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성탄절 2023. 12. 25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10:45
성탄 인사 - 밖에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얼마만에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지 모르겠습니다(8년 만에).
오늘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기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입니다.
옆에 계신 성도님들과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Merry Christmas! 성탄을 축하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법칙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중력의 법칙’입니다. 모든 사물을 지구 중심을 향해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집니다.
다른 하나의 법칙은 ‘이기심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깁니다. 돈과 명예, 인기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겨서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런 중력의 법칙과 이기심의 법칙을 역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역행하는 것은 비행기입니다. 비행기는 무거운 쉿 덩어리지만 양력을 이용해 중력을 극복하고 하늘을 납니다. 양력이 중력을 힘을 이기는 순간 비행기는 뜨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기심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의 본성은 다 자기가 잘 되고, 자기가 영광을 받고, 자기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데, 예수님의 마음은 반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과 ‘십자가’로 증명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의 마음을 품고, 이 마음이 내 마음의 이기심을 이기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섬김의 구체적 내용까지 설명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참 놀랍고,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목숨과 몸을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대중가요에도 진리가 - 백만 송이 장미>
그런데 여러분! 때로 이 놀라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성경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대중가요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름다운 교회’ 장해진 목사님께서 심수봉이 부른 ‘백만 송이 장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복음이 담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들어보기 전에, 잠깐 가사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절에서는 주인공이 세상에 태어날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을 듣고 백만 송이의 장미를 피워 오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를 얻기 위해서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절에서는 주인공이 진실한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 세상의 슬픔과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비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3절에서는 이제 모든 것이 떠나더라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며, 주인공은 그 사랑과 함께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WpbtLMM8XI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 많은 세월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비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를 안았네
(후렴)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 될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린 이 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 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후렴)
이 곡은 ‘번안가요’입니다. 원곡은 1981년에 발표된 라트비아의 가요(‘마라가 준 인생’)입니다.
그런데 후에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러시아의 시인, 1933~2010) 이 곡에 ‘백만 송이 장미’라는 가사를 붙입니다.
그런 가사를 붙이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한 가난한 화가가 있었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여배우가 한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여배우는 장미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화가가 여배우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화가는 자신의 집을 팔고, 자기의 모든 것을 팔고, 자기 그림을 팔고, 모자라서 자기의 피까지 팝니다.
그래서 백만 송이의 장미를 삽니다. 그리고 광장에 그것을 깔아 놓습니다.
여배우가 아침에 그 백만 송이 장미를 보고 “어느 부호가 나를 위해서 호의를 베풀었나 보다”하고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호텔 아래에서 가난한 화가가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배우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해 합니다.
그러나 이 여배우는 곧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가난한 화가는 이후에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화가의 가슴 속에는 환희가 남아 있었다는 가사의 내용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이런 비슷한 가사로 번역을 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심수봉 가수님이 이 노래를 들으시고 이 가사가 기독교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작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며 부른다’고 간증합니다.
한편의 복음성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여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
그런데 예수님은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남극에 사는 펭귄들이 낭떠러지나 절벽 앞에 서게 되면, 감히 바다로 뛰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린답니다. 잘못 뛰어들었다가 거기 바다표범이나 바다 맹수들에게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때 한 용감한 펭귄이 앞장서서 과감하게 바다에 뛰어들고, 아무 일이 없으면 다른 펭귄들이 안심하고 뒤따라 바다에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그 용감한 펭귄을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라 부릅니다. 바닷속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앞장서서 바다에 뛰어들 수 있는 퍼스트 펭귄 한 마리로 말미암아 그 뒤에 수많은 동료 펭귄들이 용기를 얻고 뒤를 이어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이십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사랑’입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얼마나 많은 재력을 과시하는가, 그것이 위대성의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대성의 척도는 반대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낮아져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고 섬겼는가? 그래서 얼마나 병든 영혼을 살려내고 죄인들을 구원하였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친구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형제는 고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가족관계에서 형제가 우리에게 주어지듯이 교회 안에서의 형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배경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 정말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 한 명만 잘 만나도 인생이 펴지고 미래가 달라지고 평생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 한 명만 잘 못 만나도 그 인생 망치고 악의 길로 가서 망할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살면, 그것이 곧 복의 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이 성탄절에, 만나는 모든 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따뜻한 시간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