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9. 원리해설의 발간경위
1 이러한 때에 유효원 씨에게 「원리」집필을 위한 편의제공이 되어지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형편으로 그 자신도 여기에 대한 배려를 원치 않았으니, 버스 요금이 나가는 것도 불필요한 낭비만 같아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굳이 전차 타기를 고집한 분이었다.
2 1957년 접어들면서는 원고가 문화부장인 나의 손으로 넘어와 전면적으로 검토되고 문장 수정이 가해졌다. 유 선생은 한자를 쓴 지가 오래되어 틀리게 쓰는 경우가 많았고 구시대에 학업을 마친 분이라 쓰는 단어나 문장이 매우 고루하였다.
3 이런 모든, 눈에 띄는 것들을 고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고가 정리되는 대로 문선명 선생님의 감수를 받아가지고 매달 부분적으로 기관지인 〈성화〉에 게재함으로써 원고의 완전도를 독자인 대내 신도들에게 타진하곤 하였다.
4 원리 체계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그리고 문장을 완미롭게 다듬기 위하여〈원리해설>(原理解說) 발간에 주입한 문선명 선생님과 유효원 협회장과 그리고 나의 정성과 수고는 어떠한 인간적인 작업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다.
5 4월 8일, 문선명 선생님께서는 드디어 원리 책 제작의 실무담당자인 나에게 서울 종로구 수표동 소재 통화당(統和堂一 담당의 김관성 장로) 한의원 안에 마련되어 있었던 선생 자신의 휴게실을 전용토록 내주시어 원고 수정의 마무리 및 인쇄 교정을 보게 하셨다.
6 이때 원리정서만도 이수경, 김찬균, 정수원, 장원순, 최영자, 박성회, 최현숙, 홍순원, 신미식 씨 등 수다한 식구들에 의하여 분담되었었다. 4월 18일 드디어 일부 원고가 인쇄소인 경향신문사 공무국에 넘겨졌다.
7 그 후 원고가 완성되는 대로 몇 차례에 걸쳐 인쇄소로 넘겨졌다. 5월 7일부터 교정을 보기 시작하였다. 가쇄지에 의한 인쇄 교정 중에도 문장은 수없이 수정되고 이에 따라 매양 판을 고쳐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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