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산서원
전남 영광군 불갑면 강항로 101
(우) 57059(지번) 불갑면 쌍운리 203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 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 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 ㆍ윤순거(尹舜擧)
*姜沆 1567 1618 晉州 太初 睡隱
*尹舜擧 1596 1668 坡平 魯直, 孝直 童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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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유고(明齋遺稿) 윤증(尹拯)생년1629년(인조 7)몰년1714년(숙종 40)자인경(仁卿), 자인(子仁)호명재(明齋), 유봉(酉峰)본관파평(坡平)시호문성(文成)특기사항소론(少論)의 영수
明齋先生遺稿卷之十二 / 書 / [與朴和叔 乙亥正月二十日]
靈光祠院之議。以鄙家事。汔爲其鄕章甫之爭端。極可悶然。其處儒生又有進稟門下之行。敢此附陳鄙意。蓋本郡主合享。森溪主別建。鄙意別建一事。當初旣有疊設之禁。其後又有各尊之嫌。決知其不當。故竊以爲寧從合享之議。則庶幾粗安於私情。無悖於公議。而其在一郡士林。亦當永絶携貳之隙矣。以此每以輟罷新建。歸同舊院爲善。而別建之人。以鄙言爲本家謙辭。必以稟定於執事爲言。若執事之敎。亦如鄙言。則可以妥帖矣。嘗竊聞執事之意。以院與祠爲有間。此亦不然。靈光事體與我尼鄕無異。旣奉享祖考。則先人之配於祖考。在理當然。雖以睡隱言之。先人配於祖考耳。非配於睡隱也。睡隱節義之高。亦吾家父兄之所慕。以祖考之故。而爲配於睡隱。亦何害也。森溪之人。以執事之敎爲執。故本郡之人。不敢擅便。有此進稟。幸望俯察彼此事理。一言以定之如何。無論別建與合享。初非不肖之所敢與也。而以此一事。聞聽甚紛。私情悶蹙。不得不仰布心腹。千萬下諒。乙亥正月二十日。
附玄石書
遯巖追配事。未知何決。曾答院生辭語。想兄已得傳聞也。唯父子師弟不可同享之義甚明。然則其於同配亦然。故鄙意如此。未知平日諸丈在世時。其有此等議論否。幸爲示破。今番不克奉薦老兄一款。自有曲折。固知兄之難於出世。是不唯素守然也。又慮其爲世道潰裂。略如向日羅韓時。終非爲兄好事。不敢遂意矣。因此顯道。大加非斥。至欲相絶。蓋與癸亥北洞之論斥以欲爲驅逐尤菴。自專其利者同轍。固知此友見識多滯。而不謂遽至此也。不然。筵中或有閑漫論事時。何苦何難。而不之爲乎。令人悶鬱。無以自堪。夏間人有言。兄近日意見一與南,尹兩相相合。而實爲其本根。聞之不覺驚怪。及因大哥語及張,李兩獄。而後知其無是也。然聞此說大行於中外。又因鄙不薦事而曰。某則以此相絶云。其爲譸張危險如此。不知世道果何終極也。憂歎而已。如鄙行止。則轉益狼狽。雖欲循墻。而不可得。蓋去八月間。乃以陳情歸養上章。其在高陽辭職時。及今行皆以此爲主意。誠以無疾有才。則當出而事君。無才有疾。則當處而養親。古今大致然也。豈不有據。而第今聖上之過加敦勉。無已時至。有將母入京之敎。而所陳諸說。輒爲廟堂掣肘。無一可行。此正難處之大者。而況人心世習。日益扤捏。決無更進之理。幸乞量示可救之道。千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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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齋先生遺稿卷之十六 / 書 / [與成汝中 八月九日]
信息久阻。懸溯正苦。得承惠札。慰豁難勝。第審色憂長在。貢慮區區。旱災之慘。南中尤甚云。芻牧之憂。安得不然。然仄聞聖慮特軫。已命方伯仍任云。方伯安能許守令遞去乎。況如君約己愛民。頌聲已著。私情雖切。公義亦重。方伯必欲堅執。而他人亦難容喙矣。先人門下辨章之議。已與顯道,士威相議。定爲守靜之計。外人之云云。何足顧也。千萬深惟分義。勉竭才誠。以濟一邑之顚連。兼以其私得備滫瀡之養。不亦善乎。爲君三思。恐無以易此。如何。尤翁再書。又有意外語。今則已不敢復爲仰答之意矣。使此翁至此而誣及於父母。莫非我昏昧之罪。尙誰咎哉。沃川人金曄。又上疏見詆。未知此後又有何事也。欲於秋夕歸省先壟。而旋思京裏紛紜方未已。恐近城。或添意外唇舌。未免班如。此間心緖。不堪悄悄。八月九日。
杜門待盡。是吾究竟之地。而吾黨諸友唯當十分守靜。非但道理當然如此。然後方可免於罪戾矣。言不能盡千萬默會。勿動於浮議如何。南中若或有如此浮議。切望隨力痛止之。勿致有紛紜之患。千萬幸甚。奇子亮相見否。前日有書。似全未諳本末。而言長不能詳答。只以爲若見君。則可詳矣。未知其後果如何也。
靈光鄕議之分爭。亦一不幸。而吾家適爲其爭端。貽笑於遠近。何可勝言。蓋森溪別建。固爲冒禁而睡祠合享。尤是私意。不類士子擧措。兩邊皆不可許。此中自初兩止之。而力不能禁。以致於此。咄咄奈何。恐君未知此意。故略及之。此後兩邊之請。皆斥絶之如何。莫非吾家之禍厄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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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姜沆
1567년(명종 22) |
1618년(광해군 10) |
조선, 한국 |
요약 좌찬성 강희맹의 5대손이며, 강극검의 아들이다.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데도 뛰어났다. 주요 저서에 <운제록>·<강감회요>·<좌씨정화>·<간양록> 등이 있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쓴 그는 남원이 함락 당하자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해 싸웠다. 영광이 함락되자 포로가 되어 일본 오쓰 성에 유폐되었는데, 이곳에서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우리나라로 보냈다. 1600년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후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882년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에 제향되었다.
강항
강항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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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
강항 동상, 내산서원 내,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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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좌찬성 희맹(希孟)의 5대손이며, 극검(克儉)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선조 26)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 보급에 힘썼다.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싸웠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 오쓰 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이즈시 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우리나라로 보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 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후지와라[藤原醒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1600년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후 1602년 대구교수, 1608년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사직했다.
그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데도 뛰어났다. 저서에 〈운제록 雲堤錄〉·〈강감회요 綱鑑會要〉·〈좌씨정화 左氏精華〉·〈간양록〉·〈문선찬주 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 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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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수은강항선생 첫 추향제 봉향
오는 11일 11시 호남지역유림 및 영광 중, 고교생들과 함께 분향(일본 사토회장 일행 포함)
등록날짜 [ 2019년11월07일 23시11분 ]
오는 11윌 11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영광내산서원보존회(회장 강재원 이하 보존회)에서는 내산서원 용계사에서 처음으로 "수은선생 추향제"를 봉향한다.
이날 수은선생 추향제의 초헌관에는 이개호 전 농림부장관(재선 국회의원), 아헌관 이장석 재선도의원, 종헌관 강성휘 전 재선의원(박지원국회의원 사무국장)과 호남지역유림 및 영광 중, 고교생들과 함께 분향한다(일본 사토회장 일행 분향, 포함)
특히 영광공업고등학생 중 제관으로 당일 추향제에 3~5명을 선발해 자유학기제 체험학습을 병행한다.
보존회에서는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 이하 기념사업회)와 함께 추향제를 봉향한후 오후에는 수은선생의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국가지정문화재를 위한 국제학술세미나도 진행할 예정이다.
참석을 희망하는 보존회원과 기념사업회원을 위해 교통편으로 45인승버스 2대가 당일 9시30분에 목포시 3호광장과 광주향교 광장에서 출발한다.
한편, 한일경제제재조치이후 경색된 양국을 바라보는 매스컴의 취재열기가 높아져 지난 5일 KBS 광주방송총국 '전매청' 프로그램에서는 일본이 수은선생의 은혜를 안다면 역사앞에 속죄해야 한다며 수은선생의 일대기관련해 방영했다.
이어 11일 수은선생의 추향제에는 MBC광주방송국에서 전격 취재를 나와 이날 오후 뉴스에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편집자 주>
내산서원은 1977년 10월 20일 전라남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1635년(인조 13)에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을 사액받고, 1702년(숙종 28)에 중수하였다.
그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운제마을을 앞에 두고 내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과 용계사(사당)를 중심축으로 외삼문, 내산서원,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아담하고 소박하며,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다.
외삼문은 근년에 지은 것으로 유물관에는 《강감회요》 목판각과 《수은집》《운제록》 《문선》《잡지》《간양록》의 필사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수은선생은 사숙재 강희맹선생의 5대손으로 1593년(선조 26)에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박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왜군을 만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가족 일부가 왜국으로 압송되었다.
수은선생은 왜에서의 유폐생활 중 왜국의 역사, 관제, 지리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賦中見聞錄)》을 작성,선조에게 보냈으며 '일본 유교의 비조'가 되었다.
1600년 5월 19일에 유배에서 풀려 38명의 포로와 함꼐 귀국하였으나 사색당쟁과 백형인 저어당 강해선생의 신묘사화의 연류 등으로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귀향하여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강하늘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