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품질평가사들이 지난달 1일 구글 본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티뷰에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플래카드에는 “품질평가사의 빈곤을 끝내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알파벳 노조 제공
한국인 10명 중 8명 이상은 “한국사회에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국민인식 조사’). 하지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노총을 포함한 기성 노조 활동을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10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5%가 노조 활동에 부정적이었다. 긍정적이라는 답변은 13%에 그쳤다. 노조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기성 노조에 대한 사회적 지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간극의 원인은 기성 노조가 ‘모든 노동자의 우산’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노조 활동에 비판적인 응답자 중 46%가 그 이유로 ‘노조에 소속된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서’를 꼽았다. 노동연구원 2017년 조사에서도 유사한 인식이 확인된다. 노조가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운영된다”고 응답한 비율은 21.8%에 그쳤다.
다만 노조 활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면적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파업을 하는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 파업에 대해선 지지하는 여론이 더 높았다.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특수고용직인 택배기사·화물노동자 파업 지지율은 각각 75%, 58%였다.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 파업(54%), 청소노동자 파업(80%) 역시 지지가 반대보다 더 많았다.
이런 양가적 인식은 기성 노조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기성 노조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론을 바꿔낼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각종 여론조사 수치는 노동운동이 이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요구한다.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미국 아이다호 주에 사는 미셸 커티스는 8년간 구글 하청업체 소속 품질평가사(Rater)로 일했다. 두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재택근무가 가능한 이 일을 선택했다. 품질평가사는 구글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했을 때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지, 결과와 광고 간 연관성이 있는지 등을 확인한다.
구글 지주회사인 알파벳 매출의 81%는 검색 광고에서 나올 만큼 품질평가사 노동이 수익 창출에 중요하다. 하지만 수천명의 품질평가사는 ‘유령 노동자’ 취급을 받았다. 다른 구글 비정규직 노동자는 최소 시급 15달러는 받지만 품질평가사는 이를 보장받지 못했다. 커티스는 “8년간 임금인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동료 중엔 시급 10달러를 받는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커티스는 알파벳 노조에 가입해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간 보이지 않던 ‘유령 노동자’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회사도 움직였다. 올해 1월부터 시급이 14.5달러로 올랐다. 품질평가사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커티스를 포함해 미국 전역에서 일하는 품질평가사 수십명은 지난달 1일 구글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 마운티뷰에 모여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외치고, 청원서도 전달했다. 이들의 끈질긴 싸움은 추가 임금인상으로 이어졌다. 올해 말부터 시급 15달러를 보장받는다.
구글 내부 노동시장은 구글 본사 엔지니어 등 정규직(FTEs)과 임시 파견노동자·하청 노동자·프리랜서(TVCs) 등 불안정 노동자 그룹으로 나뉜다. 불안정 노동자 그룹 처우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구글은 2019년 4월 이들의 ‘임금 및 복리후생 최소 기준’을 발표했다. 시급 15달러, 연간 8일의 유급휴가, 건강보험, 12주 유급 육아휴직 등이다. 이 기준을 적용받으려면 주 30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
문제는 품질평가사들이 주 30시간 미만으로 근로계약을 한다는 점이다. 임금은 시급 15달러까지 끌어올렸지만 복리후생에선 여전히 배제돼 있다. 알파벳 노조는 “품질평가사들이 정당한 임금과 복지를 받을 때까지 조직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왜냐하면 품질평가사 노동 없이는 구글이 세계 1위 검색 엔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비정규직과 한목소리 내는 알파벳 노조
2021년 1월4일 구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파룰 카울(위원장)과 츄이 쇼(부위원장)는 뉴욕타임스에 ‘우리가 구글을 만들었다. 이곳은 우리가 일하고 싶은 회사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싣고 알파넷 노조 설립을 알렸다. 당시 알파벳 그룹 직원 13만명 중 200여명이 참여한 소수노조인 알파벳 노조가 주목받은 것은 ‘꿈의 직장’이라고 불렸던 구글에서 노조가 생겼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파벳 노조가 정규직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도 조합원이 될 수 있도록 문을 열고 연대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절반이 임시 파견노동자·하청 노동자·프리랜서다.
유튜브 뮤직 하청 노동자들이 지난달 14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7일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던 이들이 지난해 알파벳 노조에 가입한 뒤 회사는 지난달 6일부터 사무실 근무를 명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협하고 노조를 와해하는 것라며 알파벳 노조 사상 첫 파업에 돌입했다. 알파벳 노조 제공
현재 알파벳 노조 조합원은 1300명이 넘는다. 출범 당시에 비해 6배 이상 성장했다. 알파벳 노조는 품질평가사 임금인상을 이끌어낸 데 이어 최근엔 원청인 알파벳이 유튜브 뮤직 하청 노동자의 “공동 사용자(joint employer)”라는 판정도 받아냈다.
하청업체 ‘코그니전트’ 노동자 약 60명은 시급 19달러를 받고 유튜브 음악 콘텐츠 제목, 연주자 등 정보가 정확한지 검수한다. 알파벳 노조에 가입한 이들은 지난해 10월 미국 연방노동관계위원회(NLRB)에 교섭대표노조 승인 투표 신청을 했다. 이 투표에서 노동자 과반이 찬성표를 던지면 하청뿐 아니라 원청인 알파벳과도 교섭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NLRB는 지난 3일 하청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청 노동자 임금, 노동시간, 지휘·감독에 원청인 알파벳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공동 사용자라는 것이다. 이 판정이 유지되고 향후 투표에서 노동자 과반이 찬성하면 알파벳은 알파벳 노조와 교섭해야 한다. 카울 알파벳 노조 위원장은 “알파벳은 직접고용보다 하청 노동자 고용이 더 많다. 이런 중층적 고용 모델로 매분기 수십억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다”며 “하지만 수익 창출에 필수적 역할을 한 하청 노동자 수만명에 대한 사용자 책임은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파벳 노조는 출범 뒤 2년여간 꾸준히 ‘원·하청 노동자의 아름다운 연대’에 주력했다. 소수노조라는 한계 속에서도 불안정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연대의 가치가 희미해진 노동운동
최근 한국 노동운동에서는 미국 알파벳 노조처럼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별 노조 체제를 노동자 간 격차 해소를 위한 산별노조 체제로 바꾸는 것이 노동운동의 핵심 과제였다. 36년이 흐른 지금 형식적으론 산별노조 체제가 구축됐지만 실질적으로 이 체제가 작동한다고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무늬만 산별”이라는 비판조차 진부한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해 7월 19일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그는 건조 중인 원유 운반선 내부에 1㎥ 철제 구조물을 만들고 스스로를 가뒀다. 이준헌 기자
지난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를 외치며 조선소 하청 노동자의 현실을 알린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파업은 원청 생산직 노동자로 구성된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대우조선지회 일부 조합원들은 지난해 7월 되레 하청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지회에 반발해 조직형태 변경(금속노조 탈퇴)을 다루는 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조직형태 변경 의결정족수인 투표인원 3분의 2에 미달해 부결되긴 했지만 찬성표(52.7%)가 반대표(46.0%)보다 더 많았다.
현대자동차그룹사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들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하지 않고는 정규직이 될 수 없는 현실을 두고 ‘원·하청 노동자 공동투쟁’이 실종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원청 노조가 하청 노동자와 연대해 정규직화 싸움을 꾸준히 벌였다면 하청 노동자들이 수 년간 법정 싸움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하청 노동자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공동투쟁을 벌이는 것은 이제 몽상에 불과한 이야기가 돼버렸다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비정규직 백화점’으로 불리는 방송사 내부 노동시장 역시 정규직과 비정규직·프리랜서 등 불안정 노동자 간 격차가 크다. 방송작가는 대표적인 방송사 프리랜서다. 이들은 방송국과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법 사각지대에 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2021년 12월 지상파 3사(KBS·MBC·SBS) 보도·시사·교양 프로그램 방송작가 363명 중 152명(41.9%)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방송작가들이 실질적으론 방송사 지휘·감독을 받으며 일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엔 MBC <뉴스투데이> 방송작가 2명이 노동자라는 법원의 첫 판결도 나왔다.
방송사들이 ‘꼼수’를 쓴다는 판단이 쌓이고 있지만 변화는 더디다. 이렇게 된 데는 언론노조 산하 지상파 3사 정규직 노조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들 노조가 불안정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데 미온적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권지현 방송작가유니온 영남지회장은 “정규직 노조는 우리들에게 가깝지만 먼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전교조는 2017년 ‘기간제 교사의 일괄적이고 즉각적인 정규직 전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해 기간제 교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노조 활동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이 같은 흐름은 노조 활동이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여론으로 이어졌다.
노동운동이 임금격차 해소, 비정규직 지원 등을 위한 연대 시도를 하기는 했다. 초기업 단위 교섭에서 저임금 노동자에게 유리한 차등인상 방식이 적용된 사례가 있다. 한국노총 금융노조는 지난 10여년간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 대비 2배 정도 올리는 전략을 산별교섭에서 관철해 2021년 전태일노동상을 받았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도 2018년부터 2년간 ‘하후상박 연대임금’ 전략을 시도했다.
상대적으로 고임금인 노동자들이 양보한 임금을 토대로 사회연대기금이 조성된 사례도 있다. 금융산업공익재단(금융노조), 우분투재단(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 공공상생연대기금(양대노총 공공부문 노조)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부산지하철노조는 2019년 조합원 1인당 1000만원가량을 양보해 540명의 청년 신규 일자리를 만들었다.
민주노총 화석식품노조 카카오지회의 시도도 주목을 받고 있다. 지회는 카카오그룹 내 계열사 간 벽을 허물고 계열사 노동자면 누구나 지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회가 그룹사 내에서 일종의 ‘소(小)산별’ 역할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계열사 노동자를 위한 교섭도 진행한다. 그룹 내 노동자 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것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노조원들이 2020년 7월9일 공사가 추진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방침에 문제가 있다며 서울 종로구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하러 들어가기 전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 사례들이 일반적 흐름이라고 보긴 어렵다.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관성은 여전하다. 아울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연대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기업들은 정규직이 하던 일을 외주화한 지 오래고, 플랫폼 기업들은 대리기사·배달 라이더 등의 노동자성을 지우고 있다. 하청 노동자, 특수고용직 등이 ‘고립된 섬’으로 남기 쉬운 상황이다.
아울러 능력에 따른 차별이 공정하다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노동운동이 맞닥뜨린 큰 장애물이다. 인천국제공항,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빚어진 ‘노노 갈등’은 능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시험 통과를 기준으로 노동자 간 차별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는 연대라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를 없애고 있다.
“모든 노동자를 위한 우산”
5만명가량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대구 성서공단(성서산업단지) 입주업체 3000여곳 중 70% 이상은 30인 미만 사업장이다. 여느 공단과 마찬가지로 파견노동자가 적지 않고, 수천명의 이주노동자들도 일한다.
김희정 성서공단노조 위원장. 민주노총 제공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성서공단노조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성서공단노조는 설립 초기부터 의료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운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을 위한 무료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이주노동자에게 마스크를 무료 배포했다. 김희정 성서공단노조 위원장은 “조합원이 아니라도 노동자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성서공단노조는 공단 내 모든 노동자를 위한 우산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소규모 사업장, 파견, 이주노동이라는 단어가 교차하는 성서공단은 가장 열악한 노동시장 중 한 곳이다. 이곳에서 노조 활동을 하는 김 위원장의 눈에 비친 노동운동의 모습은 어떨까. “민주노조운동 초기엔 ‘노동자는 하나’라는 인식이 분명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운동이 이상해지고 있다. 산별노조 내부를 보면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는 ‘남남’이다. 연대는 어느새 정규직 노조가 돈으로 하는 것처럼 됐다.”
성서공단노조가 지난해 만 20주년을 맞아 만든 슬로건 이미지. 성서공단노조 제공
성서공단노조는 이주노동자도 노동운동의 한 축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성서공단노조 조합원 150명가량 중 대부분은 이주노동자고, 정주노동자는 2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차민다 부위원장도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민주노총 이주회의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당시 회의자료에 국민 임투(임금투쟁)라는 표현이 있었다. 국민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가 있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의 임투’로 표현을 바꿔달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비정규직 운동조차도 이주노동자 앞에선 멈춘다. 이주민이 200만명인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이주노동자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방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성서공단노조의 슬로건은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다. 김 위원장은 “‘우리 국민 안으로, 우리 노조 안으로, 우리 산별 안으로’ 대신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