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
곡강(曲江) 가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곡강은 당(唐) 현종(玄宗) 양귀비(楊貴妃)를 위해 이룩한 유원지라 할 수
있는 장소이다.
곡강의 남쪽에는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처마를 맞대고 즐비하게 서 있다.
그리고 북쪽 지역에는 을씨년스러운 삭풍(朔風)이 고가(古家)의 담장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살점을 한 조각 한 조각씩 포로 떼어 내는 듯한 바람이다. 게다가 시야를
가리게 하는 눈보라.
가히 지옥과 같은 날씨였다.
얼어붙은 곡강 위, 잉어 낚시꾼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두툼한 털옷을 걸친 사람들이 얼음에 구멍을 뚫고 구멍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술병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셔 대고 있었다.
그가 마시는 술은 북방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모태주(茅苔酒).
죽엽청(竹葉淸)에 비할 수 없이 독한 술이다.
모태주는 한 모금만으로도 목젖을 태워 버리는 그런 술이었다.
특징이 없는 표정이다. 눈빛이 무미건조하며 의복과 머리 모양 또한 그러
하다.
아마도 세상을 애써 잊고자 하는 시정(市井)의 은자(隱者)일지도.
그렇지 않다면, 번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생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
한 인물일 수도.
그는 모태주 한 병을 다 마셔 버린 다음에 술병을 내던져 버리고 나서
또 다른 술병을 찾았다.
이미 취해 버린 듯,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마고(麻姑) 할멈의 심술이 대단해. 춥다 춥다 하지만, 이렇게 추울 수
가."
걸찍한 목소리. 그는 또 하나의 술병을 찾아 내어 입가에 대며 욕설을 토
하는 것이다.
그가 술병을 반 정도 비웠을 때, 누군가 그의 옆자리에 얼음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회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털모자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그에게 특징이 있다면, 장식적인 효과가 전혀 없는 철환을 오른손 중지에
끼고 있다는 것이다.
철환의 표면에는 열아홉 개의 꽃무늬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으며, 태양혈은 밋밋했다.
강호인이라면 그가 일초무공도 알지 못하는 처지라고 비웃어 버릴 것이
다.
회의인은 잉어 낚시를 시작하는데, 꽤 추운 듯 숨을 훅훅 불어 대고 있었
다. 어찌나 추운지 숨을 토할 때마다 흰 안개 기둥이 멀리까지 뻗어 나갔
다.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회의인은 그 사이, 잉어 세 마리를 빙판 위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는
잉어가 날뛰지 않게 하기 위해 두 눈을 검은 종이로 가려 주었으며, 모든
동작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모닥불이 타오른다. 멀리서 보면 얼어붙은 강 위에 귀화(鬼火)가 번뜩거
리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떤가?"
문득 묻는 소리가 들린다.
술을 퍼마시고 있는 사람이 회의인을 보고 씨익, 웃고 있었다.
"자리를 잘 잡은 듯하외다."
"솜씨가 제법 좋아. 나는 네 시진이나 죽치고 있었는데에도 고작 잉어 두
마리를 끌어올렸을 뿐인데… 젠장!"
괄괄한 목소리를 지닌 중년인은 욕설을 말끝마다 운으로 토하고 있었다.
"마셔 봐. 속이 확 타오를 테니까."
"고맙습니다."
회의인은 술병을 건네 받았다. 그는 술병을 입에 대고 술을 한 모금 마셨
다. 꽤나 독한 술이다.
회의인의 인상이 가볍게 찡그려졌다.
"지독하군요."
"모태주야."
"속이 불타는 듯합니다."
"한 모금만 마시면 오장육부가 훈훈해지지. 추울 때에는 모태주가 제일이
야."
고동색 장포를 걸친 사람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술병을 돌려 받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웠다."
"아……?"
회의인은 흠칫 놀라워했다.
"무영, 네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자 했지. 한데 막상 너를 대하니, 쓸 만
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사부(二師父)이십니까?"
"그런 셈이지. 후후, 지난 육 개월 간 너를 숨어서 지켜봤다. 후후, 네가
한순간이라도 도망치고자 하였더라면 너의 두개골이 바수어졌을 것이다."
술 냄새를 풀풀 날리는 사람은 바로 이사부였다.
회의인은 물론 백무영, 그는 육 개월 내내 표국에서 일한 후에야 결국 이
사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다루의 창 밖으로 떠오른 쌍연은 이사부가 그를 곡강으로 불러 내는 신
호였던 것이다.
"넌 세상(世上)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너를 표국의 서기로 일하게 한 것
이다."
이사부는 입술을 거의 달짝거리지 않고 말을 전했다.
'혜광심어(慧光心語)다. 전음입밀의 경지를 뛰어넘은 전어수법(傳語手
法)!'
백무영은 이사부의 내공이 만박이나 묘수환랑을 월등히 능가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는 폐쇄된 생활을 오래 해 왔는지라, 천하정세에 대해 어둡기 짝이 없
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강호 출도를 하다간 적에게 정체를 쉽게 노출당하
거니와, 위기에 처했을 때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지혜를 발휘하기 힘들다.
그래서 네게 세상을 배우게 한 것이다."
"저의 적이라면?"
"훗훗… 어쩌면 모든 무림인이 너의 적일지도."
"으음……."
"너는 앞으로 한 달 간 매일 나를 찾아와라. 네게 여러 가지 무공을 전하
겠다. 물론 너의 현재 무공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
른 초식을 배우는 것보다, 외우고 있으되 시전하지 못하는 초식을 터득하
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장차 너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는, 강
호의 여러 방파 무공을 한두 가지 정도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
다. 너는 이제부터 강호 명문거파의 특징적인 수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다."
이사부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술병을 마저 비웠다. 이윽고 그는 하나의
도초를 구결로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악가신도(岳家神刀)!
악가의 제자들만이 시전하는 백팔 초의 도초(刀招)이다.
악가신도를 전수받는데 두 시진이 걸렸다. 이사부가 갖고 있는 술병이란
술병은 그 사이 모조리 비워졌다. 이사부는 떠날 차비를 차리며 힐끗 백
무영을 바라봤다.
"어이해 네 자신의 신세에 대한 걸 묻지 않느냐? 네가 그걸 물으리라 여
겼는데……."
"언제고 제 스스로 알게 될 날이 있겠지요."
"좋아. 넌 호기심을 억제하는 경지에 이르렀군. 어쩌면 넌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 그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성취다. 하지만 너의 적은 너무나도 많다. 한(恨)을 씻기 위해서는
매일 정진(精進)해야 한다."
이사부는 천천히 일어났다. 이사부는 절음발이인 듯 다리를 절며 걸어갔
다.
백무영은 그가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고독과 우수가 짙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가 마셔 버린 모태주의 진한 술맛과 같은.
"언제고!"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손을 쳐들었다.
그는 털모자를 더 깊이 눌러 쓴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축 늘어진 체하며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지쳐 버린 듯한 모습으로 그는 몸을 으스스 떨어 가면서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장안성은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장안성의 겨울은 길고 혹독했다.
백무영은 매일 자시(子時)에 이사부를 찾아갔으며, 이사부는 매일 한 가
지 강호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전수하는 무공은 강호를 좌지우지하는 명문거파의 무공에서부터 붕
괴되어 버린 고대방파의 무공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기 짝이 없었다.
불도속(佛道俗)의 제반절기, 그리고 흑도의 백대절학(百大絶學)에 들어가
는 절기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모든 절기를 몸으로 익힐 수 있을 것이되, 백무영
에게는 많은 시간이 없었다.
그는 구결을 암송하는 것만으로 무공 익히기를 마쳐야만 했다.
각대방파의 무공을 두루 터득하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위기 상황에 그것을 써먹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타인과 싸울 때
상대의 무공에서 상대의 출신 방파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해가 바뀌는 그 날, 백무영은 강가에서 이사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사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다른 복장을 했다.
어떤 때는 재인(才人)이고 어떤 때에는 문객이다. 어떤 때에는 어옹(漁翁)
이고, 어떤 때에는 농부(農夫) 차림이다.
그의 역용술(易容術)이 얼마나 뛰어난지, 백무영은 그가 갖고 있는 얼굴
가운데 어떠한 것이 그의 진짜 얼굴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사부는 걸인(乞人)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썩은 새끼줄을 허리띠 삼아서 질끈 동이고 있었다.
"네게 마지막으로 전수할 것은 소림파(少林派)의 절학이다."
"소림!"
"소림은 무당(武當), 개방, 화산(華山), 전진(全眞), 곤륜(崑崙)과 더불어
육대문파에 꼽히고 있다. 아미(峨嵋), 태백(太白), 천산(天山), 장백(長白)
의 사대방파까지 합친다면 구파일방(九派一幇)이지."
"……."
"소림의 무공은 호신무공(護身武功)이 대부분이다. 소림무공을 대발전시
킨 인물은 기승(奇僧) 달마(達磨)! 그는 천축(天竺) 향지국(香至國) 출신
으로, 불경을 전하기 위해 중원에 온 인물이다. 그는 숭산(嵩山) 소림사에
거처를 정하고 구 년 면벽(面壁)을 하며 불도를 깨우쳤으며, 그 가운데
상승의 호신절기를 터득하게 되었다. 네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달마의 절
기 가운데 으뜸이라는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이다."
강호인치고 달마역근경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겠는가?
달마조사는 고승(高僧)임과 동시에, 소림파를 개파(開派)한 전설적인 인물
이다.
그는 역근경(易筋經), 세수경(洗隨經)을 소림사에 남겼으며 그것을 토대로
하여 소림파의 무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소림권(少林拳), 곤륜검(崑崙劍), 이가도(李家刀), 아미금창(峨嵋金槍), 화
산장(華山掌)을 일컬어 강호오대절학이라고 하지 않던가.
달마역근경의 진본은 소림파의 의발전인(衣鉢傳人)만이 읽어 볼 수 있는
절기라고 했다. 한데, 이사부에게 달마역근경의 진본이 있단 말인가?
"달마역근경을 익힌다고 해서 무공이 일시에 증가되지는 않는다. 달마역
근경의 효용은 수십 년에 걸쳐 매일 쉬지 않고 참선을 할 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달마역근경에 달통하게 된다면, 몸의 뒤쪽에서 금배광(金背光)
이 일어나며 권법을 시전할 때에 금불(金佛)이 환영으로 나타난다. 그리
하여 그것을 금광장법(金光掌法)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
해서는 일백 년 이상을 참수해야 한다."
이사부는 백무영을 바라봤다.
백무영의 눈빛은 혼탁한 편이었다. 그는 잡다한 무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
에 눈빛에 특징적인 게 없었다.
'짙은 살기가 내포되어 있다!'
이사부는 저도 모르게 두 손바닥을 슬쩍 모았다.
'합장(合掌)의 자세. 그렇다면 이사부는 불가인(佛家人)이란 말인가?'
백무영은 이사부의 사소한 동작에서 그가 승려일지 모른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이 녀석을 천살성(天煞星)으로 기르는 게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는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이다!'
이사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백무영의 이목구비를 유심히 살펴봤다.
얼마 후, 그는 약간 답답한 숨소리를 토하면서 달마역근경의 구결을 암송
하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정신을 하나로 모은 채 달마역근경의 비결을 따라 외었다.
새벽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빙원(氷原) 위에서 꼬박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밤새 내린 눈이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세 치 가량 수북히 쌓였다.
멀리서 그들을 본다면, 두 개의 눈사람이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될 것이
다.
"다 암기했느냐?"
"암기했습니다."
"외어 봐라!"
"예."
백무영은 눈을 반개한 채 달마역근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해 내려갔
다.
이사부 또한 눈을 반개한 채 백무영이 외우는 구결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이각에 걸쳐 구결을 암기했다.
"한 자도 틀리지 않는다. 너의 암기력은 천부적이라 할 수 있다. 너의 암
기력이 초인적이지 않았더라면, 너를 가르치는 방법이 달라졌으리라."
이사부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은은한 금광이 스미어 있는 게 보였
다.
그렇다면 그는 불가정종(佛家正宗) 금광진기(金光眞氣)를 참수한 것인지
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넌 이제 내게 배울 게 없다. 이제는 일사부를 찾아가라."
"일사부!"
백무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사부는 그에게 마지막 사부라 할 수 있다.
그는 배후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인물일 것이며, 혈의육존의 우두머리이
다.
그를 만나기까지 무려 이십일 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일사부는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개봉부(開封府)의 단심궁(丹
心宮)에 있다."
"개봉부 단심궁!"
"속히 떠나라. 시간이 별로 없다."
이사부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잔을 하나 내밀었다.
그는 백무영에게 한 잔의 이별주를 권하는 것이다.
이사부는 백무영이 섬긴 다섯 사부 가운데 가장 무개성한 인물이었다. 하
지만 그는 다섯 기인 가운데 가장 깊은 신지를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
었다.
백무영은 무릎을 꿇은 채 잔을 받았다.
그는 잔에 채워지는 모태주를 한 방울 남김없이 마셨다.
그러는 가운데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가히 주먹만한 함박눈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해는 농사가 풍년이라던가.
여명이 완연할 때, 백무영의 모습이 조용히 사라졌다.
천지에 펄펄 내리는 흰 눈.
대륙은 눈에 의해 정복이 되어 버린 듯하다. 올해는 눈이 흔한 해였다.
"저 녀석이 대업(大業)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혈의육존은 자결해야 한다.
그래야 피빚을 갚는다. 아미타불……!"
이사부는 합장하며 불호성을 외었다.
그의 어깨 위로 눈이 퍼부어졌다.
그는 어깨를 으슷 떨었으며, 어깨 위에 쌓인 눈이 부수수 흐트러져 내렸
다.
그는 허리를 구부정히 굽힌 채 조용히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그도 장안성에 머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곡강을 스치는 바람 소리, 잔잔히 퍼져 나가는 잔기침 소리.
새벽은 그러한 소리 가운데 환히 밝아 왔다.
일월 삼 일.
말발굽 소리가 얼어붙은 관도를 질타하고 있었다. 하남성(河南省)으로 접
어드는 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두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아서 나왔다. 마차를 몰고 있
는 자는 빛 바랜 회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말고삐를 쥔 채 무심
한 눈길로 앞쪽을 살피며 가끔 눈을 깜빡거렸다.
특징이 없는 모습이다.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얼굴을 절반 가량
가리고 있다. 가끔 보이는 눈빛은 우수에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이틀은 더 가야 한다."
그는 노마에게 말하며 말고삐를 가볍게 흔들어 댔다.
두 마리 노마는 울음소리를 내며 달리는 속도를 배가시켰다.
황혼이 핏물처럼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 마차는 용문(龍門)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용문은 석굴(石窟)로 유명한 곳이다.
용문석굴은 중원에서 불교가 얼마나 중요한 종교인가를 밝히는 증거 가
운데 하나이다.
용문석굴 어귀.
때아닌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으며, 암반 위에서는 호통 소리
가 터져 나왔다.
"그 계집을 놓지 못하겠느냐?"
"카카카… 씨알만한 놈이 척천십팔웅(拓天十八雄)을 몰라보고 날뛰다니!"
"애송이! 척천십팔옹 나으리들이 연환마교(連還魔敎)에서 가장 무섭다는
걸 모르느냐?"
암반 위에는 진형이 구축되어 있었다.
열여덟 명의 흑포대한이 기러기 날개 모양으로 포진해 있었다.
그 앞쪽으로 비쩍 마른 백삼청년 하나가 서 있었으며, 그의 뒤쪽에는 옷
자락이 찢어진 여인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비쩍 마른 청년은 키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의 옷가슴에는 달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는 섭선(攝扇)을 쥐고 있었으며, 가끔씩 섭선을 흔
들어 대었다. 뾰족한 아래턱에 매부리코, 정이 붙지 않는 얼굴이다.
눈빛은 어두운 편이며, 피부는 창백하다 할 정도로 흰 편이었다.나이는
이제 스물다섯 정도.
백의청년은 열여덟 명의 대한에게 엄밀히 포위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대한들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하게 생겼는 바, 그들의 옷가슴에는 마두(魔
頭)가 그려져 있었다. 마두의 빛깔은 핏빛이었다.
"어서 그 계집을 놓고 꺼져 버렷!"
"너 같은 애송이를 괴롭혔다는 소릴 듣고 싶지 않다. 크크, 우린 긴 말을
싫어한다."
척천십팔옹은 북방무림계에 혁혁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흑도영웅들이다.
그들이 시전하는 합벽검진(合劈劍陣)은 꽤나 이름 있는 재간이다. 그들은
삼 년 전에 연환마교에 투신하였으며, 그 덕에 용문지방의 향주(香主) 지
위를 제수받을 수 있었다.
용문지방에서 감히 그들을 거역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사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버러지들!"
백삼청년은 거의 웃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공포스럽기 때문에 웃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웃음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는 뒤쪽에 있는 여인을 힐끗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낭자는 갈 길을 가시오."
"소, 소협! 저로 인해 죽음을 청하지 마십시오."
여인의 얼굴은 눈물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녀는 시녀와 더불어 용문석굴 나들이를 나왔다가 척천십팔웅에게 납치
된 기구한 여인이었다.
척천십팔웅은 그녀를 소굴로 데리고 가서 술 심부름을 시키고 색노(色奴)
로 만들 작정이었는데, 뜻밖의 방해자가 생긴 것이다.
"저 따위 녀석들은 나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오. 내 비록 오랫동안
중원을 떠나 서역(西域)을 여행하고 온 처지이기는 하나, 몸을 지킬 만한
솜씨는 갖고 있소."
냉막한 인상의 청년은 슬쩍 손을 내저었다.
그가 어떠한 수법을 발휘했는지 모르되, 여인의 몸뚱이는 둥둥 떠서 사
장 밖으로 사뿐히 밀려났다.
"호오, 제법이군. 격공이물수(隔空移物手)를 쓰다니."
"카카카… 제법 자신이 있기에 우리 어르신네들의 일에 끼여든 게로군?"
"네놈이 강호인이라면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지."
척천십팔웅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열여덟 명 가운데 제일 먼저 앞으로 나온 자는 독지마웅(毒指魔雄).
그의 왼손 다섯 손가락은 숯처럼 시커멓다. 그는 다섯 손가락에 독공을
익혔기 때문에, 그의 손가락에 당하는 사람은 살이 썩어 문드러지게 된
다.
"애송이, 고통 없이 죽여 주지!"
독지마웅은 사악하게 외치며 냉면서생(冷面書生)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
다. 그는 냉면서생이 가슴 부분을 방어하지 않는 걸 눈치채고, 그의 가슴
에 대고 오 지(五指)를 가했다.
냉면서생의 가슴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리는가 하는 찰나.
팟-!
냉면서생은 어느 틈엔가 왼손을 쳐들어서 독지마웅의 팔목을 낚아챘다.
독지마웅은 찰나의 순간에 완맥을 제압당한 것이다.
"네, 네놈이 금나수(擒拿手)를?"
독지마웅은 기겁을 하며 팔을 빼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팔은 반석(磐
石)에 깔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냉면서생의 입가에 사요(邪妖)한 웃음이 번진다.
"이 팔로 그간 즐겁게 살았겠지. 후훗, 다른 사람은 연환마교를 겁내어
너희들을 혼내지 못하나, 나는 연환마교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냉면서생은 천천히 손을 위로 쳐들었다.
독지마웅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우두둑-!
듣기 역겨운 소리와 함께, 독지마웅의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분리되기 시
작했다.
시뻘건 핏물이 뿜어지고 희멀건 힘줄과 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크아아아악… 내 팔!"
독지마웅은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며 뒤로 떼굴떼굴 굴러갔으며, 냉면서
생은 독지마웅의 분리된 팔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핏물이 퉁기는 팔뚝은 아직도 생명력을 가진 듯, 한 자나 튀어올랐다. 장
내는 일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냉면서생은 산 사람의 팔을 썩은 이빨
뽑듯 해 버린 것이다.
그의 잔혹한 솜씨는 고금에 드물다 할 수 있었다.
"저, 저 놈이 독수를 쓰다니……."
"저 놈의 뱃속에서 창자를 꺼내자. 빠드득! 창자를 난도질해야 분이 풀리
겠다."
척천십팔웅의 나머지는 피를 보자, 흥분하여 병장기를 일제히 쳐들었다.
검광(劍光), 도기(刀氣)가 동천(冬天)을 가르기 시작한다.
"와라!"
냉면서생은 포위됨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섭선을 흔들어 대면서 도검이 다가서는 것을 싸늘히 쓸어 봤다.
슈팟-!
한 자루 검이 낙일도룡(落日屠龍) 수법으로 그의 가슴을 향해 다가섰다.
냉면서생은 히죽 웃으면서 부채를 활짝 펼쳤다.
부채에는 신월(新月)이 그려져 있었다.
허공에 초생달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는 가운데, 부채의 끝이 허
공을 쪼갰다.
허공으로 분수처럼 피어 오르는 피보라!
검을 쥔 자의 목에서 피보라가 뿜어지는 것이다.
목을 잃은 시체는 나아가는 속도에 따라 세 걸음 더 나아간 후에야 벌렁
나뒹굴었다.
냉면서생은 일 초마다 하나씩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의 혹독한 살인초식은 강호의 누구보다도 위력적이라 할 수 있었다.
"으으… 저, 저 자가 누구기에……?"
"합격하자. 혼자 덤벼서는 아니 된다."
척천십팔웅 가운데 열여섯은 동시에 둘이 쓰러지자, 기절초풍 놀라며 진
세를 구축했다.
그들은 냉면서생을 빙 둘러 포위하며 일제히 떠올랐다.
스스슷-!
솔개 떼가 떠오르듯, 척천십팔웅은 허공에 인간의 그물을 형성시켰다.
"등붕검진(騰鵬劍陣)이다."
구경하고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그는 먼 곳에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바로 백무영!
그는 개봉부를 향해 가던 중에 기이한 싸움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등붕검진은 등붕방(騰鵬幇)이라는 마도방파의 독문절기. 과거 한때에는
등붕검으로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한 바가 있다. 냉면서생도 상대가 시전하
는 진세가 등붕검진이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싸늘한 웃움을 흘리며 몸을 약간 이동시켰다.
그는 중궁(中宮)에서 홍문(洪門)으로 돌진해 드는 보법을 시전하는 가운
데, 몸을 핑그르르 틀어 대기 시작했다.
활짝 펼쳐진 부채가 허공에 여러 개의 그림자를 뿌리기 시작한다.
"함백(涵伯)은 마도의 노영웅(老英雄). 그를 상당히 존경했는데, 그의 휘
하에 너희들 같은 버러지들이 있다니? 너희들을 척살하고 나서 함백에게
가서 따지겠다."
부채가 꽃잎 떨어지듯 그림자를 뿌리는 가운데, 척천십팔웅은 안계(眼界)
가 뿌옇게 어두워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고, 고월마화선(孤月魔花扇)!"
"으윽, 고월이다."
"크윽, 낭인살왕(浪人殺王) 고월(孤月)이다. 피, 피해라!"
처절한 부르짖음 소리.
척천십팔웅은 부채가 떨치어지는 걸 보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
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부채가 어지럽게 떨어지는 가운데 살점이 베어져 피와 더불어 뿌려졌고,
도검을 쥔 팔과 다리가 썩은 나뭇가지 뒹굴 듯 이리저리 뒹굴었다.
"카아악……!"
"케켁!"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아수라장의 참경 위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열여섯
명은 분시(分屍)되어 버리듯 난도질당해 암반 위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끓어진 팔과 다리가 이 곳 저 곳에 뒹군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근처의 구경꾼들을 전율시켰으며, 모든 사람은 사색이
되어 뒤쪽으로 도망쳐 가기 시작했다.
고월이 부채를 거두었을 때, 근처에 남아 있는 사람은 두 사람에 불과했
다. 고월에 의해 구출이 된 이름 모를 여인, 그리고 마부 행세를 하고 있
는 백무영.
고월은 힐끗 백무영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교차되었다.
'강한 눈빛이다!'
백무영은 고월의 눈 가득히 살기가 배어 있음을 느꼈다.
반면 고월은 백무영의 눈빛에서 신비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이 있는 눈빛이군!"
고월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찰나적으로 열여덟 명을 참살했는 바, 그의 옷자락에는 핏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초상비(草上飛)를 써서 시체들 위를 걸었다.
"신발에 피를 묻히게 할 자격도 없는 벌레들! 이런 자들이 마도에 있는
한, 마도는 번영하지 못한다."
고월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우연인지 일부러인지 백무영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보통 눈빛이 아냐."
고월은 백무영에게서 삼 장 떨어진 곳에서 잠깐 멈추어 섰다.
그의 눈빛은 죽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낭인살왕 고월!
백무영도 그러한 이름을 알고 있다.
그는 북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살명(殺名)을 날리는 자로, 출신이 분명치
않다.
그는 부채를 써서 살인을 하는 바, 무자비하고 쾌속한 살인 솜씨로 인해
북방무림을 전율시키고 있었다.
"중원에 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한데, 자
네는 조금 다르군."
"……."
백무영은 묵묵부답일 뿐이다. 그는 강호계의 일에 끼여들어서는 아니 되
는 처지인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고월과 비무하여 자신의 무공을 입증해 보고 싶었다. 그러
나 그는 쓸데없는 충동을 자제하며 눈빛을 더욱 어둡게 했다.
"난 중원인이 아니지. 그러하기에 중원을 멸시하고 있지. 물론 중원에 많
은 인물이 있고, 기기묘묘한 상승절학이 많다는 걸 인정하기는 하지. 후
후……!"
그러고 보면 고월의 한어(漢語)는 상당히 서툰 한어였다.
그는 사성(四聲) 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다른 언어로 사고를 하고 있으며, 한어는 이국어로
말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난 한 사람을 찾아가야 해. 그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지. 이름하여 마존(魔尊) 함백(涵伯)! 난 그를 찾아가 볼 작정이야."
"……."
백무영은 겁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고월은 그에게 약간 실망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빠른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긴 참새가 대붕(大鵬)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백무영을 비웃으며 몸을 빠르게 이동시켰다. 그의 몸뚱이는 포물선
을 끌며 떠올랐고, 문득 자작나무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탄허비행(彈虛飛行)."
백무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죽립 끈을 조였다.
'나 자신의 무공에 대해 자신을 갖고 있었는데, 고월이라는 자는 나의 자
신감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내공과 초식에서 나보다 강하다.'
백무영은 천천히 마차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넋 나간 표정으로 고월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다가섰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르나,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여인의 얼굴은 눈물에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다. 강호계의 살벌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녀는 뜻밖에도 강호인들의 시비에 휘말려든 것이며, 혼비백산한 나머지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그냥 가십시오."
여인은 수줍은 듯 손바닥으로 앞가슴을 가렸다.
앞가슴 옷자락이 베어져 앞가슴이 살짝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애써 시선을 그 곳으로 돌리지 않고자 하며 목례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가 신형을 틀려 할 때.
"잠깐."
"어이해?"
"어디에 가야 고월이라는 분을 만날 수 있을지 아십니까?"
"글쎄올시다. 강호인들은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는지라."
백무영은 천천히 어자석으로 올라섰다. 이제 이 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강호가 거대하며 절정고수가 많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것으로
좋은 경험을 한 것이다.
'고월, 그 이름을 기억해 두지. 언제고 누가 진짜 강한가 비교해 볼 때가
있겠지.'
백무영은 천천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이제까지 그를 태워다 준 노마는 히힝거리며 발굽을 내딛었다.
백무영은 마차와 더불어 관도를 따라 사라져 갔다.
이름 모를 여인은 그가 사라지는지도 알지 못하며 고월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고월은 다른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다.
그러나 백무영은 남에게 인상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개성이라기보다 훈련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개봉(開封)은 금국(金國)의 수도이다.
개봉은 꽤나 활기를 갖고 있는 시진.
백무영은 첫번째 사부를 찾기 위해 개봉부로 접어들었다.
그는 금릉과 장안, 낙양에 이어 개봉을 거치게 된 것이다.
'나를 기르는 인물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보통 강호세력은
산이나 들에 거처를 세우는 데에 비해, 혈의육존은 다르다. 그들은 산만
히 흩어져 있으되, 나름대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하나, 강호 어
디에도 그러한 세력이 있다는 게 소문나지 않고 있다.'
백무영은 일단 객점(客店)에 짐을 풀었다.
그는 마부들이 싼값에 머무는 객잔에 마차를 맡기고 방 한 칸을 빌렸으
며, 닷새 머물 비용을 선불로 지불했다.
단심궁(丹心宮)이라는 곳을 찾는 데에는 꽤나 힘이 들었다.
단심궁은 유명한 장소가 아니었다.
백무영은 다섯 개의 주루에 들러 점소이들에게 단심궁의 위치를 물은 결
과, 표화루(飄花樓)의 점소이에게서 단심궁의 위치를 알아 낼 수 있었다.
"단심궁이오? 그 지독한 술주정뱅이 영감이 머무는 곳 말입니까? 대체
그 곳을 왜 찾으십니까?"
점소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백무영의 얼굴을 새삼 바라봤다.
"볼일이 있다."
"검을 사러 가시는 겁니까?"
"검을?"
"단심궁의 영감이 대장장이로 소문난 인물이니, 거기 가는 사람은 검을
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헤헤, 하나 헛걸음만 칠 겁니다. 그 영감쟁이
가 검을 만드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괜한 헛소문이나 내는
주정뱅이 노인에 불과합니다."
"하여간 고맙다."
백무영은 점소이의 손에 동전 하나를 쥐어 주었으며, 점소이는 그게 은자
(銀子)가 아니라 동전이라는 게 불만이라는 듯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백무영은 술을 한 주담자(酒曇子) 마신 이후에 몸을 일으켰다.
주량이 약한 사람이라면 취해 쓰러졌을 정도의 술을 마셨지만, 그는 조금
도 취하지 않았다.
내공을 익힌 사람은 술기운을 내공으로 태워 버린다.
그러하기에, 말술을 마시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시 말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단심궁!
거리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너른 석옥이 단심궁이었다.
단심궁의 문에는 이러한 방문(榜文)이 달라붙어 있었다.
<하나의 검을 팜.
검은 오직 한 자루에 불과하되, 아직 만들지 않았음.>
기괴한 선전문이다.
만들지도 않은 검을 판다고 글을 써 두고 있으니…….
가끔 지나는 강호낭객들이 검을 사고 싶은 욕심에 단심궁을 찾지만, 검을
사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씨. 퍼부어지던 눈은 가는 비로 화해 개봉부를 적셨
다.
그는 헛기침 소리를 내며 단심궁으로 들어섰다.
우선 느끼어지는 건 공기 가득 술 냄새가 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흙마당 가득히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
천장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며, 역겨운 내음과 곰팡내가 함께 풍기고 있었
다.
"이런 데 사람이 살고 있다니……."
백무영은 콧등을 찡그리며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단심궁의 뜨락으로 접어들었으며, 가꾸지 않은 화단을 보게 되었다.
화단 가에는 검로(劍爐)가 설치되어 있다.
검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지 않았다.
문득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검로 곁의 공작대 위에 놓여진 한 자루 검
이었다.
검집도 없는 검, 빛이 검고 꽤 무거워 보인다. 날도 없다. 게다가 허리가
끊어져 있으며, 녹이 붉게 슬어 있다.
"이것도 검인가?"
백무영이 중얼거릴 때였다. 갑자기 등 뒤로 무엇인가 닥쳐 들었다.
'지공(指功)!'
백무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간발의 차이로 지력에 강
타당했다.
그는 비명 소리를 억지로 참으로 비틀비틀 세 걸음 물러났다.
그가 겨우 몸을 바로잡을 때, 욕설 소리가 들려 왔다.
"네놈의 운명을 두고 비웃다니… 무례한 놈! 때려죽이고 싶다만 몸을 바
로잡는 모습을 보니, 그간 제법 열심히 배운 듯해 용서해 주겠다."
질그릇 깨어지는 듯 투박한 목소리이다.
백무영을 향해 다가서는 꼽추노인이 하나 있었다.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져 허리까지 내려졌으며,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
에는 불 같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걸치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한 검은 가죽옷.
괴노인은 술병을 꿰어 차고 걸어 나왔다.
백무영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허리에 격중된 지
력은 냉혼마전지(冷魂魔電指)!
백무영의 신체가 강하게 단련되지 않았더라면, 일 지로 인해 죽었을 것이
다.
"노인장은?"
"녠녠… 네놈이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무영!"
"그, 그럼… 일사부님?"
"사부라고 할 필요 없다. 정리(情理)로 맺어진 사제지간과는 거리가 먼
사이니까. 피차 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으음……."
"파의(破衣)에게서 네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렸다. 크크, 네놈은 예상
보다 이틀 늦게 당도했다."
"길을 잘 모르는지라……."
"닥쳐! 앞으로는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일사부의 손바닥이 번쩍 쳐들렸으며, 백무영은 가슴에 응조수(鷹爪手)를
격타당했다.
그는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그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기는 하였으되, 쓰러지지 않았다.
"시간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앞으로는 일각 일각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
다."
"명심하겠습니다."
백무영의 눈에서는 독기가 스미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적으로 사그라들었다.
괴노인은 술병을 단숨에 비운 다음에 그를 노려봤다.
"그 동안 뭘 배웠느냐?"
"여러 가지 무공을 배웠습니다."
"육사부에게 제반 병장기의 사용법을 배웠으며, 오사부에게서 무적십팔로
도를, 그리고 사사부에게서 의술과……."
백무영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괴노인의 일 장이 다시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백공장(百空掌)!'
백무영은 재빨리 몸을 틀어 백공장을 피해 냈다.
백공장은 허공에서 자연 소멸이 되었다.
"이제야 제대로 피하는군."
괴노인은 처음으로 웃음을 흘렸다.
"어이해, 저를 치십니까?"
백무영은 상당히 분개한 표정으로 일사부를 바라봤다. 일사부는 또 하나
의 술병을 쳐들어 술을 마시며 히죽 웃었다. 싯누런 이빨이 드러나는 모
습이 보기에 역겨웠다.
"너는 내가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을 했다. 그것이 맞은 이유이다."
"예?"
"아무도 믿어서는 아니 된다. 앞으로는 육 인의 사부 가운데 하나라 하더
라도 믿어서는 아니 된다. 너는 가장 많은 원수를 가지고 있는 입장. 네
정체가 밝혀지면, 강호인이 전부 힘을 합쳐 널 죽이려 들 거다. 넌 아무
도 믿어서는 아니 된다. 그 누구도 신뢰하지 마라. 넌 누구에게도 네 자
신을 밝혀선 아니 된다."
일사부의 눈빛은 숙연하기까지 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쳐들어 부러진 검
을 가리켰다.
"검을 이어 봐라!"
"이으라니요? 어떻게?"
"내공의 힘을 가해 검의 끊어진 부분을 이어라. 네가 검을 잇는다면, 네
가 누구이고 왜 우리가 길렀는지 하나도 숨김없이 네게 말해 주겠다."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백무영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자 얼마나 고뇌해 왔던가?
부러진 검을 잇는다면,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백무영은 검자루 부분과 검극(劍極) 부분을 양 손에 나뉘어 쥐고, 혼신의
공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내공은 강철을 녹일 수 있는 수준이다. 부러진 검 정도는 쉽게 이을
수 있다.
하나,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절대 이어지지 않았다.
'내공이 바다에 들어간 듯 소멸해 버리다니?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
기에, 내공을 흡수해 버린단 말인가?'
백무영은 한참 동안 혼신내공을 발휘했으나, 검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낙심한 표정이 되어 일사부를 바라보는 바, 일사부는 무심한 눈빛
가운데 이렇게 소리쳤다.
"검을 이을 때 너의 모든 비밀을 말해 주겠다. 그 이전에는 네 자신에 대
해 알려 하지 마라."
일사부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등을 돌렸다.
그는 뜨락을 가로질러 거처로 접어들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한 가지 일만 해라. 그건 이제까지 네가 배운 모
든 무공을 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