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가사의 오랜 보물들 (승가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
약사전은 큰 바위 밑도리에 있는 자연산 석굴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
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깃든 늙은 굴로 승가굴(僧伽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굴 중수비를 남겼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
대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引燈)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굴의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는 따스하다. |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
약사전에는 승가대사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역할과 직무를 대
신
하고 있는 그는 인도 출신 승려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단했던지 관세
음보살의 화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
태가 그의
상까지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확실
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 130cm로 호분(
胡粉)을 입혀 몸 전체가 하얀 천사처럼 되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순백(純白)에서 벗어
났다. |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호분을 벗기기 전, 2012년 어느 날) |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나 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이라 그에게 다가서면 '세상 살기 힘들지?'
그러면서 손으
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
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두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
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그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연꽃 대좌는 근래 만들어진 것으로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의 4사자3층석탑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
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쪽에 달린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
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
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
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천하에 흔치 않은 늙은 승려상으로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에서
광합성 작용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
못지
않게 양호하여 방부제 외모를 자랑한다. 조선 중기와 현대에 일어난 3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
은 사라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
의 늙은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국가 보물로 승진
되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 가양심신(可養心神) 바위글씨 |
승가굴을 지나면 향로각(香爐閣)이란 돌로 다진 동그란 건물이 있다. 그 직전에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의 피부에 마치 뱀이 기어간 흔적 같은 꼬부랑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다.
그는 '가양심신' 바위글씨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비봉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손수 탁본하
고 승가사에 잠시 들렸을 때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4자는 마음을 수양하기 좋은 길지라는
뜻으로
승가사가 정신 수양과 독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 의미로 그렇게 한 글자 남기고
간 모양이다. |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① |
향로각을 지나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나타나 중생들을 다시금 주눅을 들게 하는데, 그 계
단은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연화교(蓮花橋)란 약간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
까지 각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면 까마득하게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크고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그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이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②
▲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보물 215호 |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비봉능선의 일원인 사모바위의 바로 남쪽
밑이다.
승가사에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나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
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
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 거리가 있고 승가사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
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학
자들이 고려 때 것이라며 지들 멋대로 평가를 했는데, 월북미술가인 김용준이 1947년 12월 14
일자 경향신문 칼럼에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
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후덕하고 복스러
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8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신라 것이라 평가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도 신라 말~고려 초기 것으
로 여겨지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직각을 이루며 솟은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
각의 머릿돌(천개)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피부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허나 그렇다고 그의 상태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68년 김신조의 공비패거리가 서울에 침
투했을 때,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하여 마애불의 생애
최초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
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히 남아있다. 아마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자연재
해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 옆에서 바라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는 보호각의 흔적들) |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
간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머릿돌을 끼워 넣어
앞
으로 크게 돌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무
늬가 새겨져 있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
하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
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
데, 우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
름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꽃이
활짝 열린 연화대 |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
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
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
를 취했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천하에
그리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해 빵빵 열려있는 앙련(仰蓮)이 윗쪽
에, 반대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신라 말~고려 초의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는 1980년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석불 같다.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까지는 전국적으로 큰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비슷
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은 자세한 기록은 없
으나 당시 지방 세력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승가사가 고려 황실과도 인연이 깊
은 절이라 제왕과 황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들을 투입해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드러누워있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이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 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
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
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
둥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바위 주변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
제되어 있으니 괜히 바위를 오르거나 마애불을 만지는 등의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매
일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 구기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경내에서 호국보탑으로 내려가는 길)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나라도 가만 보면 고양이보다는 쥐가 더 살기 좋은 세상 같다.
(이 땅에서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이 챙기려면 쥐처럼 살아야 됨)
▲ 승가사를 뒤로하며 다시 제자리로 |
마애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승가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해질녘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있지만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다른 곳을 가려면 승가사 갈림길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된다. 경
내에서 바로 위쪽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면 그곳을 거뜬히 찍고 내려갔을 것인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렇게 하여 5월 승가사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구기동 마애부처님 상호에서 위엄있는 눈동자까지 표현된 것으로 보이는 것 같은데
다시한번 잘 봐 주세요
눈이 감겨져 있는듯 보이기도 하고(그동안은 그렇게 봤음) 아주 살짝 떴으나 눈썹 등에 눈동자가 가려진듯 보이기도 하고, 눈동자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본인의 두 망막이 침침하다 보니 햇갈리네요.
@도봉산고양이 두 망막이 침침하다..라는 표현이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귀신이다...라 생각했어요...ㅎ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글 자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