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우과에 속하는 상록관목.
아시아가 원산지이고, 숲 속에 서식한다. 크기는 15~30cm 정도이다.
꽃은 초여름에 흰색으로 피며, 꽃말은 ‘정열’이다. 열매는 초가을에 빨갛게 익는다.
열매가 아름답기 때문에 실내에서 관상용으로 키운다.
불교에서 자금(紫金)이란 부처님 조각상에서 나오는 신비한 빛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자금우의 꽃말은 '정열' 로
빨간 열매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사막이 있다.
뿐만 아니라 오아시스도 있고,
그에 따른 오아시스 농법까지 사용되고 있다.
사막이래야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평원도 아니고 전갈이나 낙타도 없지만,
섬 전체가 모래언덕으로 형성되어 있고, 갯바람이 심하게 불고나면 섬의 들과 산조차도 모래로 뒤덮여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섬 곳곳에는 섬 사람들이 '물치' 또는 '모래치' 라 부르는 물이 고인 큰웅덩이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모래가 머금고 있던 물이 한곳으로 쏟아져 내려서 만들어진 '오아시스'라는 것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임자도의 지형은 중동에서나 보는 사막의 지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단다.
그래서 이 곳 임자도를 뭇사람들은 한국의 유일한 사막이라 부른다.
대둔산성은 임자면 이흑암리(二黑岩里)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대둔산성에서 내려다 본 인근 섬지방은 동쪽에 지도(智島),
서쪽으로 재원도(在遠島), 북쪽으로 임자도 진리(鎭里)가 위치한다.
그러나 대둔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1711년(숙종 37)에 설치된 임자진(荏子鎭)과 관련된 산성으로 추정되는 정도이다.
왜냐하면 『임자진지도』에 대둔산성은 봉수대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전하고 있는 대둔산성의 잔존 형태가 조선시대 산성의 축조방식인 '물림쌓기' 형태로 구축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상태는 타원형의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석과 암벽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는 약 100m, 높이 1∼1.5m, 폭 2.5∼3m정도되나, 거의 도괴된 상태이다.
환갑이 넘은 조희룡을 유배길에 서게 한 건 1851년 예송논쟁이었다.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와 아주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유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유배 와서 본 임자도의 생활상도 암울했다. 한동안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계절이 바뀌면서 섬과 섬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매화 그림을 선물했다. 섬사람들도 흡족해했다.
시나브로 집집마다 그의 그림이 한 점씩 걸렸다.
조희룡과 지역주민들 사이의 공감대가 이뤄졌다.
조희룡의 그림 소재도 매화에서 대나무, 돌로 넓어졌다.
매화에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버무린 '용매도'에 이어 임자도의 자연을 소재로 한 묵죽도, 괴석도를 그렸다.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는 유배지에서의 심정과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화법에도 갈수록 개성이 묻어났다.
그의 예술세계를 한층 무르익게 한 임자도에서의 유배생활이었다.
조희룡은 차분히 이론을 정리하며,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경지에 올랐다. 〈화구암난묵〉 등 산문집과 시집, 그림이론서 등 많은 저술도 이때 남겼다.
'나는 한양의 번화한 거리에서 황량한 산과 고목 그리기를 좋아했다.
엉성한 울타리와 초가 사이에 사람을 그리지 않아 흡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지난날 내가 그린 그림 속의 사람 없는 집이 지금 내가 사는 집이 되었으니...(중략)...
나의 바다 밖 귀양살이는 진실로 면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연기, 구름, 대나무, 돌, 갈매기가 지금 그림의 정취를 나에게 제공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림 속의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의 산문집 '화구암난묵(畵鷗盦讕墨)'의 한 구절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150m의 굴이 문을 열어 사람들을 맞는다.
굴은 절벽 아래에서 위아래로 길게 뚫려 있다.
입구는 웅장한데,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새다.
높이 5m, 폭 2m 안팎에 이른다.
바닷물이 들면 굴이 절반쯤 물에 잠기면서 반대쪽 물길과 통한다.
어머리해수욕장은 왼쪽 끝자락에 있는 용난굴로 더 알려져 있다.
이무기가 바위를 깨고 나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굴이다.
조희룡에게 매화도의 영감을 준 굴이기도 하다.
전장포는 임자도 북쪽에 있는 자그마한 포구로 이곳에서 우리나라 새우젓 60~70%가 생산된다.
전장포 솔개산 아래에는 과거 새우를 숙성시켰던 토굴 4곳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체험 및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여행객들은 젓갈판매장에서 질 좋은 전장포 새우젓을 구매하고
또 포구에 있는 황금새우 조형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기도 한다.
- 전장포 詩碑 -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눈물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 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 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 그늘에 띄우면서.
- 전장포 아리랑-곽재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