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Никола Тесла)
본명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출생
1856년 7월 10일
오스트리아 제국 리카 지방
스밀랸(Smiljan)
사망
1943년 1월 7일 (향년 86년 181일)
미국 뉴욕 주 뉴욕
국적
오스트리아 제국(1856 ~ 186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 ~ 1918)
미국(1918 ~ 1943)
신체
188cm, Rh-O형
직업
발명가, 물리학자, 기계공학자, 전기공학자
학력
그라츠 공과대학교(제적)
프라하 대학(제적)
1. 개요
미래가 진실을 말하도록 두라. 내 업적과 성과는 하나하나 미래에서 평가받을 것이다. 현재는 그들의 것일지 모른다. 허나, 미래는, 내가 진정으로 일함으로써 얻은 미래만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것이다.
Nikola Tesla Memorial Center
세르비아계 미국인 공학기술자. 테슬라 코일의 개발자이자, 상용화 가능한 교류용 전동기를 최초로 발명하여 오늘날 사용되는 교류 전기 인프라 보급의 선두주자이다.
2. 생애
1856년 크로아티아 리카 지방에서 세르비아인 정교회 사제인 밀루틴 테슬라와 주카 테슬라(혼전성은 만디치) 부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신학자가 되지 않고 과학자가 된 천재이자 20세기 초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전형을 만들어 버린 인물이다. 또한 살아온 환경을 살펴보면 여러 모로 비운의 천재이기도 하다.
이름이나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영향인지 러시아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에서 공부도 일도 한 적이 없는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 제국[5] 출신 미국인.[6]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언변의 소유자에, 연설도 잘 했다고 한다. 머리도 좋고 말도 잘 하고 8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에다 188cm의 장신에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엄친아. 당시 사교계의 스타였다. 다만 테슬라의 삶의 목적은 본인의 연구였기에, 사교계 진출도 연구를 위한 인맥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86세까지 오래오래 살았는데 그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워낙에 매력적인 인물이니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테슬라의 일생에 친구 이상의 여성은 없었다. 동성애자니 무성애자니 논란이 많지만, 테슬라의 연구에 대한 엄청난 갈망과 집착을 보면 그냥 아예 관심이 없었던 걸로 추정된다. 실제로 본인이 "나는 결혼한 남성이 만든 훌륭한 발명품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한 적도 있고. 사실 학문에 빠져 이성에는 관심이 없었던 과학자들은 상당히 많다. 아이작 뉴턴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뉴턴은 어린 시절 친모의 재혼으로 인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혐오증을 가진 것에 가깝고, 테슬라 본인은 그냥 순수하게 결혼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오해와는 달리 뉴턴은 이성을 전부 혐오하진 않았다. 반면 테슬라의 누나와 여동생인 안젤리나와 밀카, 마리카는 결혼하여 자녀들을 두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종합기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 군 당국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나, 이후에 받지 못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체코 프라하 대학으로 옳겼으나 역시 등록금 문제로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 후 에디슨 컴퍼니에서 일했으나, 직류에 올인을 외치는 토머스 에디슨과 대립, 회사를 뛰쳐나와 투자자를 긁어모아 자기 회사를 세운다. 그의 교류전기에 대한 실험이 성공을 거두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많은 투자자들이 몰렸고, 거금의 투자와 특허비 지급을 약속한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직류 vs 교류 문제로 에디슨과 엄청나게 싸웠다는 것은 역사에서 이 대립을 전류 전쟁(War of Currents)으로 따로 기록할 정도로[7] 유명한 일로 나중에(1915년) 에디슨과 노벨물리학상 공동 후보로 올랐을 때 서로 "저 놈이랑 같이 받느니 안 받고 만다"고 악담을 퍼부어 댔다는 루머가 있다.
특허 포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당시 에디슨 전기회사(제너럴 일렉트릭)와의 직류 vs 교류 전쟁에서 테슬라의 파트너였던 웨스팅 하우스[8]는 교류 전류 전송방식을 특허내서 같이 돈 많이 벌자고 제안했으나, 자신보다는 인류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며 특허등록을 거부했다는 설.[9]
미국 정부의 나이아가라 수력발전 건립의 발전형식으로서 직류방식의 전력사업을 벌이고 있는 제너럴 일렉트릭(에디슨)과 교류방식의 전력사업을 시작하는 웨스팅 하우스(테슬라)가 경쟁이 붙었는데, 결국 교류 방식이 채택 되었고, 그에 따라 교류 방식이 전기공급의 대세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직류방식을 고집했던 제너럴 일렉트릭(에디슨)은 전기공급시장에서 밀려날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JP 모건의 지원으로 재정이 탄탄한 제너럴 일렉트릭은 부실한 재정상태인 웨스팅 하우스(테슬라)를 질 것이 뻔한 특허소송들로 압박하였고, 결국 자금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웨스팅 하우스는 교류전류에 대한 특허를 포기하였다는 설.[10] 테슬라는 사건 이후 웨스팅하우스와 의견 대립 끝에 회사를 그냥 뛰쳐 나와 버렸다.
원래는 직류 전송 방식이 먼저 연구가 시작되어 발전소와 전력망을 만드는 등 먼저 쓰였으나, 결국 변압이 용이하며 장거리 송전에서 손실이 적은 점 등, 교류가 가진 여러 장점으로 인해 에디슨의 직류 전송방식은 일반 전기 분야에서 사장되고, 세계적으로 교류 전송 방식이 쓰이게 된다. 에디슨은 테슬라를 어떻게든 지게 만들기 위해 로비도 하고 언론에 선전도 하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를 전기로 태워 죽이는 실험을 많이 해서 주변의 고양이와 개들이 남아나지 않았을 정도. 교류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교류를 이용한 사형용 전기의자를 만들어서 사형수에게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번 전기를 통한 후에도 연기가 모락모락 날 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관하던 간수에게 "차라리 화형을 하시죠"라는 말을 들을 정도. 결국 승리한 것은 교류.[11]
톰소여의 모험의 작가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과 교류를 한 적이 있다. 소설 관련이 아닌 발명 쪽으로. 이 부분은 2015년 9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그다지 수익성 있는 발명을 하지 못하여 상업화되지 못한 채 사라진 물건들이 많은 데다[12], 에디슨과 맞먹을 정도로 성격이 나빴었다고 한다. 특히나 독선적인 고집불통에다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는데, 그런 면으로 인해 조수나 동료는 물론이고 투자자[13]들과도 언쟁을 자주 벌이고 안하무인으로 상대를 대해 한때는 조력자였던 대다수 지인과 친구들이 나중에는 대거 절교를 하거나 원수가 되었을 정도였다. 네놈들은 그냥 하루하루 돈 대는 기계일 뿐이지 예를 들면 형광등의 경우 그 발명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품화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고, 심지어 전 세계에 형광등을 보급하여 떼돈을 번 회사는 바로 최대의 라이벌 에디슨이 만든 GE[14]였다. 그 탓에 기껏 고생해서 고안해 낸 발명도 개발비가 없어 묻혀버린 경우가 많았다.
친구나 동료, 가족은 남아나질 않았으나[15] 그래도 지지자, 추종자들이 많아서 만년이 별로 불행하지 않았던 굉장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노년기에는 호텔방과 임대주택 월세방을 전전하면서 비둘기에게 모이나 주는 가난한 삶을 살다가[16]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사진은 4장 남아있다고 한다. 그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강연
테슬라가 성격이 에디슨보다 더 나쁘고 독선적인 고집불통에 타협을 모르는 성격에, 다른 사람들을 안하무인으로 대했다는 여러 일화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맞는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원체 테슬라의 일생의 적지 않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고,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행적들도 일반인들 보기에는 하도 기묘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이 양반도 만년의 에디슨처럼 오컬트에 깊이 심취하였다.
3. 에디슨과의 미운정 고운정
앞서 말했듯 테슬라가 에디슨과 여러 모로 대립한 것도 사실이고, 이로 인해 에디슨이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제작하고 테슬라의 전기 체계가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실험하는 등 진흙탕 싸움이 어느 정도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둘의 갈등에는 부풀려진 면도 적지 않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최초로 '교류를 사용한 유도 전동기'를 발명하자 그와 그 회사를 비즈니스로 묻어버리려 했으나, 기존에는 없던 상용화가 가능한 교류용 전동기가 절실히 필요했고 에디슨의 라이벌이었던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그를 받아들인 덕에 실패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일 때문에 "에디슨이 뒷공작으로 테슬라를 몰락시키기 위해 마피아들과 결탁했고 테슬라의 회사를 망하게 할 악의적인 물건을 발명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전기의자를 만들기 위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동물들을 싹쓸이했다"는 말도 나돌았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그러나, 에디슨과 테슬라는 정작 몇몇 갈등 이후에는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연락하고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AC(교류전기)와 DC(직류전기)간의 전류전쟁은 에디슨과 테슬라간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에디슨과 나중에 테슬라로부터 AC 송전의 특허를 사들인 조지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대립에 가깝다.
1890년대에는 X선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에디슨이 사용한 표현을 보면 절대로 숙적한테 보낸 편지가 아니다.
"My dear Tesla, Many thanks for your letter. I hope you are progressing and will give us something that will beat Roentgen."
"친애하는 테슬라여, 자네의 편지는 잘 받았네. 나는 자네의 발명이 잘 진행되어 우리에게 뢴트겐의 업적을 이길만한 것을 주었으면 하네."
또한 1896년 Electrical Review 5월호에 올라온 비평에 에디슨은 테슬라에 대해 이런 답변까지 남겼다.
나에 대해 뭐라하든 상관없으나 테슬라는 신경질적 기질이니 이런 기사는 그를 비통하게 만들고 일을 방해할 것이다. 테슬라가 불가능해 보이는 낙관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실험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시간만 주면 테슬라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테슬라 측에서 에디슨을 그나마 비판한건 에디슨의 실험 방식이 반복실험과 시행착오가 지나치게 많은 등 "한 결과를 내기까지 삽질이 잦았었다"는 것이다. 전류 전쟁으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테슬라의 어그로를 가장 많이 끈건 웨스팅하우스와 진정한 승리자인 JP모건이었을 것이다. 즉, 에디슨과 테슬라의 라이벌 관계는 흥미를 위해 과장된 면이 많으며 어느 정도는 걸러 듣는 것이 좋다.
물론, 니콜라 테슬라와 에디슨의 라이벌 관계가 과장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면, 왜 니콜라 테슬라는 살아 생전에 IEEE를 "에디슨의 주구" 정도로 여기며 싫어했고, 또 1917년 동 학회가 "에디슨 상"을 수여하려 하자 거부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 테슬라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에디슨을 싫어하고 경계하였으나, 에디슨은 테슬라에 대해 똑같이 화가 나긴 했어도 세월이 지난 후에는 에디슨도 테슬라의 실력 자체만은 개인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으로 보인다.[17]
오늘날은 교류가 초고압으로의 변압이 쉽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에 주로 사용되고, 직류는 철도, 건전지나 알루미늄 생산 같은 전기화학 공정, 태양광 발전, 반도체 소자의 전원, 초고압 직류 송전(HVDC)[18] 등에 사용된다. 컴퓨터나 TV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용 전자기기도 들어오는 전원이 교류이므로 직류로 먼저 전환해야 사용이 가능하다. 테슬라가 전기 시대의 아버지라면 에디슨은 전자(電子) 시대의 아버지인 셈. 본인들이 살아생전엔 몰랐겠지만 결국 둘 다 현대 기술의 대다수의 기반을 마련한 위대한 발명가였다.
4. 매드 사이언티스트
생전에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취급을 받았다. 동시대 사람들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말을 들을 만한 짓을 많이 했다. 밑 일화들이 약간 왜곡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W. 버나드 칼슨의 테슬라 평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뉴욕에서 실험 중에 공진동 기계를 작동시켰는데, 실험실이 있던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도망치고 난리가 났다. 경찰이 도착해서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테슬라는 본인도 제어가 불가능해진 공진동기계를 해머로 박살낸 후 경찰들에게 말하기를 "흥미로운 과학실험 구경을 놓치셨군요!"[19][20]
콜로라도 스프링으로 가서 개인 실험실을 만들고 실험을 시작했다. 한적한 시골도시였는데 주민들은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밤이 되면 파란 불꽃이 일고, 실험실 근처를 지나가면 전기가 튀고 근처 땅전체에서 불꽃이 튀는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테슬라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테슬라가 전류를 너무 많이 써버리는 바람에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되는 사건까지 발생해버려서, 엄청난 두려움과 미움을 받았다고. 단 정전에 대한 보상과 사과는 확실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전기실험을 했다.[21][22]
JP 모건에게 지원을 받아 롱 아일랜드의 절벽 위 땅을 사서 워든클리프타워라 이름짓고는 거대한 돔을 얹을 예정이었던 전 지구 통신용 타워를 짓기도 했다! 나중엔 이 타워가 워덴클리프 타워라 이름붙여 지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있었던 테슬라는 모건으로부터의 지원 중단 전보가 오자 그 수만 달러를 주고 세운, 그것도 다 만들어지지도 않아서 제일 중요한 돔 얹는 공사도 못한 타워를 고철 값만 주고 팔아버렸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어떻게 만든 건지 공사장비로 두들겨도 휘지 않아서 TNT로 날려버렸다고 한다. 일생의 꿈 중 하나였던 타워의 건설을 그깟 돈 때문에 포기한[23]이후, 테슬라는 투자자들을 돈이 나오는 금고 정도로 취급한다. 당시 이 프로젝트가 실패 후 테슬라는 신경쇠약이 걸렸고 이런 프로젝트는 다시는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24]
테슬라가 사망하자 FBI가 달려와서 연구노트와 기록들을 몽땅 압수해서 군기지로 가져가서 분석했다. 그 후 발표는 별거 없다.. 라고 한 후 2차대전이 끝난 후 테슬라의 고국에 있는 친척에게 돌려주었다. 단 상당수의 테슬라 추종자들과 음모론자들은 미국 정부가 돌려준 기록은 쓸모 없는 것들만 있고 실제 중요한 것은 아직도 어딘가 숨겨두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25] 이때 FBI가 보낸 MIT 과학자는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삼촌인 존 트럼프다.
특유의 모난 성격과 기행 탓에, 오랫동안 수상한 발명만 해대는 기인으로서 과학 기술 업적으로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신비주의자나 음모론자, 유사 과학자 같은 사이비들에게 사실상 고인드립을 당하는 매우 불쌍한 인물이다.
5. 그 외 천재적인 발상들
라디오의 발전에는 테슬라가 만든 고주압 변환 장치인 테슬라 코일이 역할을 했다.
1898년 무선조종 배(radio-controlled boat)를 시현했다. 무인으로 조종되는 배를 지켜본 상당수 대중들이 이를 속임수, 텔레파시 또는 흑마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무선조종 함선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지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문명 5 백과사전에서도 나와 있듯이 그는 레이더의 초기 단계를 구상하기도 했다.
테슬라는 아직까지 실현된 바 없는 무선 전력 송신 기술을 상용화하려 했던 최초의 과학자였다. 테슬라의 조수가 본 바로는 전기를 보내는 송전탑을 세워 수 킬로미터까지 전류를 보내 바닥에 설치된 전구들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조수는 테슬라가 원리는 알려주지 않아서 재현은 하지 못했다고. 이 실험으로 그는 1900~4년 사이 미국의 투자자 J. P. 모건에게 수십 차례나 편지를 보내 대서양을 넘어 에너지를 보낼 수 있는 송전탑을 건축하려고 했으나 계획이 중간에 흐지부지되어 결국 막대한 빚을 져야만 했다. 일각에서는 모건이 자유 에너지(free energy)가 돈벌이가 안 된다고 판단해서 투자를 철회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모건이 훗날 인수한 에디슨의 GE는 에너지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만약 모건이 투자를 뒷받침해주었다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고로 무선 전력 송신 기술은 테슬라 코일과 연관이 있다.
테슬라는 테슬라 발진기(Tesla's oscillator)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장치는 특정한 공명 주파수에 진동하여 건물이나 땅을 흔들리게 만들 수 있다. 뒤늦게 이 기계의 파괴성을 인지한 테슬라는 해머를 통해 실험을 중단해야만 했다. 종종 거론되는 테슬라와 HAARP 무기의 연관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 음모론자들은 이 무기를 통해 지진이나 기후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차베스도 미국 정부가 HAARP를 통해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899년 콜로라도 스프링즈에서 전기 실험을 하면서 발전 설비에서 무선으로 전력을 보내는 연구를 했다. 이때 사용한 테슬라 코일 중에는 1억 볼트까지 전압을 상승시킬 수 있는 물건도 있었다.
전기구를 만들어 손으로 움직이는 등의 현재로도 구현방법을 알 수 없는 독특한 실험들을 많이 보여줬으나 대부분의 연구들이 그의 머리속에 있었기 때문에[26] 다른 것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제대로 전해지질 않지만, 2003년에 세르비아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서 필사본 등의 자료가 있음이 확인되었다.[27]
그 외에 음모론이 굉장히 많이 존재하기도 한다. FBI가 그가 죽고나서 연구 자료들을 다 가져갔다든지(이는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나중에 세르비아에 반환되었다.) 심지어는 물질 전송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필라델피아 실험 음모론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음모론이나 이리유카바 최의 그림자 정부에선 지치지도 않고 나오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SETI 프로그램의 최초 제안자이기도 하다. "외우주의 전파를 수신하여 분석하면 외계 문명을 찾을 수 있을 것" 이라는 SETI의 기본 개념을 제안한 게 이 사람이다.
그는 전하량이 전자보다 작은 입자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쿼크 발견으로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
이건 그의 천재적인 두뇌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번외로 니콜라 테슬라는 자신이 어렸을 적에 죽었던 형 다니엘 테슬라를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며 형에 비하면 자신의 능력은 별 것이 아니였다라고 인정하기도 했다.'셜록 홈즈' 시리즈의 마이크로프트 홈즈와 셜록 홈즈의 실제 모델
6. 사후 재평가
그가 죽은 지 30년 후(1975년)에야 미국 전기전자학회(IEEE)가 그를 기리는 IEEE Nikola Tesla Award를 제정하면서 다시금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28]
2009년 7월 10일에는 구글에서 니콜라 테슬라의 생일을 축하하는 로고를 띄우기도 하였다.
자기장의 단위인 테슬라(T) 또한 그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에 관한 저서는 우리 나라에서는 (주)양문에서 출판된 "과학문명을 1백 년 앞당긴 천재 과학자ㅡ 니콜라 테슬라(마가렛 체니 저)" 는 읽어볼 만하다(원본 초판이 81년에 나온 묵은 책이란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는 저 위에 나온 "빛의 제국"처럼 테슬라가 덤으로 나온 게 다다. 물론 현재는 자서전도 나왔고 평전도 나왔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읽어보긴 좋을 듯.
2012년 이후로 일론 머스크가 최대주주인 테슬라가 혁신기업으로 떠오르면서 회사명의 유래가 된 니콜라 테슬라의 인지도 역시 덩달아 올라갔다.
그가 남긴 발명품을 분석하며 그가 생각했던 것을 추측한 기사도 있다 - 니콜라 테슬라는 우리에게 FREE ENERGY의 열쇠를 남겼는가?
7. 외모
86세 때의 사진.
말년의 가난으로 인한
움푹 들어간 볼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