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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사회
학습개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음악은 현대를 살아가는데 향유하고
즐기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을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니, 역사와 사회가 곧 예술이며 음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음악의 역사를 설명하고 음악사의 수많은
사건과 다양한 작품들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고 그 시대에 필요로 하는
요구를 음악으로 표출하고 연주하였으며, 감상하였습니다.
이를 사회현상과 역사로 음악을 보고자 합니다.
학습목표
우리의 학습은 고대음악과 중세를 음악의 시작으로 그
다양성과 형식의 과정을 사회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부흥기에 음악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크는 시대정신 속에서 음악의 특징을 이해하고,
고전주의 시대는 고전주의 사회와 음악의 관계와 음악가의
사회적 위상을 다루겠습니다.
낭만주의의 사회적 요구와 개성을 알아보고
현대음악의 민족주의와 인상주의에 나타난 다양사회현상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또한 재즈와 대중음악의 발달과정이 지금 사영향을 주고,
음악으로 어떻게 표출 되었는지 해석하고 ,노력하고자합니다.
음악의 기원
음악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시작.
선사시대의 자연주의는 본능적이다.
예술의 대상은 곧 자연상태를 의미.
생활방편으로의 음악은 현실적 이다.
음악이 마법의 힘이라 믿어 종교의식으로 간주했다.
가장오래된 음악사적자료:
4대문명발생지인 이집트,메소포타미아,중국,인도
등지에서 발굴된 악기나 악기의 그림이다.
고대 그리스 음악
고대 그리스의 형성기 ( BC. 30-15세기)와 초기의 시대는(BC.14-7세기)는 신화의 시대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음악과 관계되는 대표적인 신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이들의 제례음악에 악기사용(노래와 합창음악에 악기 반주)
피타고라스 음정 : "모든 것은 숫자이다." =피타고라스(BC.6세기)는 음정을 수적비율관계로 생각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학적 사상가
헬레니즘시대 = 그리스문화가 동방문화와 융합=세계주의=안정과 조화
그리스음악은 즉흥적연주. 리듬없는 단선율.기보법고안
그리스의 극음악
그리스의 비극은 합창음악이다.
디오니소스제사에서 합창이 서사시를 부름- 이는 국가정책으로 시민과 국가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이루어졌다.
비극의 발전은 시민문화, 민중연극에서 적용되었다.
비극의 영웅적, 사건과 감정은 귀족적이나 공연대상은 일반시민이었다.
비극은 중세와 단절로 몰락하였으나 르네상스의 비극의 재현이 오페라의 탄생을 가져왔다.
음악미학의 시작
천체음악론(피타고라스정의)- 음악이란 귀로 들을 수 있는 우주의 하모니=서양미학의 출발점이 됨.
에토스론 (플라톤)-음악은 인간의 성격에 영향을 주므로 그것이 윤리적 가치를 가졌을 때 성립된다. 플라톤은 예술자체 보다 자연을 이데아의 모방이라 생각했고 이 자연을 모방한 것이 음악이라 생각했다.
카타르시스(아리스토텔레스)-긍정적인 면에서 예술을 보았으며, 감각적 통찰을 중시하였다. "정화작용" 즉 예술감상자의 정신적 해방을 의미한다.
중세음악과 사회
중세는 로마제국이 해체된476년부터 14세기말 (약900년 동안)이며 프랑크왕국을 중심으로 강력한 교회중심의 사회구조와 문화가 탄생하였다.
중세란 고대와 르네상스의 암흑의 중간시대(종교적 억압의 시대)란 뜻으로 사용.
중세의 세 시기 :
1. 5-8세기-민족이동의 불안정기(유태교회음악)
2. 9-13세기-독특한 문화안정기 (다성교회음악)
3. 14세기-새로운 역사의 태동기(세속음악발전)
세속음악
프랑스에서 발달하였고 귀족중심이었지만 민중의 생활과 관계되어온
민요나 춤곡도 있었음을 짐작한다.
14세기에 이태리에서 문화적 활동이 전개되었다.
교회음악
중세에는 교회 안 에서의 악기연주가 금지. 세속기악연주는 즉흥연주.
그레고리오 성가
카톨릭 교회의 미사의식에서 사용되는 모든 무반주 단성성가를 말하며 낭송식과 노래식이다.
명칭: 교황 그레고리오1세의 성가통일정책을 세우고 가창학교를 만들어 여러지역에 전파.
성가의 큰 비중은 가사중의 시편이며, 나머지는 성서의 노래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20세기 전반까지 모든 카톨릭 전례의식으로 불리웠고, 1600년대 까지도 종교음악의 저변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이 있다.
성가의 선율은 예배의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신도들의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하도록 리듬과 박자가 물흐르듯이 낭송조로 이루어짐
카톨릭교회 미사
미사는 카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례
그 기원은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며 기리는 의식(영성체)에서 비롯되었다.
11세기경에 로마의 카톨릭 교회의 미사는 다른 지역의 모든 카톨릭교회도 따라야 되는 정통적인 것이었다.
미사의 조항들은 음악적인 것과 비 음악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것들은 각각 항상 같은 구절이나 가사로 되어 있는 것(통상문)과 교회력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게 바뀌는 것(고유문)으로 구분
특별미사로서 장례를 위한 진혼미사가 있다.
미사모음집:미살레(Missale), 그라두알레(Graduale), 리베르 우수알리스(Liber Usualis)
성무일도
성무일도는 카톨릭교회의 기도회이다.
성무일도는 하루 8차례(3시간 간격)로 이루어져 있다.
성무일도 음악으로는 시편창과 성격 낭송 사이 사이의 반복구 외에도 찬가창, 시편 이외의 성서 가사로 된 칸티쿰(Canticum),독립적인 안티폰이 있다.
음악적으로 가장 화려한 기도회는 저녁기도회이며, 아침기도회는 음악적 비중이 가장 낮다.
세속적 단성부 노래
중세의 세속음악은 시인 음악가였던 기사 또는 귀족들에 의해 11세기 경부터 꽃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교적 언어였던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시를 짓고 또 작곡을 했다.
그 시인음악가들을 남프랑스에서는 <트루바두르>로, 북프랑스에서는 <트루베르>로, 독일에서는 <민네징거>로 각각 불렀다.
그들의 세속노래는 동시대의 종교적 노래와는 대조되는 것이지만, 형식적으로 서로 유사한 것도 많다.
가사의 주제는 주로 여성숭배적인 사랑이며, 도덕과 정치, 십자군과 영웅의 무훈에 관한 것 등도 있다.
시인음악가들의 세속적 단성부 노래는 13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다성음악으로 발전된다.
중세의 다성음악
(1) 다성음악의 최초 기록은 9세기 경에 나타난다.
(2) 초기 다성음악은 성가선율에 장식적 성격의 다른 성부가 첨가된 트로푸스였다. 이러한 성부 또는 음악형태 자체를 오르가눔(Organum)이라 불렀다.
(3) 가장 초보적 형태는 성가선율이 단순히 완전 5도나 4도 관계로 병행되는 <병행 오르가눔>이다.
(4) 11세기 경에는 병행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아직 원칙적으로 완전음정 관계로만 움직이는 <자유 오르가눔>이 나타남.
(5) 12세기 경의< 멜리스마적 오르가눔>은 하성부에 위치한 성가선율의 한 음에 대해 상성부가 여러 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6) 여기서 하성부는 "지탱한다"는 뜻의 <테로르>라는 명칭을 얻게된다.
(7) 12세기 중엽 - 13세기 중엽의 노트르담 시대는 다성음악 역사의 첫 절정기.
(8) 레노냉(Leonin, 1180경)과 페로탱(Perotin 1200경)이 대표적 작곡가이다.
(9) 대표적인 다성음악 장르로는 노트르담 오르가눔, 모테트,콘둑투스가 있다.
(10)노트르담 오르가눔은 멜리스마적 오르가눔에 모든 성부가 상당히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는 <클라우술라>(Clausula) 부분이 포함된 것이다.
다성음악의 본격적인 발전에 따라 모드 리듬이라는 리듬 체계도 정립된다.
(11)13세기에는 클라우술라 부분이 오르가눔에서 독립되고 상성부에 가사가 붙여져 모테트로 발전된다.
콘둑투스는 1-3성부의 단순한 비전례적 종교음악이며, 모테트와는 달리 테노르 성부를 포함한 모든 성부가 새로 창작되는 특성을 갖고있다.
아르스 안티쿠아
(1) 아르스 안티쿠아 (Ars Antopua 옛예술)란, 13세기의 프랑스 음악을 의미한다. (보통 노트르담 시대를 그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2) 13세기 중엽부터는 노트르담 레파토리인 오르가눔, 콘둑투스, 모테트 중에서 모테트 (2-4성부)가 가장 중요한 음악장르로 대두된다.
-모테트는 그 유형도 곧 다양화된다.
(3)대표적인 모테트 작곡가로는 프랑코 폰 쾰른 (Franco von Koln,1260년 경)과 페트루스 데 크루체(Petrus de Cruce, 1280년 경 )가 있다.
(4) 노트르담 오르가눔의 <클라우술라>부분은 모테트 뿐만이 아니고 <호케투스>(Hopuetus )의 기원이기도 하다.
(5)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다성부 세속음악 장르로는 발라드(Ballade), 롱도(Rondeau), 비를레 (virelai)가 있다.
(6) 아르스 안티쿠아 시대에는 영국에서도 세속음악이 기록되기 시작하는데, 로타 (Rota)와 론델루스 (Rondellus)가 그것이다.
(7) 이태리와 스페인에서는 단지 단성부로 된 비전례용 종교음악 만이 기록되어 있다
* 스페인의 [칸티가 (Cantiga) ]
* 이태리의 [라우다 (Lauda)]
(8) 아르스 안티쿠아 시대의 대표적인 필사본 :
<몽펠리에 필사본>,<밤베르크 필사본>, <라스엘가스 필사본>.
아르스 노바
중세질서의 붕괴
유럽세계는 봉건제도와 가톨릭교회를 기반으로 안정을 이루어 나갔다. 농업 생산이 늘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인구가 증가하고 큰 도시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유럽인들의 자신감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표출되었다. 이 전쟁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된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삼렘을 탈환하기 위한 것으로 유럽인들의 강렬한 기독교 신앙심의 발로 였지만 동방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정복 욕구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200년 가까이 진행된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중세유럽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카톨릭교회의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고 봉건제도를 떠받치고 있던 장원 경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교황이 신변 안전에 위협을 느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 프랑스 국왕의 보호를 받으려 했던 이른바 아비뇽 유수 (1304-1377) 는 교황과 기독교의 추락한 위상을 잘 설명해준다. 이 사건은 결국 교회의 대분열 (1378-1417)로 이어졌다.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한 뒤,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서 각각 교황이 선출되었는데, 두 명의 교황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바람에 유럽의 기독교인과 교회가 로미 진영과 아비뇽 진영으로 분열되어 30여 년 간이나 대립하였다.
여기에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장원제도가 무너지는 데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유럽 인구의 1/3이 이 전염병의 희생양이 되었으므로 농촌은 황폐화되고 농노들의 몸값은 크게 뛰었다.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농노들이 농민 반란 등을 통해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사실상 중세경제의근산인 장원은 해체되고 봉건제도도 무너지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오랜 대립 끝에 영국과 프랑스는 실제로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이른바 백년 전쟁(1338-1453)을 겪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이전쟁을 계기로 귀족이 몰락하고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영국은 장미전쟁 (1455-1485)이라는 또 한 차례의 내전을 겪은 후 역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는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300년 이전의 예술은 주로 수도원과 교회 및 봉건 영주의 성곽을 배경으로 웅성하였지만, 14세기 이후에는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점점 세력을 확보한 여러 궁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예술적인 경향이 고개를 들게 된다. 14세기 초의 이론가들은 이 14세기의 새로운 예술을, 아르스노바 (Ars Nova) 즉 '신예술'이라고 칭함으로써, 13세기의 아르스 안티쿠아 (Ars Antiqua)즉 '구예술'과 구분하려 하였다. 이 '아르스 노바'라는 말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이론가인 비트리(Philippe de vitry)가 저술한 박자와 기보법 등 14세기 프랑스 음악에 나타난 특성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저서 [아르스 노바 ]에서 따온 것이다.
트레첸토 음악
(1)트레첸토(Trecento)음악은 14세기의 이태리 음악을 의미하는데, 이 시기의 이태리에서는 처음으로 다성음악이 발전한다.
(2)교회음악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밖에 기록되어 있지를 않다. 그 이유는 이태리에서는 시민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3)세속음악 장르로는 마드리갈(Madrigal), 카치아(Caccia),발라타 (Ballata)가 30년 정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발전된다.
- 마드리갈: 단순한 2성부노래
- 카치아: 의성어 등이 포함된 생동감 있는 노래.
- 발라타: 이태리 다성음악으로는 처음으로 정형을 갖춘노래.
(4) 프란체스코 란디니 (Francesco Landini 또는 Landino :1325- 1397)는 가장 유명한 트레첸토 작곡가로서 특히 많은 발라타를 남겼다.
(5) 트레첸토 음악의 중심지는 전반에는 주로 북이태리의 전반에는 주로 북이태리의 도시들과 궁정이었고, 후반에는 중부의 플로렌스였다.
(6) 14세기 말로 가면서는 독특한 이태리 음악이 프랑스 음악양식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7) 트레첸토에는 최초로 이태리 음악기보법에 관한 이론서도 나온다.
(8) 방대한 양의 [스쿠아르치아루피( Squarcialupi)] 필사본은 트레첸토의 가장 중요한 음악자료집이다.
중세의 악기와 기악음악
중세의 악기에 대한 정보는 회화나 문학적 자료를 통해 얻을 수 있는데 불과하다.
중세의 악기는 음의 고저에 따라 <높은소리>와 < 낮은 소리> 군으로 나뉘었는데, 전자에는 대부분의 관악기와 타악기가 속하고, 후자에는 리코더와 현악기들이 속한다.
건반악기에는 몇 가지 형태의 오르간을 비롯하여 합시코트 (쳄발로)와 클라비코드가 있다.
악기가 악보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악여주를 위한 악기들의 조합은 잘 알 수는 없으나, 작은 그룹의 대조적인 음향(혼합적 편성)을 선호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중세의 기악음악으로는 춤곡과 건반음악이 있다.
중세에는 악기들이 독립적인 기악음악 뿐만이 아니라 성악음악의 반주용으로도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란 15-16세기 유럽사회의 인본주의적 문예부흥기를 의미한다.
르네상스 사조의 독특한 점은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대립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인 점이다.
르네상스의 음악의 중심지는 전통적인 프랑스문화권 부르고뉴와 플랑드르에서 차차 이태리, 독일, 영국, 스페인 등으로 확산된다.
16세기 초의 인쇄술의 발명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문화적 예술적 교류를 가져왔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남에 따라 신교음악도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음악적배경과 특징
교회음악 (미사와 모테트)은 기능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 하나의 창작품으로서도 감상되고, 작곡가의 기량과 명성이 중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세속음악은 15세기 후반부터는 중세의 고착된 형식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작곡되고 가사 내용도 훨씬 다양해진다.
르네상스 음악의 전형은 아카펠라(A cappella: 소규모의 무반주 합창)이지만, 16세기 후반부터는 기악음악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음악의 초기발전은 프랑스 동쪽의 부르고뉴 공국을 중심으로 한 <부르고뉴 악파>에 의해 전개되었다.
르네상스 음악의 기원은 영국 음악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태리의 음악적 특성도 새로운 르네상스 음악양식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르네상스 말까지는 <플랑드르 악파>가 국제적으로 음악양식을 주도하지만, 한편으론 이태리, 영국, 독일, 스페인 등에서도 차차 독자적인 음악양식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음악가들의 세대 분류:
①1420-1460 (영국과 부르고뉴 작곡가 시대),
②1460-1490 (플랑드르 제 1세대),
③1490-1520 (플랑드르 제 2세대), ④1520-1560 (플랑드르 제 3세대 유럽 각지에서도 악파가 형성되기 시작);
⑤1560-1600 (플랑드르 제 4세대 빠리, 로마, 베니스, 독일, 영국, 스페인 악파도 활동).
르네상스 음악의 형성
1440년경 프랑스의 시인 르 프랑(martin Le Franc)은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뒤페(Guillaume Du Fay)와 뱅슈와(Filles Binchois)를 찬양하는 시에서, 이들의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우며, 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그때까지 프랑스의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훌륭한 협화음을 만들어냈다고 칭송한다. 또한 이들의 음악이 그토록 "놀라운 기쁨(merveilluse plaisance)"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영국작곡가 던스터블(John Dunstable)을 좇아 "영국식 특징(contenance angloise)"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이보다 조금 뒤에,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음악이론가 팅토리스(Johannes Tinctoris, 1435경-1511)도 이 세 사람이 새로운 예술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르 프랑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이러한 당대의 시각은 오늘날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아,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르네상스 초 영국음악이 대륙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던스터블과 뒤페 그리고 뱅슈아가 당대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는 사실을 꾸준히 확인해주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르네상스 음악의 형성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음악의 특성과, 그것의 영향으로 나타난 대륙음악의 새로운 변화를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영국음악의 영향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453년 종결)은 영국 음악을 대륙에 전수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르네상스 음악의 초석이 된 전통적인 영국 음악의 특징은 협화적 3도·6저와 1음대 1음의 단순한 리듬적 구조이다.
특히 대륙의 <포부르동>(Fauxbourdon)이 영국의 <파버든>(Faburden)과 짝지어져 그 영향의 중요한 증거로 지적되어 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5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영국 작곡가인 죤 던스타블과 레오넬 파워는 영국음향적 특성에 대륙의 복잡한 중세후기 음악기법을 접목시켰다.
영국과 대륙음악의 접목은 때때로 대륙의 옛 기법(특히 동질서리듬)을 더 복잡하게 기교화한 진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던스타블과 파워는 르네상스 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되는 <연곡미사>에 처음으로 음악적 연관 기법을 도입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15세기 전반에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영국 음악은 영국군의 패퇴로 끝난 백년전쟁과 그 후의 오랜 국내 전쟁(장미전쟁)등으로 쇠퇴일로를 맞게 된다.
『올드 홀』필사본(Old Hall Manuscript)은 15세기 초반의 영국 음악이 수록된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16세기의 첫 10년은 이탈리아에서 조스캥은 물론, 오브레흐트, 피에르 드 라 뤼(Pierre de la Rue)등 르네상스 음악 전성기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의 성과물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르네상스 미술과 건축도 전성기를 구가한다. 미켈란젤로는 바티간의 피에타(Vatican Pieta)와 기념비적인 피렌체의 다비드상을 각각 1501년과 1504년에 완성하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것이 1503년, 건축가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성당 바실리카 건축에 착수한 것이 1506년이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이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미술가들이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던 반면, 같은 시기 최고의 음악가들은 모두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태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스캥을 위시한 이 지역 출신의 음악가들은 이탈리아의 태양을 좇아 이주하였고, 거기서 인문주의적 문예부흥 문화의 기운에 흠뻑 젖게 된다.
작곡가들과 미술가들은 매체와 국적이 달랐지만 미학적 관점은 공유하게 되었고, 공통적으로 중용, 자연스러움, 우아함에 가치를 두었다. 르네상스 작곡가들과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적 표현의 지적인 측면과 감성적인 측면의 고전적 균형을 부활시키기 위해, 인간의 열정을 세련된 심미안으로 절제하면서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성과 감성의 균형을 갈구하면서 중세에는 회피되었던 인간 정신의 본질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르네상스 예술에 있어 음악보다 미술분야에서 더 가장 괄목할만한 업적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즉, 조스캥과 삐에르 드 라 뤼의 미사와 샹송보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음악이 19세기 이후 점차 널리 보급되고 있으며, 이 음악의 진정성과 보편성이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이나 후대의 위대한 작곡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보다 절대로 뒤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에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교회음악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은 16세기 최대의 사건이며 음악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루터교회는 독일어 미사로 예배드렸다.
루터는 회중을 위해 단순한 구조의 찬송가(코랄)를 널리 장려하고 또 직접 작곡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새롭고 화려한 음악도 교회에 받아들였다.
코랄 선율을 바탕으로 한 오르간 음악도 발전하기 시작한다.
루터가 죽은 후에는 코랄의 형식이 여러 가지 요인의 복합적 작용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변하게 된다.
장로교회음악
장로교의 기원은 프랑스와 스위스(제네바)의 칼뱅 교파이다.
칼뱅은 성서 안에 있는 내용만 가사로 쓰도록 규제했다.
칼뱅은 회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순수 단성음악만을 허용했다.
다성 찬송가는 가정에만 국한되었다.
장로교도들이 유럽의 여러 지역(특히 네덜란드)은 물론 아메리카에까지 퍼져감에 따라 시편 찬송가도 널리 퍼졌다.
영국의 성공회 음악
영국의 종교 개혁은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왕의 개인적인 문제가 발단(1534)이 되었다.
영국 성공회는 엘리자베스 1세(즉위 기간:1558-1608)때에 영구히 확립된다.
성공회 예배(Service)는 카톨릭 교회의 미사에 해당한다.
앤덤(Anthem)은 카톨릭 교회의 모테트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윌리암 버드(William Burd, 1543-1623)이다.
반종교개혁과 카톨릭음악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은 종교개혁 이후 교세를 회복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가 단행한 자체내의 개혁 운동을 말한다.
개혁 수행을 위한 종교 회의였던 <트렌트 공회의>에서는 음악도 논의의 표적이 되어 다성음악의 폐지론까지 제기되었다.
트렌트 공회의의 방향과는 대조적으로 예수회는 음악을 선교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반종교개혁이 감행되는 16세기 후반의 카톨릭 음악은 팔레스트리나(로마),빅토리아(스페인), 랏소(플랑드르),버드(영국),두 명의 가브리엘리(베니스)의 미사와 모테트로 대표된다.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Pierluigi da Palest-rina,1525경-1594): 로마 악파의 중심 인물이며 반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16세기 후반의 보수적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유명한「미사 교황 마르첼로」는 단순한 호모 포니로 되어있다.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Thomas Luis de Victoria,1548/50-1611):팔레스트리나 양식을 따른 스페인 작곡가로서 로마에서 활동했다.
-빅토리아의 모테트는 그의 미사와는 달리 강한 종교적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오를란도 디 랏소(1532경-1594)는 플랑드르 제4세대의 대표적 작곡가.
-랏소의 미사는 많은 곡들이 단지 의무 때문에 작곡된 것으로 보일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의 모테트는 다양한 양식으로 되어 있고 매우 표현적인 것도 많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1510경-1586)와 그의 조카 지오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dli,1557-1612):베니스 악파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특히 지오반니의 대규모적이고 화려한 종교음악은 바로크 음악을 예견하고 있다.
-지오반니는 특히 그의 6-16성부의 다중합창 모테트들로 유명하다.
버드: 16세기 후반에 유일하게 미사를 남긴 영국 작곡가.
-버드의 『그라두알리아』(Gradualia, 1605)는 방대한 양의 고유미사와 모테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태리 세속음악
마드리갈: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태리 작곡가들에 의해 문학적 수준이 높은 가사와 또 이와 음악이 밀접하게 연결된 마드리갈이 만들어진다.
-마드리갈은 16세기 후반에 루카 마렌치오(Luca Marenzio,1553경-1599),필립 데 몽테, 랏소, 기아케스 데 베르트(Giaches de Wert, 1535-96)등과 함께 절정기를 맞이한다.
-돈 카를로 제수알도(Don Carlo Gesualdo, 1560-1613)의 마드리갈은 극단적인 반음계 기법으로 세기말적인 기교주의(매너리즘)을 보여준다.
-마드리갈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에 의해 한층 더 표현력이 강화되고 또한 동시에 바로크 악곡으로 해체된다.
마드리갈과는 대조적인 보다 단순하고 평이한 구성의 이태리 세속노래들도 많이 작곡되었다:
-빌라넬라(Villanella)는 발랄한 시골풍의 노래
-칸쪼네(Canzone)또는 칸쪼네타(Canzonetta)와 발레토(Balleto)는 16세기 후반에 크게 유행한 노래.
16세기 후반에는 마드리갈에서 파생된 특수한 두 유형도 나타난다:
-이야기가 마드리갈 연곡으로 엮어진 마드리갈 코메디(Madrigal Comedy);
-종교적 가사로 되어 있지만, 비예배용 노래인 종교적 마드리갈(Spiritual Madrigal)
프랑스 세속음악
1520년대에 플랑드르 샹송과 구분되는 프랑스적인 샹송(일명"빠리 샹송")이 탄생한다.
-빠리 샹송은 호모포니로 되어 있고 선율은 발랄한 무곡풍의 리듬을 가진 경우가 많다.
-대표적 작곡가는 클레망쟈느깽(Clement Janequin,1485-1558), 클로댕 드 세르미시(Claudin de Sermisy,1490경-1562), 피에르 세르통(Pierre Certon, 1510경-1572)이다.
-1550년경 빠리의 출판업자였던 아떼냥이 죽음으로써 빠리 샹송의 전성기는 끝난다.
1550년대부터는 빠리 샹송과 매우 흡사한 노래가 <보드빌>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한다.
16세기 후반에는 시의 박절적 운율(Vers mesures)을 리듬의 장단으로 옮겨 놓은 <뮈지크 메쥐레>또는 <샹송 메쥐레>도 선보인다.
독일의 세속음악
16세기 초에 하인리히이삭을 비롯한 몇몇 작곡가에 의해 발전하기 시작했던 테너노래는 독자적인 독일어 노래로 자리잡는다.
16세기 후반:①테너노래는 개신교가 회중 노래를 장려함에 따라 널리 불려지게 된 <회중 찬송가>(Geistliche Gesang)에 밀리게 된다
②프랑스(샹송)와 특히 이태리 음악(빌라넬라, 마드리갈, 발레토)등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독일 각 지방의 도시에서는 르네상스 전체에 걸쳐 상공업자들의 마이스터 징거 노래가 성행했으나,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영국의 세속음악
던스타블 이후의 영국 세속 음악은 (종교 음악과 마찬가지로) 16세기 전반의 헨리 8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부흥이 시작되었다.
헨리 8세 시대의 세속음악은 호모포니적인 구조, 상성부의 강조, 무곡풍의 리듬 등을 특징으로 한다.
16세기 중반부터 영국 음악에는 플랑드르의 모방 양식이 도입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시대(1558-1603년 통치)에는 이태리의 영향(특히 마드리갈)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영국 마드리갈은 이태리 마드리갈의 심각하고 내적인 표현 대신 경쾌한 리듬으로 자연을 노래한 것이 많다.
16세기 말에는 류트 반주가 붙은 노래(Ayre)도 널리 애호된다.
르네상스의 기악음악
르네상스 시대의 현악기와 관악기는 같은 족(Family)의 형태로 제작되어 음역전체를 동일한 몇 개의 악기로 구성할 수 있었다.
중세 또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악기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각광받게 된 악기로는 류트(뜨는 악기)와 합시코드가 있다
류트와 비슷한 악기로는 주로 스페인에서 쓰인 비우엘라(Vihuela)와 기타아가 있다
비올(긋는 악기)은 르네상스 시대에 새롭게 첨가되고 특히 영국에서 널리 쓰인 현악기이다.
버지날은 영국에서 널리 쓰인 합시코드이다.
악기에 관한 저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르네상스는 근본적으로 성악음악 시대였지만, 서서히 독립적인 기악음악도 발전하기 시작한다.
기악음악은 악기구성에 따라 합주음악과 독주음악으로 나뉜다.
독주음악으로는 건반악기(오르간, 합시코드, 클라비코드, 버지날)와 류트 음악이 널리 유행하였다.
기악음악의 유형은,
①모방양식의 리체르카르(Ricercar), 칸쪼나(Canzona),판타지아.
②즉흥양식의 프렐류드, 토카타(Toccato), 인토나치오네(Intonazione: 예배용 전주곡).
③주제와 변주곡
④춤곡
르네상스 건반음악의 발전은 독일의 오르간음악으로 시작된다.
초기의 독일 오르간곡은 성악곡의 편곡에 불과하나 점차 순수 기악적인 음악으로 발전하는데, 스페인과 이태리 등도 같은 과정을 겪는다.
독일과 스페인에서는 많은 전례용 오르간음악도 작곡되었다.
변주곡은 크게 연속적 변주곡과 단락적 변주곡으로 나누어지는데, 스페인이 그 초기 발전에 앞장 섰고, 영국이 뒤를 잇는다.
프랑스의 건반음악은 매우 보수적이며, 성악편곡.춤곡. 변주곡이 주류를 이룬다.
-르네상스 춤곡은 프랑스 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또 전반적으로 가장 성행하였는데,
그 구조는 변주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많다.
16세기 중반부터 건반음악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는 나라는 영국이다
-중요한 건반음악 곡 집으로는 피츠 윌리암 버지날곡집등이 있다
바로크
바로크시대의 유럽
바로크 시대는 20세기까지 이어지는 유럽문명의 세계 지배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르네상스 시대 동안 유럽은 그리스 로마문명의 인본주의와 합리주의를 받아들이고 종교개혁을 통해 신학적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었으며 기술혁명의 바탕이 될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성과를 기초로 유럽은 바로크 시대에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바로크 시대는 지식사회가 눈부시게 성장한 시기이다. 즉 갈릴레오(Galileo Galilei,1564-1642)와 뉴턴(Isaac Newton, 1646-1727)의 과학적 발견의 시대이며,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 라이프니츠(Gorrfried Wilgelm von Leibniz, 1646-1716)가 철학과 수학의 발전을 이룩한 시대이다. 당시 유럽에는 지적, 예술적, 사회적 분위기가 새롭게 용솟음치면서 새로운 유럽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절대왕정
하지만 이 시대가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는 아니 었다 종교적 분쟁과 정치적 갈등으로 17세기 내내 유럽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독일에는 300개가 넘는 나라가 난립했고, 이탈리아 역시 12개 이상의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영국은 내란과 왕정복고 등으로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이 나라들의 지배계급들은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을 적극 장려하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곤 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교회나 귀족이나 백성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누리는 절대군주로 성장하였다. 일찌감치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이러한 절대군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국의 문화에 애착이 많았던 이 절대군주 덕분에 당시 프랑스의 음악과 문학 무용은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20년이 넘는 대공사를 거쳐 산림만 무성하던 늪지대에 세워진 호화스러운 베르사유궁전은 루이14세의 절대 권력을 상징이 되었으며 명실상부한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크예술의 거대함
베르사유 궁전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바실리카와 같은 바로크 시대 건축을 처음 대할 때 우리가 가장 놀라는 것은 바로 그 큰 규모이다. 건물은 물론이고 광장, 정원, 분수, 열주 모두 너무도 웅대하다. 성 베드로 성당의 바실리카 외부에 있는 원형 기둥들 축구 경기장 여러 개를 합쳐놓은 것만큼 넓은 뜰을 이루고 있다, 또한 베르사유의 화려한 궁전과 끝없이 펼쳐지는 정원은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하는 규모로, 그 안에는 수천명의 궁정 관리자들이 사는 집이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회화나 조각에서도 나타나는데 바로크 시대의 그림이나 조각 속의 인간은 언제나 실물보다 훨씬 더 크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 성당의 돔 밑의 사방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초상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데 마가가 들고 있는 펜의 길이만 해도 1.65미터나 된다. 그러나 그 길이가 200미터가 넘고, 천정 높이가 45미터가 넘는 성당 내부에 서면 성당의 규모에 압도되어 이 초상화가 그렇게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로크 음악
바로크 시대는 1600-1750년의 약 150년간의 시대
<바로크>라는 말이 가진 부정적 의미는 이 용어를 음악사에서 손쉽게 사용할 수 없게 했다.
바로크 시대는 20세기에 들어와 음악양식으로 규정되면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 한다:
<계속저음의 시대>,<콘체르토 양식의 시대>
바로크 음악은 오페라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단순한 음악양식과 함께 시작하지만, 점차적으로 폴리포니 양식이 기반을 넓혀감으로써 현저하게 어려운 음악이 되어간다. 음악이 어려워지는 것은 프랑스와 특히 독일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 음악가-몬테베르디, 쉿츠, 비발디, 바하, 헨델 등
바로크 시대는 정치적 혼란기였고,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달이 있었다
바로크의 어원
르네상스,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 음악사 시대를 가리키는 모든 용어들이 미술이나 문학에서 먼저 사용되던 것을 음악이 빌려온 것과는 달리, 바로크란 말은 유일하게 음악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원래 바로크란 보석세공을 할 때 사용되는 울퉁불퉁한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유래한 말로, 지금도 이 단어 자체는 기괴한, 기이한, 지나치게 수식적인 이란 뜻이있다. 바로크라는 이 단어를 예술작품에 사용하게 된 것은, 1750경 프랑스 여행가인 샤를드 브로스(president Charles de Brosses)가 로마의 팜필리 궁전의 임입구 장식을 보고 건축보다는 그릇장식에 적당해서 바로크하다고 표현하면서 부터이다. 이보다 몇 해 앞선 1733년에도 익명이긴 하지만 프랑스의 한 비평가가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를 평하면서 전조와 불협화음이 너무 많고, 선율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박자도 과장되게 교체되고 시끄럽다면서 이 작품을 바로크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음악에서의 바로크
이와 같이 18세기 비평가들은 음악에서 사용된 거칠고 대담한 악기 소리와 시각 에술에서의 과도한 장식을 지칭하기 위해 바로크란 용어를 사용했다.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에게도 바로크 음악은 전조와 불협화로 가득 찬 현란한 화성과 귀에 거슬리는 선율, 어려운 발성, 그리고 자연스럽지 못한 진행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음악이었다. 즉 원래 바로크는 왜곡, 과도함 사치와 같은 경멸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바로크는 17세기 회화나 건축의 장식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가리키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1598-1680)의 조각 그리고 비발디의 음악이 새롭게 이해되면서 드디어 서양문화사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16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음악적 양식 또는 이 시대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크의 시대구분
바로크 시대는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와 같은 성악양식들과 협주곡, 소나타, 모음곡, 푸가를 비롯한 서양음악을 대표하는 기악의 중요한 음악 형식들이 이 시대에 탄생하였으며, 장 단조 조성이 새롭게 확립되면서 향후 250년간 서양음악을 주도하게 될 음악의 기반이 다져진 시기가 바로 바로크 시대이기 때문이다. 음악사학자들은 서양음악사의 모든 시대들을 구분하는 문제에 있어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바로크 시대만큼은 1600년경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하여 1750년 바흐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음에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를 지배하던 다성음악 양식이 그 시대 말 새롭게 나타난 기교적인 독창 노래양식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너무나 뚜렸했고, 그렇게 형성된 양식이 바로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만큼 차별화된 특징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교육기관
- 이태리에는 음악학교, 음악원, 특수성악학교 등이 있었고, 베니스에는 병원과 함께 있는 오스페달레라는 음악학교도 있었다. 음악교육기관들은 주로 성악가를 배출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영국에서는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작곡교육에 주력했다
-독일은 일반교육 기관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나 개인교수를 통한 음악교육이 더 중요했다
현악기의 제작 수준이 고도로 발달되어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에 제작된 현악기들은 가장 좋은 악기로 평가받는다. 오르간의 제작기술도 이 때에 크게 발달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악보출판이 왕성해졌다
바로크 음악적 특징
모노디-단성부의 노래 선율과 계속 저음의 반주로 되어 있다
장단조 화성(조성적음악)-선법적 음악에 대립되어 나타난다. 조성적 음악은 바로크시대에 이론적 실제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조성음악이 아주 명확해지는 것은 고전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계속저음- 단선율로 기록되는 베이스 성부, 화성적 연주를 위한 일종의 약식부호, 약식으로 기록된 계속저음은 연주자에 의해 즉흥적으로 해당 화성의 특 안에서 자유스럽게 재현된다
콘체르토-이 개념은 17세기에 여러가지 의미를 가졌다. 차차 장르의 명칭으로 정착된다(콘체르토 그롯소, 솔로 콘체르토)
악보에 마디가 그려지고 (단계적 강세박자)가 사용된다
음악가들의 사회적 위치
-천민 음악가
-시립관악대의 음악가
-궁정음악가
-교회 음악가
-장인음악가
위에 음악가들 중 가장 각광을 받는 그룹은 장인들이었다. 특히 유명한 성악가들은 대단한 대우를 받았다
조율법
- 평균율:옥타브의 12음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만드는 조율방식, 바로크 시대의 이론적 조율방식
- 가온음률 조율법: 두개의 장3도를 같은 크기의 온음으로 나누는 조율, 바로크 시대의 실질적 조율방식
감정이론-일정한 음형과 일정한 감정을 연결시킨다
즉흥적 연주- 계속저음의 사용으로 즉흥연주가 연주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연주자의 능력에 따라 선율에 더 풍요로운 장식을 덧붙였다
다카포아리아의 반복 부분에서는 성악가들은 능력에 따라 장식적으로 노래했다 즉흥적 방식은 연주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레치타티보에서는 장르에 따라 장식을 하는 방법이 달랐다
레치타티보의 장식법에서는 이태리, 프랑스, 독일이
각기 다른 방법들을 사용했다
바로크 오페라
바로크 오페라의 일반적 사항
오페라의 역사적 위치: 1600년경 서양음악사는 오페라와 함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오페라는 태어난지 40년쯤 지나서 청중의 음악이 되었다. 오늘날도 오페라는 청중의 음악으로 남아 있다.
오페라는 초기에 다양한 용어로 불렸다.
오페라에는 다양한 주최자, 연주자, 관객이 있었다. 영주, 시민협회, 흥행사들이 서로 각각 다른 기호와 관심을 가지고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이들의 관심에 따라 오페라의 내용이 달랐다. 귀족들은 비극을, 시민들은 희극을 선호했다.
1. 오페라의 탄생
1580년경 플로렌스에서는 -오페라 탄생의 배경이 되는- 음악이 포함된 극적 예술 장르들이 있었다:
①거룩한 극/고대 연극
②막간극
③전원극
④마드리갈 코메디
오페라의 탄생은 1580년대에 플로렌스에서 음악가, 시인, 학자들의 모임인 <카메라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옛 문헌을 연구.번역하고, 그리스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낭송적 음악을 실험. 발표했다.
그들의 노래 부르기 쉬운 것을 옹호하고 가사 이해가 어렵다는 이유에서 대위법적 음악을 배격한다.
카메라타 그룹은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 시켰으나, 오페라를 성공시킨 사람은 몬테베르디.
이태리 로마 오페라
로마 오페라: 플로렌스 오페라의 전통을 이어받는다. 처음에는 교회화된 오페라라할 수 있는 오라토리오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오페라도 나타나는데, 대개 교회적 내용의 오페라들이었다. 합창과 서정적 독창곡이 중요하다.
대표적 작곡가는 스테파노 란디.
점차 오페라 부파를 탄생케하는 막간극을 활성화시킨다. 막간극은 주로 희극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태리 베니스 오페라
초기 오페라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곳은 베니스. 베니스에는 17세기에 일반 대중을 위한 가장 많은 오페라 극장이 있었다.
작곡가들: 몬테베르디, 카발리, 체스티.
몬테베르디의 베니스 오페라는 다양한 음악들과 극에 맞춘 표현력을 중시한다. 그의 레치타티보는 '공연양식'(Stile rappresentativo)이라 불리는데, 이는 그 이전에 있었던 단순 낭송적인 레치타티보와 구분된다. 몬테베르디는 언어와 감정의 면을 극히 강조하는 작곡가였다.
그의 오페라가 가진 다양한 면들은 그가 베니스에 오기 전에 쓴 작품인 오르페오(Orfeo, 1607)에서 이미 다 드러나 있다:
◇독립적 기악곡의 활용,
◇극에 맞춘 모티브의 활용,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춘 악기 사용.
그의 베니스 오페라는 더 세분화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극적인 면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기악과 합창의 규모는 축소된다.
이태리 나폴리 오페라
나폴리 오페라: 로마의 오페라를 계승하는 나폴리 오페라는 성악적 기술을 중시하는 성악적 기술을 중시하는 음악적 특징을 갖고 있다.
나폴리 오페라의 음악은 <연극적인 레치타티보>와 <성악적인 아리아>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대본도 거기에 따라 도식화된다. 아리아 역시 <다 카포 아리아>로 도식화된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알레싼드로 스카를랏티. 그는 나폴리 오페라의 서곡인 신포니아 형식을 정립했고, 적절한 악기를 사용하여 음악과 극의 조화를 도모했다. 중창, 부포장면 등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나폴리 오페라는 수많은 작곡가와 작품들을 남겼다. 양적으로 보아 최대의 오페라 악파라고 말할 수 있다.
나폴리 오페라는 심각한 내용의 <오페라 세리아>와 우스꽝스러운 내용의 <오페라 부파>로 크게 구분된다.
①오페라 세리아는 신화나 영웅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②오페라 부파는 당대의 시민생활에 관해 다룬다.
'성악적인 면'의 강조와 '규격화'는 나폴리 오페라의 특징이었다.
벨칸토(Belcanto)창법은 로마 오페라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꽃은 나폴리에서 만개한다. 카스트라토는 당시의 극단적 성악예술 추구를 보여준다.
나폴리 오페라는 당시 온 유럽의 음악적 중심에서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작곡가들은 나폴리식 음악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에 맞춘 대량 제작, 지나친 성악가 중심, 작품의 도식성 등은 작품이 후대에까지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음악사에서 나폴리 오페라에 관해 언급되는 것은 주로 심포니의 전제가 되는 서곡(신포니아)에 관해 다룰 때이다.
프랑스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는 크게 륄리에 의해 주도된다. 프랑스의 오페라는 발레를 중시하는 특징을 갖는다.
①궁정발레: 대사, 노래, 무용의 결합.
②코메디 발레: 위와 같지만 내용이 희극.
③전원극: 목동의 이야기가 그 내용.
④서정비극: 비극적 내용의 오페라. 궁정발레, 코메디 발레, 전원극의 전통을 통합한 것.
⑤오페라 발레: 서정비극의 발레 부분이 커진 것.
륄리는 프랑스적인 오페라를 정립한다. 언어에 맞춘 레치타티보, 발레, 합창, 단순한 노래, 콜로라투라 없는 아리아, 묘사적 성격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특징이다.
영국 독일의 오페라
영국: 다른 나라의 오페라가 들어오기 이전에 가면극 <마스크>가 있었다.
17세기 영국 오페라를 대표하는 것은 퍼셀의 짤막한 <디도와 에네아스>.
영국에서 이태리 오페라로 큰 활약을 한 사람은 헨델이었다. 그는 수많은 나폴리식 오페라로 오페라를 영국에 뿌리내리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순한 거리의 노래들을 조립해 만든 <거지 오페라>의 출현을 맞아 좌절한다.
독일은 17세기에 쉿츠와 함께 오페라의 역사가 시작하지만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바로크의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 1600년경에 카톨릭 교회에 있었던 반종교개혁운동과 함께, 세속적 오페라에 대립되는 교회음악으로 나타난다. 초기에는 대화식 라우다(Lauda)를 기도실에서 불렀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함께 크게 성공적인 장르였다.
카발리에리는 오페라의 레치타티보 방식을 오라토리오에 적용시킨다. 가사는 <대화음악> (Dialogo)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 이후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한다.
1616년에는 줄거리 진행을 낭송하는 낭송자를 두게 된다.
17세기 오라토리오는 무슨 말로 대본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나뉜다:
□이태리어 오라토리오
□라틴어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는 카톨릭에서 시작하여 개신교 쪽에서도 작곡.연주된다. 독일 개신교의 것은 <히스토리>라 불렸는데, 카톨릭에서 보다 더 보수적인 음악을 사용했다.
나폴리 악파는 오라토리오와 오페라를 모두 같은 형식으로 작곡한다.
헨델은 나폴리 식의 오라토리오와 영국의 합창전통을 결합하여 오라토리오를 크게 성공시킨다. 이 성공은 작곡.연주.청중동원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크 개신교음악
(1) 개신교는 초기부터 누구나 다 노래할 수 있도록 회중찬송가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교파별로 약간 다른 음악들을 사용했으나, 자국어로 된 회중찬송가가 중심적 교회음악이었던 점은 대체적으로 공통적이었다. 이 전통이 17,18세기에도 계속 이어져 간다.
(2) 루터교에서는 다성부 음악인 모테트를 장려했다. 성가대 음악인 모테트는 찬송가를 편곡한 찬송가 모테트가 아주 많았다.
(3) 대표적 작곡가들은 당대에 "위대한 3 S" 라 일컬어지는 쉿츠, 샤인, 샤이트 등이 있었다. 이테리로부터 들여온 새로운 기법들을 독일어에 적응시키는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4) 새로운 콘체르토 양식으로 쓰여진 교회음악도 모테트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옛 대위법적 음악도 계속 나타난다.
(5) 18세기에는 보덴샤츠가 편찬한, 여러 사람들이 작곡한, 방대한 양의 곡을 모은 모음집이 있어서 새로운 모테트를 작곡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6) 바하는 모테트로서는 규모가 대단히 큰 7개의 모테트를 남겼다.
(7) 독일 루터교에서는 칸타타가 예배를 위한 아주 중요한 교회음악 장르였다.
(8) 독일 개신교 음악은 바하에 의해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9) 영국의 앤덤은 유럽대륙의 모테트와 유사한 기능의 교회음악이다.
(10) 간토르(Kantor): 독일의 교회음악가.
바로크 건반음악
(1) 바로크 시대의 건반악기는 작곡적 사고의 핵심에 놓이게 된다(계속저음). 크게 오르간, 쳄발로, 클라비코드로 나뉜다.
(2) 당시의 건반음악은 어떤 악기를 위해 작곡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 음악들은 그 연주기법이나 용도 등을 보아 구분된다.
(3) 이태리는 소나타, 프랑스는 모음곡, 영국은 변주곡을 많이 작곡했다. 독일은 세 나라의 모든 것을 흡수, 혼합했다. 오르간 음악을 크게 성공시킨 사람은 프레스코발디. 그의 업적은 같은 시기에 몬테베르디가 오페라에서 이룩한 업적과 견줄 수 있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스벨링크, 프랑스의 샹보니에르와 프랑스아 쿠프랭이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건반악기 음악의 작곡가들이다.
(7) 독일은 남부, 중부, 북부로 나뉘어 건반음악이 발달했다. 남부(프로베르거, 파헬벨 등)는 주로 이태리와 프랑서의 영향을 받은 쳄발로 음악을 사용했다. 반면에 개신교 지역인 북부(북스테후데 등)는 오르간 중심으로 작곡되었다. 스벨링크와 영국 작곡가들의 영향이 컸다. 중부(샤이트)는 남부와 북부의 음악으로부터 혼합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8) 오르간 음악과 오르간 제작기술은 18세기에 동반적으로 크게 번성한다. 코랄과 관련된 음악이 많았다.
(9) 바하는 쳄발로와 오르간을 위해 대단한 작품들을 남겼다. 쳄발로 음악으로 모음곡, 평균율,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을, 오르간 음악으로 여러 개의 프렐류드(또는 토가카, 또는 판타지)와 푸가, 팟사칼리아, 수많은 코랄 관련적 음악 등을 남겼다.
바로크 현악음악
(1) 바로크 시대에 바이올린 제작과 음악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다. 코렐리와 비발디는 탁월한 바이올린 주자였으며, 현악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들의 영향이 다른 나라에까지 미친다.(예: 독일의 바하 등). 한편 프랑스는 륄리에 의해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독자적인 전통을 세웠다.
(2) 실내악의 중심 장르는 트리오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는 2선율악기 + 1중간성부 악기+ 1저음악기(+화성악기)로 편성된다. 이 편성과 오케스트라가 결합된 편성이 콘체르토 그롯소이다. 1700년경 코렐리에 의해 정립된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 역시 편성 상으로는 트리오 소나타이다.
관악음악
1) 관악기는 바로크 시대의 현악기처럼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이는 악기가 아직 미숙한 상태인 것과도 상관이 있다.
(2) 관악기를 위한 앙상블 음악은 일정한 표준 편성을 갖지 않았다.
(3) 첨탐음악: 독주적 관악기 앙상블이 첨탑에서 연주하는 음악.
바로크 오케스트라 음악
(1) 바로크 오케스트라는 "계속저음 + 현악기 그룹" 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필요한 경우 여기에 다른 악기들이 덧붙여진다.
(2) 프랑스에서 24명의 현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나타난다. 이는 륄리에 의해 새로 나타난 기악곡들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곡들은 주로 무용 모음곡 종류들이다.
(3) 바로크의 대표적 기악음악 장르는 콘테르토. <콘체르토>라는 용어는 17세기 중엽에 이 장르를 위한 명칭이 된다.
(4) 콘체르토 그롯소: 트리오 소나타 편성 + 오케스트라
(5) 솔로 콘체르토: 1명의 독주자 + 오케스트라.
(6) 콘체르토는 이태리에서 탄생.발달한 장르.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도 콘체르토를 작곡하여 콘체르토가 전 유럽적인 현상이 된다. 대표적 작곡가로는 코렐리, 비발디, 바하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솔로 콘체르토의 전형적 틀을 만든 사람은 비발디라고 말할 수 있다: 1악장 리토르넬로 형식, 2악장 성악적 노래 형식, 3악장 리토르넬로 형식
바로크 대표적 작곡가
몬테베르디
(1) 몬테베르디는 바로크 초기의 가장 두드러진 작곡가. 무엇보다 오페라를 성공시킨 것이 큰 업적. 마드리갈과 교회음악에서도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2) 그는 마드리갈을 작곡하면서 표현적 욕구 때문에 옛 대위법(제1작법) 대신에 콘체르토 양식(제2작법)을 택한다. 제2작법은 극적인 표현력과 감정표현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자신의 작곡방식을 <격앙양식>이라 불렀다.
(3) 그는 오페라에서 가사를 낭송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극의 진행에 적극 동화하고 참여하는 방식을 성취시켰다.
(4) 교회음악에서는 -특히 미사에서- 비교적 옛 양식을 많이 썼다. 그러나 교회 음악에서도 좋은 작품은 새 양식으로 되어 있다.
하인리히 쉿츠
(1) 쉿츠는 17세기 초반의 가장 중요한 독일 작곡가.
(2) 그는 당대에 통용되고 있던 전통적이거나 새로운 음악적 긱법(제1, 제2작법)을 모두 탁월하게 구사하는 교회작곡가였다.
(3) 쉿츠의 음악기법은 거의가 이태리의 것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그도 이태리에 가서 음악을 배웠다(베니스/G가브리엘리).
(4) 그는 독일어 가사를 살리는 일에 노력하여 이태리 음악과는 다른 성격의 음악을 만들게 된다.
안토니오 비발디
(1) 비발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활동을 한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을 크게
1.콘체르토, 2.오페라, 3.교회음악 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음악은 파악이 용이하고, 그 성격은 쾌활하다.
(2) 비발디는 콘체르토를 특히 많이 작곡했다(470여곡). 그의 명성의 기초는 당대나 오늘날이나 콘체르토에 있다. 그 중 그는 솔로 콘체르토를 3악장 형식으로 정형화 했다.
(3) 비발디는 오페라와 교회음악에도 대단히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
(1) 바하: 바로크의 대표적 작곡가.
(2) 바하는 작품들의 심도와 규모의 면에서 비교가 쉽지 않은 작곡가. 푸가와 이태리 콘체르토에 특히 능했다. 교육적, 교회음악적 작품을 많이 썼다.
(3) 시기구분 (거주한 지역에 따름): 1.아른슈타트/뮐하우젠 2. 바이마르 3.쾨텐:<인벤션과 신포니아>, <평균율 I> 4. 라이프치히 칸타타, b단조 미사, <마태 수난곡>, <푸가의 기법>
(4) 바하의 음악사적 영향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본격화 된다.
프레데릭 헨델
(1)헨델: 독일에서 태어나고, 이태리에서 배우고, 영국에서 주로 활약한 바로크의 대표적 작곡가.
(2) 1710-1759년은 주로 오페라 창작 시기였다.
(3) 헨델은 오라토리오를 통해 성공적 음악가가 되었고,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전음악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 재즈나 여러 민족의 전통음악과 구별되는, 서양의 진지한 예술음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고전' 이라는 말은 매우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물건이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뜻하므로, 예술음악이 그 형식과 스타일에 있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고전음악' 은 1750년에서 182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음악, 즉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대작들과 베토벤의 초기 걸작들이 작곡된 시기의 음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결국 음악에서는 고전이라는 말이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주의' 라는 시대 이름으로 고전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어떤 점에서 이 시대 작품들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균형 잡히고 조화롭고 정확한 형식으로 이루어져서 일종의 영구적인 미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불 수 있다. 따라서 결국 고전음악이라고
할 때의 '고전'이라는 말과 고전주의 음악에서의 '고전'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지만, 영구적인 미적 가치라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일맥상통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전주의 사회
1) 이성과 진보의 시대
계몽주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를 음악과 미술과 건축에서는 고전주의라고 부르지만, 같은 시기를 철학과 문학에서는 계몽주의라 부른다. 계몽주의 시대는 한 마디로 이성의 시대로서, 사상가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자연 법칙을 발견했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는 전기가 발견되고, 증기 기관이 발명되는 등 놀랄만한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이성과 과학이 중요시되던 이 시대에는 모든 지식을 종합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모두 24권이나 되는 백과사전이 1751년에서 1772년 사이에 발간되었는데, 백과사전을 편집했던 볼테르(1694-1778)와 루소(1712-1778)는 사회정의, 평등, 종교적 관용, 그리고 언론의 자유 등의 원칙들을 신봉하였으며, 저자들 역시 과학, 철학, 정치 분야에 좀 더 합리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전통적인 종교적 믿음이나 미신 등을 모두 저버렸다.
시민혁명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정치적 자유를 향유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신념 때문에, 계몽주의의 사상가들은 기존질서를 옹호하던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기존의 정치 체제는 교회의 미신적 관습과 귀족의 특권, 왕들의 신성한 권리에 기초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볼테르는 귀족들과 성직자의 관행과 특권을 비난했고, 정직, 상식, 노동같은 중간계급의 미덕을 옹호했다. 기득권층이 격식을 차리기 위해 중요시했던 가식적인 매너나 가발, 허리에 차고 다니던 칼 등이 볼테르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상인, 장인, 혹은 제조업자 등의 보다 자연스러운 외양이 이제는 전형이 되었다. 경제적 이윤과 철학자들의 원칙에 고무되어, 프랑스에서는 중간계급이 점차 늘어나고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군주제와 그 지지자들에게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끝내는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인 프랑스 혁명(1789-1794)을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은 계몽주의의 기치, 즉 자유, 평등, 박애를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며, 17세기 이후 가장 강력했던 절대군주의 후예인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것으로 군주제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계몽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모여 미국의 독립운동(1775-1783)을 촉발시켰다. 한마디로 이성의 시대가 혁명의 시대를 몰고 온 것이다.
박애정신
박애정신은 18세기 새로이 만들어진 조직들을 지탱했던 관념이었다. 이러한 조직들 중 대표적인 것이 1717년 영국에서 창설된 프리메이슨이었다. 프리메이슨의 구성원들은 상호 원조를 하면서 사회적으로 자선을 베풀었던 국제적 조직이었다. 또한 이들은 신분과 직업을 초월했다. 이 조직은 유럽과 미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그 구성원 중에는 왕, 문학가, 작곡가, 정치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18세기 유명한 프리메이슨으로는 요제프 2세, 독일의 대문호 괴테, 모차르트, 그리고 조지 워싱턴 등이 있다.
계몽군주
18세기 말 유럽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지만, 유럽의 모든 군주가 그것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통치자들이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계몽된"군주가 되었다. 예를 들어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는 적어도 선왕들과 비교해 볼 때 모두 계몽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예술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프레데릭 대제는 플루트를 연주했고 당시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을 고용했었다.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던 요제프 2세는 음악과 문학의 훌륭한 후원자였다.
비엔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자 요제프 2세의 궁정이 위치하고 있었던 비엔나에서는 모든 종류의 예술이 융성했다. 한 해 동안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귀족들은 비엔나에 모여서 겨울을 보냈는데, 음악은 궁정생활의 중심이었으며,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귀족들에게 큰 자부심이었다. 18세기 말엽에 비엔나는 유럽음악의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음악가들이 명예와 부를 찾아 비엔나로 모여들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도 모두 고향을 떠나 비엔나 시민이 되고자 했던 음악가들이다. 인구 20만의 도시에 피아노 선생이 어림잡아 300명은 되었다고 한다. 비엔나에서는 "모두가 악기를 연주하고 모두가 음악레슨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많았다. 귀족들은 전문음악가를 초청하여 그들의 연주를 듣고 또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었다. "명문가에서 사람 구함, 바이올린을 잘 연주할 줄 아는 남자 하인 한 명"이라는, 1789년 비엔나의 한 신문의 광고 문구는 당시 귀족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산업혁명과 중간계급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18세기 내내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부를 축적한 중산층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표현의 자유와 여가 시간을 요구했다. 또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급격히 진행되었으며, 인구가 늘어난 대도시들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18세기 말의 런던은 전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 런던의 연주회는 활기를 띠었고, 런던의 많은 자본과 부유한 청중들은 외국의 수많은 음악가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만년의 하이든이 런던은 두 차례에 걸쳐 체류하면서 런던의 청중들로부터 풍료로운 대접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의 고전주의 윤곽
(1) 고전시대: 18세기중엽- 19세기 초. 이미 바로크 시대(1730년경)에 시작한 고전주의적 경향은 전고전이라 불린다,
(2)<고전>의 개념은 19세기 초에 질적으로 탁월한 하이든,모짜르트,베토벤의 음악을 다른 음악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말.
(3)<고전>의 개념에는 "모범적, 균형적,보편적, 시대초월적"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4) 고전시대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이라는 사상적,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다. 구습의 타파와 때묻지 않은 인간본성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주장된다(칸트/루소). 이 주장은 전 유럽을 통하여 많은 동조자를 얻게 된다.
(5) 음악에서는 <자연스러움>, <단순성>, <보편성> 이 강조된다. 이 세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단순한 민속음악이었다.
음악가/ 연주회
(1) 고전시대의 음악가들은 그 전 시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더 자유로운 여건 속에서 작업했다. 하이든은 궁정에 소속된 음악가였으나 활동에 큰 장애요인은 없었다. 모차르트는 작곡. 연주. 레슨에 의한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으나 실패했다. 그 자유를 성취한 사람은 베토벤이었다.
(2) 다양한 음악회가 있었다. <연주회장>이 가장 중요한 음악회 장소로 떠오른다. 연주회장에서 음악회를 여는 주최자는 주로 <음악협회>였으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의 시대를 펼친다. 청중은 입장료를 지불했다. 오케스트라 음악 중심의 음악회는 고전시대를 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전음악의 특징
(1) 고전시대의 음악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 비해 단순하고, 그 성격이 경쾌하다. 기악 위주로 음악이 바뀐다.
(2) 주요 삼화음의 중심성이 바로크 시대에서보다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위법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바로크 시대와 같은 비중을 갖지 못했다. 화성적으로 착상된<소나타악장 형식>이 중심적 작곡기법이 됨에 따라 대위법적 푸가는 2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3) 고전음악의 선율은 민요적 성격의 것이다: -4마디 구조, -제한된 음역, -전음계적 음계.
(4)4마디 그룹들이 서로 쌍을 이룬다. 화성도 반종지, 완전종지로 같이 보조를 맞춘다.
(5) 고전음악은 그 중요한 부분에서 위의 음악적 특징들과는 대립되는 면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소나타악장 형식의 전개부가 그렇다.
연주
(1) 고전시대에 들어오면서 연주실제가 많이 변한다: -계속저음의 폐기, -피아노의 등장과 연주기법의 개발, -클라리넷이 오케스트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점진적 강약의 선호.
(2) 꾸밈음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정도의 옛 관행이 남아 있었다. 꾸밈음이나 장식음이 완전히 정리되는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고전주의 음악 2
고전주의 음악장르
음악에서 장르라는 용어는 음악양식이나 연주매체 그리고 때때로 연주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행진곡과 발라드를 다른 장르라고 얘기할 때는 양식적 구분이지만, 현악4중주와 피아노 독주는 연주매체의 구분일 테고, 독주회와 거리연주회는 장소에 따른 장르의 구분일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음악에서 장르란 일반적인 음악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 여러 음악장르들이 유행했지만 이 시대에는 오페라, 교향곡, 현악4중주, 소나타 그리고 협주곡이 가장 중요한 장르로 부상하였다. 이 가운데 오페라만 바로크 시대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 다른 장르들은 거의 고전주의 시대에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소나타와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부터 있었지만 고전주의 시대에 너무 많이 변하였으므로 거의 새로운 장르로 보아야 할 것이며, 교향곡과 현악4중주는 바로크 시대에 그 직접적인 조상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 생겨난 장르이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모든 장르들이 모두 세속적 장르라는 점이다. 작곡가들이 여전히 미사나 오라토리오 같은 종교적 작품들을 작곡하긴 했지만, 고전주의 시대 이러한 형태의 곡들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사회의 구조와 관심사가 변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이 장르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연주되고 또 그것이 연주되는 장소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의 음악회에 참석하는 청중들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로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오페라 공연은 몇 안 되는 아주 부유한 귀족들의 궁정이나 프라하, 파리, 비엔나 같은 큰 도시의 공공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렸으며, 교향곡은 오페라처럼 귀족들의 궁정에서 연주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유럽 전역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던 공공음악회장에서 연주되었다. 현악4중주와 소나타들은 귀족의 살롱이나 중간계급 음악 애호가들의 거실 등에서 주로 사적인 모임을 위해 연주되었다.
교향곡의 탄생
고전주의의 산물 :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이 가장 선망했던 장르가 오페라였다면,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장르는 교향곡이었다. 교향곡은 야심찬 작곡가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위대한 장르였다. 작곡가들은 교향곡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평가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국제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이든이 107곡이나 되는 많은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모차르트가 그 짧은 생애 동안 41곡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교향곡이 차지한 비중을 알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 교향곡의 인기는 계몽주의 시대 혁명적인 사회 변화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공공음악회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런던, 파리 그리고 비엔나 같은 대도시의 음악 중심은 더 이상 귀족들의 궁정이 아니라 공공음악회를 위해 새로 건립된 콘서트홀이었다. 공공음악회의 하이라이트는 교향곡이었고, 이 교향곡을 듣기 위해 중상위계급의 청중들은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록 만하임의 선제후나 에스테르하지 왕자들 같은 몇몇 귀족들이 여전히 초기 교향곡의 중요한 후원자였지만, 이 시대 교향곡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공공음악회의 청중들이었다. 하이든의 마지막 20개의 교향곡들은 런던과 파리의 공공음악회를 위해 작곡된 것이며,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들은 모두 공공음악회를 위한 것들이다. 더구나 공공음악회의 커다란 콘서트홀에서 연주될 목적으로 작곡된 교향곡들은 궁정의 연주회장에서 연주되던 초기의 교향곡들보다 규모도 커지고 그 내용도 정교해졌다.
교향곡의 구조
일반적으로 교향곡이라고 하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여러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관현악곡을 말하지만, 고전주의 시대 교향곡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나타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즉 대부분의 교향곡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 제2악장은 느린 빠르기의 3부형식이나 주제와 변주, 제3악장은 미뉴에트나 스케르초와 트리오, 그리고 제4악장은 론도나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1악장은 거의 예외 없이 빠른 템포의 소나타 형식으로 전체 악장 중 가장 극적이고 흥미로운 악장이다. 제2악장은 이와 대조적으로 서정적이고 느리며, 노래 부르듯이 부드러운 선율이 전개된다. 제3악장에서는 이보다 빠르기도 빨라지면서 분위기가 유쾌하고 생동감 있게 바뀐다. 제4악장의 분위기는 이제까지의 악장과는 달리 작곡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은 빠르고 밝고 활달하지만 다소 가벼운 반면, 베토벤의 마지막 악장은 영웅적이고 승리에 찬 느낌으로 전체 교향곡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교향곡의 역사
물론 이러한 형식 구조가 누군가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흔히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하이든이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만든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는데, 사실 교향곡이라는 형식 구조를 하이든 이전에 이미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하이든은 <런던>, <군대>, <시계>, <놀람> 등 수많은 걸작을 포함하여 모두 107곡이라는 유례 없이 많은 교향곡을 작곡하였을 뿐 아니라 교향곡의 예술적, 형식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을 얻은 것이다.
신포니아
교향곡의 직접적 조상은 바로크 시대 신포니아라고 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교향곡은 바로크 시대 여러 양식들이 통합되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신포니아는 원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빠름-느림-빠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한 악장 짜리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이었다. 이것이 1700년경에는 오페라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인 기악곡으로 연주되기 시작하였고, 그 규모도 확대되어 서로 다른 빠르기의 세 부분이 각각 빠름-느림-빠름의 세 개의 악장으로 발전하였으며, 1740년대부터는 미뉴에트 악장이 첨가된다. 이렇게 해서 이 세기 중엽 교향곡은 빠름-느림-미뉴에트-빠름의 4악장으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장르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교향곡이 빠르기가 대조를 이루는 여러 개의 개별적인 악장으로 구성되고, 미뉴에트 같은 춤 음악을 포함하는 점은 바로크 모음곡에서 유래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하임 악파
고전주의 시대의 막이 열리기 시작한 18세기 중엽, 교향곡의 탄생과 발전에 높은 관심을 보였던 지역은 만하임과 비엔나 그리고 베를린이었다. 만하임 악파의 창시자인 슈타미츠(1717-1757)는 소나타 형식인 제1악장 알레그로에서 제1주제와 대조적인 성격을 이루는 제2주제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이전까지 3악장 구조로 된 교향곡에 미뉴에트를 첨가하여 교향곡을 4악장 구조로 확대시킨 최초의 작곡가이다. 또한 당시 슈타미츠가 이끄는 만하임 관현악단은 폭넓고 다양한 음향을 자유롭게 다루는 기량을 과시하며 전 유럽을 놀라게 했다. 베를린에서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넷째 아들인 카를 필립 임마뉴엘 바흐가 지나치게 감정적인 양식의 영향을 받아 교향곡에 다양한 표현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비엔나에서는 바겐자일(171501777)과 몬(1717-1750)등의 작곡가들이 비엔나 특유의 유쾌하고 서정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양식들이 18세기 후반 그들의 뒤를 잇는 비엔나 악파의 거장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교향곡은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에 이르러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교향곡의 역사에서 볼 때 이들이 남긴 업적은 모두 대단하여 그 우열은 가릴 수가 없다. 이들은 교향곡의 발전에 있어 제각기 다른 역할을 맡았으며, 그들의 교향곡 역시 뚜렷이 다른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고전주의 소나타
소나타는 고전주의 시대 현악4중주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실내악 장르였다. 바로크 시대 소나타가 4-5개의 춤곡 악장들로 구성된 단순한 모음곡이었던 것과 달리, 고전주의 시대 소나타는 빠름-느림-빠름으로 빠르기가 대조되는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며, 각각의 악장은 소나타 형식, 3부분 형식, 론도 형식 또는 주제와 변주 형식 등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들이 가장 선호하던 독자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피아노 소나타
고전주의 소나타는 피아노 소나타와,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와 같은 독주악기와 피아노 반주를 위한 소나타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피아노 소나타에 대한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라는 식으로 따로 명시하지 않고 그냥 '소나타'라고 하면 '피아노 소나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고전주의 시대 피아노 소나타는 어떠한 장르보다 가장 많이 출판되는 장르였다. 18세기 피아노는 오늘날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와 비교한다면 그 성능이 크게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높은 음역에서 더 부드럽고 가벼운 소리가 났고, 낮은 음역에서 덜 울리고 둔탁한 소리가 났기 때문에, 피아노와 포르테, 즉 여리고 센 음량이 조절될 수 있는 능력만으로도 당시에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더구나 모차르트와 베토벤 같은 고전주의 거장들은 근본적으로 피아니스트였으며, 피아노가 날로 개량되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작곡을 할 때면 우선 피아노에 앉아 그들의 아이디어를 피아노로 쳐보고 피아노의 성능에 맞는 기교들을 실험하면서, 주옥 같은 피아노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탁월한 작품들이 악보로 출판되고 대중에 의해 대량으로 소비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피아노는 그 어떠한 악기보다 대중적인 악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협주곡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고전주의 시대에는 협주곡이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 유형으로 굳어진다. 이 시대 협주곡이 강조하는 것은 독주자의 연주 기교와 해석 능력,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음색과 극적인 구성력 그리고 이 두 파트가 팽팽한 긴장과 대조 속에 엮어 내는 대화이다. 여기에서 두 힘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선율을 주고받기도 하고 같은 음악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기도 하면서 긴밀하게 대화한다. 때로 독주자가 선율을 연주하면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고, 독주자가 잔잔한 펼친 화음을 깔아주면 오케스트라의 목관악기들이 화려하게 주제를 펼쳐 나간다.
구조: 고전주의 협주곡은 외형상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나타라고 할 수 있지만, 독주악기 소나타나 교향곡처럼 미뉴에트나 스케르초를 포함한 4악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빠름-느림-빠름의 순서인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제1악장도 소나타 형식이기는 하지만 제시부에서 주제가 오케스트라에서 한번 그리고 독주자에 의해 다시 한번 연주되는 이중 제시부로 되어있다. 오케스트라의 제시부는 악장 전체의 느낌을 예견하는 동시에 독주자의 출현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며, 독주자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개 화려하고 극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제시된 주제를 탐닉하기도 하고 새로운 주제도 끌어내면서 제시부와 발전부를 거쳐 재현부까지 밀도 높은 대화를 끌어나간다. 그리고 재현부의 끝에 오면 긴 페르마타 음 위에서 진행이 멎어버리는데 이것이 독주자가 카덴차로 들어선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 카덴차는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독주자가 자신의 연주기교를 자유롭게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다. 독주자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악구와 어려운 아르페지오를 통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 여기서는 이제까지의 주제와 다른 성격의 주제도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으며 조성도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카덴차는 일반적으로 즉흥연주되었다.
이 시대에는 즉흥연주가 흔했고 작곡가 자신이 독주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고전주의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이러한 관습이 쇠퇴하면서 작곡가들은 카덴차를 악보에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작곡가가 여러 개의 카덴차를 작곡하여 연주자가 선택하게 하거나, 이전에 작곡된 협주곡에 춧날 다른 작곡가가 새로운 카덴차를 작곡해 넣는 등, 카덴차는 여전히 협주곡에서 가장 자유로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화려한 카덴차를 다 연주하고 난 독주자는 긴 트릴을 통해 오케스트라를 깨워 자신의 연주가 끝났음을 알리고 이 둘은 다시 자연스럽게 맞물려서 장엄한 피날레는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오페라
(1)이태리 작곡가들 중 몇 사람은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통합을 시도했다.
(2)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는 대단히 성공적. 오케스트라가 극적 흐름에 같이 참여하고, 등장인물은 성격이 뚜렷하다. 음악은 여러 장르로부터 가져왔다.
<피가로>는 등장인물의 동작을 고려한 음악을 들려준다.
(3)롯시니의 오페라 부파는 당대에 열광적 호응을 얻었다. 음악은 가볍고 부담을 주지 않는다. 빠른 말 노래, 해학적 콜로라투라, 같은 리듬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고조시키는 효과 등이 두드러진다.
프랑스 오페라
(1)<부퐁의 논쟁>은 자연스러운 음악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자국의 옛 오페라 전통을 파기해야할 것으로 주장하면서 일어난 논쟁이다.
(2)글룩과 피치니의 논쟁은 <자연스러운> 음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쟁이었다.
(3)프랑스의<오페라 코미크>는 루소에 의해 이태리 오페라 부파와 프랑스의 코메디 전통이 결합된 것이다. 말로 하는 부분을 가진 <멜로드라마> 부분도 여기에 포함된다. 나중에는 너무 많은 오페라 장르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서정비극과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독일오페라
(1)징슈필: 말로 하는 대사와 음악을 결합시킨 음악극으로 18세기 중엽 독일에서 나타난다.
(2)징슈필은 누구보다도 모차르트를 통해 크게 성공적인 장르가 된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와 <요술피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오페라에서 보는 모든 음악적 요소들을 더 단순화 시키고, 소박한 민속적 선율을 많이 사용했다.
글룩의 오페라 개혁
1)글룩의 오페라 개혁은 <극적인 면>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것. 이는 프랑스 오페라의 부자연스러움과 이태리 오페라의 '반연극적' 경향을 타파하려는 것이었다. 대본을 세심하게 다루어 극이 무성격하게 되는 것을 피했고, 음악이 극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도록 작곡했다.
-글룩 오페라의 특징: -기교적 성악의 억제,- 반주 레치타티보 사용, -합창, 무언극, 발레의 사용, 여러나라의 노래 사용
(1) 고전시대에 들어와 이태리의 오페라 세리아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2)모차르트의 오페라 세리아도 그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다.
(3)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내용적으로는 '혁명의 오페라'이고, 음악적으로는 여러 장르의 전통을 결합한 것이다.
오페라 세리아
낭만주의 음악정신
낭만주의 음악의 이상
고전과 낭만:'바로크','고전'과 같은 말이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과 달리, '낭만' 또는 '낭만적' 이라는 말은 평소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 사전적 정의로는 공상적, 허구적, 환상적, 비현실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예술에서 낭만이라는 말은 환상, 상상, 감상을 중요시한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을 가리킨다.이것은 균형, 조화, 완전함을 중요시하는 이른바 '고전적' 예술과 뚜렷이 대조된다. 많은 역사가들은 예술의 양식이 고전과 낭만이라는 두 개의 극단을 오갔다고 말한다. 즉 예술에는 언제나 질서와 안정과 균형을 도모하는 경향과, 그와는 반대로 파격과 경이로움, 그리고 생소함 등 감정의 강렬함을 추구하는 상반된 경향이 공존해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음악 역사를 보면 과거의 전통과 관습적 형식 속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음악을 추구했던 인물이 있는가 하면, 시대를 앞서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을 만들어갔던 개성 있는 작곡가들도 있었다. 그러한 보수적인 작곡가들은 흔히 '고전적' 음악가로, 그리고 다분히 혁신적인 작곡가들은 '낭만적인' 음악가로 분류되곤 한다.
낭만주의 예술사조
고전적 그리고 낭만적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예술적 경향이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난 시대사조는 물론 말 그대로 18세기 고전주의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이다. 구체적인 예술 사조를 가리키는 '낭만주의' 라는 말은 19세기 초 박켄로더, 틱,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등이 주도한 독일 문화운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음악에 '낭만주의' 라는 개념이 적용된 것은 호프만(1776-1822)이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에 대한 비평에서 '낭만적 음악 이라고 말한 것이 처음이다. 호프만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낭만주의란, 그 말 자체가 원래 현실과는 거리가 먼 허황된 이야기인 중세기사문학을 가리키는 로망스에서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 세계와는 다른 비현실적이고, 전설적이며, 공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말한다. 실제로 낭만주의 예술에는 자유, 자기표현, 대담한 행동, 열정적 감정,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 등 혁명적 정서가 넘쳤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세계를 초월한 동화 같은 마법의 세계,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자연, 무한한 영원의 세계이며, 바로 이러한 세계가 제공하는 자유였다.
환상의 세계
낭만주의 시대의 주요 화두는 악마, 마법, 환상, 신비 같은 개념이었다.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는 이러한 요소들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인공 파우스트는 이상적 여인과의 쾌락과 영원한 젊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다른 낭만주의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수많은 작곡가들이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 그리고 그레트헨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악에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종류의 강렬한 표현이 음악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예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중 '마귀들의 잔치', 그리고 베버의 <마탄의 사수> 같은 작품들이다. '마왕"에서는 소년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리는 동안 마왕이 소년의 영혼을 가져가 버린다. <환상교향곡>의 '마귀들의 잔치'에서는 마귀들이 부르는 듯한 디에스 이레가 날카롭고 기분 나쁘게 울린다. 또한 <마탄의 사수>의 전면에 흐르는 전설적인 중세의 이야기, 아득히 먼 동화 같은 마법의 나라, 달빛에 일렁이는 환상같은 소재들은 낭만주의 예술에서 가장 즐겨 다루는 것들이다.
이성과 감정
구체적으로 고전주의 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을 비교하자면, 고전주의 시대에는 형식과 질서가, 낭만주의 시대에는 표현적 내용이 우선순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고전주의 음악은 명확한 구조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청자들은 음악을 감상할 때 그 구조를 인식해야 했다. 이렇게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전주의 음악에서, 감정이란 그 구조 내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낭만주의 음악에서는 강렬한 감정의 표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형식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화성과 선율, 음색, 극적 연결 등 모든 음악적 수단들이 주로 감정표현을 위해 동원되었다. 고전주의 작품에서 형식은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작품에 논리와 질서, 그리고 균형을 부여한다. 반면,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형식을 단지 그 안에 흥미롭고 매력적이며 감정이 풍부한 아이디어를 담는 존재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개성적 양식
음악사에서 낭만주의는 이전까지의 음악의 모든 지평을 확대시키면서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대어 가장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들은, 비록 작곡가가 다르고 각 작곡가들마다 독특한 음악언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청중들이 좋아할 음악을 공통적으로 추구하였기 때문에 각 시대별로 서로 비슷한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개성적인 표현과 양식에 몰두했으며 남들과 차별되는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갖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 정도 음악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처음 몇 마디만을 듣고도 로시니나 슈베르트,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구분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불멸의 명작
예술가의 개성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예술가의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하이든과 같은 작곡가는 고용주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하인의 신분을 기꺼이 받아들인 반면, 베토벤은 자기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이든은 그의 교향곡들이 그 자신보다 더 오래 기억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백 여 개의 교향곡들을 작곡했지만 자신의 작품들을 귀족에게 기쁨을 주고 사라져갈 소모품으로 여겼다. 그는 다음 세대 작곡가들의 작품이 자신의 곡들보다 뛰어나서 자신의 작품들을 대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하이든 시대에, 과거의 음악을 보존하고 심지어는 연구하기까지 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그래서 베토벤과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세대가 아니라 후대를 위해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불멸의 명작을 작곡하는 창조자였다.
예술가의 초상
이제 예술가는 하인이 아니라 창조적 예술성을 지닌 천재였으며 영웅으로 존경을 받았다. 19세기 중반, 리스트가 독일 중부에 있는 바이마르의 한 공작을 방문했을 때, 그는 공작이 주문한 음악을 작곡하는 고용인의 신분으로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공작의 친구이자 고귀한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슈베르트, 슈만, 베를리오즈, 쇼팽, 리스트 같은 낭만주의 시대 음악가들을 모두 낭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항상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어야 하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삶은, 그 자체가 그들이 창조한 음악 속의 낭만적인 움직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낭만적 정신이라 부르는 것들, 즉 자기표현, 열정, 과도함, 자연과 문학에의 애정, 어느 정도의 이기심, 무책임, 심지어 정신질환 등으로 점철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삶도 예술로 만들었다.
19세기 음악관
19세기 지배적인 음악관은 <감정미학>이었다. "음악은 감정을 표현한다"는 생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낭만주의 감정미학에서는 <주관적 감정>이 음악에 표현된다는 점이 매우 강조되었다.
기악음악의 강조: 낭만 시대에 예술이 추구했던 세계는 규정 불가능한 "동경과 이상 세계"였으며, 가사가 배제된 기악음악에서 이러한 세계가 가장 순수하게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술종교의 탄생: 음악을 통해 현실을 벗어난 이상의 세계, 동경의 세계를 추구했던 경향은 음악에 종교적 역할을 부여했다.
19세기에는 음악에 대한 사상(음악미학)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철학자에 의해 연구되었다 : 쉘링, 헤겔, 쇼펜하우어, 하우제거 등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19세기에는 대조적인 경향들이 공존.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이 공존했다. 고전시대부터 나타난 순수한 기악을 낭만주의적 표현방법의 극치로 이상화했던 <절대음악의 옹호자>와 문학이나 그 외의 비음악적 내용을 음악에서 표현하려는 <표제음악의 옹호자>는 서로 대립하면서 19세기 음악을 전개시켰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은 미학적으로 형식미학과 표현미학(감정미학)의 논쟁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 후반에는 보수적 그룹(브람스)과 진보적 그룹(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의 대립을 낳았다.
19세기 음악적 특징
화성: 낭만적 화성은 고전적 화성을 발전시켰지만, 다양한 전조, 반음계주의, 변화화음 등을 통해 무조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선율: 고전에서와 같이 선율은 음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 작품의 흐름을 주도하는 서정적 선율은 낭만시대 음악의 주요 특징이다.
음향: 19세기 전반에 악기가 많이 개선되고 새로운 연주기법이 개발됨에 따라 다양한 음향이 선보였다.
리듬과 박자: 고전음악에 나타난 박자의 주기성, 리듬의 강약이 기본적으로 지속되었다.
형식: 19세기에는 고전주의의 형식적 명료성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감정표현에 주력하였다. 짧은 형식의 작품이 선호되었고, 반면 소나타 같은 대규모 형식도 -변화를 거치면서- 계속 작곡되었다.
19세기 음악문화와 낭만시대예술가
일반적 음악계: 19세기에는 개인적 후원제도가 점차 사라지고, 중산층 시민들을 청중으로 하는 공공 음악회가 일반화된다.
출판문화: 창작과 연주에 대한 비평이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음악가의 위치: 낭만시대 예술가는 영감을 받은 천재로서, 문화적 영웅이 되었다. 음악을 통해 인류에게 고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여겨졌던 19세기의 작곡가와 연주가의 위치는 그 어느 시대보다 높았다.
기교주의(Virtuositat): 19세기 청중은 그 어느 때보다 음악적 기교를 숭상하였다.
살롱음악 : 19세기에는 음악의 대중화 현상에 따라 일반청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가벼운 음악이 많이 작곡되었다.
음악적 리얼리즘
19세기 음악사는 일괄적으로 <낭만주의>로 이해 되었지만, 다른 예술에서 낭만주의와 더불어 중요한 조류로 등장한 <리얼리즘>적 특성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19세기 음악사의 새로운 이해가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음악에 나타난 리얼리즘은 미학적 측면에서 다음의 특성을 갖는다: 진실의 미학 추구, 현실적 소재의 선택, 사회적 시각의 강조, 객관적 표현 시도.
리얼리즘적 경향은 특히 19세기 오페라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낭만주의 음악정신
예술가곡
피아노 반주가 붙은 독창곡은 19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절정에 달했다. 예술가곡(Lied)이 이 시기에 융성하게 된 이유는, 피아노의 발달, 독일 시문학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고 또한 이 장르가 낭만주의 미학관에 잘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예술가곡은 시와 음악과의 관계에 따라 단순 장절 가곡, 변형 장절 가곡, 일관작곡 가곡 (통절 형식)으로 구분된다.
슈베르트: 낭만시대 예술가곡은 19세기 초 슈베르트에 의해 이미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약 660곡에 이르는 그의 가곡에는 서정적이고 표현적인 성악선율과 섬세하게 세분화되고 생동감 있는 피아노 반주가 특징이다.
슈만 :자신의 뛰어난 문학적 소양으로 당대 시인들의 뛰어나고 까다로운 작품들을 서정적이며 신비스럽고 부드러운 가곡으로 작곡함으로써 슈만은 낭만적 가곡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슈만의 가곡에서는 특히 피아노의 역할이 더욱 확대되었다.
1850년 이후: 신독일악파(리스트, 바그너)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경향과 브람스, 옌센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경향의 가곡이 작곡되었다.
세기말: 볼프, R.슈트라우스, 피츠너, 말러등에 의해 더욱 개별화되고 세분화된 가곡이 작곡되었고, 특히 관현악반주에 의한 대규모 가곡이 새롭게 성행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가곡은 위에서 설명한 낭만주의의 새로
경향들을 가장 뚜렷하게 반영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음악역사에서 노래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든지 발달했으나, 노래라는 뜻의 독일어 리트, 즉 가곡이 독립된 장르로서 예술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이다. 특별히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어권에서는 가곡이 단순히 시에 음악을 얹어 부르 는 차원이 아니라, 음악과 시의 긴밀한 결합 또는 문학적인영감과 음악적인 표현의 완벽한 조화로서 예술가곡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가곡의 탄생에는 두가지 요건이 필요하엿다. 하나는 보편화다고 일반적인 상념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을 담아 노래한 낭만주의 서정시의 발전이다. 괴테 나 쉴러, 하이네, 아이헨도르포, 뮐러, 케르너 덩의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들이 작곡가들의 영감을 부추켜서 위대한 선율을 작작곡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피아노의 발전인데, 이 시대 피아노는, 과거의 현악기나 관악기가 노래를 단순히 반주하는 데 머물렀던 영역을 뛰어넘어, 노래와의 이중주를 실현하기에 충분한 풍부한 표현력을 갖춘 악기로 개량되엇던 것이다.
가곡의 유형
가곡은 시와 노래의 결합 구조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의 각 절에 같은 음악을 반복하는 것으로, 1절, 2절 등의 절이 있는 노래를 유절 가곡이라고 한다. 시가 계속 바뀌어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는 것은 민요라든가 대중적인 노래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슈베르트나 슈만 등의 예술가곡에서도 흔한 형식이다. 이에 반해 어느 부분의 반복 없이 음악이 가사에 따라 매 절마다 바뀌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소재로 작곡하는 것을 <통 절 가 곡>이라고 한다. 즉 시의 전개에 따라 작곡가가 가사의 뜻에 부합하는 음악을 다르게 작곡하는 것이다.
작곡가들은 시 자체가 부분적으로 반복 구조를 가지거나 규칙적인 운율이 있는 경우에는 유적가곡을, 반면에 산문시 에 가깝거나, 괴테의 발라드 '마왕' 같이 대화체 형식의 시에는 <통 절 가 곡>을 선택하였다. 즉시의 요구가 음악의 형 시 구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의 형식을 합친 중간 유형이 있는데 유절 가곡의 형식을 하고 있으면서 시에서 특별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중간에 다른 음악적 소재를 도입하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의 '보리수' 를 보면 음악적으로는 각 절마다 유사하지만 2절의 전반부가 1절과는 다르게 단조로 바뀌며 3절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가사의 '차가운바람' 을 모사하는 극적인 부분이 삽입되어 잇다.
연가곡
낭만주의 시대에는 '연가 곡' 이라고 해서 여러 곡의 가곡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유 행 하였다. 연 가곡으로 유명한 것은 슈베르트의<겨울나그네>나<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슈만의<시인의 사랑>과<여인의 사랑과 생애>,베토벤의<멀리 있는 연인에게>, 무소르그스키의<죽음의 노래 와 춤>등이 있다.
연가곡은 일종의 가곡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시인에 의해 일정한 주제가 있는 연작시에 곡을 붙인 경우가 많았지만,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하나의 제목 속에 묶기도 한다. 그리고 연 가곡이라고 해서 늘 소설이나 연극처럼 일관된 줄거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서정을 그려내면서 비슷한 인상이나 기분의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끼리 모아 가곡집을 만든 경우도 많았다.
괴테
독일 예술가곡 발전의 원천이었던 독일 낭만주의 서정시들은 사랑과 동경, 자연예찬, 덧없는 인간의 행복 등의 주제를 지극히 낭만적이고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 예로부터 작곡가들의 영감에 불을 지핀 시인들은 많았지만, 낭만주의 가곡의 발전을 논한 때 괴테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괴테의 시는 동시대뿐 아니라 이후 현대음악에 이르기 까지, 또 독일 작곡가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작곡가들도 앞 다투어 음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괴테의 작품에 붙인 음악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모차르트의 <제비꽃>은 리트역사상 최초의 통절 가곡으로 가곡의 발전에 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기억할 만하며, 무려 125곡에 달하는 괴테 시에 곡을 붙인 라이하르트와 멘델스존의 스승으로 유명한 첼터 는 괴테 시 작곡가로 유명하다. 또한 괴테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베토벤은 80여 편의 가곡 중 <동경>과<미뇽의 노래>,극 음악 <에그몬트>에 나오는 '클레르헨의 노래' 등을 통해서 괴테와의 행복한 만남을 시도 하였다.
슈베르트
'가곡의 왕' 슈베르트도 괴테의 시에 붙인 가곡<anffpp 잣는 그렌트헨>을 시작으로 가곡의 역사를 새로 써나갓다. <몰레 짓는 그레트헨>은 괴테가 56년간의 세월을 두고 완성한 <파우스트>에 나오는 시인데, 슈베르트는 파우스트를 그리워하는 그레트헨이 물레를 돌리면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초조한 심정을 음악으로 탁월하게 그려냈다. 이 곡의 작품번호는 2번이지만 1번인 '마왕' 보다 1년 앞서 1814년에 작곡된 것으로 실재로는 슈베르트의 최초의 작품이다. 당시 슈베르트는 17세에 불과했지만, 끊임없이 돌아가는 물레를 연상시키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는 피아노로 연주되는 탁월한 화성을 볼 때, 이미 그가 음악과 시의 완벽한 결합에 성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슈베르트에 의해 노래는 더 이상 시에 음악을 덧 업힌 수준이 아니라, 시 속에 스며있는 감정을 추출해내는 장르가 되었다. 다시 말해, 슈베르트 덕분에 가곡은 시와 음악, 성악과 피아노가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대화를 하는 새로운 가곡의 미학을 얻게 되고 예술가곡이 음악사에 독립된 장르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곡의 왕
리스트는 슈베르트를 '가장 시인 같은 음악가이며, 음악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시인' 이었다고 회상했다. 슈베르트 작품의 가장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가곡은 교향곡과 실내악곡, 피아노곡과 종교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특유의 서정성이 스며들어, 그의 기악작품에서도 항상 노래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근원적으로는 가장 간결하고 소박한 가곡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그는 낭만주의 음악의 꽃을 피운 것이다. 슈베르트의 작품은 불과 31년의 생에 동안 쓴 것이라고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고 또 그 수도 많다. 슈베르트는 600곡이 넘는 가곡 이외에도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피아노와 현아기를 위한 실내악곡, 피아노 소나타, 미사곡, 오페라 등을 남겼다.
슈만
슈베르트의 뒤를 이어 낭만주의 독일 가곡의 결정을 이룬 작곡가는 슈만 이다. 슈만 의 삶은 낭만주의 적인 열정과 걱정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겐 끊임없는 시련이 닥쳤고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몸으로 투쟁해야 했다. 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교육과 후원을 받으며 자라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슈만의 부모는 그가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 하였다. 그는 한때 부모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로 하여금 더욱 법학을 혐오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결국 어머니를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의 출발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을 간직했던 그는 당대 일류 피아노 교사인 프리드리히 비크 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한 만큼 그는 필사적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격렬한 연습 대문에 오른손 손가락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고 초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이제는 피아노가 아닌 작곡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린다. 그의 창작욕은 실로 폭발적인 것이었다. 슈만의 대표적인 피아노곡의 대부분은 그가 20대에 작곡한 것이었다.
슈만의 노래의 해
그의 창작력은 자기 선생의 딸인 클라라 비크 와 사랑에 빠지면서 더욱 불붙는다. 하지만 비크 선생은 클라라가 슈만과 맺어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딸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던 비크가, 장래가 촉망되는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그 딸을 앞날이 불투명한 가난한 청년 작곡가에게 내줄리 없었다. 슈만은 클라라가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법적 보호자인 비크를 상대로 법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엇다. 마침내 슈만은 법정 투쟁에 승리하여 클라라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이 해가 바로 1840년이고, 이 한해 동안 슈만은 봇물처럼 가곡을 써 내려가서, 무려 200편에 가까운 가곡을 작곡하였기 때문에 이 해를 흔히 '노래의 해' 라고 부른다. <시인의 사랑>, <리더크라이스>, <미르테의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이 모두 이'노래의 해' 에 작곡된 연가곡들이다.
이 가곡들은 한결같이 여인 즉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고 있다. 한편 슈만은 가곡에서 '노래와 피아노를 위한 곡'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즉 피아노의 인상적인 전주를 통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간주부분을 통해 앞과 뒤의 시의 분위기를 연결하며, 노래 선율을 중간에서 끝나게 하면서 그 나머지를 피아노가 완성하게 하는, 즉 후주 부분을 두어서 시의 여운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 때 분에 슈만의 가곡은 때로 피아노 소품처럼 들리기도 하며 노래가 피아노에 얹어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여기서 시와 음악은 완벽한 하나가 되며, 세분화된 뉘앙스와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피아노 반주와 서정적인 선율의 조화를 통해 '목소리와 피아노의 이중주'를 실현한다.
격동의 삶
결혼 이수 슈만은 서정적인 걸작들을 작곡하였고, 인기절정의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는 연주 때마다 남편의 작품을 초연함으로써 그의 예술성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슬하에 여덟 명의 자식을 둑도, 한동안 이 두 예술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하지만 슈만의 인생의 시련은 결혼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이 40이 되면서 우울증과 신경 쇠악이 그를 엄습한 것이다. 그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1854년 우울증과 환청에 견디다 못한 슈만은 라인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어부들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그는 이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2년 후 46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격동의 삶을 외롭게 마감하였고, 클라라 슈만은 많은 자식들과 함께 남겨졌다.
클라라 슈만
그녀의 곁에는 슈만이 발굴해낸 젊은 작곡가 브람스가 있었다. 브람스가 20세였을 때 슈만은 자신의 잡지에 기고한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통해 그를 "젊은 독수리" 에 비유하면서 "우리에게 이 시대의 가장 고귀한 이상을 표현해 줄 사람" 이라고 소개 했었는대, 바로 그 글 덕분에 브람스는 작곡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슈만 부부는 이 수줍음 많은 젊은 작곡가를 알게 된 후 자기들의 집으로 맞아들였고 그때부터 이들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5개월 만에 슈만에게 심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났고, 이번에는 브람스가 이 부부가 시련을 이겨내도록 그들 옆에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슈만의 병세가 날이 악화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된 이후에도, 브람스는 홀로 남게 된 클라라와 그의 자녀들을 극진히 돌보았다. 그러면서 클라라에 대한 젊은 브람스의 감정은, 이상적인 여성에 대한 존경과 우정에서 사랑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다. "당신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매일 더욱 큰 놀라움으로 그것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브람스
하지만 브람스가 진심으로 클라라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은 그를 작곡가로 데뷔시켜 준 후원자이자 스승이고 친구였던 슈만을 너무나 존경하고 신의를 지키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브람스는 슈만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해 죄의 식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사랑과 신의 사이에서 갈등했고 그 갈들은 슈만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은 사랑하는 법뿐 아니라 불타는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항간에는 두 사람 사이에 대해 심상치 않은 소문이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드러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슈만 사후에 슈만이 사용하던 피아노를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기증했을 정도로 이들이 친밀했다는 것 정도이다. 더구나 브람스는 끝내 클라라와 결혼하지 않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클라라를 향한 그의 마음만은 평생을 두고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브람스는 끝내 클라라와 결혼하지 않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클라라를 향한 그의 마음만은 평생을 두고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년에도 그는 클라라에게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 자신을 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클라라에 대한 사랑의 열병은 그로 하여금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하도록 했으며, 그녀가 죽었을 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역시 10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브람스 가곡
모두 200여 편의 가곡을 작곡한 브람스는 가곡에 있어 슈베르트와 슈만의 직계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즐겨 쓴 주제는 사랑, 자연, 그리고 죽음에 관한 것이다. 늘 자신이 진정한 독일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브람스는 독일 민요와 어린이 노래들을 편곡하면서 가곡에도 이러한 요소를 사용하였는데, 그의 가곡은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유절형식이 많으며 대칭적이고 규칙적인 선율을 선호하여 소박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브람스 특유의 침울하고 어두운 주제가 어우러져서 브람스만의 독특한 가곡세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름다운 마켈로네>, <네 개의 엄숙한 노래>, <5월의 밤> 등이 있다.
브람스 이후 작곡가
브람스가 보수적인 경향의 가곡을 썼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리스트는 자유로운 양식으로 가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그의 가곡들은 형식적으로 자유롭고, 낭속적이며, 반음계 화성이 많고, 피아노다운 표현들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리스트는 <로렐라이>와 <꽃과 같은 그대> 등 80곡 가량의 가곡에서 그의 현란한 교향시나 피아노 작품과는 분명히 다른 서정성을 강조한다. 오페라 작곡가인 바그너도 가곡을 작곡하였는데, 자신의 연인이었던 베젠동크의 시에 붙인 연가곡 <베젠동크의 노래>가 유명하다. 한편 바그너의 가곡은 후고 볼프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볼프의 가곡은 바그너의 영향으로 반음계적인 진행과 자유로운 낭송, 끊임없는 조바꿈을 사용하여 한층 후기 낭만주의의 색체를 띠고 있으며, 심리를 묘사하는 피아노가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볼프는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오직 가곡을 통해서만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였다.
볼프는 불행히도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하였는데, <뫼리케 가곡집>, <괴테 가곡집>, <이탈리아 가곡집>을 비롯한 7개의 가곡집을 포함하여 300곡 가까이 되는 리트를 남겼다. 가곡사의 독특한 존재로 혁신적인 작곡가였던 볼프는 피아노로 반주되는 진정한 의미의 '독일 리트'의 최후의 대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관현악 반주
볼프와 같은 해에 태어난 말러는 피아노와 성악의 결합인 독일 리트를 관현악 반주에 의한 예술가곡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19세기 말 교향곡의 대가였던 그는 민요와 낭만주의적인 시에서 영감의 원천을 끌어내고 자신의 자전적인 체험을 관현악과 목소리의 결합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표작으로는 <뢰케르트 가곡집>,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이 있다. 말러가 시도한 관현악 반주의 가곡을 계기로 작곡가의 개성적인 양식을 더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던 독일 가곡의 전통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와서 막을 내렸다. 슈트라우스의 가곡들은 비록 가수들에게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고는 있지만 청순한 서정이 강조되며 연주시간도 2분에서 5분을 넘지 않는 간결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19세기 오페라
이탈리아
19세기 이태리 음악사는 <오페라의 역사>라 할 정도로 오페라는 이 지역의 중심 장르였다. 19세기 이태리 오페라에는 18세기 전통과 이태리 오페라의 관습이 계속 영향을 미쳤다.
롯시니: 롯시니는 18세기 오페라 전통을 기본으로, 단순한 화성과 선율, 명확한 리듬으로 19세기에 오페라 부파를 크게 성공시킨 작곡가였다.
벨리니와 도니젯티: 롯시니와 베르디를 이어주는 이 두 작곡가는, 이태리 전통에 서정적인 낭만성을 부여한 오페라로 당대 큰 인기를 누렸다.
베르디: 19시게 이태리 오페라는 베르디를 통해 그 절정에 도달했다. 총26개의 오페라를 썼던 그는 음악 중심의 이태리 오페라 전통에 바탕을 투고, 뛰어난 심리적 묘사, 표현력 있는 선율과 리듬으로 이 장르의 전형이 되는 걸작을 내놓았다. 표현의 직접성과 명확성, 그리고 단순성의 경향은 다양한 그의 오페라에서 변하지 않는 요인이다.
베리스모:19세기 이태리 문학에 나타난 자연주의의 영향하에 현실적인 소재와 음악요소를 도입한 오페라가 나타난다. 베리스모(Verismo)라 불리는 이 경향의 대표작으로는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있다.
프랑스
프랑스 파리는 19세기에 유럽 정치. 문화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유럽의 오페라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활발하게 창작된 프랑스 오페라는 다른 나라 오페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랑 오페라: 중산층의 취향에 맞게 음악과 발레, 합창, 군중장면이 함께 어우러진 대규모의 화려한 오페라. 심각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이 장르는 마이어베어(G. Meyerbeer)와 극작가 스크리브(E. Scribe)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오페라 코미크: 레치타티보 대신 대화를 사용하며, 소규모의 단순한 오페라이다.
서정극: 1850년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장르로 규모에 있어 그랑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의 중간에 위치한다. 서정적, 감정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오페라 부프(오페레타): 낭만적이고 해학적인 요소를 강조한 장르로, 춤곡이나 유행가가 삽입되기도 하였다.
비제의 카르멘: 19세기 프랑스 오페라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오페라 장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을 융합시키려는 19세기의 경향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 보다 독일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독일 오페라는 베버에 의해 정립된 낭만오페라를 거쳐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프만의 「운디네」는 초기 낭만주의 오페라의 기틀을 보여주며, 베버는 「마탄의 사수」에서 이 전통을 확립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낭만주의 경향과 독일 민속적 특색을 뛰어난 음악적 표현으로 묘사한 「마탄의 사수」는 이 장르의 전형으로 꼽힌다.
바그너는 첫 창작기에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을 발표: 「리엔치」, 「방황하는 화란인」「탄호이저」, 「로렌그린」이 있다.
12.세기의 전환기
음악역사학자들은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보불전쟁 발발 이후부터 1910년 사이를 '후기 낭만주의'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낭만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어법이 현대 음악의 언어로 전환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움직임은 독일이 주도하였다. 특히 19세기의 마지막 10년동안 독일의 관현악 음악이 점차 유럽의 연주회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프로이센이 파리를 함락시키고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에 승리함과 동시에 민족의 염원이었던 통일을 완성하였고, 한층 강력한 독일 제국으로서의 힘찬 출발을 하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은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생활습관을 가진 독일민족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독일민족주의가 일구어 낸 성과였다. 19세기 말 독일주도의 후기낭만주의 음악은 바그너, 브람스, 말러의 웅대한 작품들을 통해 그 정점에 다다랐다. 그러나 1900년경, 독일음악제국은 두개의 힘의 도전으로 와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독일낭만주의의 주류에 속하지 않은 작곡가들이 바그너의 음악으로 집약되는 독일식의 음악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던 것이다. 당연히 반독일 감정이 가장 강하게 일어났던 곳은 1870년과 1914년 두 차례나 독일과 전쟁을 치룬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처음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듯 했지만, 189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 음악은 독일 음악과 양립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 작곡가들에게 낭만적 감상주의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고, 독일의 과장된 구조는 지나치게 무겁거나 허황되고 겉치레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의미 있는 표현이란, 거대한 음량과 엄청난 길이가 아닌, 좀 더 섬세하고 미묘한 방식을 통해 전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독일의 주도적 위치는 유럽 여러나라들의 민족주의 물결이 위협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음악은 처음에는 러시아와 보헤미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발트 해 연안의 나라들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영국, 미국, 등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요약하자면, 후기 낭만주의 시대 음악은 독일 식 낭만주의와 프랑스 악파 그리고 민족주의의 영향들이 서로 얽혀 들어가면서 18세기부터 고전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까지 200년을 지배해 온 조성음악의 시대의 종식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시기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음악
19세기 유럽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비엔나 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국가의 틀을 짜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럽의 식민지들은 나폴레옹 전쟁시의 혼란한 틈을 타서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고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인들 사이에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었다.19세기 유럽음악계에서도 민족주의는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였다.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자주 출신지역의 민속음악의 요소들을 통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적인 어법을 개발하였다.
고국을 떠나 일종의 실향민 신세였던 쇼팽이 고국 폴란드 음악의 민속적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쓴것이나, 리스트나 브람스가 헝가리 집시음악을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만큼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독일 민요가 슈베르트나 브람스, 슈트라우스, 말러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의 중요한 원천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1860년 이후 유럽에는 이와 같은 경향과 뚜렷이 구별되는 보다 강력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음악적 전통을 갖지 못한 국가에서 일어났다.
이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예속되어 있었던 독일 음악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민족주의는 자의식이 강하고 공격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음악은 자국의 언어에 기초하고 자국의 신화와 전설, 민요 등을 소재로 하여 의식적으로 민족적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많은 국민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민속적 음향에 기초한 민족음악들은 반음계적 화성법으로 허물어져 가는 조성의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한편 이 시대 산업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한층 개량된 관현악기의 표현력은 민족적 소재를 더욱 색채감 있게 그려내기에 유효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음악에 나타난 민족주의는 나라별로 그 양상이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러시아는 열렬한 애국주의를 표방하였으나, 노르웨이의 그리고,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미국의 아이브스 같은 민족주의 음악가들은 각각이 고립된 존재로 남았을 뿐 하나의 악파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며, 엘가나 멕도웰처럼 자기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만 민족주의적이었던 작곡가들도 있었다.그러나 어느 나라든 최초의 다소 공격적이었던 세대가 지난 뒤, 민족주의는 다양한 방법으로 유럽음악의 주류와 절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가 유럽음악의 흐름을 바꿔놓고, 새로운 어법과 새로운 기법으로 이 흐름을 풍성하게 하였으며, 20세기로 흘러들어갈 수많은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음악의 인상주의
이처럼 인상주의가 세기말 프랑스 화단에 등장하여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을 일으키고 있을 때, 드뷔시는 이 인상파의 화풍을 음악에 성공적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미술에서 더 익숙한 용어였던 인상주의를 음악용어로 승화시켰다. 그런데 정작 드뷔시는 자신이 인상주의 회화를 모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음악을 '인상주의'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서 연출되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과 안개처럼 모호한 분위기와 감각적 환상은 분명 낭만주의 화가들의 그것과 닿아 있다. 자유분방하고 자발적인 그의 음악은 마치 즉흥 연주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음악을 전통적으로 고정된 형식에 끼워 맞추어서는 안되며, 음악은 색채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전통적인 화성법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젊은 시절 한 교수가 그에게 어떠한 화성규칙을 따르느냐고 묻자 "나는 단지 내가 좋은 대로 할 뿐"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심미적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음색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끝에 새로운 음향의 색채를 위해 혁신적인 화성과 리듬을 구사하였다. 특히 그의 화성처리는 인상주의 음악의 가장 진보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음악
(1)20세기 서양음악은 그 이전의 음악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을 주요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물론 서양음악 역사상 소위 "신 음악"이라 불리는 음악의 <혁명>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나타났고, 그 때마다 음악은 당시 기존의 양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신 음악에서 나타난 음악의 개혁은, 그 동안 지속되었던 음악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고, 극단적으로는 예술음악의 존재 자체까지도 위협하는 확장된 음악개념을 가져왔다. 즉 전통적 양식(조성, 형식, 기법 등)과 음악관은 20세기에 들어와 그 어느 때보다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2)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많은 창조적 음악가들에 의해 개성 있게 시도되고, 그 결과 20세기 음악은 "다양성"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바로크"또는 "비엔나 고전"등의 과거의 음악처럼 하나의 총괄 개념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의 조류가 각각 독창적인 모습으로 20세기의 음악사를 엮어 나가기 때문이다: 20세기 상반기에 나타난 <인상주의>, <표현주의>, <무조음악>, <12음악>, <신고전주의>, <신즉물주의>와 50년대 이후의 <음렬음악>, <전자음악>, <우연음악>, <음향 음악>, <컴퓨터 음악> 등. 즉 20세기 음악의 공통점이라면 일반적인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3)"전통의 단절"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음악은 청중의 입장에서, 즉 음악 수용적인 측면에서 그 이전의 음악과는 또 다른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음악 청중은 현대음악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에 따라 청중과 음악과의 거리감이 심화되었다.
역사적 흐름
19세기의 90년대 초부터는 낭만주의와 구분되는 특징이 나타나는 독자적 시기이다. 음악적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곡가 드뷔시, 라벨 그리고 독어권의 R.슈트라우스, 말러, 레거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는, 고전.낭만음악적 전통의 변화가 현저하게 가속화되었다.(예를 들어 조성의 애매함, 자유로운 형식). 그러나 이 기간의 음악은 아직도 전통음악의 경계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자유로운 조성은 전통적 종지로 귀결되었고, 낭만주의적 전통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음악사적으로 이 시기의 음악이 갖는 의미는 전통적 음악과 20세기 음악 사이의 <과도기적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음악에 있어서 20세기는 1900년이 아니라 1910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를 전후로 고전.낭만적 음악의 전통, 특히 기능적 조성의 전통을 파괴하는 새로운 사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20세기 음악의 혁명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시작하여 수십 년에 걸쳐서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표적 작곡가는 비엔나의 쇤베르크 악파와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등이다. 이들은 화성, 리듬, 음색과 형식 등 순수 음악적인 영역에서, 즉 작곡기법적 영역에서 음악적 재료를 개혁함으로써 낭만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하지만 예술음악에 대한 믿음과 보존에 있어서는 여전히 전통을 고수했다.
예를 들어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은 급진적으로 낭만주의와 결별하고, 무엇보다도 <조성의 붕괴>를 통하여 커다란 혁명을 가져왔으나, 낭만주의적 미학관에 머물러 있다. 쇤베르크는 순수 예술음악전통으로서의 연주회 음악을 고수하였고,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 의존하여 절대음악의 형이상학을 확고히 지켰다: "작곡가는 세계의 가장 내면적 존재를 계시하고, 이성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진리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1910년대에는 <미래주의> 또는 <다다이즘>이라 불리는 아방가르드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전통적 예술개념과 완전히 결별하고, 대부분 부정성의 기준에 의하여 20세기의 실험적 문화를 시작했다. 예컨대 프라텔라는 그의 <미래주의 선언>에서 공장과 산업의 소음들을 음악에 넣을 것을 열렬히 요구하였고, 룻솔로는 <소음음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은 음악전 형상화에 실패하여 별다른 것을 남기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1920년대에 세계는 정치적 변동에 휩쓸리게 되고,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여 20세기 신음악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다. 먼저 이 시기에는 신음악을 위한 전문적 기관들이 새로이 건립되었고, 음악 내적으로 <세대 교체기>가 있었다. 이미 1910년부터 파격적인 변화의 철 장을 열고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쇤베르크,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등의 신음악 첫 세대의 등장 이후, 20년대에는 젊은 작곡가들이 음악계의 중심적 역할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신음악 내에서도 뚜렷한 방향전환이 전개된다.
신음악의 제1세대는 음악의 개혁을 작곡기법에 집중하였던 반면에, 불란서 6인조, 크세넥, 바일, 힌데미트, 아이슬러로 대표되는 2세대는 파격적인 예술관을 통하여 신 음악을 발전 시킨다. 이들은 선배들이 고수했던 전통적 예술관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다른 한편으로 1920년대에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의한 음악>,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와 힌데미트 등에 의한 <신고전주의> 등의 조류가 나타난다.
이 시기는 경제 공항의 파급으로 인하여 사회.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선다. 이러한 영향으로 음악에서도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많이 사라지고,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경향이 지배적이 된다. 유럽에는 특히 <민족적 사회주의>(나치즘)의 대두 이후 많은 20세기 작곡가들이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고(쇤베르크, 바르톡, 크세넥, 힌데미트 등), 이것이 미국 음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쇤베르크 악파의 구조적인 음악관이나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실험 활동 대신에 전통적 음악장르에 알맞고, 양식적으로 명확한, 무엇보다도 조성적 음악이 다시 중심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의 반대 역할을 버리고, 신 바로크, 신 고전, 신 낭만적인 요소들을 결합시켜 나타난 <중용적인 모더니즘>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합창문화가 꽃피게 되었고, 교회음악과 민족주의적이고 대규모적인 음악이 복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전후 세대는 사회전반의 변화에 상응하여 다시 한 번 적극적으로 음악의 전통을 부인하고, 새로운 출발을 공표한다. 그 결과 이들은 <점묘음악>을 거쳐, 고도의 수학적 조직에 의한 <음렬음악>을 발전시켰고, 여기서 또 다시 <전자음악>의 영역을 개발한다. 반면 이러한 음렬주의적 사고의 도래와 동시에 미국의 케이지는 이와는 정반대 되는 <우연음악>을 작곡한다. 철저한 실험정신에 의하여 다양항 모습으로 나타난 케이지의 <아방가르드>는 인간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부터는 서서히 음렬음악의 진보주의가 붕괴되고, <음렬 이후의 음악>이라 불리는 <음향작곡>이 리게티와 펜데레츠키에 의해 시작된다. 70년대에는 50년대의 실험문화를 종식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는데, 여기에 속하는 음악의 종류는 <최소음악>(라 몬테 영, 릴리.), <원형음악>(슈톡하우젠), <새로운 단순성>(림))등이 있다. 이들은 발전성, 역사성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인 사고와 미학관과 결별했고, 다른 한편으로 저급음악과 고급음악의 벽을 허무는 다원화 현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음악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른다.
신음악의 개념
새로운 음악양식을 지칭하는 개념은 서양음악사에서 수 차례 사용되었다. 20세기에서도 급격한 음악양식적 변화를 지칭하는 개념이 탄생했는데, 이는 독일어 권에서 활발하게 사용된 "신 음악"이다.
20세기의 새로운 음악양식은 수용적인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청중은 신 음악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였고, 이에 따라 신 음악이 연주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연주될 기관을 찾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양한 신 음악 연주기관이 만들어 졌다.
음악관의 변화
20세기 음악은 미학적 측면에서 보아 특히 고전-낭만적 미학에 대한 반발이 특징이다. 전통적인 미 개념에 대한 예술 전반적인 변화와 함께, 음악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음악미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더 나아가 작곡가들은 예술의 최종적 목표를 아름다움에서만 찾지 않고, 다양한 다른 개념으로 대치하였다.
20세기 음악에서 1.음악의 재료인 <음>은 악기나 목소리의 범위를 벗어나, 이질적으로 보이는 자연과학의 세계에서 도입되었고(전자음악, 컴퓨터음악), 다른 한편으로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일상적 소리, 소음, 침묵 등 <자연스러운 소리>를 직접적으로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소음음악, 구체음악). 2.시간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재현되는 음악작품의 개념이 변화된다. 3.음악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었던 <감정>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힘을 잃어갔다. 그러므로 이들의 음악에서는 직접적인 감정의 호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더 나아가 불협화음이나 기계소리 또는 소음 등을 통하여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향까지도 일반화되었다.
무조음악
(1)서양음악의 기본적 요소로서 작용하였던 조성체계는 19세기 말부터 점차 힘을 잃어갔고, 20세기 초에는 조성의 기능이 상실된 무조음악이 나타났다.
(2)무조음악에서는 어떤 조성적 중심도 없고, 12음이 자유롭게 사용된다.(비교: 조성체계는 평균율적으로 조율된 12개의 음 가운데 7개의 음을 기본적으로 사용하며, 그 안에는 중심음이 있다.)
(3)조성음악에서는 중심 음에 따라 화음이 기능적으로 분류된다(기능 화성학). 무조 음악에서는 이러한 기능 화성학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에 따라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구분이 없어진다.
(4)무조 음악은 쇤베르크에 의해 시작되었고(세 개의 피아노 작품, op.11, 1909) 그의 제자 베르크와 베베른 외에도 많은 20세기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12음기법
(1)12음 기법이란 열 두 개의 음이 동등하게 다른 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용되는 작곡방식이다. 이 기법은 쇤베르크의 피아노 작품에 처음 적용되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제2기 무조음악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다.
(2)구성원리: 12음 기법은 평균율적으로 조율된 음계의 한 옥타브 안의 12개음을 조직적으로 배열하여 곡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3)12음 기법의 적용: 한 작품을 위해 기본음렬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48개의 음렬이 파생된 후에도, 이 음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 음렬의 겹침: 여러 음렬이 동시에 진행. -음렬의 나눔: 하나의 음렬을 주선율과 부선율로 나누어 사용
(4)12음 기법에 의한 음악은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인 베르크, 베베른에 의해 작곡되었다. 베르크는 12음기법을 서정적으로 활용한 반면, 베베른은 12음기법의 논리성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5)12음기법의 원리는 50년대 이후 <음렬음악>으로 확대 발전 된다.
신 고전주의
(1)20세기 주요 음악경향인 <신고전주의>는 조성체계를 포함한 전통적 음악양식과 음악관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면서, (낭만시대 이전의)전통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수용한 경향이다.
(2)20세기 신고전주의 선구적 형태는 옛 음악에 관심을 보였던 프랑스의 라벨과 사티, 레거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음악>, 부조니에 의한 <젊은 고전주의>경향이 있다.
(3)신고전주의는 1920년 경에 나타났다. 이 경향은 낭만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낭만 이전의 전통에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카셀라, 불란서 6인조.
(4)신고전주의 음악들의 전반적 특징으로는 낭만시대 이전의 음악, 특히 17-18 세기의 음악에 새로운 접목을 들 수 있다.조성, 대위법, 푸가 형식, 고전미학 등.
(5)넓은 의미로는 20년대 이후 쇤베르크의 음악(12음 기법에 의한 작품)도 옛 음악의 장르나 형식에 의존한다는 면에서 신고전주의에 속한다.
현대음악양식
다양성과 실험정신 - 20세기 이전 음악사의 시대들을 보면 각 시대별로 음악에 대한 규범이 존재했었다. 다시 말해 그 시대 음악이 어떻게 들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20세기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양식들이 등장했고 또 사라져 갔다. 무조음악, 음렬음악,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신고전주의, 미니멀리즘 등 서로 상반된 규범을 따르는 다양한 음악들이 20세기에 모두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작곡가들은 이러한 다양한 양식들 중 하나 혹은 여러 개를 자신의 작품세계로 받아들였다. 사실 이장에서 논의될 양식 중 어느 것도 20세기 음악의 주류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21세기에 온 우리가 20세기를 돌아보면 지난 백 년은 분열되고 소외된, 다양성을 끝없이 실험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급진적인 실험성이 우리가 '현대적' 또는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음악양식의 근본적인 특징이 되어버렸다. 최초로 음악에서 급진적인 실험정신이 나타난 것은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이다. 당시의 새로운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에서 나타난 진보적 면모를 더욱 발전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이전까지 걸어오던 방향을 완전히 돌린 것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즉 기존의 '음악은 아름답고 유쾌한 것', '음악은 듣는 이를 즐겁게 해주는거나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었다. 대신에, 음악은 음향을 왜곡함으로써 듣는 이에게 충격을 주는 그 폭력적 성격을 드러냈다.
이러한 초창기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한 태도 변화는 청중들의 분노를 샀다. 1913년 아놀드 쇤베르크에게 비엔나 청중들은 야유를 보였으며, 같은 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듣고 그 불협화음과 원시적인 리듬에 대해 화가 난 청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의 의도는 청중이 문화적 만족의 상태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청중들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그 시기 화가들이 급진적인 시각적 왜곡을 통해 중산층의 감성을 배격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곤 한다. 사실상, 20세기 초기의 음악과 미술은 분명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마티스, 뒤피, 블라맹크, 드랭, 등의 야수파 화가들이 원색의 강렬함과 단순한 터치, 그리고 대담한 변형을 통해 말하려 했던 메시지를 음악에서는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발레음악,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에서 격렬한 리듬과 관능적이기까지 한 원시적 선율로 표현하였다. 또한 파블로 피카소같은 입체파 화가들이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기하학적 평면으로 대상을 파악함으로써 그 실제 형상을 깨뜨리고 위치를 뒤바꾸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아놀드 쇤베르크 같은 '신음악'작곡가들은 전통적인 조성이 만들어내던 선율을 해체하고 선율을 모나게 뒤틀었으며 리듬을 불연속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선율은 너무나 파편적이라,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곧 사라져 버린다. 피카소의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처녀들의 형체가 찌그러지고 서로 얽혀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1910년대와 20년대에 피카소와 스크라빈스키 같은 예술가들은 친구 사이였고 파리에서 종종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한편 바로 그 당시 독일에서는 표현주의라고 하는 일군의 화가들이 주류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성을 격렬하게 표현하고자 했고 대상의 실제 형태를 왜곡시켜 때로는 작품 속에서 그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는 묘사된 인물이 처녀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칸딘스키의 <콘서트>에서는 청중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
이 밖에도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팝 아트 등 다양한 전위 예술들이 이 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음악과 미술에서 나타난 진보적인 경향은 건축과 문학, 무용 등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1919년 그로피우스를 주축으로 하여 설립된 건축 조형학교인 바우하우스의 창립 이념은 건축은 물론 조형, 장식 등 많은 예술 분야의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것은 '천재의 감각'과 스케치의 신화에 밀려 폄하되었던 예술가들의 기술과 장인성을 회복하고, 실용성을 기초로 한 예술과 테크놀러지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무엇보다 '총체예술'로서의 모든 예술의 종합을 추구했다.
한편 문학에서는 제임스 조이스나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엘리어트의 시가 현대 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또한 버나드 쇼나 오닐, 사르트르 등의 희곡 작가들은 연극 공연장의 무대를 현실세계의 문제와 무의미함을 성토하는 자신들의 연단으로 삼았다.
또한 무용에서는 안무가이자 탁월한 흥행사이기도 했던 디아길레프에 의해 전통적 발레가 재해석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 예술의 여러 분야들이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진보의 길을 택했다고 해서 이들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음악을 포함한 모든 현대예술은 급진적인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하게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진했다.
세계대전 사이의 현대음악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사이, 작곡가들은 고전적 전통의 음악이 맞닥뜨린 문제를 각기 개성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음악은 그 양식이나 개념에 있어 계속 다양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나라와 어느 지방에서 작곡된 음악들이든지 이 시기 음악은 당면한 정치적 현안과 이데올로기와 점점 더 깊이 연결되고 있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일찌감치 논했듯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음악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서구사회의 오래된 믿음이었다. 샤를마뉴가 그의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성가를 성문화하고, 루이 14세가 춤과 오페라를 통한 규제를 옹호한 것도 모두 그 같은 신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세계대전 사이에 우리는 음악역사상 또 하나의 새롭고 견고한, 음악과 정치 사이의 결탁을 보게 된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에서는 음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매우 심했다. 그 외의 대부분 국가들에서도 정부가 음악활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압력이 가중되고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까지 닥쳤던 이 시기, 선배 현대음악 작곡가들로 인해 음악청중이 현대음악에 등을 돌린 것을 보고, 어떤 작곡가들은 다시 대규모 청중과 소통할 방법을 찾으려 했고, 또 다른 작곡가들은 대중적 인기는 개의치 않고 더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추구하였다.
미국
경제대국 :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미국은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자금 및 물자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 경제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미국은 일찍이 없었던 번영의 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계화에 따른 생산성은 증가하는 반면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은 억제되면서 소비가 생산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이러한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해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대공황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다행히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위시한 다양한 노력을 통해 1930년대 중반 대공황의 깊은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부와 평화의 땅으로 더욱 우뚝 솟게 되었다. 미국이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비추기는 유럽의 음악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라흐마니노프,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미요, 바일, 힌데미트가 모두 이 시기 정치적, 직업적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한 작곡가들이다.
새로운 유행 : 유럽의 중요한 작곡가들의 망명은 미국의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에게 새로운 유럽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편 이 시기 미국 음악가들에게 일어난 흥미로운 변화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주로 독일에서 공부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는 같은 연합국이었던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는 것이다.
특히 1920년대부터 미국인들에게 음악가가 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코스는 프랑스로 가서 포레와 스트라빈스키를 길러 낸 나디아 불랑제에게 배우는 것이었다. 코플랜드, 버질 톰슨, 로이 해리스, 월터 피스톤, 로스 리 피니, 엘리엇 가터가 실제로 그녀 밑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미국인 작고가들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여전히 유럽 음악의 테두리 안에 있었지만, 유럽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가기도 했다. 새로운 유행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나 두가지 큰 줄기로 모아질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 재료의 개발에 초점을 맞춘 실험주의와 극단적인 현대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대공황과 뉴딜 정책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포퓰리즘과 결합한 미국식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레즈 : 극단적이고 실험적인 현대음악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미국 작곡가로 바레즈, 카웰, 그리고 크로포드 시거를 들 수 있다. 파리 태생인 바레즈는 스콜라 칸토룸과 파리 음악원에서 루셀과 댕디에게 배웠으며, 파리와 베를린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15년부터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바레즈는 타악기를 특별히 선호한 작곡가로 유명한데, 그는 현관악기가 주관적인 감상을 일으키는 데 반해 타악기 소리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다. 바레즈의 음악은 소리 그 자체, 특히 독특한 소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언제나 새로운 음향을 추구했던 바레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자매체를 통해 생성된 전자음향과 녹음을 통한 소음까지 그 음향의 폭을 넓혀 나갔다.
바레즈만큼 진보적인 작곡가였던 카웰은 극단적은 불협화음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지 않고, 손바닥 전체나 주먹 또는 팔로 여러 개의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 연주하는, 클러스터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급진적 실험주의자인 존 케이지의 스승이기도 하다. 유명한 음악 학자 찰스 시거의 분인인 크로프드 시거는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은 최초의 미국여성이다. 그녀는 초기에는 음렬 음악에 대한 실험적 작품들을 주로 썼었지만, 1930년대 이후부터는 미국 민요를 보존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뉴딜 정책의 영향으로 나라의 음악발전에 기여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인데, 그녀가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거의 아무도 듣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현대음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민요를 찾아내고 채보, 편곡하여 보존하는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코플랜드 : 20세기 초 미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유태인에, 동성애자인데다가 좌파정치성향까지 가진 코플랜드는 미국사회의 분명한 아웃사이더이지만, 뛰어난 작품 덕분에 그 세대 가장 중요한 미국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코플랜드는 1920년대 날카로운 불협화음 위주의 작품으로 시작하였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미국적 특징을 보다 세련되게 현대적으로 표현해낸 유려한 양식으로 옮겨갔다. 그는 불협화를 주로 이용한 현대적 기법을 자제하고, 간단한 텍스처에 온음계적 선율과 화성을 이용한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양식 변화의 원인은 라디오와 녹음기 시대가 열림으로써 대규모 청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에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인해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이 더욱 굳어졌기 때문에 그는 대규모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음악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플랜드의 작품 중에서는 발레 <빌리 더 킷>, <로데오>, <애팔래치아의 봄>, 그리고 <피아노 변주곡> 등이 가장 대표적인 화제작들이다.
대중음악 : 천만에 가까운 전사자와 전염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까지 합쳐 모두 2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를 잊기 위해 음악과 다른 오락을 도피처로 삼아 그것에 열광적으로 매달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중음악과 재즈는 사상 유래 없는 전성기를 누렸다.특히 라디오, 녹음기 그리고 음악이 삽입된 영화의 발명으로, 음악은 악보상태가 아니라 연주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음악이 엄청난 수의 청중들, 이른다 '대중'에게 동시에 그리고 매우 빠르게 전달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바로 대중음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뮤지컬 : 20세기 초 대중음악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재즈와 뮤지컬이 대단히 인기가 있었는데, 특별히 뉴욕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오락적이면서도 건전한 쇼 비즈니스가 발달하면서 그야말로 뮤지컬의 황금기가 열렸다. 그 중에서도 1920년대는 브로드웨이가 가장 분주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한 시즌에 새로운 뮤지컬이 50편이나 오른적도 있으며, 남의 작품을 적당히 베끼는 일이 용납되던 이전의 뮤지컬의 관행을 버리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생겨나게 된 것도 이때이다.
이 시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표하는 작품은 제롬 컨의 <쇼 보트>라고 할 수 있다. <쇼 보트>는 1880년부터 1920년 사이 미시시피의 쇼 보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당시 다른 뮤지컬에서 다루지 않던 인종차별과 결혼 파탄과 같은 미국의 현실 문제를 처음으로 다룸으로써 화제를 모았다. '올드 맨 리버'와 '속임수'등의 노래들로 관객들을 감동시키며 최대의 흥행기록을 세웠던 <쇼 보트>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로 제작되었고 브로드웨이에서 만도 무려 네 번이나 리바이벌 되었다. 또한 <쇼 보트>를 계기로 미국의 뮤지컬은 유럽식 오페라적 요소에서 벗어나 소재에 있어서나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 스타일에 있어서 보다 대중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식 뮤지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제롬 컨 이후 미국 뮤지컬의 계보는 어빙 벌린과 콜 포터, 조지 거쉰, 리처드 로저스로 이어진다. 뮤지컬계의 'Big 5'라고 불리는 이들은 풍토, 사회, 인종 문제 등 미국의 현실적인 문제를 소재로 하는 미국적인 뮤지컬의 전통을 확립하면서 60년대까지 계속된 뮤지컬의 황금기를 수놓았다.
재즈
뉴올리언스 재즈 : 1900년대 초, 뉴올리언스에서는 재즈가 래그타임과 블루스의 영향을 받아 골격을 갖춰가고 있었다. 당시 재즈는 소규모 편성의 밴드가 즉흥연주 형태로 연주하였는데, 요즘 보편적인 재즈악기인 피아노와 베이스, 색소폰이 등장하기 전이었으므로, 선율을 코넷, 클라리넷, 트롬본이, 리듬을 벤조와 튜바, 드럼이 맡아 연주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밴드로는 '킹' 올리버가 만든 크레올 재즈 밴드를 들 수 있다. 이 악단에는 내로라하는 뉴올리언스의 연주가들이 모여 그야말로 최고의 밴드임을 자랑했는데 그 중에는 훗날 재즈사에 족적을 남기 루이 암스트롱도 있었다. 그런데 1917년 뉴올리언스의 홍등가인 스토리빌이 미 해군 당국에 의해 강제로 폐쇄 당하게 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즈 음악가들이 일자리를 잃고 시카고와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이 연주하는 이 다소 생소한 음악을 처음에 시카고 사람들은 홍등가라는 뜻의 '재스'라고 불렀으며, 이 말에는 재즈라는 명칭이 처음 생겨나게 된 것이다. 즉 재즈의 초기 형태가 나타난 곳은 뉴올리언스였지만 재즈라는 용어는 1910년대 중반 시카고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재즈는 빠르게 시카고와 뉴욕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는데, 재즈가 공식적으로 레코딩을 통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1917년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뉴올리언스 출신의 백인재즈 음악가들이 1916년 시카고에서 결성한 밴드인데 1년 후에 이들은 뉴욕에 진출하여 백만 장이라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수의 레코드를 판매하는 대성공을 거두며 재즈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재즈 시대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가 명명한 것처럼 '재즈 시대'가 열렸다. 그의 표현처럼 1920년대 이후 약 20년간 재즈는 미국과 유럽대륙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당시 미국 전체에 금주령이 내려진 시대였지만 나이트 클럽이나 캬바레에는 여전히 밀주가 넘쳐흘렀고 재즈의 주무대였던 시카고의 밤업소는 갱단의 텃밭이었다. 이들 갱단은 재즈 음악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며 음악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했다. 한편 시카고처럼 수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모여 들었던 뉴욕에서는 할렘가를 중심으로 솔로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폴 화이트맨 악단처럼 재즈를 콘서트 스타일로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증가했다. 한편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은 금주령의 해제와 함께 스윙 바람에 휘말리기 시작하여 1940년대 초반까지 재즈의 주류는 스윙이었다.
스윙은 4/4박자의 규칙적이면서 달콤한 리듬의 댄스 음악으로, 주로 10명에서 20명까지의 사이드맨으로 구성된 빅 밴드가 연주하였다. 이시기 미국의 댄스홀이나 나이트클럽은 빅밴드가 연주하는 스윙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또한 카운트 베시, 플레처 핸더슨, 아티 쇼, 해리 제임스, 글랜 밀러 등 수많은 빅 밴드 리더들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렇지만 듀크 엘링턴만큼 후세에 영향을 미친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재즈 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자 편곡자였다. 엘링턴은 50년 이상의 활동기간 중 자신의 빅 밴드를 위해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며 150장이 넘는 앨범을 통해 1천 여곡을 레코딩하였다.
듀크 엘링턴과 더불어 재즈 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인 루이 암스트롱의 최고의 트럼펫 연주와 논리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즉흥연주의 전개 스타일은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뜨거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랩소디 인 블루 : 이 시기 몇몇 미국 작곡가들은 재즈와 블루스를 예술음악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거쉰이다. 그는 재즈와 유럽의 전통예술음악을 세련되게 접목시켜 미국적인 음악을 만들어냄으로써, 최초로 미국인들이 열광한 미국 작곡가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황금기 동안 그는 <스와니>, <아이 갓 리듬>, <더 맨 아이 러브>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통해 대중음악의 총아가 되었으며 피아노와 재즈 밴드를 위한 <랩소디 인 블루>로 연주회용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랩소디>의 여파는 대단했다. 라벨과 코플랜드 등 당대의 많은 고전음악 작곡가들이 거쉰의 뒤를 이어 재즈 스타일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였고 당시 뉴욕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 담로쉬는 "거쉰은 재즈를 귀부인으로 만들었다"고 격찬함으로써 대중음악의 어법으로 클래식 음악과 같이 예술성 높은 음악을 쓰려던 그의 노력을 인정했다. 거쉰은 담로쉬에게 화답하는 뜻에서 1925년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초연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타임지의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다. 또한 1928년 파리를 방문했던 거쉰은 화려한 관현악 편성의 교향시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작곡하였다.
거쉰
거쉰 : 그런데 이렇게 거쉰이 개성 있는 음악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정규 음악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피아노 개인 교습을 받았지만 그의 피아노 교사는 하농이나 체르니 등 딱딱한 연습교본을 무시하고 오페라 모음곡 등을 자유롭게 편곡한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뉴욕 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취직한 첫 직장이 음악 출판사였는데, 여기서 거쉰은 출판사 작곡가들이 작곡한 대중음악을 가수나 흥행사들에게 피아노로 들려주는 일을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데모 테이프 같은 것을 즉석에서 피아노로 들려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덕분에 거쉰은 자연히 피아노 실력과 작곡 실력을 기르게 되었고, 이후 브로드웨이의 작곡가가 되어 당시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음악 장르였던 '레뷔'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거쉰은 자신이 제대로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항상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찾아 배우려고 했다. 거쉰은 파리에 갔을 때 라벨에게 작곡을 배우러 찾아갔지만, "왜 거쉰 음악 1인자가 라벨음악 2인자가 되려고 하느냐?"며 라벨이 되물었다고 한다. 또 그 다음에 스트라빈스키에게도 자신을 지도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거쉰의 수입을 알게 된 스트라빈스키가 "내가 당신에게 레슨을 받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실제로 거쉰은 미국 전역에 불어 닥친 경제 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최대의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뉴욕 고급 저택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그림들을 수집하고 스스로 화폭을 잡음으로써 화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성공의 절정은 1931년 공연된 정치 풍자 뮤지컬 <그대를 위해 노래하리>이 뮤지컬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34년 작곡한 대규모 오페라 <포기와 베스>역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거쉰은 바로 이 생애 최고의 순간에 삶을 마감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는 1937년 38세가 되던 해 뇌종양에 걸렸으며, 이 미국 최고의 작곡가를 살리려 했던 전 미국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음악
1945년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은 정신적 물질적 폐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세계는 점차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냉전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전후 25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미국과 서유럽국가들의 경제부흥에 힘입어 동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놀라운 기술의 혁명이 일어나고 자유의 물결이 전후 세대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움직였고 점점 빠른 의사소통을 원했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로 음악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 새로운 유행 그리고 새로운 전통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독창적인 것만을 계속 추구한 결과, 20세기 후반은 너무나 다른 음악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전대 미문의 다원 주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전자 음악 : 새로운 음향과 새로운 음악재료는 20세기 음악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곡가들은 기존 서양악기의 음계나 주법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거나 비 서구악기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음향에 대한 필요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작곡가들이 기존의 음악과 차별되는 전적으로 혁신적인 음향을 갖게 된 것은, 전자매체를 음악에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전자음악은 이미 존재하는 음향을 녹음하고 편집하는 형태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선구자는 프랑스 작곡가인 쉐퍼인데, 그는 악보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악기소리, 소리, 소음 같은 구체적인 음향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작업들을 '구체음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어 계속된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신시사이저가 발명됨으로써 건반과 스위치만 가지고 전자음향의 생성부터 합성, 재생이 모두 가능하게 되었으며, 라이브 연주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컴퓨터가 놀랍게 발전하면서, 전자악기를 컴퓨터로 제어할 수 있는 미디가 개발되었고 이로써 작곡가들은 보다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디지털 방식으로 녹음, 재생, 합성이 가능해졌다.
인간 연주자와 컴퓨터 : 가장 대표적인 전자음악의 선구자로서는 슈톡하우젠을 들 수 있다. 슈톡하우젠은 <소년의 노래>, <콘타크테>, <국가>, <접촉> 등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자매체를 실험 함으로써 전자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상 사람이 연주하기에는 불가능한 수준으로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당시 현대음악을 그 리듬, 음높이, 강세 그리고 음색의 표현을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녹음할 수 있는 전자악기가 대신하여 연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중들은 무대에서 언제나 연주자를 보고 그들에게 반응을 보내기 때문에 연주자는 새 음악의 중요한 프로모터이다. 따라서 연주자 없이 순전히 기계만 가지고 연주하는 것은 오히려 청중들로부터 새 음악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무대에서 연주자와 기계가 함께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밀튼 배빗은 전자음향이 녹음된 테이프와 라이브 소프라노가 신시사이저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필로멜>을 1964년에 발표하여 인간과 기계의 하모니를 재현함으로써 화제를 모았다.
음향의 공간 : 한편 전자매체를 통해 전적으로 새로운 전자음향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서, 바레즈가 제시하였던 것과 같은, 음악을 무한한 음향이 서로 엉키고 움직이는 공간으로 파악하고 선율이나 화성이 아니라 소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더욱 촉진되었다. 이제 작곡가들은 선율과 화성 없이 오로지 진행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새롭고 흥미로운 텍스처만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음악을 전자악기가 아닌 어쿠스틱 악기로 처음 쓴 사람이 바로 크세나키스이다. 그의 문제작 <메타스타시스>에서 현악연주자들은 각각의 움직임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하나의 클러스터처럼 음악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는 음악적 공간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통적인 오선보가 아니라 직선과 곡선의 그래픽을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냈다.
크세나키스는 그리스인으로 반 나치 저항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그리스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여 주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그는 음악가이자 건축가이고 엔지니어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음악의 기본은 수학이라고 보고, 우연성까지 컴퓨터를 이용하여 수학적인 확률로 계산하여 엄격하게 조절하였다. 음악의 텍스처와 진행에 기초하여 작곡된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곡은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의 52개의 현악기를 위한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일 것이다. 악보는 박자나 음악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가 거의 없이 초 단위로 시간만을 제시하며, 52개의 악기는 각각 자기 성부를 가진 채 온갖 종류의 현악기법을 통해 서로 다른 자기만의 '색깔'을 발함으로써 새로운 음향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 작곡가인 리게티도 비슷한 시도를 하였다. 그는 마이크로 폴리포니라고 하여 여러 악기들의 음들이 만들어 내는 마치 두터운 구름과 같은 음향층을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로 삼았다. 그런데 리게티는 미니멀리즘, 민속음악, 전통음악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풍자적인 <어드벤처>나 100개의 메트로놈의 동원된 <교향시>등 유머감각이 넘치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가장 난해하면서도 가장 접근하기 쉬운 20세기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소음, 우연 그리고 침묵 : 프랑스 군대용어이지만 음악에서 아방가르드 즉 전위 예술가라고 하면,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시작을 알렸던 진보적인 작곡가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총렬음악과 전자음악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전후 세대의 작곡가들 역시 그들 못지않은 아방가르드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획기적인 실험정신의 작곡가 존 케이지는 전후 세대 가장 대표적인 아방가르드라 할 수 있다. 케이지는 카웰에게 작곡을 배우고 쇤베르크와 바레즈와도 수학했다. 초기에 그는 다양한 타악기와, 피아노 현 사이에 나사, 볼트, 고무, 나무 같은 것을 끼워 넣은 소위 '준비된 피아노'를 위한 실험적 작품들을 주로 썼다. 그러나 그는 1950년대와 1960년에는 음악의 개념을 뒤흔드는 보다 급진적인 작품들을 내놓는다. 그의 작품은 수 백 년 간 음악들이 그랬던 것처럼 감정표현, 이미지 전달, 재료의 재발, 일관된 구조, 논리적 연결 같은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1940년대부터 몰입하였던 동양철학 특히 선불교와 주역의 영향으로, 음악은 작곡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소리 그 자체로 들려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러한 그의 철학을 실현시키기 위해 택한 세 가지 전력은 우연, 불확정성 그리고 음악, 예술, 삶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역 음악>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전을 던져 어떻게 곡을 쓸지 결정하였다. 그러나 점점 작곡가의 의도를 배제, 아니면 적어도 최소화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예를 들어 작곡가는 불확실성을 많이 남겨둔 악보를 연주자에게 주고, 연주는 우연에 맡기는 식이었다. '우연성 음악'의 극단적인 예는 <4분 33초>일 것이다.
1952년 초연에서 피아니스트는 무대에 등장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만 노려볼 뿐, 세 악장으로 되어있다는 이 곡의 한 음도 연주하지 않은 채, 피아노 뚜껑만 세 번 열고 닫은 후 정확히 4분 33초만에 퇴장 했다. 이 <4분 33초>에서 음악은 그때 거기서 우연히 났던 소리들이었다는 것이다.
퍼포먼스 아트 : 케이지의 영향으로 슈톡하우젠, 펜데르츠키 등 많은 작곡가들이 불정확성의 개념을 작품창작에 받아들였다. 한편 루토스와 프스키처럼 작품에 대한 작곡가의 저작권을 고집하면서도 불확정성을 선택적으로 사용한 중간자적 입장을 취한 작곡가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현악4중주>를 보면, 음높이와 리듬은 정해져 있지만 각 파트의 배치는 정해져 있지 않아서 연주자들은 동시에 시작하지만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템포대로 일정 부분을 연주하는 식이다. 그 밖에 음악에 우연 또는 불확정의 아이디어가 도입된 이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우선 전통적인 오선보 에서부터, 선율곡선, 다이내믹 영역, 리듬 같은 것을 보다 융통성 있게 연주하도록 지시하는 순수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기보법의 범위 가 확장되었다. 또한 불확정성의 결과로 하나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결국 연주 때마다 같은 연주는 없기 때문에, 결국 작품은 작품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연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음악작품'에 대한 이런 생각은 음악사를 보면, 중세의 노래나 초기 바로크 아리아에 배어있는 익숙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작곡가들이 고음악의 열린 개념의 음악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굳어진 작품결과보다는 연주라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불확정성의 개념은 다른 분야로도 확대되어 음악뿐 아니라 문학, 조형예술, 연극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예술 형태의 '퍼포먼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개념을 낳게 되었다. 퍼포먼스 아트가 의도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의 경험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작품을 반복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퍼포먼스 아트는 전통적인 예술들로는 충족되지 않았던 원초적인 표현 욕구를 신체를 통해 자유롭게 표출하면서 전위예술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는데, 퍼포먼스 아트의 원조는 1962년에 조직된 플럭서스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매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무어맨과 함께 이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백남준은, 음악, 조각, 행위예술에 첨단 비디오 작업을 접목시킴으로써 비다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는 현대 예술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인용과 콜라주 : 전후 세대 많은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기존의 음악을 인용하거나 때로 다른 여러 곳에 인용한 음악들을 콜라주하는 기ㅓㅂ을 사용하였다. 음악사를 보면 다른 작품에서 빌려온 재료를 통해 바흐와 헨델과 같은 과거 작곡가들로부터, 쇤베르크, 아이브스, 스트라빈스키 같은 현대음악작곡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곡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후 세대 작곡가들이 새로운 음악에 과거음악을 끌어들인 것은 다른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였다.
인용에 기초하여 작곡된 음악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전달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아무리 새로운 음악이라고 할지라도 친숙한 음악이 인용되어 있으면 청중들은 쉽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음악들은, 낯선 음렬음악, 전자음악, 아방가르드와 전후 세대의 경향들보다 청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몇몇 작곡가들은 기존음악들에서 빌려온 재료들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양식 특히 조성을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인용음악이 신낭만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최근의 경향들의 하나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팝 뮤직 : 대중음악은 항상 사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양식의 새로운 대중음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서유럽의 경제적 붐 그리고 보다 신속해진 커뮤니케이션 수단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시 대중음악의 발전은 전후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몇몇 나라들은 나름대로의 전통과 문화 위에 미국 대중 음악양식을 받아 들여 그 지역 고유의 대중음악을 향유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경제성장 덕분에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누리게 된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중요한 소비 집단이 되었다. 이 젊은 세대들은 자신의 라디오와 녹음기를 통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들 들었기 때문에 레코드 회사들은 앞 다투어 젊은 세대를 겨냥한 음악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팝 뮤직이다.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 :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는 블루스와 가스펠에 뿌리를 둔 리듬 앤 블루스라는 새로운 대중음악이 유행하였다. 도시는 전쟁에서 돌아온 젊은이들로 북적 였고, 이들은 흑인가수들이 부르는 리듬 앤 블루스의 낭만적이면서 선정적인 가사와 강한 리듬 그리고 그 강렬한 연주에 빠져들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샹송이 에디트 피아프 같은 가수들의 활약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장르로 떠올랐으며, 이탈리아 칸초네도 유럽의 대표적인 장르가 되었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는 리듬 앤 블루스의 흑인 창법을 로큰롤에 접목시켜 로큰롤의 황제로 군림하며 로큰롤의 광풍을 주도하였다.
대중음악의 황금기 : 1960년대 초 영국 리버풀 출신의 록 그룹, 비틀즈의 등장과 그들의 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은 대중음악 역사의 또 다른 신기원을 이루었다. 직설적인 가사와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음악이 내뿜는, 이전의 로큰롤에서 볼 수 없었던 비틀즈의 강력한 에너지는 젊은이들 뿐 아니라 기성세대까지 끌어들여 비틀즈 열풍 속에 휘말리게 하였다. 더욱 정교해지고 직업화 되어가던 재즈나 록 과는 대조적으로, 포크 송은 그 음악이 아주 간단해서 한 두 명의 가수가 기타나 밴조 반주만으로 노래하며, 종종 청중들을 끌어 들여 함께 노래했다. 또한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에 불어 닥쳤던 탱고의 바람이 록큰롤의 기세에 잠시 누그러드는 듯 했지만, 더욱 세련되어진 그 관능적인 탱고의 매력은 80-90년대 또 다시 세계가 탱고 리듬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게 하고도 남았다.
뮤지컬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그들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뮤지컬은 리처드 로저스와 해머시타인 2세가 콤비가 되어 내놓은 <오클라호마>이다. <오클라호마>이후의 뮤지컬에서는, 이전처럼 극의 흐름과 상관없이 스타가 등장하여 뽐내기 식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스토리와 배역에 맞는 연기, 음악과 가사와의 유기적인 관계가 중요해졌으며, 제작 과정에서도 작사가.작곡가.연출가. 무대미술가. 안무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수평적인 협력관계를 이루기 시작 하였다.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최고의 흥행사인 카메론 매킨토시와 손잡고 만든 <캐츠>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 <오페라의 유령>으로 영국의 극장거리인 웨스트 앤드와 미국의 브로드웨이 모두 석권하였다.
대중음악 시장 : 1970년대에 이후 자본주의의 유통구조와 기술 혁명으로 인해 다양한 대중음악들이 전 세계로 더욱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덕분에 그만큼 청중들의 음악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더구나 녹음기술의 발달로 인해 원하면 얼마든지 과거의 음악을 즐길수 있게 되어 그 당시 유행하는 음악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무색해졌으며,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공통적으로 즐기는 음악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펑크라고 해서 거친 목소리와 반항적인 제스처를 통해 격렬하고 때로 난폭하기까지 한 반항의식을 토로하는 록이 나타났던 것도 70년대이다. 80년대 들어 <스릴러> 음반과 함께 떠오른 마이클 잭슨의 등장으로 뮤직비디오 시장과 스타 마케팅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매우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이 탄생했으며, 아직도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사
1970년대는 한국가요계가 다양해지는 시기이다. 기존의 트롯트나 신민요, 포크라고 불리던 통기타음악과 록 등이 폭 넓게 등장 했다. 현재 청년문화의 시작이라고 평가 받는 1970년대는 경제성장을 계기로 억눌렸던 젊은 세대의 욕구가 외부로 표출된 시기이다. '개발독재'는 일정한 경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가부장적 구조를 답습할 뿐이었으며, 성장의 틈새로 수입된 서양문화를 통해 세계적 유행의 흐름에 이끌리지만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겉모습일 뿐이다. 젊은 세대는 여전히 답답하기만 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함께 순수와 낭만은 추구했고 그런 가운데 새로운 문화를 만났다. 그것이 소위 '통기타문화'였고 그들이 모이던 무교동과 명동의 음악다방과 생 맥주 집은 통기타를 연주하는 가수들이 있던 곳이었다.
통기타 가수 하면 바로 김민기나 양희은, 한대수, 양병집, 서유석 등을 떠올릴 것이다. 지금이야 포크전사로 재평가되어 함께 거론되거나 아니면 몇 가지 역사적 특징만으로 서로를 변별하곤 하지만, 과거 이들은 소박하게 말해서 음악 살롱에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들이었다. 음악 살롱 혹은 음악 감상실이라고 불리던 곳 중 가장 유명한 '쎄시봉' 은 당시 통기타 가수라면 누구나가 거치고 싶어 하던 유명한 무대였다. 앞에 거론된 가수들은 물론 소위 통기타 1세대로 불리는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등도 모두 이곳 출신이다(물론 양희은은 두 번째 무대인 '오빈스캐빈'에서 주로 활동하지만 고등학교 YMCA 시절부터 이 1세대와 함께 활동했다.)
1. 젊음의 명소,쎄시봉-음악감상실
2. 아마추어와 프로-송창식 ,윤형주
3. 명동 통기타 살롱의 등장-오비스캐빈
4. 듀엣의 전성기-키보이스,투코리안스,어니언스,서수남 하청일등..
5. 금지곡-아침이슬
6. 곡을 나눠 부르던 통기타 가수들-번안곡
7. 통기타 음악의 퇴조-디스코,대학가요제열풍
통기타 음악의 새로운 지평
1. 통기타 음악 혁명의 아이콘 한대수 -자의식을 노래하는 새로운 음악인
2. 김민기 : 촉망 받는 작곡가에서 문화운동가로- 시인 김지하를 만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어 야학을 열고 문화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1. 쎄시봉 출신의 통기타 가수들
2. 통기타 문화의 전성기 : 통기타에서 밴드 사운드로
3.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
4. 통기타 출신 가수 1세대의 시련과 몰락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포크의 열기는 급격히 시들해지고 포크 가수는 대거 대중가요 가수가 된다. 펄시스터즈와 김추자를 통해 고고 음악이 히트하긴 했지만 1975년 활동정지를 당함으로써 신중현의 음악은 휴지기에 들어간다. 1976년에 조용필로 시작된 세련되고 흥겨운 트로트고고의 바람이 가요계를 휩쓴다. 고고가 주류가요의 대표적 리듬이 되어 트로트를 빛내고 잇을때, 산울림에 의해 고고 리듬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에 영향 받은 대학생들은 그룹 사운드를 만들며 고고 붐을 일으켰다. 록 그룹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대중문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 젊은 세대가 들을 만한 발라드가 전무했던 가요계에 '빨간 풍선'으로 발라드 가요가 외국의 발라드 곡을 대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산울림은 록, 댄스풍의 고고,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가요의 모든 부분을 이끌어갔다.
1960년대 미8군 무대가 있었다. 여기에는 아마추어 포크와는 달리 당시 한국의 실력 있는 음악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당시 주류 대중음악은 트로트와 민요 등이었던 것에 반해, 미8군 무대는 서구의 유행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밴드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경쾌한 리듬의 경음악 스타일의 연주를 하고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미군이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월남으로 파병되어 국내 주둔 미군의 숫자가 줄면서 미군 무대도 줄기 시작한다. 월남전쟁으로 그곳에 새로운 미군 무대가 생기자 미8군 무대 출신 음악인 다수가 월남으로 간다. 신중현 역시 미군이 잇는 월남으로 무대를 옮기려던 중 자신의 노래를 취입한 '펄시스터즈'가 크게 히트하면서 미군무대에서 벗어나 활동무대를 주류 대중음악으로 옮겨 작곡가와 기타리스트로서 활동한다
1. 제1회 MBC 대학가요제
2. 샌드페블즈 이후 가요계 고고리듬 열풍
3. TBC와 MBC
4. 한국 록 음악의 작은 가능성
국풍81: 한국신문협회가 추최고 양방송사가주관한 국민축제-유신정권 말기사람들의 증폭된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가 대마초 파동으로 허전해진 대중음악계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방송사와의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결과물이다.
단절의 연속이었던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20여 년이 흐른 후에도 살마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즐기는 것을 본다면 그 뮤지션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 행운아가 바로 산울림이다.
1. 산울림 이전
2. 1970년대를 규정한 록 밴드 산울림
3. 1970년대 말 가요계를 리드했던 산울림
4. 1979년 산울림 콘서트
5. 멈추지 않는 울림, 산울림
조용필은 1980년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통해 사람들이 갈망하던 바로 그런 노래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1980년대를 열었다. 조용필은 그가 원하던 최고의 가수가 되었지만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의 약점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 과감히 록으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사운드를 얻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5집에서 조용필은 그가 원하던 사운드와 메시지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 그룹이나 음악을 흉내 낸 것이 아니었다. 판소리 창법 등 한국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서양의 록을 친숙한 록으로 만들어갔다.
한국 대중음악의 시작이 미8군 무대라고 하면 이의를 제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8군 음악의 수용자가 내국인이 아닌 미군장병이었다는 점 때문에 절름발이가 음악이라거나,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가 엄연히 주류로 이어오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 까지 한국 대중가용의 발전을 이루어 내고 역사를 바꾼 음악인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음악인들이 미8군 무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미군에서 일반 대중으로 대상을 바꿔 음악활동을 시작했을 때 한국 대중가요는 한 단계 발전했다. 과연 미8군 무대가 무엇이었기에 가요발전을 토대가 되었을까.
1975년에 가요계에 불어 닥친 대마초 파동은 가요계 전체를 흔들 정도로 거셌다. 이런 가요 규제조치의 근간에는 당시의 월남패망에 따른 국내의 정치상황의 급변이 자리하고 있다.
1. 월남 패망과 국내 독재의 강화
2. 대마초 파동의 전말
3. 대마초 파동의 최대 피해자 신중현
4. 박정희의 죽음과 '서울의 봄'
조용필
1. 무명가수에서 위대한 탄생으로
2. 조용필과 핑크 플로이드
3. 1집 '창밖의 여자' (1980년 3월)
4. 2집 '촛불' (1980년 12월)
5. 3집 이후, 록으로의 선회
6. 7집 : 조용필 상누드의 완성
7. 1985년 가요계의 변화와 조용필의 선택
8. 새로운 조용필의 시작
9. 위대한 아티스트 조용필
1. 신군부의 등장과 가요계의 위축
2. 대학 자유화 조치와 가요계의 부활
3. 양김의 대권 쟁탈전과 6월 시민혁명
4. 운동권의 민중문화와 민중가요
1. 포크 전사론
2. MBC 대학가요제와 통기타 진영의 변화
3. 대학가요제의 위축과 통기타 계열의 상황
4. 10년 만에 활기를 찾은 통기타 진영
5. 통기타 진영의 쇠퇴
1980년대의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보다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자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욕구의 증대는 문화와 소비의 다양화로 이어져 1980년대 중반의 가요는 사람들의 새로운 욕구를 반영하여 한층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시나위로 대표되는 언더 헤비메탈 씬, 들국화로 대표되는 동아기획사단, 주현미를 필두로 한 트로트, 김완선과 소방차 등의 댄스계열, 이문세와 변진섭으로 대표되는 팝 발라드는계열 등 새로운 가요의 흐름이 물밀듯 밀려오게 된다.
198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유래 없는 급성장을 한다. 이것은 1970년대부터 이뤄온 사회기반 산업에 대한 대기업 중심의 투자가 정치와 경제의 극심한 위기를 극복하면서 이뤄낸 것이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호황국면을 맞은 박정희의 자주국방정책은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고자 집중투자를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7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재벌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중화학공업을 국가적으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 이 산업을 중심으로 한 재벌체제의 강화를 가져왔다.
서태지와 아이들 탄생
1980년대 중반 서구 팝음악으로 시작되는 록의 열기는 들국화를 만나면서 그 신세대가 문화의 주체로서 메탈 씬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메탈 씬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역사와 단절된 가요계의 이단아로서 혁명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기반이 약한 메탈 씬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대 씬이 와해되고 언더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음악인들은 대거 가요계로 진출하여 주류 속에 록 음악을 심었다. 1992년 시나위 출신의 서태지는 새로운 랩 댄스 음악을 통해 신세대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언더 메탈 씬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류와 타협한 록의 변절자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록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메탈 씬에서 그가 꿈꿔왔던 것을 현실적으로 이루기 위해 한걸음씩 힘겨운 진보를 계속하게 된다. 서태지의 등장. 그것은 1970~80년대와 다른 1990년대 한국 사회와 한국 가요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팝
1. 입시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1980년대 청소년
2. 새로운 팝 문화를 접한 학력고사 세대
3. 마이클 잭슨으로 시작된 뮤직 비디오 열풍
4. 댄스 씬의 형성
5. 테크노 팝과 한국의 마돈나 김완선
6. 소방차와 박남정 : 친숙한 댄스 음악
7. 단순한 안무를 곁들인 댄스풍 가요
8.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과 리믹스 DJ붐붐
9. 새로운 세대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만남
1. 신세대 록 문화의 시작 : 전영혁과 성시완
2. 잉베이 맘스틴과 들국화 : 신세대 록 문화의 형성
3. 시나위의 데뷔
4. 시나위 2집과 3집
5. 백두산의 부상
6. 메탈 씬의 위기
7. 1980년대 초중반 신세대 록 문화
신세대 음악가
1. 대학에 진학하여 록 밴드를 결성한 신세대
2. 대학생 록 밴드의 음악적 욕구의 실현, 대학가요제
3. 무한궤도의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4. 무한궤도와 신해철
5. 솔로로 독립한 신해철
6. 공일오비(015B)
서태지 혁명
1992년 4월 서태지는 '난 알아요'를 선보였다. 이 새로운 랩 댄스 음악은 모든 이들에게 너무나 경이로운 것이었으며 이러한 생소한 음악은 어려워도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적 과제로 이해되었다. 그 해 여름, 사람들은 랩, 샘플러 그리고 회오리 춤의 펀치를 TV를 통해 지켜봤으며, 그 해 가을, 직설적인 가사가 인상적이었던 친숙한 멜로디를 가진 새로운 하우스 댄스인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고 서태지와 랩 댄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친근하고 편안했던 가요의 세상으로는 결코 돌아가기 힘들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은 서태지 이전과 이후가 너무다 달라져 있었다.
댄스뮤직
1. 또 하나의 혁명, '아주 오래된 연인들'
2. 주류 가요의 모범 답안을 보여준 공일오비
3. 넥스트로 재무장한 신해철
4. 철학하는 뮤지션 신해철
5. 현진영과 와와 : 최초의 힙합?
6.댄스 뮤직 체제로 전환된 가요계
트롯트의 몰락
1. 대중가요란
2. 트로트의 탄생
3. '동백아가씨'로 새롭게 출발하는 한국 대중가요
4. 가요시장을 장악한 미8군 가요와 탄압받는 트로트
5. 남진 VS 나훈아 시대
6. 다시 정상권으로 도약한 트로트
7. 주현미의 '쌍쌍파티'와 트로트의 부흥
8. 서태지의 등장과 위축되는 트로트
9. '하여가'와 트로트의 몰락
10. 신세대를 보며 자각하는 기성세대
11.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무너뜨린 기성세대
팬 문화
1. 신세대와 기성세대 모두의 지지를 받은 '컴백홈'
2. '시대유감' 가사 부활과 사전심의 철폐 운동
3. 새로운 팬 문화 정착
4. 사회적 공감대로 획득한 표현의 자유
5.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
6. 힙합의 전성시대를 선언한 '컴백홈'
서태지의 은퇴와 가요혁명 종결
1. 급작스런 서태지의 은퇴
2. 신세대를 인정하게 된 기성세대
3. 가요계의 변화
가요계의 불황
1. 서태지의 은퇴 이후 급물살을 탄 세대교체
2. 대형 기획사로 재편되는 가요계
3. 1990년대 말 가요계의 현황
4. 서태지 솔로 1집
5. 서태지의 컴백
6. 대형 기획사들의 침몰과 새로운 변화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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