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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세중(1928-1986)
조각가 김세중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박용숙은 그에 대해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모더니스트 같은 애매함을 지니고 있는 현대 속의 보수주의자"로 규정한 바 있다.
그 역시 생전에 자신이 “변화와 실험에는 신중한 태도”를 갖고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수긍하는 것으로 말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이경성은 그에 대해
“마뉴멘털한(壯美)의 작가”로 규정하였다. 장미에 대해 “남성적인 미로서 우미(優美)의
미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서 또 다른 방향으로 달음박질하는 힘의 상태”로
정의한 이경성의 논리는 그의 작품 중에서 종교 조각보다 기념 조형물에 더 주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의 작업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그가 조각을 전공하게 된
경위와 종교 미술에 집중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먼저 그가 조각을 전공하게 된 이유에 대해 생전에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는데,
고등학생 시절 그는 문학을 할 것인지 연극을 할 것인지 정치를 할 것인지 고민하던 중
우연하게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의 ‘로댕 어록’ 이란 책을 읽고 조각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하자 미술학부 조소과 1 기생으로 입학하였는데
당시 명동성당의 수녀로 미술대학 회화과에 재학 중이던 안혜택 알렉산더와
장발 교수와의 만남은 그가 가톨릭에 입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장발의 깊은 신앙심과
안정된 인격에 감화되어 그를 대부로 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평화와 종교적
환희를 작품 주제로 즐겨 다룬 것도 장발의 영향이라고 했다. 장발의 권유로 가톨릭에
입교했으나 부모가 불교 신자였으므로 그에게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그것에 대해 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나의 부모님은 오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나는 일치되지 않는 신앙이 괴로워서
잠시 집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명동성당 기숙사에 들어가 3년을 지냈지요.
새벽 종소리가 울리면 먼저 일어나 미사에 갔고, 아침을 먹고는 누구보다 먼저 학교로
달려가 저녁에 어두워질 때까지 작품에 몰두하는 구도자와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엔 프랑스로 가서 종교 미술을 공하려고 했지만 유학 수속을
밟던 도중 6.25전쟁이 터져 좌절되었지요.”
그가 미술계에 데뷔한 것은 1949년 개최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청년’으로
특선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때 ‘청년’과 함께 출품하였던 그의 작품 중 ‘우인’에 대해
김용준은 “클래식한 정신을 파고들어가는 태도와 관찰이 주도면밀하여 피상적 형태미에
취하지 않고 물체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야심이 있어 장래가 촉망된다.” 하고 평가할 만큼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0년 미대를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프랑스로
유학하여 종교 미술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갔다가 1952년 마산
성지여고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이때 이 학교 국어 교사였던 시인 김남조를 만나
1955년 중림동성당에서 결혼하였다.
그는 제2한강교에 건립하였다 철거된 ‘유엔 참전 기념탑’(1963),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68), 탑골공원 ‘3.1운동 기념부조’(1968),
남산 국립극장 분수 조각 ‘군무’(1970), 장충단공원 ‘유관순 동상’(1970), 경기도 여주
영릉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1971), 여의도 국회의사당 ‘애국애족의 군상’(1977),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의 '모자상' 분수조각, 고양시 행주산성에 있는
‘권율 장군 동상과 행주대첩도’ 등의 기념 조형물 제작을 했다.
그는 생전에 한 번도 개인전을 갖지 않았지만 ‘국전’과 한국미술협회 등을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고 ,대학 시절부터 제작한 작품을 포함하면 1,000점에
이른다는 그 자신의 증언을 볼 때 다작의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작한 작품 중에서 상당수가 종교적 목적을 지닌 까닭에 전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발표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김세중기념사업회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그는 모교의 전임 강사로 부임하던
1954년 벨기에 엑스포에 ‘마돈나’를 출품했다고 한다. 같은 해 명수대성당의
외부에 ‘예수 성심상’을, 내부에 ‘성모상’을 제작했다. 그 후로 그는 앞에서 논의한
혜화동성당의 ‘성 베네딕트’를 비롯하여 가톨릭 대학교 성신교정의 ‘평화의 모후’,
‘성모상’, 명수대교회의 ‘십자가의 고난’, ‘그리스도’(모두 1955), 세종로교회의 ‘동정 마리아’,
원효로교회의 ‘영광의 마돈나’(모두 1958), ‘순교 기념탑’(1965), 절두산성지의
‘순교 기념상’(1967), 성 라자로 마을의 ‘새 삶의 예수상’, ‘성 라자로 마을 성당 십자가’,
‘피에타 상’, ‘다미안 신부와 이와시다 신부 흉상’, ‘토마스 알레인 신부 흉상’,
아론의 집 성당의 ‘십자가’와 ‘성모상’(모두 1968), 춘천 죽림동성당의 ‘성모자상’(1970),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하던 때 제작한 불광동성당의 ‘김대건 신부상’, ‘예수상’,
‘십사처’(모두 1984), 절두산성지의 ‘요한바오르 2세상’(1984) 등 많은 종교 미술품을 제작했다.
이 중 병인박해(1866-67) 때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의 상징적 장소가 된 절두산성지의
순례성당은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6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완공되었는데 성지의
안내판에 따르면 혜화동성당을 설계한 이희태(1925-81)가 설계를 맡고 그가 미술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이 순례성당의 종탑에 ‘순교자상’과 함께 성당 내부의
대리석 제대와 감실을 제작했다. 종탑 부조는 1955년 등신대 크기로 제작한 ‘순교자’를
화강석으로 확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종교 조각 중에서 예술적 성과가 뚜렷한 작품으로 ‘골룸바와 아그네스’를
꼽을 수 있다. 1954년 성모 성년 기념 제1회 ‘성미술전’이 10월 5일부터 12일까지 열렸는데
이 전시에 그는 ‘골룸바와 아그네스’를 출품했다.
김효임과 동생 김효주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온갖 고문을 받은 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된 후 복자의 지위에 올랐다가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된 순교자들이다.
그의 종교적 주제를 담은 부조는 장발의 그림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으나
이 부조의 경우는 장발의 회화와는 달리 골룸바로 추정되는 성인이 왼손에 깃털을 쥐고 있고
아그네스는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쥐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모습이며 그들의 의복
또한 한복임을 아주 단순하지만 분명한 윤곽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주목하면 그는 숭고한 종교적 주제를 형상이 아닌 형태, 질감, 구조, 상징
등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골룸바와 아그네스를 모델로 제작한
부조 작품을 보면 유교적 통치 이념이 마지막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던 과정에서
단행된 천주교 박해와 신앙을 위해 순교를 받아들인 성인의 고귀한 희생을 단순하면서
고졸한 방식으로 표현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장식이 배제된 단아한 선과 하나의 덩어리로 완결된 인체, 죽음을 초월하는 정신의 승리를
보여주려는 듯 강직하게 처리된 얼굴과 마디가 분명한 손, 최소한의 주름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한 의복 표현 등은 십자가나 나뭇잎 못지않게 이 작품의 상징성을 고양하는 요소이다.
전시장이 아니라 교회에 전시되었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의 강렬함이 종교 의식과 맞물려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관학적인 인체 조각 수용도 힘겨워했던 당시에
관습적 표현을 뛰어넘어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추구한 작가의 근대성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84년 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작업 경향과 향후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과거에는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했지만 더 살 수 있다면
나의 예술, 나의 조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동안 내 작품은 초기의
극단적인 사실을 거쳐 조형적으로 요약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을 지나왔지요.
예술의 흐름에 대한 나의 해석과 수용에는 후회가 없었지만, 좀 더 정돈되고
결론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거의 종교 작품만을 만들 생각인데 이 작품들 통해서 나의 신앙과 삶을
결산해 보고 싶습니다.”
그는 1980년 위 수술을 받고 여러 달 입원해 있던 동안 1962년 작 ‘그리스도의 얼굴’을
옆에 두고 늘 어루만지면서 병마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의 작업이 단지 심미적인 것의 추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
종교적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적 과정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그의 종교 조각 중에서도 비교적 사실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인데 예수의 긴 얼굴과
지그시 감고 있는 눈에서 묵상, 종교적 초월, 신비 등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그가 남긴 수많은 종교 조각은 신앙 고백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짧은 까닭에 그들은 종교를 통해 영원을 희구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나 불교의 해탈도 결국 생명의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염원의 표현이다.
그는 서울대 미술대학장을 세 번씩이나 연임(1973-1978), 지도력을 인정받았으며,
‘和 ’의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신중하고 넉넉한 성품 때문에 미술계는 그에게 ‘외교관’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또한 그는 예술 행정가로서도 뛰어났는데 과천에 미술관 부지 확정해 놓고
예산을 얻지 못해 애태우고 있을 때 관계 요로를 뛰어다니면서 예산을 따냈다.
또한 그는 국외적으로도 활동해 1984년에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바티칸미술관, 프랑스 외무부와 문화부, 독일 쾰른 대교구의 협조를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제종교미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으로서 이 협회를 국제기독교미술인협회(SIAC)에 가입시켰고,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미술전’을 통하여 한국의 가톨릭 미술 작품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과천에 새로 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준공을 앞두고 준공기념전을
기획하고, 마지막 공사를 독려하다가 개관을 앞두고 1986년 6월 24일 지병과 과로로
5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타계한 후 부인 김남조 시인은 남편의 조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세중 조각상’을 만들어 후진을 격려하고 있다.
[조각가 김세중] 중에서 출판사:현암사
[김세중의 종교 조각 - 미와 진리를 향한 조형 언어(최태만)] 중에서
[이야기하는 그림] 이규일 지음 중에서 출판사: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