마리아- 이스라엘의 후예 아,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었습니다. 산들도 흰 외투를 걸치고 눈앞에 성큼 다가옵니다. 저는 꾀병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누워 있으면 괜찮은데 강론 준비라도 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다시 목이 따끔거립니다. 오늘 잠시 머무는 수녀원에서 겨우 나오는 작은 목소리로 강론을 했더니 더 집중해서 듣는 것 같아서 가끔 감기도 필요한 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첫 토요일입니다. 매월 첫 토요일은 동정 마리아 신심미사를 드리기도 하지요. 매일미사 책 앞부분에 늘 동정마리아 신심미사가 있지요. 매월 성모님을 기리는 호칭이 다른데 이 달 12월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후예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교회 전례가 택한 독서와 복음도 특별합니다. 독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마태오 복음의 내용입니다. 동정 마리아 신심미사에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듣는 이유와 이 달의 호칭 ‘이스라엘의 선택된 후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의미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아브라함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마리아를 기리는 신심미사에서 굳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듣고 묵상합니까? 아브라함은 단순히 역사상의 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한편 성모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고 신앙의 어머니이지요. [아브라함- 우리 신앙의 아버지]라는 묵상서에서 마르티니 추기경은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찾는 이스라엘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한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나그네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를 이스라엘의 후예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감이 잡히실 것입니다. 바로 마리아는 신앙의 나그네 길을 가는 사람들의 후예, 바로 아브라함처럼 묵묵히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던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찾아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표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신심미사에서 복음으로 듣는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로 이어지는 족보이지요. 마침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말로 족보가 이어진다는 의미에서도 아브라함은 우리의 아버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족보상으로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 몸속에 예수님의 몸속에 뛰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맥박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의 전례가 그를 ‘우리 신앙의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그가 마치 친아버지처럼 우리에게 인생 여정에서 갈 길을 가르치고 우리에게 전통을 물려주고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예표가 되어준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여로, 그가 겪은 두려움, 고독, 번민, 외로움과 더불어 그가 받은 축복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라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겪는 두려움과 고통, 외로움과 번민과 더불어 체험하는 은총과 삶의 기쁨의 예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시점을 출발점으로 하여 여러 길들을 거쳐 자기가 아내 사라를 위해 산 헤브론 동쪽 땅에 묻히는 데서 끝이 나는 여정, 신앙의 여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마치 아브라함의 삶이 그러했듯이 나그네길, 여로이지요. 최희준의 ‘하숙생’이라는 노래가사가 인생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지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이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아브라함을 우리 신앙의 나그네 길에서 아버지로 삼아 그 길을 따라간다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가는 벌거숭이 인생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듯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걸어가면서 배우는 것이지요. 마르티니 추기경이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신앙 체험에 대하여, 언제, 어떻게 그가 하느님 체험을 했는지를 놓고 여러 가지 가설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마는 중요한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체험, 신앙 체험은 궁극적으로 회심의 체험이고요. (회심이란 어원적으로 하느님께 돌아선다는 말이니까요.) 아브라함은 말씀의 체험에 의하여 회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자, 내가 아는 분과 다른 분, 빛나시는 분, 매혹적인 분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때에, 그분은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 삶에 관심을 지니시고 우리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시는 분이심을 깨달을 때에, 내 손에 잡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전혀 알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렇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꼭두각시이겠지요.) 오히려 그분이 하시는 대로 나를 맡겨 드릴 수밖에 없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회심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걸어간 삶의 여정 안에서 끝없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서서히 하느님의 말씀에 자기를 열어두는 자세가 형성되고 신앙이 성숙되어 갑니다. 그것이 그가 예측을 불허하는 말씀에 자기를 열고 맡겨 드리는, 다시 말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신앙의 여정에서 자식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고 우리가 걸아가야 하는 길을 알려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신뢰를 지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도 그분에게 맡겨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끝없는 도전이자 응답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 여정에서의 회심의 체험입니다. 아브라함이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에서 얻게 된 체험이 바로 그것이었고, 죽는 날까지 그 체험을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완성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삶의 개입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마르티니 추기경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여러 가지라고 열거합니다: 받아들임, 거부, 소홀, 애매한 태도의 신앙, 갈수록 명료해 지는 신앙 등등.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분명한 신앙의 태도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하느님을 인정하기 싫고, 그분의 방식이 틀렸다고 항변하게 되고, 거부하고 마음 안에서 울분이 솟아오르게 되지요. 성모 마리아도 이런 마음의 갈등에서 예외였던 분이 아닙니다. 성모님도 이스라엘의 후예입니다. 바로 신앙의 나그네 길을 걸으면서 번민해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궁극적인 신뢰를 그분께 두면서 묵묵히 신앙의 여정을 걸으셨기에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며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그 마음의 갈등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머니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말씀의 신비 앞에서 그 갈등, 그 충돌이 일어나게 잠자코 인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추기경은 결국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향해 나섰던 그 여정을 우리도 이어받는 것이라고 하며 시편 119편의 몇 구절을 우리 나름대로 엮어 기도로 바치도록 초대합니다. 주님, 당신을 찾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당신을 알고 싶사오니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의 길이 제 앞에 열려 있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