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의사
1 .<8월의 독립운동가> 박 열(朴烈) 선생 공적개요 (1902. 2. 3 ~ 1974. 1. 17)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박열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받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나아가 귀향하여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살포하며 문경의 3·1운동을 촉발하여 민족독립의 의지와 열기를 분출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는 일본 본토보다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학업을 계속하며 보다 과학적이며 선진적인 반제이론을 수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도쿄에 도착한 뒤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더 나아가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초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나 반제 항일투쟁의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무정부주의단체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선전활동에 주력하며 항일운동을 편 것이다.
특히 식민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의열투쟁노선을 천명하면서 1922년 말 직접행동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중운동』·『후데이센징』·『현사회』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서울·도쿄의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펴면서 민중의 권익신장에도 힘썼다.
다른 한편으로 1923년에는 흑우회와는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하여 갔다. 그해 가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계기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며 폭탄 반입 및 제조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대진재의 발생을 기화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어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으로 비화되었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나아가 사형 판결이 나자 선생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였다.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이후 무기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실로 22년 2개월이라는 기나긴 옥고를 치른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8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2. 박열(朴烈)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김명섭 (단국대학교 강사)
1. 머리말
박열은 일제 강점기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세계최장의 옥살이를 치루어야 했다.
해방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박열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다.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였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하여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하지만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에 끼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남북한 양쪽을 비롯해 고향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미소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밑바탕에는 일제의 천황제 체제는 물론 남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모두를 거부하고자 했던 그의 자유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다행이 지난 2001년 문경의 뜻있는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 중에 있어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기대된다.
2. 성장과 항일투쟁
박열의사 공판 장면
한복입은 후미코와 박열이 법정으로들어오는 사진이 실린 당시의 일본신문기사
박열은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부친 박지수(朴芝洙)와 모친 정선동(鄭仙洞)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烈)로 불렀고, 호적에는 준식(準植)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제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조선총독부의 후원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일찍이 오천리에는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星山組合)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1월 권농조합으로 개칭되었다. 박열의 맏형 정식과 둘째형은 이 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1-22년경 마을 구장을 맡아보는 등 마을일에 적극 앞장섰다.
박열의 집안은 누대로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고 한다. 7세인 1908년부터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에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인 보통학교에 통학하면서, 소년 박열은 민족의식 형성에 큰 계기를 갖게 된다. 즉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그동안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며 조선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교사는 형사”라는 선생님의 말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소년 박열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여 민족을 위한 큰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박열은 농사를 지으라는 맏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일본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음모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였던 박열은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에도 박열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경 그는 도쿄(東京)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도쿄에 도착한 박열은 여느 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의 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험난한 고학생활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단기어학 전문학원인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의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직접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다.
박열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찬․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義血團, 후에 鐵拳團-血拳團-撲殺團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떠나라고 명령하고,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서 김약수,백무,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1922년 2월경 박열은 그의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요코하마 태생의 그녀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오면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이었다. 약 7년 동안 조선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한 바 있는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곧 만남을 통해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3. 흑도회와 흑우회, 불령사 활동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박열은 김약수․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저명한 일본 아나키스트인 이와사 사쿠타로의 후원아래 다양한 항일투사들이 결집된 흑도회의 회원들은 세계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나아가 그는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黑濤)》의 발간책임을 맡아 창간호와 2호를 발간하여 항일세력의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하였다.
흑도회는 1922년 8월 니카다(新潟)현 나가스가와(中津川)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로 다수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열과 김약수를 조사단으로 파견하였다. 이어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9월 7일 도쿄 YMCA에서 보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롯해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는 등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열은 이 사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가 민족차별과 식민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의 근본적인 파괴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니카타현 조선 노동자학살사건의 조사를 계기로 흑도회는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을 강조하는 박열과 대중적 전위정당을 추구하는 김약수와의 균열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박열은 국내에 사건보고를 위해 들어왔다가 김한(金翰) 등 의열단 간부들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 역시 조선인노동조사회와 노동자동맹을 결성함에 따라 흑도회의 해체를 불러왔다.
박열은 1922년 12월경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하였다. 결성 당시 회원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포함해 신영우,홍진유,서상일,박흥곤,장상중 등이었다. 흑우회 멤버들은 곧 사무실 내에 민중운동사를 세우고 1923년 5월경 기관지 《민중운동(民衆運動)》을 발간하였다. 순수 조선문으로 발간된 이 월간 사상잡지의 발행을 위해, 박열은 흑우회 사무소에서 편집 및 통신을 비롯한 기타 일체의 사무를 보았다고 밝혔다.
흑우회는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우회원들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現社會)》라는 기관지를 통해 ‘과격사회운동 취체법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대규모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 노동단체 주최로 열린 세계노동절 행사에 참가해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조선의 해방’을 외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흑우회 멤버들도 대회에 참가하다가 경찰의 검속에 걸려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이밖에도 흑우회원들은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울과 도쿄의 노동단체들과 연락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 연대활동을 펼쳤다.
4. 일왕폭살계획과 옥중투쟁
박열은 1923년 4월 중순경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으로 조직된 불령사에서 박열은 정기모임을 통해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활동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그는 보다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박열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하려 하는 한편, 의열단의 중요간부인 김한(金翰)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세 번째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열은 1923년 가을의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金重漢)에게 폭탄구입 여부를 타진하였으나, 구입비용 때문에 잠시 보류하였다. 이때까지 박열은 폭탄을 구입해 이를 언제, 어디에 투척할 것인지 분명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옥중의 박열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빅열의사의 옥중가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해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이런 와중에 일본내각과 군부는 1918년 쌀폭동 당시의 민란움직임을 사전에 막기 위해 도쿄시내와 인근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완전무장한 상태의 군대와 경찰은 이 기회를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하였다. 정부의 고의적인 유언비어 살포로 인해 자경단과 민중들조차 이 광란의 대학살에 참여한 나머지,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과 약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하였고, 6천여 명이 검속되기에 이르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회원들 역시 9월 3일경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검속되었다. 일본경찰은 이어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를 명분으로 한 달간의 구류에 처하더니, 곧 불령사를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혐의로 들어 구속 기소시켜 버렸다. 이러한 조치는 박열과 불령사를 오랫동안 감시해온 경찰의 사전계획에 의해 취해진 것이다.
경찰의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구입계획 사실이 알려졌다. 이때부터 일본정부와 검찰은 불령사를 폭동과 천황암살을 꾀한 조직사건, 즉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했다.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박열 부부의 폭발물 유입계획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大震災)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하였다.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여론과 조선인들의 들끓는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정부의 계략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검찰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고․김중한 세 사람 이외의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함으로써 스스로 실패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박열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본천황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그는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인 것이다. 나아가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등의 글을 읽으며 일본 천황의 죄를 폭로하였다.
일본정부는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스스로 조작사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다. 사형판결 후에 박열은 미소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 하였고,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의지에 대해 일본 재판장까지도 감동하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 당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서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불행한 세기의 연인은 각각 치바(千葉)형무소와 도치키(栃木)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가혹한 삶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아 출간하였다.
일제는 두 사람의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사상전향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편지왕래나 독서내용을 제한한 것은 물론, 글 쓰는 것도 방해하거나 전향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다.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인해 비밀리에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졌고, 무사히 경북 문경 팔령산(八靈山)에 옮겨 묻힐 수 있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구한 삶과 사랑은 두 사람의 다정한 포즈가 담긴 사진이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또 다시 일본정계를 뒤흔들었다. 즉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검사와 예심판사가 두 사람을 동석시켜 사진을 함께 찍었고, 이 사진을 빌미로 야당에 의해 ‘대역죄인 우대’라는 정치공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내각의 총사퇴와 사법관 파면 등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박열에게도 꾸준히 전향공작을 펼쳤다. 일본 사법당국은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전향선언을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전향서라고 밝힌 글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천황의 적자’를 자처하거나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등 일관성이 없으며, 이전의 문투와 달리 일본식 표현을 쓰는 등 조작의 흔적을 짙게 남기고 있다. 더욱이 일제는 그에게 어떠한 감형이나 출옥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1945년 10월까지도 정치범이 아니라 대역사범(大逆事犯)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했다.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박열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박열의사의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츠지변호사
5. 해방 후 재일본거류민단 단장 활동과 납북
석방당시의 박열의사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北海島)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다. 실로 22년 2개월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이 아닐 수 없다. 23년만의 생환 못지않게 해방 후 박열의 삶 역시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도쿄에서 열린 석방환영 대회에서 그를 옥중에서 감시했던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藤下伊三郞)가 수천의 조선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이날 그는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바치고,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박열이 도쿄에 돌아오자, 당시 재일조선인연맹 등 조선인단체들이 앞다투어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민주주의적 건국의식’ ‘사해동포적 세계협동’ ‘근로대중의 동지’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동맹의 강령에서는 아나키즘의 자유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등 중도우파의 색채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박열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쓸쓸히 버려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어 그는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박열은 초대단장으로 추대되었고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이 맡았다. 이로써 초기민단은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로 자리잡아갔다.
당시 이승만도 일본에서의 입지를 고려해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박열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다. 이 회담 이후 박열은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히고 말았다. 이후 1947년경 이승만 정부는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박열의 이승만 정부지지 방침은 오랜 수감생활로 인한 정세판단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를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독재정권의 부패와 권력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민단 내부의 분열만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박열은 1948년 2월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뀌기 전,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박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해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북으로 건너간 이후 박열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다른 납북인사들의 소식과 함께 일부 전해질 뿐이다. 그중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한 사실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안재홍,엄항섭,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강령을 살펴보면, 외국군대의 즉각적 철수와 군대 축소,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제적 중립화의 선언 등 민족공동의 이해와 민중 생존권에 입각한 자주,평화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 자유왕래와 교류, 총선거 실시와 통일헌법 제정 등 5단계에 걸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으나, 북한정권의 불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열을 비롯한 조헌영 등은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위원장과 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재일거류민단장 시절
박열의사 출옥 기념사진
3.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국경 초월한 무정부주의자의 사랑 - 죽음 앞에서도 '천황제'에 온몸 항거
천황 폭살 모의하다 붙잡혀 사형선고 받은 후 부부 인연 - 박열, 23년간 복역후 석방, 가네코는 옥중서 의문의 자살… 두 사람이 추구했던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에 큰 영향
1926년 3월 25일 도쿄 대심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가네코 후미코(왼쪽)와 박열(가운데).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다룬 1927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 가네코가 박열의 아이를 임신한 채 죽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왼쪽),
1926년 2월 26일 오전 도쿄 대심원 대법정. 정복 차림의 경찰 150명과 헌병 30명이 법원 안팎을 통제하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한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피고석에 앉았다.
사내는 하얀 비단 바탕에 보라색을 띤 상의와 쥐색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학을 새긴 각대를 두르고 있었다. 여성도 하얀 비단 저고리를 걸치고 머리에는 장식 두 개를 꽂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조선식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 법정을 향해 무언의 항의 표시를 한 피고인들은 박열(1902~1974)과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ㆍ1903~1926)였다.
이들의 혐의는 형법 제73조와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일제의 형법 제73조는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이른바 대역죄(大逆罪)였다. 증거도 없고, 폭발물 테러의 대상과 날짜도 명시하지 못한 허술한 기소였지만 3월25일 결심공판에서 대역죄인 박열 부부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은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가네코 후미코는"만세"를 외치며 천황제 국가 일본을 조롱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이념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꼽지만 제3의 사상, 아나키즘도 간과할 수 없다.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개인적 자아의 해방과 자율성을 주장하며 민중을 착취하는 모든 권력을 부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우파 민족주의는 물론 당에 권력이 집중된 공산주의 역시 비판과 경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채호, 이회영, 조봉암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이를 적극 지지했다.
박열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경성고보에 입학, 3ㆍ1운동에 참가한 뒤 탄압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조선인들의 현실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재일 유학생들,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의기투합해 '흑도회' '불령사' 등의 모임을 꾸린 뒤 천황가에 대한 폭탄 테러를 모의했다.
만물절멸을 주장한 그의 아나키즘이 허무주의로 폄하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열은 법정 진술에서 자신의 이념을 "소극적으로는 나 하나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지상에 있는 모든 권력의 타도가 궁극의 목적"이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그의 아나키즘이 개인적 희생을 통해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살신성인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1923년 9월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5년 10월 아키타 형무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23년간 복역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최장의 수감 기록이다. 박열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고, 1989년 항일투쟁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무적자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조선에서 6년간 생활하며 식민지인들의 아픔을 체험한 뒤 아나키즘에 경도됐다. 그는 박열과 동거하며 조선의 해방과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옥중에서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생은 시련의 연속이었으나 그것은 권력과의 대결이라는 그의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 일본인 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왜 일본인인 당신이 조선인 편을 드느냐"며 여러 차례 전향을 강요했지만 그는 "나는 권력 앞에 무릎을 끓고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어 끝까지 나 자신의 내면적 욕구를 따를 것이다.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흔적을 찾아 나선 지난달 29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공휴일인 쇼와(昭和)의 날이었다. 히로히토 전 일본 천황의 생일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체포돼 1923년 9월부터 1926년 4월까지 함께 복역했던 도쿄 신주쿠 도미히사마치의 이치가야(市個谷) 감옥 터. 박열 부부는 이곳에 수감돼있는 동안 천황제의 허구성에 대해 일본 법조계와 치열한 법정 논쟁을 벌였다.
박열은 이 감옥에서 자신의 사상을 함축한 '일본의 권력자에게 줌' 을 비롯해 '나의 선언'과 '음모론' 등의 글을 썼다. 가네코도 이곳에서 원고지 3,000매에 달하는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를 썼으며, 200여 편에 이르는 단가(短歌)를 남기기도 했다. 가네코가 도쿄 북쪽 도치기(栃木) 형무소로 이감되기 한 달 전인 1926년 3월, 두 사람은 이치가야 감옥에서 구청에 결혼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정식 부부가 됐다.
신주쿠역 동쪽에서 15분가량 '감옥거리'라 불렸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면 이치가야 감옥터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구립 아동 놀이터와 작은 공원이 돼있다. 휴일을 맞아 공원을 산책하는 노인 한두 명 외에는 인적이 드문데, 한 구석에 196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세운 '형사자(刑死者) 위령탑'이 이곳이 감옥터였음을 알려준다.
박열 부부가 투옥됐던 이 감옥에서 1932년 히로히토 천황의 암살을 시도한 이봉창 의사, 1924년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가 순국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아직도 "일본 고유의 제도인 천황제에 대해 외부에서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지만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을 여전히 금기시하는 일본의 현실을 떠올리면 이 쓸쓸한 감옥터는 전체주의와 결합된 천황제가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게 한다.
박열과 가네코가 동거했고 23명의 한ㆍ일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인 '불령사'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한 2층 셋집은 신주쿠에서 지하철로 10분 거리인 요요기(代代木)에 있다. 간선도로인 야마노테 거리의 북서쪽 지역으로 박열과 가네코가 머물던 당시에는 도시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충산층의 깨끗한 맨션이 즐비하지만 언덕과 언덕 사이에 위치한 저지대라 볕이 잘 들지 않고 잦은 비로 습기에 차 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불령사(不逞社)'표찰찰을 걸고 벽에는 '반역(反逆)'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었다는 옛집은 사라졌지만,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나자 박열과 후미코가 여진을 피해 노숙했다는 언덕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비극으로 끝난 두 사람의 사연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20세기초의 일본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있는 가메다 히로시(龜田博ㆍ57) 전 도시샤(同志社)대 인문연구원은 "박열이 추구했던 아나키즘은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만큼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나 일본의 진보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도쿄=이왕구기자]
[출처] : [한일 강제병합 100년] <1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 한국일보
4. "천황제 허구·폭력성 밝혀… 항일투쟁 금자탑"
'천황을 폭살하려 한 테러리스트', '국경을 초월한 무정부주의자의 로맨스'.
식민지 청년 박열과 일본 민중 가네코 후미코의 투쟁과 사랑은 그야말로 1920년대 조선과 일본 사회를 뜨겁게 달군 핫 이슈였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으로 바짝 긴장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도쿄 한복판에서 추진된 박열의 일왕 폭살 계획은 그 사실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명실상부한 국가신앙으로까지 권위를 차지한 일본의 천황제는 어떠한 비판이나 저항도 허락하지 않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되었다.
천황제는 일본 국민 전체를 맹신도로 만들어 전쟁터로 내몰았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전체를 장악하려는 제국주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당당히 천황제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밝힌 투쟁은 그야말로 반전·반제 항일투쟁의 금자탑이라 할 만하다.
'박열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를 강타한 대지진의 와중에서 일본 지배층이 자행한 조선인 대학살을 모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6,000여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6,000여명을 보호검속한 일제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을 명분으로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권력층의 의도는 이들의 당당한 투쟁으로 철저히 어긋났고, 그 대가로 박열은 세계 최장 기간의 기록인 23년 간의 투옥, 가네코 후미코는 의문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이후 박열의 항일 유지를 받든 아나키스트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강렬하게 투쟁했다. 흑우회와 흑우연맹 등은 항일과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며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과의 연대 활동에 나서 재일 한인들을 규합했다.
3,000여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선동흥노동동맹과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그 대표적인 항일 노동단체인데, 친일 단체에 대한 투쟁은 물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에도 크게 기여하며 1937년까지 활동했다.
이외에도 계림장과 신문배달인조합, 자유청년연맹 등 도쿄에서만 9개 조직 3,200여명의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했고 오사카와 효고, 아이치 현 등에서도 13개 단체 800여명이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40년말 비밀결사 건달회가 적발될 때까지 합법ㆍ비합법으로 꾸준히,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풍부한 이론 습득과 다양한 활동을 경험한 젊은 아나키스트들 중 일부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원심창,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 이현근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상하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비롯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나아가 광복군 제5지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유지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독립운동과 자유공동체사회 건설에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김명섭 '자유공동체연구회' 연구간사·단국대 강사]
[출처] "천황제 허구·폭력성 밝혀… 항일투쟁 금자탑" [한일 강제병합 100년]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