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 백제문화기획 탐방
산행지 : ▲공주/부여 - 백제문화권 여행 주요 탐방지 : ☞ 송산리고분군 → 국립공주 박물관 → 공산성 → 곰나루 ▲ 양지 바른 곳에 뉘인 백제 왕들의 무덤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로 들어가는 길가에 자리한 무덤 군이다. 현재 총 7기의 고분이 이곳에 있는데 부여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백제 왕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비시대의 왕이 여섯이니 대강 그 수가 비슷하지만 무덤의 대부분이 도굴당하여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처음 발굴을 시작한 1호분에서 고구려 무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신도가 무덤 내부에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교류 및 당시 백제 문화에 도교가 수용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백제 고분 양식의 변화는 백제의 천도과정과 함께 이해하면 되는데 초기 백제가 자리한 한강 유역에서의 백제 무덤들은 계단식 무덤인 적석총으로 서울의 풍납동 등에 그 형태가 남아 있다. 고구려 무덤인 장군총 등과 유사한 것으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뒷받침해 준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백제는 수도를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 시기 백제 무덤의 대표는 무령왕릉이다. 벽돌로 쌓아 만든 전축분 형태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 묘제문화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당시 백제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도읍을 정한 사비, 부여의 무덤 형태는 돌방무덤으로 내부에 방을 만들고 주변을 흙이나 돌 등을 이용해 봉토한 형태로 능산리 고분이 그런 형태이다.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 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壕)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석수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왕으로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다. 그런 위대한 왕의 무덤이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자 온 나라가 온통 흥분에 휩싸이고 들썩거렸다. 거기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며, 이중 국보가 12건에 이른다. 유물에는 지석, 석수,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몇 점의 부장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부여-저녁식사-연잎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