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래 첫 부처길'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 해발 600m에 위치해 한국 국보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하여
영암군이 새 탐방로를 명명했다.
이번에 열린 탐방로는 영암읍 대곡제 일대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월출산을 오르내리던 유서 깊은 등산로였으며,
왕인박사, 도선국사, 최지몽, 김시습, 정약용 등
이름 높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다고 알려져 ‘명사탐방로’로도 불려져왔다.
용암사를 오르기전 바로 못미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편에 있는 부도는 옥개석이 유실되고 없다.
기단과 탑신뿐으로 하대석은 원형인데 상면에 22연판을 음각으로 조식하고
탑신괴임 대신 역시 원형음각의 띠를 돌렸다.
또 하단에는 8개의 귀꽃같은 돌기부가 있어 특이하다.
탑신은 종형으로 다른 명문이나 기법이 보이지 않는다.
옥개부 이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른 부도는 기단과 탑신, 상륜이 1석으로 좌대는 방형으로 각 면에 희미한 우주를 모각하였다.
탑신 중앙에 당호(堂號)를 음각하였는데 “죽암당(竹庵堂)” 이며,
상륜은 보주형을 하였다.
달마산 미황사 남부도전(南浮屠田) 죽암당(竹庵堂, 1821) 승탑이 존재하고 있음에!
용암사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귀한 승탑니다.
용암사지는 산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좁은 협곡 같은 곳에 꽤 넓은 터를 유지하고 있다.
마애불에서는 멀리 서남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지만 그 아래의 용암사지는
사방이 산줄기로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고 속세의 번뇌를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요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참선을 하고 부처의 도를 깨닫는 수행자가 거처하기에는 최고의 자리로 여겨진다.
용암사는 羅末麗初의 도선국사가 승평(순천) 선암사, 희양(광양) 운암사와 더불어
호남의 삼암사(三岩寺)로 지목한 3대 비보 처 중의 하나로 여길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이곳은 용암사지의 법당(전면 5간, 측면 3)과 요사 2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바,
돌절구가 있는 곳이 요사, 주춧돌이 남아 있는 곳이 법당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남쪽으로 가려진 산벽을 배경으로 고고하게 서 있는 탑을 보면
몇 천 년 전의 세월이 어제처럼 느껴진다.
용암사지 동삼층석탑은 보물 1283호이며
절터의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m 떨어져 있는 암반 위에 자리하고 있다.
석탑은 거대한 암반을 바닥돌로 삼아 서 있는데, 단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형 석탑의 모습이다.
암반 위에 평평하게 탑구(塔區)를 조성하였고,
그 위에 8장의 돌을 놓아 2단의 높직한 굄대를 구성하고서받침돌의 면석을 받게 하였다.
받침돌의 면석 역시 8장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면석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 부분에는 1개의 가운데 기둥이 가지런히 조각되어 있다.
4장의 돌로 조립된 받침돌의 덮개돌은 널찍한 편으로,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돌로 만든 윗면의 높직한 2단 굄대는 육중한 탑신부(塔身部)와 잘 어울린다.
1층 몸돌은 윗부분에 아래부분보다 작은 돌 하나를 더 올린 모습이지만,
2~3층의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가지런히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1층과 2층은 2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3층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지붕돌의 받침은 1층이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이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받침수가 줄어드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붕돌 윗면의 낙수면은 평박(平薄)한 편인데, 네 귀퉁이 전각(轉角)의 반전과 잘 어울려 둔중한 느낌은 없어 보인다.
다만 석탑에서는 흔하게 보이지 않는 두툼한 귀마루가 조각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 굄은 지붕돌 윗면에 1단씩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남아 있고,
그 중심에는 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석탑은 암반을 이용하여 견고한 바닥과 평평한 탑구를 만들고, 사리장엄구를 봉안하는 등 여러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오래 전에 쓰러져 각 부재가 곳곳에 흩어졌던 것을 1996년 1월 4일∼4월 3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복원 공사 때 암반과 받침돌 사이에서 금동보살좌상 1구, 백자 사리호 1점, 청자 대접 1점,
사리 32과, 철 조각 11점 등이 발견되었다.
1995년에 이뤄진 학술조사 때 불상 주변에서
'통화이십오년정미(統和二十五年丁未)'(1007년), '용암(龍嵒)', '암사(嵒寺)', '도솔(兜率)' 등이 쓰인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고 1657년의 《동국여지지》에 월출산 구정봉 아래 용암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고봉 기대승이 1557년 3월 이곳 용암사에 올라 '龍巖用朱子韻(용암에 올라 주자의 운을 쓰다)' 이라는
아래의 詩를 쓴 것이
(...누가 이곳에 절집을 지어 /
자취를 산과 바다 언덕에 깃들였나 /
돌길을 걸어 찾아오자 날이 저물어 /
허전히 바라보며 넋을 잃었노라 /
휘어잡으며 오르는 걸음 피로하여 /
하룻밤을 자며 감탄을 금치 못했도다…)
발견된 점으로 보아
과거 이곳에 용암사(龍嵒寺)라는 절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능선을 몰아치는 바람마저 숨을 죽이는 깊은 옛 절터에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석불과 단둘이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암봉 중에 하나를 골라 깎아 새긴 마애불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골짜기에 안겼던 절집의 흔적들은 죄다 '시간의 재'가 돼서 흔적도 없이 흩어졌지만,
마애불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돋을새김한 석불의 자애스러운 표정은 더없이 선명하다.
흘러내려 대좌를 덮은 옷의 유려한 주름까지 저리 생생할 수 없다.
이 험한 산길을 올라와 그 앞에 무릎 꿇어 빌었을 이들은 소망과 함께 덧없이 스러졌지만,
석불은 그 앞에 두 손을 모은 이들의 소망을 다 안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다.
월출산 구정봉의 서북쪽 암벽을 깊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높이 8.6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을 한 높이 86㎝의 동자상을 조각하였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큰 얼굴은 근엄하고 박력있는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옷주름은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아래까지 흘러 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섬세한 옷주름과 양감있는 신체의 표현에서 탄력성과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당당한 신체에 비하여 팔은 가늘게 표현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하였으며,
그 안에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정감과 장중한 인상을 주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기법과 더불어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반면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커진 얼굴과 너무 작게 표현된 팔 등에서 불균형한 비례와 경직된 표현이 엿보여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마애여래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 마애불의 손가락 두 개 크기쯤 되는
작은 인물이 새겨져 있다.
선지식을 찾아 법을 구하러 다닌다는 선재 동자다.
그렇다면 바위에 새겨놓은 건 선재 동자가
미륵을 만나 법을 구하는 극적인 순간인 셈이다.
신라인들이 이 불상을 새긴 이유를 두고 통일신라와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전남 영암 지역이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 등 남방으로 가는 해로의 시발지였다는 점에서
뱃길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해 새겼다는 설이 있다
강호동양학자인 조용헌 박사는
해상 물류 세력이 돈을 대어 마애불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위치상으로 영산강 하구를 들락거리는 해상세력의 안전을 기원하는 방향임에 틀림없다.
항해 안전용 마애불이라고 짐작해도 틀리지 않는다.
마애불의 높이가 8.6m니까 결코 작은 마애불이 아니다.
이 정도 크기로 조성하려면 돈이 상당히 들어간다.
돈 없으면 결코 조성할 수 없는 수준의 마애불이다.
이 돈을 누가 댔단 말인가?
배를 타고 바다를 오고 가며 장사를 하는 해상무역업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바위부처이다.라고...
마애불 맞은편의 120m에 있는 서탑인 3층 석탑은 2미터 가량 높이의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아 지붕돌을 올렸다.
이 석탑은 약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마애불좌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사방이 훤히 조망되는 곳에 탑을 세운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따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애석불을 보는 자리는 건너편 능선의 삼층석탑 앞이 명당이다.
석불 앞에서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것보다,
석탑을 앞에 두고서 그 뒤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불과 눈을 맞추는 것이 제격이다.
그때가 마침 산그림자가 내려오는 저물녘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석불 뒤편의 장엄한 암봉들이 석양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며
너른 영암의 들녘을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1000년 전의 시간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용암사지는 산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좁은 협곡 같은 곳에 꽤 넓은 터를 유지하고 있다.
마애불에서는 멀리 서남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지만 조금 내려온 용암사지는
사방이 산줄기로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고 속세의 번뇌를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요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참선을 하고 부처의 도를 깨닫는 수행자가 거처하기에는 최고의 자리로 여겨진다.
첫댓글 유대장님!
멋진곳 다녀 오셨네요
아주 옛날에 구정봉 가보고는 못갔습니다
대구에서는 거리가 먼이유라서 좋은시간 내어 한번 가봐야 겠습니다
사진으로나마 잘봤습니다
너무 멋진곳입니다
대장님께서도 오래 전에 월출산에 오셨군요!
우리들은 근거리에 있어서
맘만 묵으면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산이자,
기암들이 즐비한 명산이어서
종종 찾아가는 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