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언젠가 반드시>
또 다시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작은 부활’인 축복의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 부활을 경축해야 합니다.
주님 부활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 부활의 신비를 크게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당신 사랑의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눈부신 부활의 아침마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오고갔던 ‘첫사랑’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웅덩이에 빠져 짐승처럼 절규하던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 내밀어주셨던 생명의 주님,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있던 우리에게
성큼 성큼 다가오셨던 희망의 주님,
머리칼보다 많은 죄의 덫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던 해방의 주님...
이런 주님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어쩔 수 없이 감사요, 찬미요, 환희요, 기쁨입니다.
탁월한 영성 생활을 충만히 누렸던 한 평신도의 체험입니다.
그는 한때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정신없이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변한 사람을 보고 주변 사람들 가만있지 못합니다.
다들 한 소리씩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그는 당시의 고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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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한 지 약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하느님께 대들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친구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무슨 처사가 이렇습니까?”
친구들은 갑자기 변한 저를 도무지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남기고 다들 떠나갔습니다.
“너는 변했어.
우리는 더 이상 너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아라!”
(스콧 한,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라’, 바오로 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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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처음 직면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을 묵상해봤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날이 갈수록 공동생활이 힘들어집니다.
남아있는 길이 지나온 길보다 훨씬 험난하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 형제들을 직면하기도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공동체를
다른 무엇에 앞서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깊이 사랑하며,
이웃과 더불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화의 길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라고 확신합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그의 초라한 옷차림을 본 종업원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작은 비누와 너덜너덜한 수건을 주었지요.
목욕을 마친 그는 종업원들에게 금화 한 개씩을 팁이라면서 각각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깜짝 놀랐지요.
더군다나 그들이 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기보다도 오히려 후한 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도 했지요.
‘우리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더라면 더 많은 금화를 팁으로 주지 않았을까?’
일주일 뒤 부자가 다시 그 목욕탕을 찾아왔습니다.
종업원들은 그를 알아보고 이번에는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그에게 무료로 마사지도 해주고, 몸에 좋은 향수도 뿌려주면서 극도로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목욕이 끝나자 부자는 그 종업원들에게 팁이라며 100원씩만 주는 것입니다.
크게 실망한 종업원들을 바라보며 부자가 말했습니다.
“이 동전은 지난 번 서비스에 대한 것이고,
지난 번 금화는 오늘 서비스에 대한 것이네.”
이 부자의 행동이 공평합니까? 공평하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공평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행동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의 행동을 섣부르게 판단하기에 급급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대상은 나의 이웃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문이 자기에게만은 활짝 열리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첫째처럼 보이는 사람이 꼴찌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꼴찌처럼 보였던 사람이 첫째가 될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그 좁은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을 간직하고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형제님 한 분이 전력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이렇게 전기가 나가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전력회사 직원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부터 빨리 드십시오.”
정전되면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이 녹을 테니 빨리 먹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우선 순위는 사랑의 실천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당장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청 성소국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좁은 문>
살다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꼭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에겐 술을 마실 때 후회스러운 일이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어제도 과음을 해서 오늘도 늦게 일어났고 하루 종일 머리가 띵한 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독한 술을 잘 안 마시는데
어제는 술자리에 함께 하신 신부님들이 고량주를 드시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조심스런 분위기라 저 혼자 약한 술을 마시겠다고 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상황이 그렇게 가더라도 아닌 것 같으면 혼자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과 과감하게 홀로 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한 심리학자가 지원을 받아 제비뽑기를 하여 간수 팀과 죄수 팀을 짜서
며칠간 만들어진 감옥세트 내에서 상황극을 하며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수들은 점점 사악해져갔고
죄수들은 간수들의 폭력에 온갖 굴욕적인 것까지 정말 죄수처럼 따라하였습니다.
실제 간수가 아니고, 실제 죄수가 아닌데도
아무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상황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결국 며칠 뒤 폭력이 점점 심해져서 억지로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간수들이 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행했던 대부분의 장면들이,
수십 년 후에 미군들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했던 장면들과 매우 흡사한 면을 보면서,
상황이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것도, 좋은 단체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다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혼자서는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하는 것들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단히 많은 상황의 힘 안에서
힘없이 맥도 못 추고 주관도 없이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조종하는 그 상황의 힘을 이기라는 뜻입니다.
공기 중에 인간에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산소는 21%입니다.
그러나 생명 유지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질소는 78%를 차지합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도
질소의 비율보다는 산소의 비율에 가까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험해서
더 많은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당에 나온다고 해서 과연 다 공기 중 산소와 같이 21%에 속할까요?
세계에서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도 21%정도 되겠지만,
그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정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21%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주일미사 참례율은 신자의 30%에도 못 미치고, 유럽은 10%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나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따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다면 진짜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미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분과의 친교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사에 나와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미사를 했는데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겠다’고 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2년의 보좌생활을 하고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전화로 자신들의 이름을 대면서 먼저 자신들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조금 난감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리 자주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학교 때 지금의 에버랜드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누가 예쁜 여자들과 사진을 찍는가 시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 예쁜 아이에게 말을 걸어서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그 아이와 단 10초 정도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일 년 이상을 매일 함께 했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의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상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상을 주지 못하는 신자들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거나 혹은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기억에 오래남지만
특별히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 신자들은 자주 연락하지 않는 이상엔 조금씩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잊지 않으시지만
아무리 미사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도 악을 일삼으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억하시는 예쁜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매일 군중 속에 끼어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만나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예수님께 예쁜 모습을 보여야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에서 가정이 있는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나서서 대신 죽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앙만 버리면 많은 재산과 명예를 주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고통스러운 순교를 선택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끌어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이들은 모두 성인들이고
예수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많은 사람이 넓은 문으로 가고
좁은 문으로는 몇 안 되는 사람만이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골고타 언덕까지 간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대부분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지만
요한만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가슴깊이 새겨진 사도는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율 28%,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28%에 들어야 합니다.
평일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당연히 몇 명 안 되죠?
그렇다면 그 몇 명 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많습니까, 읽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묵주기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안 내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정말 이렇게 따지다보면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좋은 길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고
무엇이 좁은 문인지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좁은 문이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길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십시오.”
- 로마 유학중
<좁은 문과 넓은 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루카 13,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그러면 좁은 문의 특징이 뭘까요?
어렵고 힘듭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합니다.
자기를 희생합니다.
의미 있게 삽니다.
구원을 희망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합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참고 인내합니다.
겸손하며 용서할 줄 압니다.
아낌없이 베풀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신 분들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넓은 문의 특징은 뭘까요?
쉽고 편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합니다.
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요행을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교만하고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끊임없이 모으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속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멸망에 이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 고질병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일주의요,
둘째는 상대주의요,
셋째는 실리주의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편한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물질문명입니다.
요즘은 물질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한 것에 길들여지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고 점점 더 안일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다음은 상대주의입니다.
요즘은 절대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방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분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대주의가 판을 치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피땀 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목숨 바쳐 의로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게 살아서 존경받을 이유도 없고,
세상이 썩고 부패해도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리주의입니다.
이것은 결과주의와도 비슷합니다.
방법과 과정은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질병이 신앙생활에도 스며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은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축복만을 갈구합니다.
이런 신앙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편한 길이요, 넓은 문입니다.
엘리위젤이 쓴 「흑야」를 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앙상한 뼈만 남은 무리들이 일터로 끌려갈 때,
사정없이 내리치는 간수들의 채찍을 피해 대열의 가운데에서 걷고자 사투합니다.
일단 대열의 중앙을 확보하면 무서운 채찍은 모면할 수 있습니다.
채찍은 항상 바깥쪽의 친구들만 위협하고, 중앙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사안일주의적인 평범한 중앙대열에서 이탈하시어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의 문은 대열의 중앙에 있기만 하면 저절로 밀려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도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될 날은 반드시 옵니다.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지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날은 반드시 옵니다.
오늘의 희생과 봉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지옥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멸망으로 이끕니다.
천국의 문은 좁고 험하지만
생명으로 이끕니다.
집주인이 천국 문을 닫은 후에 문을 두드리지 맙시다.
- 원주교구 /·안식년
<"첫째가 꼴찌 되는 실수 범해선 안돼">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주님은 구원받을 사람들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주님과의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긴밀한 내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회개의 여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주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는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만 두려고 해도 되풀이 되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인정하며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한탄하는데서 방향을 전환시켜
주님의 자비에 맡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바라는 '악'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께서 바라는 '선'으로 향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키고 변명의 구실을 늘어놓는 것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희망하며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 여정을 걸어가듯이,
주님은 우리가 누구나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삶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
되풀이 되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서기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
자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사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다만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두드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의지와 필요성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문 밖에 서 있을 것입니다.
문 밖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 밖의 세상이 주는 사라질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두드림은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용서와 자비의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문을 제시하십니다.
아마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기에 좁다는 뜻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문은 들어가기에 결코 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삿짐 옮기듯 많은 것을 등에 지고 손에 움켜쥐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을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겨 가져가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오히려 문에 걸려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교만,
자신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자만,
그런 장애들을 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문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며 열려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문이 닫히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문 밖에서 외칠 것입니다.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루카 13,25)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아담을 부르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주님을 피해 두려워 숨기만 했습니다.
주님이 애타게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더 이상 찾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서, 주님 성찬례 안에서, 주님을 안다고 변명해도
주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필요에 따라서만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1코린 11,27-29)
우리는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픈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준다는 사실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 교수
<구원의 문>
제가 면담 중 삶에 자신 없어 하는 분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살고 못 살고는 차후 문제이고
험하고 힘든 세상 끝까지 견뎌 살아내면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삶은 지상 명령입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살아내야 하기에 삶은 순종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 묵상 중 이런 삶의 고백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좋다.”
“모두가 감사하다.”
“모두가 은총이다.”
결론하여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매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갈 때,
매일 첫 미사이자 마지막 미사처럼 봉헌할 때
저절로 위와 같은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이 좋은 날이요,
‘일일시신일(日日是新日)’ 매일이 새날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구원은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십니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문입니다.
하느님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십니다.
바로 세례 받아 미사에 참석하여 모두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듯
모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문입니다.
주님은 ‘나는 문이다.’라 하지 않습니까.
벽이 없이 동서남북 활짝 열려있는 구원의 문이신 주님이십니다.
끊임없이 구원의 문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입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하느님의 유일한 소원이자 기쁨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요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말씀대로 실현되어 우리 모두는 이 거룩한 미사에서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내 영광을 본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주님의 영광을 혼자 누리지 말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도 그 영광을 알리라는
복음 선포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모든 이들의 구원이 성취된 그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동서남북 사방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느님 구원의 문이요,
구원 받았다 교만으로 방심하는 이들을 분발케 하고,
구원 받지 못했다 자신 없어 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때요 구원의 자리입니다.
모두가 좋고, 모두가 감사하고, 모두가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 때 주님의 구원 체험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문이 구원의 보편성을 뜻한다면
구원의 좁은 문은 구원의 특수성을 뜻합니다.
똑같은 구원의 좁은 문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 다른 그 고유의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십자가가 다 다르듯 그가 통과해야 할 좁은 문도 다 다릅니다.
좋다 나쁘다, 작다 크다,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그 고유의 좁은 문들입니다.
십자가 수난 없이 부활의 영광 없듯이
시련과 고난의 좁은 문 없이 구원도 없습니다.
시련과 고난의 단련을 통해 깊어지는 삶이요 통과하는 좁은 문입니다.
자연의 이치도 이를 입증합니다.
화창한 봄, 꽃폈다하여 배열매가 아니라
여름 뙤약볕, 폭풍우의 온갖 시련을 통과했을 때
가을의 탐스러운 배 열매들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시련과 고난의 연단 과정을 통해 거품은 걷히고 정화되어
순수한 진짜 믿음, 희망, 사랑만 남게 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래서 ‘불림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된 사람은 적다.’ 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 통과에는 등수도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와 비교할 것도, 누구를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페이스대로 좁은 문 넘어 주님만을 바라보며
시련을 잘 극복하고 완주하여 좁은 문 통과하면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이런저런 삶의 시련 후의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가
참 평화, 참 의로움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평생 영적 훈련병입니다.
온갖 삶의 시련의 좁은 문을 통과할 때 구원이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이런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믿음을 주십니다.
마냥 열려있는 구원의 좁은 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꽃 필 때가 있으면 열매의 때가 있고
탄생의 때가 있으면 죽음의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를 알아 깨어 사는 게 지혜입니다.
구원의 좁은 문 역시 열려있을 때가 있으면 닫힐 때가 있습니다.
죽음의 때를 아무도 모르듯 좁은 문이 닫힐 때 역시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막연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빠진 무의미한 시련이요 고통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자기 탐욕 따라 살다가 스스로 자초하여 겪는 시련과 고통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다가 겪는 시련과 고통만이
구원의 좁은 문 통과에 도움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외적 교회생활에, 수도생활에 충실했다 해도
주님과 코드를 맞추어 살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 알지 못하면 구원은 장담 못합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닫힌 문을 열어 달라며 애원하는 이들에 대해
다음 주님의 냉엄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주님을 몰랐기에 불의를 일삼은 삶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했지만 주님과 전혀 무관한 나만의 불의를 일삼은 삶이었습니다.
주님과 완전 불통의 내길(my way)만을,
좁은 문이 아닌 넓은 문을 추구했던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며 시련의 좁은 문을 통과할 때 구원이요,
이들에게 축복을 선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진정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시련의 좁은 문도 너끈히 통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좋다, 모두가 감사하다, 모두가 은총이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밖에서야 좁은 문이지만
안에서는 하느님 감미의 넓은 문입니다.
분도 성인은 그의 규칙에서 이 경지를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RB머리49)
주님은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
하느님 나라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편 16,2)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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