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누구나 알 듯이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
이다. 또한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하였던 금속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제학자이기도 하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났다.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경주 김씨는 훈척가문에 되었으니, 그의 가문은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도가였다.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갈 기회를 가졌고, 이 때 중국의 유수한 학자들과 사귈 수 있게 된다. 특히 당대 제일의 학자였던 옹방강(翁方綱)과 깊이 사귀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도 서신왕래가 잦았다. 옹방강의 호가 완원이어서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강했던 추사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지어서 썼으며, 이외에도 예당(禮堂), 시암(時菴), 과파(果坡), 노과(老果)등등 수 백개의 아호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재질은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등이 경술문장이 바다 건너 동쪽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하였고 이들로부터 고증학의 세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그러나 젊은 시절 중국의 문물과 사람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우리나라를 「답답하고 촌스런 나라」로 여기기도 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순수비의 발견과 금석학에 대한 책자를 내는등 병조판서의 자리에도 오르는 등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으나 그의 아버지가 옥사의 배후 조종자로 연루됨에 따라 그도 관직에서 밀렸다가 순조의 배려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는등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졌다.
추사는 제주도, 북청 등에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대략 그 기간이 13년이었다고 하며, 귀양살이 하는 동안 허송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과 서도(書道)를 대성시키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아 일세를 대표할 만한, 대학자로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추사 개인으로서 가고 싶어하는 중국엘 못가는 심정과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귀양살이에서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아픈 마음속에서 잉태한 위대한 예술이 오늘날 돋보여진다. 그는 글씨와 그림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니 글씨나 그림이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다.
1851년에 다시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이번에는 북청에 2년간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는 파란 많았던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절을 오가며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인 185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원래는 서울 장동(현재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하였으나 집이 너무 크다하여 월성궁 간신들이 영조대왕께 상소하여 현재의 신암으로 장동에 있던 집을 뜯어다가 53칸의 집으로 추사의 증조부이신 월성위 김한신께서 건립한 곳.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이며 서예가이신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의 고택으로 80.5평이며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 두 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 가옥이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대갓집」형이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 가옥 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사랑채 댓돌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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