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다.
정운은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통영 앞 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 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 가야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 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76년 3월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더 크게 만들겠다던 문학상 기금은 정운의 타계로 붓지 않고
구상. 김준석. 임인규등 문학상 운영위원들의 합의로 '정운시조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글참조 : 중앙일보 - 이근배 시인>
탑(塔) 詩/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시인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사랑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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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을 떠올리며
글쓴이 : 000
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이라지만,
이 두 분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네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난 늘 이영도 시인이 부러웠습니다.
청마가 유부남이요,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3년 동안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흔히 이별의 가장 많은 원인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알게 했습니다.
혼자서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가 부러웠습니다.
과연 청마 외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한편 이영도의 가슴 아픔이 저려옵니다.
싫어서가 아닌데..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마음..
한편으론 행복하고 한편으론 아팠을 그 마음..
변함없는 사랑에 어쩜 유치환보다 더 울었을 이영도..
사랑한다 한 만큼 아팠을 이영도..
어쩜 유치환은 행복하기만 했을 듯합니다.
그토록 사랑할 여인이 그래도 곁에 있었으니..바로 건너편 2층 집에..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픔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의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나도 이영도 시인처럼 한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영도는 청마의 시세계를 넓혀주었습니다.
이 또한 제가 부러웠던 이영도의 면이었습니다.
3년만에 청마에게 마음을 연 이영도..
이렇게 그들은 20년 동안 사랑을 키웠습니다.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현대에서 분명 이들의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유치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긴 세월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유치환에게 받은 편지를 한 통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이영도..
난 연서 대신 실습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편지를 다 지니고 있습니다.
혹여나 교단에서의 회고록을 쓸 때면 활용하려고 말입니다.
거창하게 출판까지는 꿈꾸지 않습니다.
나도 만약 이영도를 사랑한 만큼의 유치환이
제게도 있다면
저 역시 한 통의 편지도 버리지 않고
모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만의 책으로 탄생시킬 것입니다.
나에게 매일의 연서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의 태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세간에서 불륜이라기보다는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주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적고보니 저도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저는 혼자도 아니고
이영도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자도 아니고
한 눈에 마음 줄 만큼의 미모를 지니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영도 만큼의 욕심을 부리고 싶습니다.
꿈으로 끝날지언정.....
*유치환님의 행복이 이종환님의 목소리로 흐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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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장년의 사랑
그를 말할 때면 사람들은 항상 이영도라는 사람을 항상 말하고는 한다
황폐하지 않은, 불모의 사랑이 아닌, 소중하고도 행복한 사랑,
즉 주는 사랑을 20여 년간 한 사랑...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감상'이 없는 불장난이 아닌 충실한 사랑을 짙게 물들여 그의 장년기를 수놓는 제2의 청춘 가로 채웠던 그는... 외로운 사랑을 했으며 죽음도 그 안에서 너그러운 사랑 속에 안길 수 있었다.
그의 남성형 자세와 그 시풍이 도달한 종착점이 바로 <주는 사랑>의 행복한 연가로 폭을 넓히고 무르익었다. 영원한 것, 平常無事의 터득 속에서 익힌, 온화한 자애의 소근거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이영도를 정신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처 자식이 있는 상태였던 그는 시조 시인이었던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200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녀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중 추려 모은 서간집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장년기의 시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이 서간집은 그의 사후에 출판한 것이다.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 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 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영도는 이 책의 인세 수입을 한국문학사 가 주관 하는 정운시조상 기금으로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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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선생이 타계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에게 사위에게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부지런히 살았고 그것도 붓 한 자루에 연명된 삶이었으므로 풍족과는 아예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궁색하지 않았던 삶으로 기억된다.
따님이 급한 용처가 생겨 어머니께 돈을 빌리고자 하여도 그의 장례비는 건드리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예비한 삶이었다.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먹는 일이 없고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 ,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근검 절약하면서도 남을 위한 배려는 돈독하였다. 후배 문인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 언제나 먼저 나서 도우고자 하였다. 그의 후덕에 힘입어 필자는 전문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필자 뿐 아니라 후덕에 힘입은 문인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산 이은상이 '언약'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사향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욱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길이 갈 것이다.'
정운 선생의 향내 머금은 작품들은 첫째로 연정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친다고 할까.'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한결 외로움도 보배 냥 오붓하고/실실히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이것은 '비'의 전문이다. 딸은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지키는 방안의 허적, 그리고 젖어 내리는 밤비의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선생.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40년 대말~50년 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정운 선생은 사랑에 대해선 퍽 용감하고 솔직한 분이었다. 정운과 청마의 사랑은 청마가 정운에게 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책에 절절히 기록되어 있지만 뜨겁고 열렬했던 그들의 사랑은 찬탄할 만하다.
애 타는 심정을 시로 서로 화답하고 당신이 주신 시를 수놓은 그 병풍 아래 누워야 잠이 들고 하루에 한 장씩의 편지를 주고받아야만 진정이 되는 사랑은 참으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정운 선생의 향내 머금은 작품세계는 두 번째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 할 수 있다.'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길고/감 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이것은 정운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보리 고개'다. 보릿고개의 절박한 삶을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눈이 오시는 날에 동작동 墓地를 걷는다/뜨겁게 목숨을 사뤄도 사무침은 돌로 섰네/山河도 고개를 숙여 이 絶叫를 듣는가'.
이것은 '落花'의 일부이다. 여기서 보듯 정운 선생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세월을 보낸 시인이었다.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고 풀 한 포기에도 사랑과 연민을 보냈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 여름, 정운 선생 댁인 애일당(愛日堂,부산대 인근)을 찾았을 때 대문 앞에 달린 수세미가 옆집 것 보다 훨씬 크고 묵직하여 씨가 달라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거름을 듬뿍 주고 벌레 잡아주고 쓰다듬어 준 결과라고 하면서 비록 식물이라도 애정으로 대하면 애정으로 답한다고 일러주었다.
정운 선생이 애일당을 떠나던 날 나는 사진사를 데리고 부산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선생은 당시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그게 1967년 이른 봄이었던 것 같다. 떠나던 그 날까지도 정운 선생은 뜰을 돌보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뜰에서 자라는 것들에 애정의 손길을 주고 싶어했던 정운 선생의 그날 그 모습은 참으로 훌륭해 보였다.
몇 년이 흘러 애일당을 찾았더니 보료 같던 금잔디밭, 수선화가 곱던 조그마한 연못, 사철 아름답게 피던 꽃들은 오간 데 없어 저 옛 노래의 '황성옛터'를 실감나게 하였다.
정운 선생이 가신지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선생의 무덤은 경북 청도군 내호 마을 선영 아래 오빠인 이호우 선생 곁에 있다. 정운 선생이 배출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들 괄목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전 부산문인협회 회장 김상훈(현 부산일보 사장)선배가 지난 96년 노고하여 금강공원 안에 정운 선생의 시비를 세웠는데 선생이 그리워질 땐 가끔 비 곁에 앉아 정운 선생이 내게 주신 도타운 애정을 한껏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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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던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입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습니다.
청마의 편지는 마치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Lyricism 으로 가득 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묶여져, 그 수익은 이영도의 뜻에 따라 후진 양성을 위한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희사된, 청마의 연애편지 중 한 편을 소개합니다.
두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더듬으며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절하고 아름다운모습을 다시 한번 새겨 보면서 사람간의 사랑이 언제까지나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 길입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
중 3 일학기 국어시간에 한국 문학의 흐름에 대한 공부를 한다.
국어 선생님과 시간이 맞질 않아 나는 또 그 시간에 대타로 나섰다.
나의 대타 과목은 수학, 과학, 국어...여건만 되면 의례대로 그냥 책 들고 선다.
이젠 이골이 났다. 전공 선생님들 보다는 다소 시험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지겠지만
감동을 끌어내고자 하는 수업 방식에 아이들은 부담 없어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이름과 작품이 쭈욱 열거되고...
청마 유치환 대목에 오니 과거 중3때의 흥분한 국어 선생님이 떠올라 픽 웃었다.
청마와 정운 선생의 사랑을 불륜으로 매도하면서 서슬 퍼렇게 떨던 모습이...
어린 나도 국어 선생님 가정에 뭔가 문제 있구나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 편파적 매도 땜에 그토록 아름다운 유치환님의 시를 쉽게 흘려 버렸었다.
뿐만아니다. 로크, 루소,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의 사상가들을 사기꾼으로 매도하던 도덕 선생님 ...
피카소를 비롯한 화가들의 여성편력, 대표적인 음악가들의 신경쇠약 등 ...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비난을 먼저 접해 그 위대한 예술 혼까지도 비하시켜 버리곤 했었다.
이처럼 철학적 빈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사들에게서 일방적으로 심어진 그릇된 선입관을 없애는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사랑이 무언지를 깨닫고 난 지금에서야 비로서 작품을 통해 그들의 굴곡 있는 삶마저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매 순간마다 진실하다면 그 마음의 흐름과 예술의 표현도 진실 할 수 있음을 나는 먼저 알려 준다.
작가의 삶에 대한 시비는 본인과 당사자들만이 가릴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랑을 비롯한 감정들은 일방적 욕심에서 묶어 둘 수 없다는 생각의 발로에서
철저히 작품을 이해시키고 감상하도록 이끌어 본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말해주어 우리 선조들의 세계를 이해 시키고자 한다.
여기 지고지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운 이영도님의 시조를 적어 본다.
손바닥 마주치는 합환의 즐거움은 없을 지라도 마음으로 이미 사랑했음으로 행복했고
그 추억만으로도 구슬같은 시조를 읊을 수 있었으니 두 시인은 이미 천하를 얻은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