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八章 兄友對面
무창(武昌).
호북성(湖北省)의 성도로서, 장강(長江)을 끼고 있어 수로를 이용한 운송 수단이 발달하여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한 곳이다.
특히 무창은 인접해 있는 한구(漢口), 한양(漢陽)과 더불어 호북에서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철군악과 송난령은 장산현을 떠난지 열흘이 지나서야 무창에 도달할 수 있었다.
“후훗……!”
송난령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 했지만, 끝내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이상하게 기분이 들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해 쉽게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것이 철군악 때문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부인 검제(劒帝)에게서 검을 배울 때부터 검객(劒客)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비정(非情)이라는 것을 귀에 못박이도록 들어왔다.
그녀도 그것을 수긍했고, 그래서 언제나 비정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그것을 이행해 왔다.
항상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많은 기남아(奇男兒)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개중에는 천하제일의 갑부도 있었고, 천고의 기재와 최고의 미남도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들을 본체만체하던 그녀도 철군악과 같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묘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천재같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송난령은 여태껏 보아 온 어떤 남자보다도 철군악이 마음에 들었다.
송난령은 생글생글 웃으며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피가 끓는 젊은이라면 송난령 같은 절세미녀가 웃음 짓는 것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겠지만, 철군악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송난령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딱딱한 표정으로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철군악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하던 송난령은 고운 아미(蛾眉)를 약간 찡그렸다.
지옥(地獄)의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철군악의 두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군악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보아 고아(孤兒)가 아닌가 생각되는 두 명의 소년들이 그들보다 훨씬 덩치가 커다란 서너 명의 장한들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퍽…… 퍽!
어찌나 심하게 매를 맞는지 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올 정도였다.
“이 개자식들이 뒈지려고, 감히 내 말을 안 들어?”
장한들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온갖 듣기 거북한 욕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구경만 할 뿐, 누구도 소년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흉흉한 장한들의 기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뭔가 하고 그쪽을 쳐다보던 송난령은 다시 실소를 머금었다.
겉으로는 무심하고 비정해 보였지만, 철군악은 보기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는 사내였다.
철군악은 딱딱한 안색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송난령은 모르고 있었지만, 철군악은 지금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는 두 명의 소년 중 조금 더 커보이는 소년이 그보다 작은 소년의 몸을 필사적으로 감싼 채 매를 맞고 있는 것을 보자 사형인 철단소가 떠오른 것이다.
사형도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었다.
철군악은 사형을 좋아했고 또 존경했지만, 정작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짐만 됐을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철군악은 사형의 죽음을 보며 맹세했다.
비록 사형의 목숨을 지켜 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누구도 그의 맹세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무서움에 치를 떨게 될 것이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막 주먹을 내리치던 한 장한의 손목을 잡았다.
“억……?”
한참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던 장한은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자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 개새끼……”
막 심한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돌리던 장한은 철군악의 두 눈을 보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기 시작했다.
“으……!”
조금 전의 기세등등한 태도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오히려 구경하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다른 장한들도 휘두르던 주먹을 멈추고 모두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헉……!’
그들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철군악의 눈을 마주 대하자 오금이 저려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무인들에게는 기(氣)라는 것이 있다.
일명 기세(氣勢)라고도 하는 그것은 보통 때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싸움을 한다거나 화가 나면 자신도 모르게 외부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한들은 철군악에게서 그와 같은 기세를 느낀 것이다.
그들은 강호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의 비위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온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한들을 향해 철군악이 스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들이 한 번만 더 저 소년들을 괴롭힌다면 그 잘난 주먹을 영원히 쓸 수 없게 만들어 주겠다.”
철군악은 말을 하며 근처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를 향해 슬쩍 한 손을 휘둘렀다.
이런 자들일수록 강자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간단히 한 수 보여 주는 것이 백 마디의 말보다 훨씬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쾅!
폭음이 터지며 최소한 삼사백 근(斤)은 됨직한 돌덩이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동시에 부스러진 잔해가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타다닥……
돌멩이가 온몸으로 떨어져 살갗이 따가웠지만, 장한들은 감히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 예!”
철군악은 두 손을 모은 채 연신 굽실거리는 그들을 보자 왠지 화가 더 치밀었다.
“꺼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한들은 십년감수한 표정을 지으며 도망치듯 허겁지겁 사라졌다.
허둥대는 꼴이 꼭 죽음 직전에 목숨을 건진 자들 같았다.
철군악은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아직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냐?”
소년들에게 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에는 송난령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주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소년들은 어찌나 심하게 맞았는지 철군악이 부축을 해주고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헤헤…… 고맙습니다!”
그들은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하고도 웃고 있었다.
비록 가난과 세파에 찌들려 있는 모습이었지만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것이 한없이 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철군악은 형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평소의 딱딱한 어조는 간데없었고, 두 눈 또한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이 근처에서 유명한 깡패들인데, 우리가 점소이 노릇을 해서 매일 조금씩 모은 돈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저희들은 비록 그들이 무서웠지만, 이 돈만은 절대 뺏길 수 없었어요. 저희들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요!”
“미래……?”
“예, 미래요! 저희들은 돈을 모아 언젠가는 큰 부자가 되고 말 거예요.”
철군악은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쳐다보았다.
비록 남루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과거의 자신처럼 분명한 목표와 꿈을 갖고 있었다.
철군악은 사람이라면 꿈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기름이 다 떨어진 등잔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소년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름이 뭐지?”
“예, 저는 용천운(龍天雲)이고 제 동생은 용천월(龍天月)이에요……”
“이름이 아주 멋있구나!”
용천운이라 이름을 밝힌 소년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헤헤…… 사실 저희는 고아예요. 멋있게 보이는 이름으로 저희가 지은 거죠. 동생은 달을 좋아하고 저는 구름을 좋아하거든요……”
철군악은 불현듯 옛일이 떠올랐다.
천애 고아(天涯孤兒)였던 철군악도 자신의 성을 몰라 사형의 성(姓)을 따랐었다.
이름은 사형이 직접 그에게 지어 준 것이었다.
군악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지어 준 사형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씁쓰레한 미소를 짓던 철군악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용천운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혹시 성안에 열빈루(悅賓樓)라는 객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용천운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곳은……”
철군악은 그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내 답례로 간단한 호흡법(呼吸法)을 하나 알려 줄 테니 매일 꾸준히 연마하거라……
일 년만 지나면 아까처럼 불량배들에게 매를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윽고 철군악이 조그만 목소리로 구결(口訣)을 암송했다.
“호장단흡(呼長短吸), 삼령조화(三靈造化)……”
천운, 천월 형제는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받고 항상 동경해 마지않던 무공까지 배울 수 있게 되자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지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구결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무공의 기초가 전혀 없는 그들 형제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나, 머리는 제법 총명한지 단 세 번만 듣고도 구결을 전부 외울 수 있었다.
철군악은 그들이 생각보다 똑똑한 것을 알자 구결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곁들여 주었다.
사실 철군악이 방금 그들에게 알려 준 것은 간단한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이었지만, 그의 사문(師門)에서 전해 오던 것이라 잘 터득하면 무궁무진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천운, 천월 형제는 철군악의 설명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듣더니 수십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떠났다.
철군악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응시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동네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보기 좋군요……!”
철군악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송난령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군악은 그녀의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저 소년들은 더 이상 아까처럼 무기력하지 않을 것이오.”
송난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가슴에 철군악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까?
그것은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열빈루(悅賓樓).
무창성 남쪽 어귀에 있는 제법 규모가 커다란 주루로, 음식 맛이 좋기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철군악과 송난령은 지금 그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철군악은 식사가 거의 끝나 가자 점소이를 불렀다.
이내 홍안(紅顔)의 소년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손님, 부르셨습니까?”
“이곳의 홍소다정탕(鴻燒多情湯)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맛을 볼 수 있소?”
느닷없는 질문에 점소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저희 업소에서는 그런 것은 팔지 않는데요?”
“분명히 여기 그런 음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하……! 잘못 아셨겠죠? 제가 이곳에서 오 년이나 근무했지만, 그런 음식이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입니다.”
철군악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알겠소.”
점소이가 별 이상한 손님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물러나자 송난령이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나도 요리에 대해서 조금 아는데, 그런 탕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요. 그게 뭐죠?”
“아니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소.”
송난령은 뭔가 미심쩍음을 느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철군악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송난령이 식사를 마저 하려고 막 젓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혹시 송 소저가 아니시오?”
갑자기 어디선가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송난령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건너편 탁자에 이제 막 주루로 들어온 듯 청년 세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중 백의를 입은 귀공자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난령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정말 송 소저군요!”
백의미공자(白衣美公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송난령에게 걸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송난령이 마주 인사를 하자 백의미공자가 환한 얼굴로 그가 있던 탁자를 가리켰다.
“송 소저, 이게 얼마 만입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합석을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송난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그의 의도를 묻는 것이다.
철군악은 번거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백의미공자의 기대 어린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소저 편한 대로 하시오.”
그의 말에 백의미공자가 기쁜 얼굴로 자신이 있던 탁자를 가리켰다.
“저곳이 더 넓으니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곧 철군악과 송난령은 그들과 합석을 했다.
백의미공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점소이를 불러 새로운 음식을 시켰다.
무엇이 그리 기쁜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우선 인사부터 하시지요. 이쪽은 철사문(鐵獅門)의 소문주인 철수공자(鐵手公子) 사승우(査丞優), 사 공자요.”
송난령은 백의미공자가 가리키는 흑의청년을 바라보았다.
짙은 검미(劒眉)에 창백한 안색이 유달리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입가에 그린 듯이 걸려 있는 퇴락한 미소만 아니라면, 누가 보아도 감탄의 기색을 떠올릴 만한 칼날 같은 기세가 그의 전신에 어려 있었다.
그는 절세미녀인 송난령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만 까딱거리고는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백의미공자는 그런 흑의청년의 태도에 이골이 났는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송난령을 바라보았다.
“사(査) 형(兄)은 원래 세상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 소저께서 이해하십시오!”
“저는 괜찮아요.”
백의미공자는 사승우를 향해 힐끔 곁눈질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이번에 가리킨 사람은 전신에 누런 황의를 입고 있었는데, 덩치가 어찌나 커다란지 마치 거대한 산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텁수룩한 구레나룻에 부릅뜬 고리눈이 실제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그는 송난령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그녀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강호에 영명(英名)이 자자한 신검미인(神劒美人)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오늘 내 눈복이 터졌군요. 본인은 순우대웅(淳宇大熊)이라 합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루의 지붕이 다 들썩거릴 정도였다. 정말 이름처럼 커다란 곰을 보고 있는 듯했다.
송난령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마주 인사했다.
“아! 바로 그 유명한 순우 공자시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송난령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철군악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백의미공자와 같이 앉아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사승우는 무림십대고수(武林十大高手)라 일컬어지는 아버지의 절예(絶藝)를 거의 터득해 이미 부친을 능가하는 고수라고 평가받고 있었고, 백의미공자는 강호사대검문(江湖四大劒門)의 하나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소가주 남궁욱(南宮旭)으로,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기재였다.
그리고 거대한 체구의 황의청년 또한 절대 그들에게 뒤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남궁욱이나 사승우처럼 배경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외문(外門)의 기공(奇功)을 극에 이르도록 연마해 전신에 도검(刀劒)이 불침(不侵)할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알려진 고수였다.
이들은 모두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로 손꼽히고 있었다.
“송 소저, 그런데 이분은……?”
자리에 앉자마자 남궁욱이 철군악을 가리키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신검미인이라면 강호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기재로, 그녀와 같은 사람이 아무하고나 어울려 다닐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범상치 않은 인물일 터인데, 강호에 대한 견문이 제법 풍부한 남궁욱으로서도 철군악이 누구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송난령은 철군악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시선에 의혹이 어려 있음을 느꼈지만, 그녀 또한 철군악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송난령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철군악이 입을 열었다.
“철군악이라 하오.”
철군악이 간단히 인사를 하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그들은 철군악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는지 그와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이내 송난령과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바로 이틀 앞으로 다가온 비룡승천대회(比龍昇天大會)에 온통 쏠려 있었다.
비룡승천대회(比龍昇天大會)!
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인가?
검을 든 무인치고 사해오호(四海五湖)에 찬란한 무명을 날리기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홍안(紅顔)의 소년 검사(劒士)부터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기인(老奇人)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이 넘는 무림인들 중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일류고수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 중에는 순수한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실력보다는 배경이 뛰어나 능력 이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명문대파(名門大派)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자신의 실력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어떤 이들은 실력도 없으면서 배경이 뛰어나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면도 없지 않았다.
비룡승천대회는 이와 같은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백여 년 전에 생겨난 비무대회였다.
일단 이 대회는 여타 다른 비무대회와는 달리 나이가 사십을 넘지 않으면 출전에 제한이 없었다.
참가자가 명문정파의 촉망받는 기재이건 흉명(兇名)을 떨치는 사파(邪派)의 마인(魔人)이건 상관이 없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일정한 시험을 통과한 후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참가자는 엄청난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십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이 대회의 우승자들은 모두 일세(一世)를 풍미하던 무적(無敵)의 고수였다.
개중에는 천하 제일인으로 공인받은 사람도 있었고, 강호를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든 마왕(魔王)도 있었으며 한평생 모든 이의 추앙을 받은 대협(大俠)도 있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림인들에게는 일생의 영광이요 자랑거리였다.
그러기에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불철주야 내공(內功)을 수련하고 검법을 연마했다.
한마디로 비룡승천대회는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요 희망인 것이다.
“이번 대회에 송 소저도 참가하실 겁니까?”
송난령은 남궁욱의 빛나는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부님께서 많은 도움이 될 거라 하시기에……”
“하하! 소생은 은근히 이번 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있었는데, 소저께서 참가하신다니 우승은 포기해야겠군요!”
남궁욱의 말에 송난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 공자께서는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시는군요.”
“아닙니다. 당금 천하에 신검미인의 미모와 뛰어난 검예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과연 소저를 당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겸손해서가 아니라, 사실 저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남궁욱은 물론이고 묵묵히 술만 마시던 사승우의 얼굴에도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신검미인 하면 후기지수 중에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고수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중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면 넘쳤지 이렇게 약한 소릴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남궁욱은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송난령을 바라보았다.
“소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얼마 전에 사부님께 들은 얘기인데, 이번 대회의 참가자 중에는 단소동(段東)도 있다더군요.”
남궁욱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송난령을 바라보았다.
“아니, 단소동이라면 마도제일검(魔道第一劒)이라는 혈우마검(血雨魔劒)을 말하는 겁니까?”
“천하에 단소동이라 불릴 사람이 그 외에 누가 또 있겠어요?”
남궁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혈우마검(血雨魔劒) 단소동(段東)!
이 이름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커다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혈우마검이 강호에 모습을 보인지는 채 십 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의 검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이미 수백을 넘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피에 굶주린 살인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에게 도전을 하거나 시비를 거는 자들은 절대 살려 둔 적이 없을 뿐이다.
그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게 해주는 흑룡단(黑龍團) 사건은 강호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언젠가 혈우마검이 볼일을 보기 위해 배로 장강(長江)을 건넌 적이 있었다.
원래 장강은 바다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넓을 뿐만 아니라, 그 길이 또한 매우 길어 그곳을 무대로 수적(水賊)질을 일삼는 무리들이 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흑룡단이라는 수적 떼가 있었는데, 이들은 재수가 없게도 그만 혈우마검이 타고 있는 배를 노략질의 상대로 삼은 것이다.
흑룡단은 혈우마검에게 금품을 요구했고, 당연히 혈우마검은 돈 대신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아니,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륙(屠戮)이라고 해야 옳았다.
恝遲I
시작된 지 채 일(一) 각(刻)도 되지 않아 배를 습격했던 흑룡단원 삼십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혈우마검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흑룡단의 본거지를 찾아가 그곳에 남아 있던 오십여 명의 사람을 모조리 도륙했다.
장강에서 제법 위세를 떨치던 흑룡단은 단지 혈우마검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나절 사이에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후로, 감히 혈우마검에게 시비를 거는 바보는 없었다.
혈우마검 하면 살성(殺星)의 대명사로 여겨져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남궁욱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비록 희대의 마인이라지만, 과연 송 소저와 같은 고수가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단지……?”
송난령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으로 떠나기 전에 사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 단소동이 검을 펼칠 때, 귀신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나고 검이 암적색을 띤다면 절대 맞서지 말라구요.”
남궁욱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천하에 수없이 많은 검법이 있지만, 귀곡성 같은 검명(劒鳴)이 나고 검기(劒氣)가 검붉은 색을 띠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인들이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여태껏 잠자코 있던 철군악이 한마디 했다.
“소저는 삼절마검(三絶魔劒)을 말하는 것이오?”
“예! 맞아요.”
“뭐라고요?”
남궁욱 등은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삼, 삼절마검이라면 천 년 전 멸망한 마교(魔敎)의 비전검법(秘傳劒法)이 아닙니까?”
“그래요.”
“이럴 수가……!”
중인들은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삼절마검(三絶魔劒)!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전설에 의하면, 제석천(帝釋天)에 의해 무저갱으로 떨어진 아수라(阿修羅)가 세상을 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과 저주를 담아 만든 검법이 바로 삼절마검이라 했다.
또한, 삼절마검은 지닌바 위력이 잔인할 정도로 끔찍하고 기괴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다고 했다.
천 년 전 마교의 멸망과 함께 인세에서 영원히 사라졌다고 알려진 공포의 검예가 바로 삼절마검이었다.
그런 가공할 검법을 혈우마검이 익히고 있다니,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고금제일검마(古今第一劒魔)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송난령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가 삼절마검을 익히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거예요.”
“흐음……!”
중인들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일대의 기재들이라 내심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비무를 하기도 전에 신검미인이나 혈우마검 같은 뜻밖의 강적이 연이어 나타나자 의기소침해진 것이다.
대화가 끊기자 철군악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불그스름한 노을이 온 천하를 적시고 있었다.
“……”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는 철군악의 눈이 흡사 먹이를 찾는 맹수의 그것처럼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밤[夜].
밤은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는 안락을, 시간과 돈이 많은 부자들에게는 환락을 제공해 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미 자시(子時)가 가까워 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철군악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는 남궁욱 등과 헤어진 후 이 객점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옆방에서는 아마 송난령이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을 꿈속에서나마 만나고 있지는 않을까?
철군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무슨 꿈을 꾸건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꿈에서 애인을 만나든 혹은 부모를 만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한가로이 쓸데없는 일에 심력(心力)을 소비할 여유가 없었다.
똑, 똑!
돌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철군악은 흠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철군악은 잠시 방문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열려 있소.”
이내 방문이 열리며 갈색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기다란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보통 키에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을 간직한 듯한 눈빛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철군악은 그를 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군악이 형님을 뵙니다.”
세세한 눈초리로 철군악을 뜯어보던 중년인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네…… 네가 진정 군악이란 말이냐?”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의인은 다시 한 번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꽉 다물린 입, 우뚝한 코에 남자다운 기상.
비록 어릴 적의 장난스런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 그가 보았던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구, 군악아!”
갈의인은 격정을 참지 못하고 철군악을 꽉 끌어안았다.
철군악은 상대의 몸이 가늘게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스스로의 감정이 메말랐다고 여기던 철군악조차 괜스레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갈의인은 죽은 철단소의 죽마지우(竹馬之友)였다.
동천립(董天立)이라는 이름의 그는 철단소의 절친한 친구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비밀결사의 성질을 띤 단체를 맡아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철군악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철군악보다 거의 스무 살 정도 나이가 많은 동천립은 만날 때마다 항상 그를 귀여워해 주었다.
철군악과 철단소가 지난 오 년간 비무를 위해 강호를 떠돌아다니느라 그들은 서로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급작스레 철군악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더군다나 철군악은 철단소와 항상 함께 다녔으니, 이 년이나 연락이 끊긴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동천립이 격정을 참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한참 동안 철군악을 안고 있던 동천립이 포옹을 풀더니 사뭇 떨리는 눈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매우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는 철군악이 그들 단체의 비밀 신호로 자신을 만나려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도 반가워 안절부절못하느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철군악이 그에게 연락을 취한 방법이 철단소가 그와 연락할 때 주로 쓰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단소는 보이지 않고 철군악만 불쑥 나타나자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형님은…… 어디에 계신가?”
철군악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동천립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초조함, 그리고 무언가를 바라는 애원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철군악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의 입으로 사형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동천립은 철군악의 행동과 표정을 보자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 정녕 단소가 죽었단 말인가?”
동천립은 허탈한 표정으로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철단소처럼 책임감 강한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년 동안이나 연락을 끊을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적들의 함정이 있는 곳으로 떠난 후 연락이 끊기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는 지난 이 년 동안 항상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너무 심한 부상을 입어 도저히 연락을 할 수 없는 것이겠지 하는 바람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단지 희망일 뿐이었다.
“허허허……!”
철군악은 마치 실성한 듯 웃음을 머금고 있는 동천립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친인(親人)을 잃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커다란지 이미 자신도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지 끝없는 슬픔만이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 파고들 뿐이다.
“흐으……!”
한참이 지나자 좁은 방안을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던 울음 같은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서야 철군악은 동천립의 우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사형의 시신 앞에서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맹세……?”
“제가 알기로 사형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라도 예의를 지켰고,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결코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형이 한 쪽 팔이 잘린 채 복부에서 내장을 쏟아 내며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형을 그렇게 만든 놈들은 그때쯤 계집들을 끼고 술을 처먹으며 노닥거리고 있었겠죠…… 저는 그놈들에게 사형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해줄 겁니다.”
철군악은 잠시 빛나는 눈으로 갈의인을 응시하더니 한 자 한 자 끊듯 말을 이어 갔다.
“사형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들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설령 황제(皇帝)라 하더라도 지옥 끝까지 쫓아가 사형을 건드린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말을 하는 철군악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두 눈은 시퍼런 불길을 토해 내고 있었다.
동천립은 철군악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으나, 반대로 그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래야지! 단소는 네게 단 하나뿐인 사람이었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동천립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고개를 끄떡이던 동천립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철군악을 응시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예전에는 그저 장난이나 좋아하는 말썽꾸러기로만 생각했었는데……”
“세월은 인간을 변하게 합니다.”
“그렇지…… 그래.”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천립의 표정이 점점 기이하게 변했다.
그것은 돌아오지 못할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게 줄 것이 있다.”
동천립은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르륵, 사르륵!
보따리가 풀리자 기다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劒).
그것은 바로 한 자루 검이었다.
길이가 거의 넉 자에 이르는 장검(長劒)이었는데, 물소가죽으로 만든 검집만 보아도 결코 범상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동천립은 잠시 감회 어린 얼굴로 검을 만져 보더니 이내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청명한 소리와 함께 검신(劒身)이 드러났다.
검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날카로워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명검처럼 무슨 신기(神氣)를 띠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검신이 은은한 묵색(墨色)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병기를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돈이나 권력을 좋아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검을 주로 쓰는 철군악이 검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동천립은 검을 들고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이것은 네 사형인 단소에게 선물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그와 가장 친했던 네가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아마단소도 네가 이 검을 사용하길 바랄 것이다…… 너는 이 검의 이름이 뭔지 아느냐?”
철군악이 묵묵히 고개를 젓자 동천립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쓸쓸하게 웃었다.
“네 사형은 전부터 이 검을 쓰고 싶어 했지. 예전에 우연히 단소가 하는 말을 듣고 그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몇 년 동안 고생 끝에 어렵게 구했는데, 이젠……”
동천립은 격정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시간이 꽤 흘러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검의 이름은 바로 무적인(無敵刃)이다. 너도 무인이니 아마 한 번쯤은 무적인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게다.”
철군악의 눈에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무림인이라면 무적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수천 년 무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병기로 손꼽히는 것이 무림십대병기(武林十大兵器)인데, 무적인은 바로 무림십대병기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검이었다.
이것은 백 년 전의 명장(名匠)인 서문청령(西門淸靈)이 수십 년간의 각고 끝에 겨우 만들어 낸 명검으로서 다른 어떤 병기에도 손상되지 않고 아무리 뜨거운 열기라도 감당할 수 있다 했다.
더군다나 세간에는 검의 주인이 위기에 처하면 스스로 울음을 토해 낸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떠돌았다.
무적인은 그야말로 무를 익힌 사람이라면 꿈에서라도 얻기를 갈망하는 기보(奇寶)인 것이다.
동천립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이 검이 명검(名劒)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다른 병기로는 이 검을 손상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검이 일반 쇠가 아니라 천산(天山)에서만 난다는 곤오신철(坤烏神鐵)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지.”
곤오신철이라면 철군악도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쇠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만년한철(萬年寒鐵)이 땅의 정기를 흡수해 생성되는 것이 바로 곤오신철이라 했다.
곤오신철은 매장량이 극히 적을 뿐 아니라 그 가치가 엄청나,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오히려 비싸다고 알려져 있었다.
“곤오신철은 일반인은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나 서문청령에게는 그것을 다룰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곤오신철을 입수한 후 무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해서야 한 자루의 검을 만들 수가 있었지. 그것이 바로 무적인이다.”
동천립은 말을 끝내고 철군악에게 검을 건넸다.
검을 받아 찬찬히 살펴보던 철군악의 눈에 언뜻 이채가 떠올랐다.
“……!”
검신에 희미한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철군악 정도의 고수도 안력(眼力)을 집중해야 겨우 볼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정말 특이했다.
한 손에 검을 든 명왕(明王)이 악귀나찰을 손으로 잡아 들고 발로 짓누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철군악은 여태껏 이처럼 괴이한 그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은 언뜻 보기에도 매우 섬뜩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으며, 명왕이 꼭 아수라(阿修羅)처럼 묘사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검신에 이상한 그림이 있군요.”
철군악이 그림을 살펴보자 동천립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처음 검을 입수했을 때, 기이한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검에 새겨져 있는 것은 분명 불가(佛家)의 명왕(明王)인데, 나찰(羅刹)들을 짓누르고 있는 형상이 너무 섬뜩했기 때문이지. 나는 궁금증이 생겨 여러 방면으로 검신에 새겨져 있는 그림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누가 그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수년 동안의 노력 끝에 한 가지 사실만은 알아 낼 수 있었지.”
철군악이 궁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동천립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너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철군악은 동천립의 말대로 그림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연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신에 음각된 그림의 선이 매우 가늘면서도 매끄럽다는 점이 그것을 본 철군악의 뇌리에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이 떠올랐다.
“엄청난 내공(內功)이군요.”
“그렇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검이나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내공만으로 이미 완성된 검에 그림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일반 쇠가 아닌 곤오신철로 수천, 수만 번 단련된 검에 말이다.”
철군악은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곤오신철은 용암(鎔巖)에도 녹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곤오신철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 없었다.
곤오신철을 다루는 비법을 모른다면 천하의 누구라도 그것을 절대 다른 모양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새겨 넣은 사람은 자신의 순순한 내공만으로 곤오신철로 만들어진 검에 정교한 그림을 새겨 넣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는 고금(古今)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내공의 소유자일 것이다.
동천립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마 당금 강호에서 가장 강력한 내공을 가진 사람에게 검을 부러뜨리라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단지 검을 구부릴 만한 힘만 있으면 될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무(武)의 조종(祖宗)이라는 보리달마(菩提達磨)조차도 이 정도 내공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만약 이 그림을 새겨 넣은 사람이 현존한다면 천하의 누구도 그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마인이라면 강호는 엄청난 혈겁(血劫)에 빠질 것이고, 다행히 그가 바른 마음을 갖고 있는 대협이라면 강호는 머지않아 평화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철군악은 묵묵히 검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보자기로 싸맸다.
어찌 됐든 이제부터 검의 주인은 바로 그였다.
철군악은 좋은 검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도 어쩌면 사형의 유일한 유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물건을 얻었다는 것이 더욱 기꺼웠다.
“이 검…… 잘 쓰겠습니다.”
철군악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자 동천립은 기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검의 원주인은 단소지만, 다행스럽게도 네가 그 검을 맡겠다니 나로서는 기쁘기 한량없다. 그 검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이루기 바란다……”
동천립은 말을 끝낸 후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염려스런 얼굴로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형의 복수를 하려면 너 혼자의 힘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 우리와 같이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떻겠느냐?”
철군악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형의 복수는 제 혼자 힘으로 하고 싶습니다.”
철군악의 단호한 대답에 동천립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 대신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거라. 어차피 단소를 죽인 놈들은 우리의 적이기도 하니까.”
“예.”
동천립은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단소의 죽음은 내 잘못이 크다. 그가 위험한 곳으로 가려는 것을 알고도 끝까지 만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비록 뒤늦게 우리 쪽 사람을 보내 그를 도우려 했었지만, 그들마저도 한 기인(奇人)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심한 자책감과 후회가 묻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철단소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뜨거운 눈으로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유정(有情)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라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부디 조심해서 사형의 못다 한 꿈을 꼭 이루도록 하려무나.”
철군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동천립의 두 눈을 마주볼 뿐이었다.
< 제 1권 끝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