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맺힌 은원(恩怨)은 풀어야
(1)
새벽이 왔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강이 먼저 푸르게 깨어 일어났고 수목(樹木)이 일어났고 대장간 지붕 위의 하얀 서리가 풀풀이 일어나서 대기 속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을 끼고 바로 붙어있는 대장간은 한 떼의 안개에 포위되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그 안개는 대장간의 굴뚝에서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
이른 새벽부터 대장간은 깨어 있었다.
쇠망치가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마다 붉은 쇳덩이는 쩌엉! 쩡! 비명을 질렀다.
간단없이 들리는 망치질 소리가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메아리쳐 돌아오곤 했다.
아침이 되기 전, 대장간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후끈한 열기!
대장간 안은 쇳물이 끓어 넘치는 화로(火爐)에서 뿜어내는 열도 열이지만 웃통을 벗어 던진 몸집 좋은 사내의 맹렬한 기세(氣勢)에 더욱 뜨거웠다.
사내의 몸집은 약간 마른 듯했지만 근육이 속으로 뭉쳐져 있어 탄탄한 느낌을 주었고, 얼굴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차가운 인상이었다.
대장간 문이 소리 없이 열렸고, 한참동안 백의 인영은 말없이 대장장이 사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흰 눈썹이 특이한 노인 아닌 노인, 천일기였다.
대장장이 사내는 오른손에 잡은 망치로 힘을 주어 두들기는데 새빨간 쇠끝은 두드리는 대로 늘어났다.
쇠의 강도와 크기를 능숙하게 조절하는 숙련된 손길.
집게를 이리저리 뒤집어 붉은 쇠를 요령있게 두들기는데 망치가 치는 대로 쇠는 낫도 되고, 곡괭이도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내가 말했다.
"뭘 사러 오셨으면 얘길 하시오."
천일기가 대장간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이미 사내는 그가 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의 인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쓸 만한 검을 좀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대장장이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여기는 농기구를 파는 곳이지 무기를 파는 곳이 아니오. 길 건너편으로 가보시오. 식성대로 고르실 수 있을 것이외다."
"허나 강호의 어떤 대장장이도 탐기랑(探器浪) 고독검(高獨儉)의 솜씨를 능가할 수는 없지."
천일기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를 쩌렁쩌렁 울리던 망치 소리가 뚝 멎었다.
툭!
대장장이 사내는 망치를 떨어뜨렸고, 망치는 떨어지면서 발등을 때렸지만 사내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천일기가 말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쇠를 다루는 솜씨에 관한 한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어째서 농기구 따위나 만지고 있는 건지……."
대장장이 사내의 얼굴이 잔잔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누, 누구냐?"
천일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벌써 내 목소리를 잊었나 보군. 날 모르겠나?"
순간 홱, 대장장이 사내가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 망치로 내리치던 시뻘겋게 달궈진 쇠가, 아니 날이 선 낫 한 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내가 너 같은 놈을 어떻게 알아!"
고함소리와 함께 낫이 천일기의 목을 향해 쉬이잇! 날아들었다.
백의 인영은 슬쩍 고개를 뒤로 젖혔고, 낫은 살바람을 일으키며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허어, 아는 척 좀 했다고 대뜸 목을 노리는 건가?"
"날 아는 놈은 모두 죽인다!"
고독검의 낫에서 파란 예기가 쏟아져 나가 천일기의 몸을 휘감았다.
금방 피를 쏟고 쓰러질 듯 위태위태하면서도 천일기는 교묘하게 발을 놀려 이리 저리 피하는데 그 수법이 보통이 아니다.
앞으로 가는가 하면 뒤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는가 싶으면 왼쪽으로 갔다.
고독검이 휘두르는 낫의 예기(銳氣)는 점점 무뎌져 갔다. 힘이 떨어져서는 아니다. 상대가 펼쳐 보이는 솜씨에 놀라서는 더 더욱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보법을 밟는 천일기의 동작이 무척 눈에 익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어디서 봤을까? 어디서…….'
천일기는 뒤로 서너 장이나 한꺼번에 물러나 낫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고독검의 평소 성격이었다면 절대 쉽게 놓아주지 않았겠지만 그는 공격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그저 망연히 백의사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천일기는 조용히 시 한 수를 읊었다.
황운은 만리를 뒤덮어 바람에 나부끼고,
백파는 여섯 갈래로 설산을 휘돌아라…….
黃雲萬里動風色,
白波六道流雪山…….
고독검은 사뭇 놀라는 표정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결코 더워서 흘리는 땀이 아니었다.
"서, 설마?"
"아직도 나를 모르겠느냐?"
"대, 대형!"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내뱉곤 곧 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그 모습은?"
과거 천일기의 구빛 피부는 백지장처럼 허옇게 변해 있었고, 천하제일 미장부로 이름을 날리던 모습은 추하고 강마르게 변했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라고 단순히 세월 속에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천뇌옥 들어간 지 사흘 만에 백발이 되었고 열흘 만에 눈썹이 허옇게 변했지."
천일기의 목소리에는 진한 아픔이, 세월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고독검은 낫을 떨어뜨렸다.
"대형!"
그리고 허물어지듯 두 무릎을 땅바닥에 박았다.
"못난 아우 고독검이 삼가 대형을 뵈오!"
고독검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웃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웃음은 눈물이고 통곡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어디 있나?"
"대형께서 탈옥하셨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으로!"
그의 목소리는 울먹이듯 들떠 있었다.
"갈위량(葛萎良)은?"
고독검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형제들의 힘이 미약하여 아직……."
천일기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그의 눈 속에 작은 불꽃이 지펴지더니, 이내 활활 타올라 그의 온몸을 사르기 시작했다.
"독검! 내 검을 만들어다오. 날이 두텁고 무거운 놈으로!“
* * *
두두두!
황량한 대지 위에는 여섯 필의 말이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지축을 울리며 폭풍처럼 질주하고 있다.
선두는 커다란 장검(長劍)을 등에 멘 천일기가 섰다. 그리고 그 뒤를 고독검을 비롯한 다섯 명의 사내가 일렬로 따르고 있었다.
청룡육존(靑龍六尊)!
강호에선 천일기와 그의 다섯 의형제를 이렇게 불렀다.
장강(長江) 남북(南北)을 누비며 기행을 펼쳤던 이들이 십구 년 만에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특색있는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가운데에서 채찍질을 하고 있는 탐기랑 고독검은 면이 넓고 길이가 짧은 칼을 왼쪽 팔목에 매달고 있었고, 철혈대군(鐵血大君) 맹용백(孟龍白)은 톱니바퀴처럼 둥그런 모양에 날이 뾰족뾰족 선 일월륜(日月輪)을, 천도귀랑(天道鬼浪) 오진담(吳進潭)은 여섯 척이 넘는 긴 대도(大刀), 풍파창(風破槍) 강우(姜祐)는 일장쯤 되는 긴 장창(長槍)을 각각 꼬나쥐고 있었다. 그리고 맨 오른쪽의 현풍번(玄風飜) 노소군(魯蘇窘)은 폭이 넓은 검은 깃발을 등에 매달고 있었다.
그들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 사라진 뒤 일각도 되지 않아서 청룡육존이 오던 방향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청룡육존이 말발굽에 땀이 나도록 휘달려 갔던 길을 유유자적, 휘파람을 불면서 쫓아오는 사내의 모습은 가히 경공(輕功)의 신이라 할 만했다. 무서운 속도로 쭉쭉 앞으로 나가는데 발바닥은 땅에 닿지도 않았다.
강호에서 이 정도 경공술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하나뿐이다. 무영천리 석비룡, 단언컨대 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 *
평소 조용한 청룡보(靑龍堡) 앞이었지만 이날따라 스산한 적막(寂寞)이 흐르고 있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는 왠지 모르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긴장감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는 걸까?
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리서 뽀얀 흙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흙먼지를 구름처럼 피워 올리며 웅자(雄姿)를 드러내는 청룡육존의 모습.
청룡보의 정문에서 삼십여 장 거리에 이르렀을 때 천일기는 오른손으로 말고삐를 홱, 잡아당기며 왼손을 어깨 위로 번쩍 치켜 들었다.
"워워!"
그의 수신호에 따라 뒤를 따르던 다섯 형제도 말고삐를 잡아당겨 제동을 가하며 일제히 멈춰 섰다.
"정말 오랜만에 내 집에 돌아왔군."
천일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거대한 현판 위에 웅후한 힘으로 휘갈긴 청룡보라는 글자.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곳을 십구 년 만에 찾아왔다.
"모든 게 예전 그대로야. 비록 주인은 바뀌어 십구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였다.
쾅!
청룡보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둑이 터지듯 붉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 손에 한 자루씩 검을 꼬나쥔 일백여 명의 무사들은 반월형(半月形)으로 대회륜진(大回輪陣)을 쳤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듯 그들의 행동은 절도가 있었고 신속했다. 거의 동시에 청룡보의 지붕과 담장에 검은 그림자들이 쑥쑥 솟아올랐는데, 대략 오십여 명쯤 되어 보이는 수의 궁수(弓手)들이 시위에 화살을 매기고 금방이라도 쏘아 낼 듯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듯 청룡육존을 꼬나보며 공격자세만 취하고 있었다.
고독검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대형께서 세상에 다시 나오신 걸 들은 모양인데…… 제법 용기가 가상하군요. 꼬리를 말고 튀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렇게 대대적인 환영행사까지 준비해 둘 정도라면……."
천일기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그만큼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고……."
(2)
"껄껄껄!"
대회륜진을 이루고 있는 무사들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새벽녘 까치의 울음소리가 요란스럽더니 옛 친구들이 찾아오느라 그랬던 모양이군."
목소리와 함께 무사들 속에서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천일기의 음성이 떨렸다.
"갈위량…… 드디어 네놈을 만났구나."
갈위량의 모습은 매우 온화해 보였다. 얼굴에는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턱은 맨질맨질하게 면도를 한 반면, 검은 콧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은 청렴한 노학자의 자태, 그 자체였다.
갈위량의 등 뒤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황실에서나 볼 수 있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는데,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일곱 개의 채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형형색색의 실을 꼬아 만든 것인데, 백황적녹흑자옥(百黃赤綠黑紫玉)의 일곱색이 어울려 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모습이 그럴까?
여인의 얼굴은 화사했고, 밝게 빛났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녀의 입언저리에 매달려 있는 오만한 미소였다.
그것은 그녀가 결코 보통의 여인과 같이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비록 그녀의 미모가 출중하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주님을 뵈옵니다!"
홍의(紅衣) 무사들은 일제히 갈위량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보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미럴!"
철혈대군 맹용백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이죽거렸고 현풍번 노소군이 맞장구를 쳤다.
"요샌 도둑놈을 보주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갈위량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일부러 못들은 체하면서 진을 이루고 있는 무사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무사들 가운데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사내를 쳐다보며 핀잔을 주었다.
"쯧쯧……! 친구들을 맞는데 쓸데없이 너무 요란을 떨었군. 누가 보면 우리끼리 생사를 건 싸움이라도 치르는 줄 알게 아닌가."
"그, 그게……."
방연공(方年空)은 갑작스런 질책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너무 하십니다요, 보주님!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한 점 허점이 없도록 하라고 시킬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야단을 치시는 겁니까?'
눈치가 재빠른 그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방연공은 그저 황송하다는 듯 허리만 깊이 숙였을 뿐이다.
천일기는 말등에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오랜만이다, 갈위량!"
갈위량은 고개를 돌려 천일기를 쳐다봤다.
휘이이잉!
바람 한 줄기가 두 사람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갈위량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천일기를 새롭게 보자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겨우 십구 년 전만 해도 무림제일의 기남아로 이름을 떨쳤던 천일기가 어떻게 저런 쉰 옥수수 같은 거지꼴로 변한 거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빈정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고독검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겨우 십구 년이라니, 저 개새끼를 그냥……!"
대형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가 목을 걸고 일전(一戰)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일기는 오히려 담담했다. 아니 그의 겉모습이 무심할수록 속에서는 거대한 분노가 점점 단단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전부 네놈 덕분이지. 네놈이 베풀어준 은혜를 열심히 되새김질 하다 보니 긴 세월도 잠깐 사이에 흘러가 버리더군."
갈위량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차라리 모든 걸 잊고 죽어 버렸으면 그나마 고통도 없었을 것을……."
"멱 줄을 따 버리고 말겠다, 개새끼!"
청룡육존 중 가장 성격이 급한 풍파창 강우가 말 안장 위에서 그대로 몸을 솟구쳐 갈위량을 덮쳐갔다.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다. 아니 말리기는커녕 강우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들 중 누구라도 뛰쳐나왔을 것이다.
파파파팟!
강우는 손에 들고 있는 긴 장창을 꼿꼿이 세우고 갈위량의 머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강씨 집안의 가전창술(家傳槍術)인 무천극법(舞天戟法) 십팔 초는 본래 장강이남(長江以南)에서 맹위를 떨치던 것으로, 얼마나 많은 악인의 목을 베었는지 모른다. 그 때문인지 창날에는 붉은 핏빛이 배어나와 더욱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갈위량은 태연하게 강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늙었어도 아우의 과격한 성격은 변함이 없군. 처음부터 마지막 초식을 사용하다니……."
강우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장창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는데, 갑자기 갈위량은 오른손을 쭉 뻗었다.
쉬잇!
그의 손바닥에서 하얀빛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강우의 가슴을 향해 쭉 뻗어왔다.
천일기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월강수(月鋼手)!"
그는 강우를 향해 급히 소리를 질렀다.
"위험하다! 피하라!"
허나, 강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갈위량의 손에서 월강수가 펼쳐지자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에게는 청룡육존의 자존심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었다.
파팡!
그의 장창이 월강수에 부딪쳤다.
창 가운데가 휙 구부러지며 강우의 몸이 활처럼 휙 젖혀졌다 싶었는데 어느새 창을 놓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어떻게 저항해 볼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한 반탄력이었다.
우직! 가슴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강우의 신형은 공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아찔한 순간, 강우는 허리를 비틀어 간신히 땅바닥에 처박히는 난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다섯 사람의 근심스런 시선이 강우의 얼굴에 쏠렸다.
강우는 빙긋이 웃었다.
"걱정마. 이 정도론 끄떡없어."
태연하게 일어섰지만 끝내 울컥! 한 움큼의 검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갈위량은 느물느물 웃었다.
"충고하는데 쓸데없는 충성심을 과시하는 건 삼가는 게 좋아. 청룡육존에서 천일기를 제외하곤 모두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니까."
이번에는 철혈대군 맹용백이 일월륜을 들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 쓰레기의 맛을 보여주겠다, 갈위량!"
왼손에 든 일륜과 오른손의 월륜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켰다.
위이잉!
일월륜의 톱니바퀴 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자 맹용백의 몸 주위에 회오리바람과 같은 가공할 기세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크아아앗!"
맹용백은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갈위량은 어깨를 들썩이고 빙긋 웃었다.
"후후후! 백파의 여섯 갈래가 설산을 휘감아 흐른다고? 웃기는 소리지."
맹용백의 흉내라도 내는 듯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더니 앞으로 쭉 내뻗었다.
"네놈들의 전성기는 이미 십구 년 전에 끝났어!"
우우우웅!
양 손에서 뻗어나오는 번개 같은 빛살은 맹용백이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어갔고.
꽈꽝!
우레소리와 함께 시꺼먼 먼지가 확 피어올랐다.
"우욱!"
답답한 신음성이 터지고 일륜과 월륜이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
맹용백은 낭패한 모습으로 쿵쿵쿵쿵! 뒷걸음질을 쳤고, 탁! 그의 등을 받치는 손에 의해 가까스로 신형을 멈출 수 있었다.
맹용백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대형 천일기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대, 대형!"
"수고했다. 쉬어라."
천일기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갈위량을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네놈은 이미 예전의 갈위량이 아니로구나."
갈위량은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내가 너라면 함부로 이곳을 찾아올 게 아니라 머리박고 평생 숨어 살았을 거라고. 애석하게도 이젠 그나마의 기회조차 영원히 물 건너가 버렸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상대를 흥분시켜 우위를 점하자는 수작이다.
허나 그런 뻔한 수법에 흔들릴 상대가 아니다.
천일기는 자신의 마음을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갈위량! 너 혼자 날 상대해도 좋고, 전부 와도 좋다. 모쪼록 최선을 다하거라. 그래야 후회가 적을 것이니!"
갈위량은 껄껄 웃었다.
"술도 계집도 없는 천뇌옥 골방에 틀어박혀 십구 년이나 뭘 하고 지냈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간덩이만 부풀린 게로군."
말을 마치자마자 스슥 움직였다.
미끄러져 간다고나 할까?
지면에 밀착한 두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천일기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천일기는 삼백 근이나 나가는 커다란 장검을 두 손으로 움켜 쥐고 검 끝을 땅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갈위량이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눈을 번뜩인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손에서 월강수를 시전할 때의 눈부신 광채가 뿜어나올 때 검을 움직였다.
"이야압!"
"아핫!"
기합과 기합이 어우러졌고, 흰 광채를 번뜩이는 두 손과 한 개의 검이 어우러졌다.
싸움에 임하는 두 사람의 동작은 사뭇 달랐다.
갈위량은 손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러 대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반면 천일기는 무거운 검을 들고 있다가 갈위량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한 번씩 휘두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위세는 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압적이어서 갈위량이 자랑하는 월강수는 천일기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갈위량은 초조해져 가고 있었다.
'놈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아니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빠르고 강해진 느낌이다!'
천일기의 검이 또 한 번 바람을 갈랐다.
"다음은 목이다. 조심해서 받아보도록!"
"헉!"
갈위량은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는데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천일기는 대각으로 휘두르던 검을 일직선으로 쭉 밀었다.
검 끝은 그대로 갈위량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고,
"이크!"
갈위량은 상황이 너무나 다급한지라 그만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마치 당나귀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을 뒹구는 수법.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이 너무 치졸하고 참담하여 무림의 고수로서는 차마 쓰지 못할 방법이다.
갈위량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땅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고 발작적으로 고함을 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러자 멍청하게 구경만 하고 있던 방연공이 칼을 뽑아 들었다.
"쳐랏!"
고함소리와 함께 홍의무사들이 좌우에서 천일기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마치 그물에 걸린 짐승을 덮치듯 무서운 기세였으나 천일기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대뜸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쓸데없는 수작!"
번쩍!
십여 명의 무사들은 그저 눈부신 빛살 하나가 자신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빛이 지나간 순간 그들의 칼은 뚝뚝! 부러졌고, 동강난 반 토막 칼날과 함께 머리가 공중으로 높이 튀어 올랐다.
비명은 그 다음에 터져 나왔다.
"끄아악!"
"아악!"
다섯이나 목이 뭉턱 잘려 썩은 고목처럼 나뒹굴었고, 나머지 다섯은 목이 절반쯤 잘렸다.
반밖에 남지 않은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고통스럽게 사지를 떠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놈!"
고함과 함께 등 뒤에서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예기(銳氣)!
갈위량이 땅에 떨어진 무사들의 토막 난 칼을 주워들고 쏜살같이 달려든 것이다.
쉬이이잇!
등에 거의 닿을 듯 찔러가는 칼끝.
천일기는 홱, 몸을 돌리며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거센 강기가 일어났고,
까깡!
갈위량이 꼬나쥐고 찔러 들어가던 반 토막 칼은 마치 폭발하듯 부서져 버렸다.
"이, 이게 도대체?"
그 가공할 위력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갈위량은 천일기의 엄청난 위세에 질려 덤벼들 생각도 못하고 뒤로 몸을 날렸다.
단숨에 십여 장이나 물러선 갈위량에게서는 처음에 보였던 거만하던 자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변해 있었다.
천일기의 검끝이 갈위량의 가슴을 향했다.
"네놈은 늘 이런 식이었어.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당당한 적이 없었어. 이젠 악연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갈위량!"
갈위량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악과 불신에 찬 눈빛으로 천일기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거야? 천뇌옥에 들어가는 놈은 모든 근육이 절단되고 무공이 폐쇄되는 것이 불문율인데 저 놈은 어떻게?'
"갈위량! 각오해라."
천일기의 장검에서 우우우웅! 소리가 일었고 눈부신 광채가 폭사돼 나왔다. 광채에 덮여 천일기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갈위량의 입은 쩍 벌어졌다.
"서, 설마 저것은……!"
(3)
짝짝짝짝!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중인(衆人)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가슴 속의 기혈이 뒤집어질 듯 요동치는 것이다. 단순히 손뼉을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에 내공을 모아 치는 소리.
장내의 시선이 그 박수 소리에 집중되었고, 그들의 동공 속에 들어온 사람은 갈위량이 나올 때 뒤따라 왔던 여인이었다.
지금 그 여인은 오만한 미소를 머금고, 천일기 앞을 막아섰다.
자연히 천일기의 장검 끝은 갈위량 대신 여인의 가슴으로 향했다.
"비키시오!"
천일기의 목소리가 쨍하고 올라갔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두 뺨에 샘을 파는 그 모습은 아찔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 웃음 하나만 있으면 어떤 사내의 철석심장(鐵石心臟)이라도 능히 녹여낼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멋진 무극구합검법(無極九合劍法)의 변식이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교태와 관능적인 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품격이라는 베일로 곱게 가려져 있어 결코 천하지 않고 오히려 청순하게 느껴지는 것이 매력을 배가시켜 주었다.
"원래 무극구합검법은 아홉 가지의 변화가 한계인데 무려 스물다섯 개의 변식을 한꺼번에 쏟아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는 섬전이 무색할 정도였단 말이지?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천일기는 두 눈을 부릅떴다.
'대체 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나이로 보아 대략 스물이 넘지 않은 것 같은데, 단번에 내가 펼쳐 낸 검법을 알아맞힐 뿐 아니라 그 속의 변화까지 간파해 내다니…….'
여인은 고개를 돌려 갈위량에게 눈길을 던졌다.
"안되겠어, 갈 영감. 상대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해. 당신이 자랑하는 월강대천십팔식(月鋼大天十八式)을 밑천까지 몽땅 털어봐야 다섯 합을 넘기기 어렵겠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갈위량은 쓰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고 여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귀인(貴人)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청룡육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봤다.
'귀인?'
오만무도한 갈위량이 허리를 숙이고, 극진한 예를 올리는 모습이라니.
저 여인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하지만 여인은 갈위량의 이런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일기를 바라봤다.
"보름 동안 잘 쉬었으니 대가를 치를 때도 되었지."
사뭇 다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별호가 추혼검객라고? 한때 검을 제법 잘 썼다고 들었는데 진짜 그래?"
"말조심해라, 계집! 너 같은 것들의 세치 혀끝에 함부로 올려놓을 수 있는 존함이 아니시다!"
천도귀랑 오진담이었다.
여인의 아름다운 눈썹 끝이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계집? 금방 내게 계집이라고 말했나? 잘 안 들리는데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말해 주지 않겠어?"
"그렇잖아도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 줄 생각이었다."
오진담은 이 여인이 나이는 어리지만 범상치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처음부터 전력을 기울였다.
대도를 들어 오른쪽을 치는 척하면서 왼쪽 어깨를 내리찍으려 했다.
"이따위 어설픈 장난으로 내 버릇을 고쳐?"
여인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어깨를 살짝 낮춰 오진담이 내리치는 대도를 피하더니, 한 손을 치켜 들어 손가락을 말아 툭 튕겼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오진담이 들고 있던 대도는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
오진담은 수중에 대도가 없어지게 되자 주먹으로 그녀의 면상을 겨냥하여 후려갈기려 들었다.
"이 발칙한!"
여인은 피하지 않고 쏜살같이 날아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탁, 맞받아쳤다. 힘도 주지 않고 가볍게 밀어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펑!
오진담의 신형은 붕 떠서 십여 장 밖으로 훌훌 날아가 버렸다.
콰쾅!
담벼락에 큼지막한 개구멍을 내고 밖으로 뚫고 나가 버렸다.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이상하게 요즘 세상엔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것들이 너무 많단 말야."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탐기랑 고독검과 현풍번 노소군은 분노가 폭발했다.
"발칙한 계집!"
"뭘 믿고 날뛰는지 두고 보겠다!"
대갈일성(大喝一聲)을 터뜨리며 즉시 신형을 뽑아 올렸다.
고독검의 왼쪽 팔목에서 짧은 칼을 뽑아 정면으로 찔러 들어갔고, 노소군의 검은 깃발은 하늘을 덮을 듯 위맹스런 기세를 떨치며 여인의 머리를 덮어갔다.
여인은 냉랭한 표정으로 흥! 코방귀를 뀌었다.
"그래, 한두 놈은 더 관을 보자고 설쳐댈 줄 알았어."
그녀는 손을 허리께로 내려 체대 하나를 슥 잡아당겼다. 녹색 채대였다. 여인은 그것을 마치 채찍으로 때리듯 휘둘러 노소군의 깃발을 후려쳤다.
촤라라락!
사람들은 그녀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늘을 덮었던 깃발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노소군의 몸이 바람에 나부끼는 가랑잎처럼 날아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여인의 동작은 물 흐르듯 부드럽고 유연했다.
손목을 잡아채자 깃발을 찢은 채대는 방향을 바꿔 고독검을 향했다.
휘리리릭!
채대는 고독검의 칼을 감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저런 무모한……."
기껏해야 얇은 실을 꼬아만든 것 일뿐인데, 여인의 채대가 잘려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채대는 잘라지기는 커녕 영활한 뱀처럼 칼과 팔뚝을 칭칭 감더니, 채대 끝이 마치 뾰족한 창처럼 곧장 고독검의 얼굴로 솟구쳤다.
고독검은 기겁을 할 듯 놀랐다.
"이, 이건……?!"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채대 끝은 정확하게 고독검의 미간 바로 한 치 앞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앞으로 나가려면 채대를 무시해야 했지만 여인의 가공할 솜씨를 생각해 보건데, 이것은 단순한 천조각이 아니라 창끝보다 더 날카로울 게 틀림없었다.
채대 끝자락을 잡은 여인의 입가에 냉소(冷笑)가 흘러나왔다.
"말해. 넌 얼마나 누워있고 싶어?"
"으음……."
고독검은 방금 세수를 마친 사람처럼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깔깔깔!"
여인은 뜻밖에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때를 맞춰 옆에서 지켜보던 갈위량도 득의만면(得意滿面)한 얼굴로 아양을 떨어댔다.
"과연 귀인의 무공은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곧 싸늘해지는 여인의 얼굴.
"다시 한 번 입을 잘못 놀리면 그땐 머리통이 붙어 있지 않을 거야!"
그녀가 손목을 구부렸다 탁 펴자 고독검의 팔뚝과 칼을 휘감았던 채대가 휘리릭 풀려나 그녀의 손목에 착 감겼다.
"넌……넌 누구냐?"
"내가 누구냐고?"
고독검의 물음에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이없다는 듯 갈위량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봐, 갈 영감. 말 좀 해봐. 이렇게 훌륭한 솜씨를 보여줬는데도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야? 이거 지금 말 되는 거야?"
갈위량은 쿨쿨 웃었다.
"십구 년이나 천뇌옥에 처박혀 있던 놈이 고귀한 황족의 후예이자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벽소운(碧素雲)님의 존함을 언제 들어나 봤겠습니까?"
"벽소운이라면……."
고독검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별호 하나.
"칠채월화(七彩月花) 벽소운!"
들리는 소문에 칠채월화 벽소운은 자칭 황족의 후예라 칭하고 다니는데, 그녀의 일곱 개의 채대를 사용하는 기술은 가히 신의 경지에 달한다고 했다.
그제야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못마땅한 듯 벽소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쯧쯧! 이래서 무식한 것들하곤 대화가 안 통한다니깐!"
그러나 천뇌옥에 갇혀 있었던 천일기만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칠채월화 벽소운의 이름 석 자는 과거 청룡육존이 강호에서 활약할 때 보다 더 유명했지만 말이다.
"칠채월화든 뭐든 나는 모른다. 동생들을 부상시킨 것은 괘씸하지만 갈위량과 먼저 해결할 일이 있으니 요망한 계집은 뒤에서 기다리도록!"
'뭐, 요망한 계집?'
벽소운에게 그 말은 충격이었다. 강호에 나와 자신의 이름을 듣고서 이렇게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는 놈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갈위량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미친 놈! 잘못 건드렸어!'
벽소운은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견디지 못하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천일기, 천뇌옥에서 기어 나온 걸 지옥에서 후회하게 될 거야!"
말과 함께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슈슈슈슛!
그녀의 양손에서 얼음 기둥과 같은 두 줄기 강기가 뻗어 나왔다.
천일기도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았다.
"좋아! 계집, 그렇다면 널 먼저 상대해 주지."
손가락을 가볍게 말아 튕겨냈다.
피융!
세 줄기 지풍(指風)은 벽소운이 보낸 두 줄기 강기를 관통했다.
"우웃! 화광지!"
벽소운은 황급히 손을 거둬 들이며 옆으로 휙 몸을 돌려 피했다.
팟!
지풍은 그녀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고, 벽소운은 팔을 들어 구멍이 숭숭 뚫린 소맷자락을 보고 경악했다.
"네가 현현교의 무공을?"
천일기는 두 손으로 지면을 향하고 있던 장검 끝을 올려 벽소운의 허리께를 겨누었다.
"누가 먼저 황천길을 밟게 될지는 검이 말해주는 것. 각오해라, 계집!"
진기를 끌어올리자, 그의 흰 장포가 바람이 들어간 듯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으며 흰 머리카락이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일어섰다.
"서……설마 꿈의 경지로 알려진 검도(劍刀) 최후의 극점 무한검법(無限劍法)이라는 건가?"
갈위량은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손등으로 눈을 쓱쓱 비벼댔다.
천일기는 검을 머리 위로 반듯하게 세웠다.
"날 막는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는다……"
이때 벽소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잘게 씹었다. 한 쪽 끝을 잡아당겨 입술을 씹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귀검수 왕소우을 제외하고 이토록 뛰어난 검(劍)의 달인이 존재할 줄은 몰랐군."
허리춤에서 다시 채대 하나를 스윽 뽑아드는데, 이번엔 붉은색이었다.
벽소운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일곱 색의 채대를 사용하는데,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진기를 주입하자 채대는 쭉 펴져 마치 쇠막대처럼 꼿꼿이 섰다.
(4)
팽팽한 긴장감이 휘몰아치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잠깐!"
외마디 소리가 두 사람의 움직임을 흠칫하게 만들었다.
"누구냐?"
벽소운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룡보의 담장 위에는 언제부터였는지 표표히 옷자락을 휘날리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천일기만이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사내가 천뇌옥에서 자신을 구출해주었고, 낙양의 기루에서 술잔까지 나누지 않았던가. 담장 위에 서 있는 사내는 바로 천리무영 석비룡이었다.
벽소운은 그를 본체만체, 얼굴을 다시 천일기 쪽으로 돌렸다.
"오늘은 잡상인들이 많군. 볼일이 있으면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석비룡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성격 참 급하기도 하군."
그는 벽소운의 성격으로 봤을 때 이 싸움이 쉽게 그칠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비룡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단소를 꺼내 들었다. 그 사이에도 벽소운은 점점 천일기 앞으로 다가들었고, 천일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장검을 고쳐 잡았다.
삘릴리…… 삘릴리……!
단소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잦은 가락으로 경쾌하게, 그리고 점차 가락과 장단이 느려지면서 장엄하고 처량하게 울려왔다.
청룡보의 무사들은 차츰 단소 소리에 정신이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석비룡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휘청하면서 맥없이 기울어지더니 땅바닥에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신형을 그대로 버티고 있는 사람은 천일기와 벽소운, 두 사람뿐이었다.
벽소운은 안색을 차갑게 굳혔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검법 최후의 경지라는 무한검법을 구경한 것도 과분할 지경인데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천하삼대신음(天下三大神音)의 하나인 범천불음(梵天佛音)까지 듣게될 줄이야……."
그녀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려 음공에 대항했다.
"아아아아아아!"
그녀의 사자후는 점점 넓게 퍼져나가 마침내 단소 소리를 압도했다. 종내에는 그녀의 사자후만 들릴 뿐 단소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석비룡은 싱긋 웃으며 단소를 입에서 떼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맞섰다면 장내에 있는 인물들 가운데 태반이 기혈이 뒤집혀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석비룡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방금 그 소리가 바로 천하 삼대신음 중 가장 무식하다는 파천붕음(破天崩音)인 모양인데…… 남자도 아닌 여자가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과히 듣기 좋진 않군."
벽소운이 지르던 사자후가 뚝 그쳤다.
그녀는 냉기 풀풀 날리는 눈초리로 석비룡을 쏘아보았다.
"흥! 꽤나 여유를 부리는데, 진짜 실력은 어떤지 볼까?"
석비룡은 고개를 훼훼 도리질 쳤다.
"싫소."
뜻하지 않은 대답에 벽소운은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보통의 무사들이라면 이런 제의에 금방 발끈해 먼저 달려들었을 것이다.
"이유는?"
석비룡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지 뭐 다른 뜻이……"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소운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이유는 이미 만들어졌어!"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색 채대는 순식간에 석비룡의 가슴 앞까지 도달했다.
"이크!"
석비룡은 옆으로 몸을 홱 돌렸지만 쫙 하는 소리와 함께 상의 앞가슴 자락이 쭉 찢겨져 나갔다.
벽소운의 공격은 신속하고 날카로운 동시에 악독하고 거셌다.
채대를 통해 펼치는 초식과 초식은 앞뒤가 물샐틈없이 배합돼 무수한 붉은 그림자를 만들며 상대를 압박해왔다. 그 상대가 천리무영이 아니었다면 벌써 가슴에 여러 군데 칼자국을 남겼으리라.
석비룡은 쩔쩔매는 와중에도 입만큼은 쉬지 않고 계속 놀려댔다.
"어허, 초면에 이렇게 막가도 되는 거요?"
"사정 좀 봐가면서 살살 합시다!"
"이러다 어디 한 군데 고장이라도 나면 책임질 거요?"
벽소운은 점점 약이 올라 입술을 질끈 깨물고 냅다 고함을 쳤다.
"어디 이것도 피해봐라!"
붉은 색 채대는 무척 현란하게 공격해오는데 어느 것이 허초이고 어느 것이 실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석비룡도 더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 방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즉시 무영환리보(無影幻離步)를 밟기 시작했다.
삼십 명의 공격을 한꺼번에 피할 수 있다는 절륜한 보법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몸이 여러 개로 분리되는가 싶으면 하나로 합쳐지고 하나로 합쳐지는가 싶으면 다시 여러 개로 나뉘어져 벽소운의 채대를 피해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벽소운은 자신의 공격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크게 노해 허리춤에서 일곱 개의 채대를 모두 끌러 한꺼번에 날렸다.
"아이쿠! 신선도 막지 못한다는 연산비(衍散飛)까지!"
꽈꽈꽈꽝!
시꺼먼 연기가 확 피어오르며 바닥에 깔은 대리석들이 산산이 쪼개져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벽소운의 일곱 개 채대는 석비룡이 있던 자리에서 반경 일장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마치 벼락이 떨어진 듯 커다란 웅덩이 하나가 파여진 것이다. 아마 석비룡도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벽소운은 그제야 흡족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놈! 그렇게 까불지만 않았다면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옷을 탁탁 터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소운이 눈을 휘둥그레 치뜨고 고개를 돌렸다.
석비룡은 천일기의 옆에서 먼지 하나 없이 말짱하면서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휴우! 하마터면 장가도 못 가고 황천길로 갈 뻔했잖아."
벽소운은 놀라서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말했다.
"세 호흡 동안 열여덟의 공격을 모두 피한데다 연산비까지 피하다니…… 그렇군. 세상을 깡그리 뒤집어엎어도 이렇게 빠른 자는 오직 한 명뿐이지."
그녀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석비룡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리무영 석비룡…… 맞지?"
석비룡이 감탄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웠다.
"하하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더니 역시 단박에 알아차리시는군! 훌륭한 안목이외다!"
천리무영!
석비룡에 의해 그 말이 확인되는 순간 갈위량과 그의 수하 무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벽소운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얼굴 위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신룡처럼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다는 천리무영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행차한 거지?"
이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봤다.
석비룡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선선히 대답했다.
"나도 웬만하면 남의 일에 끼어드는 성격이 아니지만 저 양반과는 워낙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서 말이오."
저 양반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천일기를 가리켰다.
"이건 나의 일이다. 간섭 말고 물러서라, 석비룡!"
천일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쿠쿵!
갈위량의 가슴에 천근 무게의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 이 일을 어떡한다냐? 아무래도 오늘 무사하기를 바라기 어렵겠구나.'
갈위량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관 속에서 방금 꺼낸 시체나 다를 바 없었다.
벽소운은 마치 악동과 같은, 짓궂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 얘기는 결국 나와의 충돌도 불사하겠다 이거지?"
석비룡은 황망히 손을 훼훼 내저었다.
"아아! 그건 전적으로 오해요.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처음부터 이번 일은 당신이 참견해선 안 되는 일이었소."
벽소운은 싸늘하게 흥!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누구도 날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어!"
석비룡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하지만 천 선배와 갈위량의 관계를 좀 들어보면 당신도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았을 거요."
벽소운은 입을 삐죽거렸다.
"관계는 무슨 얼어 죽을 관계라는 거야?"
갈위량은 황급히 벽소운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소! 귀인께선 더 이상 저놈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현혹되시지 말고 당장 저놈들을 없애버리시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제 그가 등을 비비고 의지할 사람은 벽소운 뿐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벽소운은 냉정하기만 했다.
"당신,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갈위량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 내 성질 몰라서 그래?"
이렇게 일침을 쏘아주고는 다시 석비룡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말해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다는 거지?"
석비룡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십구 년 전…… 이 청룡보의 주인은 천 선배였고 갈위량은 총관이었소. 허나 호시탐탐 보주 자리를 넘보던 갈위량은 천 선배가 현현교와 연관되어 있다고 무림맹에 밀고(密告)하여 보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음으로써 기어코 이 청룡보를 통째로 집어삼키고야 말았소."
갈위량은 필요 이상으로 펄쩍 뛰었다.
"저, 저놈이 뉘 앞에서 저런 새빨간 거짓말을!"
석비룡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당신은 천 선배의 아내까지 강제로 욕을 보였고 수치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결의 길을 택하고 말았지."
그의 싸늘한 눈길이 벽소운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갈위량의 얼굴에 꽂혔다.
"거기다 갈위량, 당신은 천 선배의 딸은 어떻게 했지? 겨우 여섯 살 밖에 안 된 어린것을 거저 주다시피 기루에 팔아넘긴 장본인이 바로 당신 아냐?"
"그……그건……."
갈위량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꿀꺽 삼켰다.
"한마디로 갈위량 당신은 한 사람의 인생을 철저하게 송두리째 말아먹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야. 지금은 그 모든 걸 다시 토해낼 때가 된 거고!"
"그……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갈위량은 발악이라도 하듯 고함을 쳤다.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이런 더러운 일에 자칫 잘못 끼어들면 칠채월화의 이름에 똥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 주시길…… 내 얘기는 끝났으니 알아서 판단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석비룡은 입을 다물었다.
벽소운은 스르르 눈동자를 굴려 갈위량을 째려봤다.
"진짜야? 당신 그렇게 구질구질한 인간이었어?"
"아……아닙니다! 난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놈 말에 속지 마십시오! 저놈은 지금 우리를 이간질 하려고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갈위량은 땀이 가득 고인 손바닥을 허벅지에 쓱쓱 문지르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상해……."
벽소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당신은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하는데 왜 당신의 눈은 모든 걸 인정하고 있는 거지?"
"그……그럴 리가……."
벽소운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하마터면 날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뻔했군."
갈위량은 스르르 맥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귀, 귀인……."
애타게 부르는 파랑새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훌쩍 발을 굴러 청룡보의 담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제 다 끝났나!"
천일기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갈위량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응축된 분노라고 할까? 그의 얼굴에서는 칼날 같은 차가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갈위량은 그의 압력에 밀려 뒤로 물러섰다.
"뭐,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저, 저놈을 당장……."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그의 뒤에서 대회륜진을 치고 있어야 할 일백 명의 무사들도, 담장과 지붕 위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어야 할 궁수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뭐, 뭐야? 이것들이 전부 어디를 간 거야?"
그 혼자 남겨진 것이다.
이미 대세를 파악한 수하 무사들은 모두 제 살 길을 찾아 달아났다. 어차피 그들에게 충성이란 없었다. 그들의 바람이라면 그저 힘 있는 쪽에 붙어 명줄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뿐.
"이, 이런 후레자식들!"
가슴을 쳤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갈위량은 천일기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처……천 보주! 난 죄가 없소! 난 그저 무림맹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오!"
천일기는 냉혹하게 되받아쳤다.
"무림맹에서 내 집사람도 겁탈하라고 시키던가?"
"그……그건……."
"그래서 여섯 살짜리 딸아이도 기루에 팔아 넘겼나?"
갈위량은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급기야 그의 등이 담벼락에 막혔다.
그리고 그의 좌우를 막아서는 청룡육존의 다섯 형제들. 전후좌우가 모두 막혀 버린 것이다.
"천 보주!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갈위량은 부들부들 떨다가 급기야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천일기는 일장 앞에서 멈춰 섰다.
"신조경은 어디에 있느냐?"
갈위량에겐 그 물음이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발견한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살아날 방법이 있다.
갈위량은 즉시 머리를 굴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네놈이 날 무림맹에 팔아먹은 것도 신조경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무림맹의 멍청이들은 내 입을 통해 신조경이 있는 곳을 알아내려 했지만 난 처음부터 네놈이 그것을 숨겨 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 허나…… 난 십구 년 동안 끝내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그리하여 언젠가는 그곳을 나와 네놈을 찾아가기 위해서였지. 마지막으로 묻는다. 신조경은 어디 있나?"
갈위량의 눈동자는 이 순간 빠르게 움직였다.
"가, 가만있어 보시오. 너, 너무 오래된 일이라 생각이 나……나지 않는데……."
그가 말을 다 끝맺지 못했는데, 천일기의 발이 날아들었다.
퍽!
"컥!"
턱이 덜컥 뒤로 꺾이며 피가 공중으로 뿌려졌다.
그의 몸이 제자리에서 붕 떠 날아갔다.
쾅!
담벼락에 부딪쳐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천일기의 눈치를 살피며 병들고 주눅 들린 개처럼 엉금엉금 기었다.
"내, 내가 잘못했소! 한번만 용서해주시오! 천 보주! 날 죽이면 신조경도 못 찾고 당신의 딸도 찾지 못할 게 아니오?"
"필요한 건 내가 내 힘으로 찾는다."
천일기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장검을 가슴 앞으로 스윽 끌어당겼다.
ㅆㅆㅆ!
갈위량은 자신에게로 쏘아져 날아오는 천일기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신형 자체가 하나의 비수가 된 듯, 장검을 앞으로 내민 채 유성처럼 쏘아져 갔다.
갈위량은 눈만 더욱 커졌을 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동공 속에 날카로운 장검 끝이 산처럼 크게 확대되어 다가왔다.
촤악!
갈위량의 두부(頭部)가 반쪽으로 잘려지며 그 속에 있던 뇌수와 핏덩이들이 밖으로 파밧, 튀어나왔다.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즉사해 버린 것이다.
* * *
활활 타오르는 불길!
천일기의 지시에 의해 다른 형제들이 곳곳에 불을 놓았고 일각도 지나지 않아 청룡보의 수십 채 전각들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어렵게 찾은 집을 왜 태워 버리는 거요?"
석비룡은 안타까운 생각에 이렇게 물어봤지만 천일기는 담담할 뿐이다.
"저곳에 더 이상 나의 미래는 없네. 있다면 단지 암울한 과거뿐……."
천일기는 품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동경(銅鏡) 하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받게. 자네가 찾던 신조경일세."
"이것이 갈위량의 품속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소?"
"놈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위인일세. 그렇기에 처음부터 놈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
석비룡은 웃으며 신조경을 받았다.
"어쨌든 고맙소, 천 선배!"
"무슨 말을? 인사는 내가 해야지."
천일기는 석비룡의 어깨를 보듬은 다음 휙 돌아섰다.
훌쩍 말안장 위에 올라탄 그는 마지막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청룡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까래와 지붕, 기둥들이 불에 휘감긴 채 마지막 숨을 토하며 허덕이고 있었다.
급기야 구구궁! 소리를 내며 청룡보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화기(火氣)가 치솟으며 붉은 불기둥이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석비룡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셈이오?"
"무림맹이 날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당분간 중원을 떠나 있을 생각이네. 물론 그전에 딸아이를 찾아야 할 테지만……."
석비룡은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무운(武運)을 빌겠소, 천 선배."
"자네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될 걸세."
천일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고,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말고삐를 홱 낚아챘다.
히히힝!
말은 시위를 떠난 쏜살같이 내달렸다.
두두두두!
천일기와 다섯 형제들은 청룡보의 타오르는 불빛을 어깨 뒤로 받으며 멀어져 갔다.
석비룡은 그들 일행이 자욱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멀리 사라지는 것을 한참 동안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천 선배! 이후의 삶은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