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의 저녁 외 2편
- 슬도
이강하
경남 하동에서 출생, 2010년 《시와 세계》 등단, 시집 『화몽(花夢)』 『붉은 첼로』가 있음.
어느 별의 수령(樹齡)을 구겨 넣었을까
파도 소리가 웅숭깊다
날고 싶은 색이 범람하는 시간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탄력적인 구멍이고 싶을 때
이 땅의 청춘들이여, 기죽지 마라
어둠이 맞닿는 지점에서는
더 깊은 현을 만끽하라
노을 속에서 칸나가 피듯
옛사람의 형상으로
나 당신을 사랑했으므로
꽃이었던 밤의 기억
진화된 빛을 거부할 수가 없구나
거문고다리가 등대를 오래 바라보는 저녁
나는 이미 옛사람
붉은 칸나.
멀고도 가까운 해변
몸이 멀어졌어도 끈을 놓은 적이 없지
기억이 흐르는 해변은
높이가 다른 집, 가격이 다른 신발을 신고
격한 고민을 털어놨을 때도
서로의 고민은 순식간 해결되곤 했지
험악한 먼지가 불어와도
끝까지 울타리를 지켜낸 별들이여,
항상 너는 나의 길
나는 너의 길,
서로의 염려가 흘러넘치는 한때
파도에 부딪히는 새 울음이
울퉁불퉁한 돌멩이가
슬프기보다는 따뜻한 위로가 될 때가 있지
불향을 껴입은 구름이
아늑한 촉감으로
에밀 놀데의 밀밭을 달리는 것처럼
원시적인 밀밭이 한 뼘씩 늘어날 때마다
별들은 몸을 자꾸 비틀지, 설령
어느 바윗덩이가 이간질을 해도
여전히 사랑이 타오르는 나의 해변은
멀고도 가까운 해변 2
- 대왕암공원
소나무 숲에는
바다를 사랑하는 이젤이 산다
그 바다는 분홍이기도 하고
노랑이기도 하고 초록이기도 하고
보라이기도 하다
가족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갓 핀 해국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귀를 쫑긋거리며
코를 씰룩거리며
오늘도 나의 이젤들은
둥둥 북소리를 낸다
두 팔 벌리며 날아오는
당신은 누군가, 누구든
도착하면 이젤을 와락 안아 보아라
먼 사랑이라도 좋겠다
가까운 어머니면 더 좋겠다
이젤의 감정이 절정인 저기,
초록을 기워 덧댄 물비늘이 참 곱다
기억이 생동하는 바다
볕이 좋아서 무작정 매곡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매곡도서관은 우리 집에서 가깝다. 우리 집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도착해서 승용차에 앉았다. 그러니까 운전대를 잡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대부분 사람들은 운전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운전이 즐겁지 않다. 오른 발이 불편하고부터는 더 그렇다. 그렇다고 운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버스를 타면 멀미가 심했고 어쩔 수 없이 개인의 교통수단으로 면허증을 땄었다. 놀랍게도 운전을 하면 멀미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긴장을 한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깊어졌을 땐 혼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다.
누군가가 바다로 가라고 일러준 것도 아닌데 오늘 역시도 바다로 향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울산의 바다는 나에게 이런저런 꿈을 꾸게 했다. 시를 쓰게도 했다. 너무 마음이 복잡할 때는 혼자일 때가 좋다. 홀로 해변에 도착하면 곧바로 몽돌이거나 파도가 된다. 수평선은 한참 뒤에야 편안한 자세로 바라본다. 해변에 머무르는 동안만큼은 편안한 의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산만했던 어제가 정제되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좋은 기억들이 살아나와 나를 위로한다. 철썩철썩, 파도가 어깨와 등을 매만져준다. 새처럼 훨훨 날아 바다 위를 날아다니기도 한다. 큰 고래를 타고 먼 바다까지 헤엄쳐가기도 한다.
유년의 골목이 어떤 이야기를 끌고 오기도 한다. 어릴 적 부모님이 어릴 적 젊은 형제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손도 잡아준다. 어릴 적 친구들이 환히 웃으며 갯바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섬진강도 보이고 구례 화엄사도 보이고 하동 쌍계사도 보이고 화개장터도 보인다.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지만 바다에서는 생동하는 어제를 만날 수 있다. 언제 어느 때나 누구든 자유롭게 와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고 가라고 저렇게 가슴이 넓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고민을 털어놔도 그 고민을 다 받아주기에 저렇게 깊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들끓는 바다, 누군가의 혁명이 시작되는 바다, 누군가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기도 하는 저기! 저 바다가, 나의 시가 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