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로서 발견된 것은 없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대덕면과 봉산면에서 마제의 석검․석촉․석부 등이, 담양읍에서는 세형동검과 세문경이 출토되었다. 금성면․대덕면․대전면․무정면 등 군의 거의 전지역에 걸쳐 고인돌군이 분포되어 있다.
백제시대에는 추자혜군(秋子兮郡)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쳐 불렀다. 이 때의 치소는 무정면 봉안리로 보인다. 백제 때 굴지현(屈支縣)이 있었던 창평면(昌平面) 지역은 신라에 편입되어 기양현(祈陽縣)으로 개칭되었다. 868년(경문왕 8) 왕의 발원에 의해 개선사(開仙寺)가 창건되었다.
〔고 려〕 995년(성종 14) 담주(潭州)로 고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담양으로 고쳐서 나주(羅州)의 속현이 되었다. 이 때 현의 치소는 금성면 석현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주현으로 독립하였다.
1237년(고종 24) 이연년(李延年) 형제가 원율(原栗, 栗原)에서 민란을 일으켜 한때 광주까지 위협하였다. 몽고의 침입기에는 차나대(車羅大) 등이 담양에 둔소(屯所)를 설치해 주둔하기도 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율원현(栗原縣)을 겸병하여 속현으로 삼았다.
〔조 선〕 1395년(태조 4) 국사 조구(祖丘)의 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다시 1399년(정종 1) 정종비 김씨(金氏)의 외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한 뒤 1413년(태종 13) 담양도호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인후(因厚)가 창의하여 금산싸움에서 전사했으며, 정유재란 때는 관아와 축요루(祝堯樓) 등의 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1648년(인조 26) 부사 성이성(成以性)이 해마다 둑을 쌓아 수해를 막아오던 것을 1717년(숙종 43)의 대홍수 이후 관방제(官防堤) 축조에 착수, 1854년(철종 5)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관비를 투입해 완성하였다. 한편, 창평현은 1479년(성종 5) 강상죄(綱常罪)에 연관되어 일시 폐현, 광주에 병합되었다가 5년 뒤 복구되었다.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 개선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등. 높이 3.5m. 보물 제111호.
1728년(영조 4) 역적 박미귀(朴美貴)의 출생지라 하여 담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38년 다시 승격하였다. 1762년 역적 이홍범(李弘範)의 태생지라 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72년 담양도호부로 승격되는 곡절을 겪었다. 남면의 성산 일대에는 일찍부터 많은 문인이 거주해 문단활동을 하였다. 특히, 송순(宋純)의 면앙정(潭仰亭), 정철(鄭澈)의 송강정(松江亭)과 식영정(息影亭) 등을 중심으로 시가와 별곡이 제작되는 산실이 되었다.
〔근 대〕 1895년의 관제개혁으로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 창평현은 창평군으로 바뀌었다. 1908년 옥과군이 폐지되면서 일부가 담양에 이속되었다. 1914년 창평군이 폐지되어 그 예하의 면들과 광주군의 갈전면․대치면, 장성군의 갑향면․북하면 일부, 동복군 일부가 편입되었다.
1895년부터 일어난 의병투쟁에는 고광순(高光洵)․고제량(高濟亮) 등이 창평에서 일어나 남원․동복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연곡사에서 순절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송진우(宋鎭禹)가 활약한 것이 두드러진다.
담양에서는 정기환(鄭基煥)․임기정(林基政) 등 9명이 장터에서 시위를 벌였고, 창평에서는 조보근(趙補根)․한익수(韓益洙) 등이 주동하였다. 1923년 담양선이 개통되었다가 1943년 선로가 철거되었다. 1943년 담양면은 읍으로 승격하였다.
〔현 대〕 1949년 여순반란사건으로 용흥사(龍興寺) 등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6․25전쟁 때는 공비들이 용면의 용추산과 가마골에서 준동하여 1955년에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1957년 담양군 남면의 덕의리․충효리․금곡리가 광주시로 편입되었다.
1976년 담양호와 광주호가 건설되어 용면․남면의 일부 마을이 수몰되었다. 1983년에 봉산면 강쟁리, 무정면 오계리․반룡리, 금성면 금월리․삼만리․학동리, 월산면 운교리․삼다리․가산리가 담양읍에 편입되었고, 1990년에 남면 외동리가 창평면에 편입되었다.
나. 담양군 유적과 유물
담양읍 가산리, 무정면 오봉리 등 곳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봉산면 제월리에서는 석촉․환석․석검․지석․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철제대도․동경․마구류․옥류․토기호․개배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대전면 행성리 등에는 고분이 있다. 산성으로는 용면 도림리에 금성산성과 무정면 오봉리에 담주산성(潭州山城)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남면 학선리에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 보물 제111호), 담양읍 객사리에 담양읍내리석당간(보물 제505호), 남산리 용화사에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보물 제737호), 지침리에 담양읍내리오층석탑(보물 제506호) 등이 있다.
또, 월산면 용흥리에 용흥사범종(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용흥사부도군(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고서면 금현리에 영은사석조여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용면 용연리에 용추사사리탑, 무정면 봉안리에 언곡사지석탑(彦谷寺址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호)이 남아 있다.
이 밖에 무정면 오룡리 외당마을의 동방로방미륵(東方路方彌勒), 창평면 창평리의 이천부락석불(鯉泉部落石佛), 남면 학선리의 향적사지석불(香積寺址石佛), 대전면 행성리의 행정부락천연석불(杏亭部落天然石佛), 고서면 분향리의 담양분향리석불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용면 월계리 추월산의 보리암(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담양읍 향교리에 담양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고서면 교산리에 창평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고서면 분향리 죽림유장(竹林遺莊) 안에는 죽림재(竹林齋)(전라남도 기념물 제99호)․세일재(歲一齋)․취사당(聚斯堂)․충효각이 있다. 또, 대덕면 매산리의 담양몽한각(潭陽夢漢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 대전면 행성리의 대성사, 평장리의 담양오충정려(潭陽五忠旌閭, 전라남도 기념물 제16호)․포의사가 있다.
학당으로는 고서면 분향리의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호), 수북면 오정리의 수북학구당(水北學求堂,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이 있다. 정자로는 봉산면 제월리의 면앙정(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남면 지곡리의 정송강유적(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창평면 용수리의 상월정(上月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호), 담양읍 백동리의 남희정(南喜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호) 등이 남아 있다.
한편, 정원으로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남면 지곡리의 담양소쇄원(潭陽瀟灑園, 사적 제304호), 고서면 산덕리의 담양후산리 명옥헌정원(鳴玉軒庭園, 전라남도 기념물 제44호), 남면 연천리의 독수정원림(전라남도 기념물 제61호) 등이 보존되어 있다. 중요한 사료로는 조선 중기를 연구하는 데 기초자료가 되고 있는 ≪미암일기 眉巖日記≫(보물 제260호)가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慕賢館)에 소장되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는 담양읍 향교리에 낙죽장(烙竹匠,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참빗장(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5호)과 양각리에 채상장(彩箱匠,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이 있다. 이 밖에 용면 월계리에 담양추월산(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 담양읍 객사리에 담양의 관방제림(官方堤林, 천연기념물 제45호) 등의 명승지와 고서면 산덕리에 담양후산리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366호), 담양대전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84호) 등이 있다.
다. 담양군읍지(潭陽郡邑誌)
1899년에 편찬된 전라남도 담양군의 읍지. 1책. 지도 1매가 첨부된 사본.
내용구성은 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형승(形勝)․관직(官職)․산천(山川)․성씨(姓氏)․풍속(風俗)․단묘(壇廟)․공해(公力)․제언(堤堰)․물산(物産)․교량(橋梁)․역원(驛院)․관애(關武)․누정(樓亭)․사찰(寺刹)․고적(古蹟)․진보(鎭堡)․인물(人物)․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夕蛇)․환적(宦蹟)․읍선생(邑先生) 등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호남읍지≫에 수록된 것과 정조에서 순조조에 걸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담양부읍지≫와 연대 미상의 ≪담양읍지≫․≪담양지≫ 등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1899년에 편찬된 전라남도 담양군의 읍지. 1책이며 지도 1매가 첨부된 사본. 규장각도서.
소쇄원을 위한 즉흥시
김 인 후
대숲 너머 부는 바람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 밝은 달은 마음을 비추네
깊은 숲은 상쾌한 기운을 전하고
엷은 그늘 흩날려라 치솟는 아지랑이 기운
술이 익어 살며시 취기가 돌고
시를 지어 흥얼노래 자주 나오네
한밤중에 들려오는 처량한 울음
피눈물 자아내는 소쩍새 아닌가
4. 담양소쇄원(潭陽瀟灑園)
가. 소쇄처사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양산보(1503~1557)선생은 출생한 때부터 총명․단정․정직하고 얼굴이 잘 생겼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서 그 글의 참 뜻을 깨달아 알았고 장성하면서 높고 원대한 뜻을 품고 힘써 글공부를 하므로 아버지 창암공(蒼巖公) 사원(泗源)이 크게 기뻐하며 사랑하였다.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청하니 정암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쾌히 승낙하고 소학책을 주면서 그것부터 공부하도록 하였다.
1519년 기묘(己卯)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그만 공의 이름이 삭제되고 말았다. 중종이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여 불러보시고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을 하사하셨다.
그해 겨울에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조광조가 괴수가 되었다하여 화순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17세에 불과한 때인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나 들어가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낙향하여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소쇄원(蕭灑遠, 사적 제304호, 문화재 안내 참조)이라는 별서(別墅)정원을 조영하고 두문 불출하며 한가로이 살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호도 소쇄옹이라 하였다.
그후에도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해왔으나 끝끝내 버티어 나가지 않고 평안하고 한가롭게 산중 숲 속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고 밝히는 일로 깨끗하고 고요함에 만족하며 30여 년간 시름없이 살았다.
하서 김인후 선생과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로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차남 고암(鼓巖) 자징이 하서의 사위가 된다.
교유 인물로는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등이 있으며 기대승,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공을 따랐다.
나. 소쇄원(蕭灑遠)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원. 사적 제304호. 지정면적 10만8558㎡. 이 정원은 은사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에게 몰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양산보(梁山甫)가 세상의 뜻을 버리고 하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소쇄원의 ꡐ소쇄ꡑ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 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그림
이곳은 무등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광주호의 상류에 위치하여 무등산을 정남쪽에 대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까치봉과 장원봉(壯元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동서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조선 중기의 정원인 담양소쇄원의 제월당 구역이다. 사적 제304호. 제월당 구역은 오곡문에서 남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 직선도로의 위쪽 부분을 말하는데, 주인을 위한 사적 공간이다
또, 뒷산과 까치봉 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산기슭에 터를 잡은 소쇄원의 바로 앞에는 증암천이 동서방향으로 흘러 광주호에 들어가고 있다.
정원의 평면적인 모습은 계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흙으로 새 메움을 한 기와지붕의 직선적인 흙돌담이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곡의 굴곡진 경사면들을 계단상으로 처리한 노단식 정원의 일종이지만, 구성면에서는 비대칭적인 산수원림(山水園林)이다.
소쇄원은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라 애양단구역(愛陽壇區域)․오곡문구역(五曲門區域)․제월당구역(霽月堂區域)․광풍각구역(光風閣區域)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애양단구역은 이 원림의 입구임과 동시에 계류쪽의 자연과 인공물을 감상하면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애양단이란 김인후(金麟厚)가 지은 〈소쇄원사팔영 瀟灑園四八詠〉 가운데 있는 ꡐ양단동오(陽壇冬午)ꡑ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宋時烈)이 붙인 이름이다.
왕대나무숲속에 뚫린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오면, 입구 왼편 계류쪽에 약 18m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방지(方池)가 만들어져 있고, 과거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이것은 장식용으로 오곡문 옆 계곡물이 홈대를 타고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도랑을 타고 내려와 물레방아를 돌리게 되어 있어, 이것이 돌 때 물방울을 튀기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의 약동을 건너편 광풍각에서 감상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위쪽 옆에는 계류 쪽으로 튀어나온 대봉대(待鳳臺)라는 조그마한 축대 위에 삿갓지붕의 작은 모정(茅亭)이 있는데, 이것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오곡문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밑 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그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 1.5m의 크기를 가지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이와 비슷한 기법은 1100년대(숙종연간)의 이실충(李實忠)이 만든 경기도 부천의 척서정(滌暑亭)에서 볼 수 있다.
오곡문의 ꡐ오곡ꡑ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1755년(영조 31)에 만들어진 〈소쇄원도 瀟灑園圖〉에, 한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제월당구역은 오곡문에서 남서방향으로 놓여 있는 직선도로의 위쪽 부분을 말하는데, 주인을 위한 사적(私的) 공간이다. 제월당 앞의 마당은 보통의 농가처럼 비워져 있으며, 오곡문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매대(梅臺)에는 여러가지 꽃과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광풍각구역은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경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광풍각의 뒤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잠(陶潛)의 무릉도원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제월당의 ꡐ제월ꡑ과 광풍각의 ꡐ광풍ꡑ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周敦蓬)의 사람됨을 평하여 ꡒ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ꡓ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소쇄원의 조경식물로는 소나무․단풍나무․버드나무․참등나무․대나무․매화나무․복사나무․살구나무․벽오동나무․배롱나무․회화나무․치자나무․사계화나무․국화․파초․연꽃․철쭉․동백․난․측백나무 등을 심었다.
이들 가운데 소나무․매화나무․대나무는 국화와 함께 사절우(四節友)라 하여 선비들이 즐겨 심었던 것이며, 측백나무는 주나라 때 왕자의 기념식수로, 회화나무는 고관들의 기념식수로 쓰이던 나무들로, 그 풍습에 따라 자손이 성공하기를 비는 뜻으로 심었다. 현재는 당시에 심은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측백나무․배롱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소쇄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의 언덕에 복사나무․배롱나무 등을 심어 철따라 꽃을 피우게 하였으며, 광풍각 앞을 흘러내리는 계류와 자연폭포, 그리고 물레방아에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등 자연과 인공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경지를 방불하게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시인․묵객․문사들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었으며, 그들이 남긴 시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정원은 경사면의 적절한 노단식 처리라든지 기능적인 공간구획, 대숲 속의 오솔길, 지형에 따라 변화 있는 담장지붕의 선, 담 밑에 뚫린 수문 등 낭만적이고 장식적인 조경으로 원림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별서(別墅: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영남이 길재 이후로 도학과 사림 문학의 본고장이라면, 호남은 그 유장한 남도의 가락이 넘쳐나는 풍류와 기예의 터다. 따라서 산자락 물굽이마다 자리한 수많은 누정을 배경으로 가단이 형성되었는가 하면 풍류제영의 누정문학을 낳았다. 그러므로 호남가단과 그 인맥, 그리고 사우간의 교유에 의한 문풍진작은 급기야 목릉성세라는 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웠다. 물론 호남의 가객이 도학자가 아닌 것이 아니며, 그들의 문학이 처사문학이 아님이 아니지만, 학문보다는 시인묵객으로서의 면모와 기여가 드러났다. 이시대의 대표적 작가들을 사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송순(1493-1583)
박상의 문인으로 중종 14년(당시 27세)에 별과에 급제하고, 같은 해 김안로 일당에 밀려 46세까지 낙향한것 말고는 비교적 순탄한 관료생활을 한다. 선조2년(77세)에 致仕閑客이 되었고 이후 14년간 담양의 제월봉 아래 면앙정을 짓고 온갖 호사와 풍류를 누렸던 호남가단의 맹주였다. 면앙정은 41세 때 지였고 이후 59세 때 담양부사 오겸의 진언으로 개축하고, 기대승의 <記> 임제의 <賦>, 그리고 김인후, 박순, 고경명, 등이 詩三十詠으로 각각 倡和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가단활동은 치사 이후로 호남의 인맥은 두루 이 가단을 중심으로 사제, 교우 또는 인척관계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송순 자신은 경학의 스승이었거나, 사림 혹은 관인문학의 장단점을 적시하거나 그 지평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단아한 풍모와 인후한 덕행의 감화로 가단과 인맥이 형성된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의 친화저연적인 삶을 대변하고 있다.
百里群山擁野平 빙둘러 뭇산들이 들을 에웠고
臨溪茅屋幸初成 시냇가 띠집 이제 막 얽었다네
此身不繫蒼生望 이 몸 벼슬길에서 놓여났으니
宜與沙鷗結好盟 이제부터 다만 백구와 더불련다
<면앙정>이란 제목을 붙인 7節이다. 곧 초기 낙향후 면앙정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늙고자 하던 40대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한시보다 국문시가로 이름이 났으며 정극인의 <상춘곡>이래, 실로 오랫만에 가사다운 가사 <면앙정가>를 지어 이후 문하의 정철에게 그 맥을 이었으며, 이현보와 함께 강호가단의 전원문학을 이룩했다. 특히 그의 문학사적 업적은 가단을 형성하여 남도의 풍류문풍을 진작케한 점이다.
임억령(1496-1568)
박상의 문인으로 그 시의 뛰어남과 청신(俊逸淸新)함으로 당시 강남의 第一訶宗으로 받들렸다. 여기 '준걸한 기상과 맑고 참신한 사상'이라 함은 두보가 이백의 시를 鮑照의 준일과 庾新의 청신으로 편한 말로 그의 시격을 盛唐 이상의 古格으로 칭송한 것이다. 일찍이 담양부사때는 성산으 가단을 사선의 풍류로 仙遊했는가 하면, 재치론 口號와 卽事가 자재로웠다 한다. <<遺閑雜錄>>의 다음 일화는 그 좋은 예이다.
근자의 석천 임억령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시 짓기를 청하며 '甘'자 운을 부르니, 임은 곧 바로 "늙어서야 바야흐로 이 맛이 단줄 알았네"하니, 또 '三'자 운을 부르므로 "석잔은 마셔 뭐해, 한잔 술에 도통했네" 하자, 또 '男'자 운을 부르니, "그대 혜강 완적이 유수를 조롱한 걸 아는가, 공후백자남을 부러워 않았다네"라 했으니 참으로 기발한 작품이다.
실로 적절한 사용에 따른 호방한 기개는 재치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친구 李蘭(자는 子芳)에게 준 시 <示子芳三首> 중 제3수의
古寺門前又送春 옛절 문앞엔 또 봄이 다가고
殘花隨雨點衣頻 철 늦은 꽃 비에 젖어 옷깃에 지네
歸來滿袖淸香在 돌아오는 길엔 청향이 소매에 가득 묻어
無數山蜂遠진人 산벌이 먼 데까지 따라 오누만
은 그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감각이 온통 '천지 조화를 한 몸에 입은 듯' 오미으 감각이 뒤어켜 따사로운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이제 그의 시에서는 더 이상 宋風의 理나 論은 물론, 그 흔한 갈등도 없다. 정서적 상승, 조화적 공간으로서의 자연이 있을 뿐이다.
김인후 (1510-1560)
김안국의 문인으로 이황과 교유가 돈독하였던 호남의 巨儒이다. 38세에 옥과 현감으로 낙향하였다가 을사사화 후로는 병을 핑계하고, 향리에서 성리학에 전심하여 <<周易觀象編>> <<西銘事天圖>>등 성리학의 근원을 밝히고, 이항 기대승 등과 <<太極圖設>> 및 ,四端七情論>>을 강론하였다.
그의 문학적 연원은 <<詩經>>을 바탕으로 <<離騷>>를 참호하고 이백과 두보를 선호했다. 문학적 특징은 맑으나 지나치지 않고, 절실하되 촉박하지 않으며, 즐겁되 음란치 않고, 시름하되 상심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성정을 갈무리고, 도와 덕을 궁구하려던 도학자적 문학관의 실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문집에는 <<시경>>을 읽고 그 느낌을 시로 쓴 <讀周南> <讀召南><讀衛風> <讀鄭風> <讀唐風> <讀關雎篇> 등이 있는가 하면, 인종을 그리는 시 역시 <<시경>>의 <柏舟> <南山> <卷耳> 章의 시의를 원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지극한 슬픔과 울분을 초나라 <<이소>>의 유풍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시를 배우지 않고는 입지할 수 없다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여긴 시 옹호자여서 <<시경>>의 대소주까지 천번을 읽었다고 하며 그 제자들에게도 이를 훈도했다.
그의 시작 활동은 면앙정가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면앙정 30영>을 비롯해서 환벽당, 소쇄원 등 누정연작시가 무려 83수나 된다. 그중 五律 <瀟灑園卽事>를 통해 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기로 한다.
竹外淸風耳 맑은 바람 댓잎에 울고
溪邊月照心 시냇가 밝은 달 마음 속까지 비추네
深林전爽氣 우거진 숲 상큼한 바람이 일고
喬木散輕陰 높은 나무 엷은 그림자 드리우네
酒熟乘微醉 술 익자 아슴프레 오르던 취기
詩成費短吟 시 지어 읊조리며 다 마셨다네
數聲聞半夜 한밤에 자주 우는 저소리들
啼血有山禽 피 토해 울어 예는 두견이로세
대숲의 맑은 바람, 시냇가의 밝은 달, 그 삽상한 밤달 어스름에 마주한 정자 주인과의 작흥과 취흥으로 시격은 물론 성정을 갈무리하는 작자를 볼 수 있다. 結聯의 '제혈산금(啼血山禽)'은 인종을 그리는 자신의 衰魂이기도 하니, 영달을 위한 戀主가 아니라, 보은할 수 없는 망극 때문이다. 곧 34세에 세자(인조) 侍講院說書 때 幼沖한 세자로부터 <,朱子大全>>과 墨竹을 하사하셨던 그가 즉위 원년(1545) 7월에 승하했으니, 그 충격과 슬픔은 언제나 통곡하여도 안타가운 그였으나 군신의 의로 맺은 셈이다.
박순(1523-1589)
서경덕의 문인으로 청렴개결한 성품과 곧은 지조로 당시 사림의 존중을 받았다.대사헌을 거쳐 14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내는 등 비교적 순탄한 官路를 지냈다. 그는 시.문.서에 두루 뛰어났으며, 특히 당시의 騷壇에 학당을 제시한 선각일 뿐 아니라 그의 작품 역시 唐詩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다.
다음의 예시를 통해 그의 맑고 깨끗한 성품이 빚어낸 정감어린 시의 격조를 살펴보자.
亂流經野入江타 이 골물 저 골물 들을 지나 강어귀로 드니
滴瀝猶存檻外柯 듣드는 방울물 나간의 나무가에 달렸네
籬掛蓑衣첨쇄綱 울타리엔 도롱이 처마엔 어망
望中漁屋夕陽多 어촌의 석양은 붉기도 하여라
七絶 <湖堂口號>다. <<淸江삭語>>에 의하면 서당에서 학사들이 소나기가 막 지나간 후 석양이 언제런듯 붉게 타는 정경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모두 박순의 시를 탄미하며 '진실로 소리나는 그림'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가 백운동에 있는 조준룡의 초당을 찾았다가 쓴 七絶 ,訪曹雲伯二首> 중 그 2이다.
醉睡仙家覺後疑 취해서 자다 깨고 보니 여기가 어디멘고
白雲平壑月沈時 흰 구름 골을 메우고 새벽달 넘어간다.
然獨出修林外 휘휘휘 집 박을 빠져 나오노라니
石逕공音宿鳥知 돌길의 막대소리 자던 새 놀래누나
結句로 인해 宿鳥知先生으로 통칭되리만큼 회자되었던 절창이다. 술에 취해 睡鄕에 노닐다 깜짝 깨고 보니 남의 집이라, 허둥지둥 지팡이를 던지며 돌길을 내려오노라니 숲에서 자던 새 푸드득 놀라 나는 산골의 저녁풍경,과 이슬에 젖은 베잠방은 또 언외에 포치되었다. 그러기에 신위는 <東人論詩絶句>에서 결구와 承句로 삼고, 이어 "청수한 고절은 따를 자 없고 시상은 시 가운데서 속세를 떠난 듯 하다."고 논평했다. 특히 그의 시는 절구에서 그 정화가 발휘되어 <<思庵集>>에는 약330여수의 절구가 전해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순의 시사적 위치는 학당의 실천으로 복고및 목릉성세의 난만을 앞당긴 점이라 할 것이다.
고경명(1533-1592)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갔다가 정쟁에 휘말려 파직한 후, 성산가단의 사선으로 종유하며 시문학 특히 풍류제영시에 전념했다. 선조 14년(1581) 이이의 주선으로 재등용되어 서상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임란 전 1591년에 동래부사로 서인의 몰락과 함께 낙향했다. 임란 중에는 광주에서 6,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금산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함으로 충절보국했다. 이처럼 그는 남다른 지사풍의 선비엿으나 그 시대의 정치, 사회적 제반 문제점의 지적이나 개선에는 그 역시 한계가 있어 고작 산수에 묻혀 흥취나 읊조릴 뿐이었다.
蘆州風점(風+占)雪漫空 갈밭에 바람이 일자 잔설이 흩날리는데
고(水+古)酒歸來繫短蓬 술받아 돌아와 배를 매노라
橫笛數聲江月白 두어 소절 비껴부는 피리소리에 강달은 흰데
宿鳥飛起渚煙中 자던 새 내 낀 물가로 날아 드네
칠절의 제화시 ,漁舟圖>다. 寒江의 낚시는 기심이 있을리 없는 바로 그 낚시기에 세월을 낚으렴도 아니요, 소선의 적벽을 의양함도 아닌 거기에는 무구한 풍월과 海笛이 있어 자연과 합일한 몰아지경이다. 그러니 작자 역시 화폭 속의 한 오브제로 용해한 정신적 초절자로 있을 뿐이다
정철(1536-1593)
기대승, 김인후, 양응정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익혔으며 송순의 풍류와 박순의 훈도를 받았다. 김성원, 이이, 고경명, 조헌, 최경창, 백광훈 등과 교유했으며, 이안눌, 권필에게 문맥을 이어준 문예의 재인이었다. 따라서 재치로운 말결과 거침없는 卽事가 스케일이 큰 시조문학의 절창을 낳았고, 호남의 유장한 가락과 진솔한 천품이 가사문학의 독보로 위상이 되었다. 한편 한시문학에서도 구호가 대부분이긴 하나, 폭넓은 교유로 많은 수기시를 남기고 있다.
특히 이 시대의 사대부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정철 역시 무상한 출인으로 조정에 들면 귀거래로 泉石을 그리고, 자연에 묻혀선 戀主之情을 노래했다. 더욱 정 철은 국문시가의 1인자로 자리매김된 이상 그의 한문시가의 주제패턴과의 대비도 동일 작가의 작품이란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一曲長歌思美人 한자락 님 그리는 노래 부르고 나니
此身雖老此心新 이 몸 비록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한창이라
明年梅發窓前樹 명년 봄 창앞의 매화 피거들랑
捐寄江南第一春 강남의 첫 봄소식 님께 먼저 받자오리
성산에 낙향하여 님 그리는 술자리의 즉흥시이다. 수천리 떨어진 곳에 계신 임금에 대한 정이 暗香의 절조를 실어 드리니 '창밧긔 심근 매화 두세가지 픠여세라. 득 冷淡 暗香은 므일고....뎌 매화것거내여 님 겨신 보내오져'<<사미인곡>>은 그 성률화에 다름아니다.
한편 時事에도 人事에도 맑게 씻은 초탈의 詩情도 있으니
曆日僧何識 스님이 책력은 알아 무엇해
山花記四時 산꽃의 피고 짐으로 사계절을 알지
於時碧雲裏 때때로 푸른 구름 속에서
桐葉坐題詩 앉아서 오동잎에 시를 쓰지
가 그것이다. 이는 물론 두시 ,重過何氏五首> 중 제3수를 차운한 <題山僧軸>으로 산꽃이 사계절을 알리니 맑은 하늘 청정한 하루를 머귀잎에 시를 쓰며 불심을 닦는 성불의 지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700여수의 한 시 중 <山寺夜吟>은 가히 逼唐의 경지라 할 것이다.
蕭蕭落木聲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
錯認爲疎雨 성근 빗방울 소리인줄 알고
呼僧出門看 동자승 불러 나가보랬더니
月掛溪南樹 시내 앞 나무가지에 달만 걸려있다더라
와 같다 구양수의 <秋聲賦>를 환골탈태한 점화는 실로 정철다운 재치요, 성당의 시격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역시 호흡에 맞고 귀에 익은 멋드러진 장단의 가락인 국문시가가 제격이니, 정한의 자수인 戀主의 독백은 민족정서를 접맥해온 비장이다. 따라서 그의 한시는 장단가에 비해 한단계 낮다. 그러나 그 장단의 모태가 한시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문학적 연원은 굴원에게서 사미인의 衰情을, 陶潛의 귀거래와 애주픙을, 이백에게서 호방한 기풍을, 소식에게서 자연 친화적 仙風을 취해 왔다 할 수 있댜.
참고문헌: 한국한문학사,이병도외 저, 반도출판사
라. 누정(정자)과 문학
1. 누정의 개념
누정은 누각과 정자의 약칭이다. 누각은 '樓', '亭' 혹은 '堂', '臺', '閣'등이 이름 밑에 붙는 것으로 '누'라 하는 것이 가장 많고, '각'이라 한 것도많다. 이러한 건물은 대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벽이나 문을 두지 않고 높이 지은 다락모양의 건축물이다.
정자는 누정에 비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으면서 역시 벽이나 문이 없이 기둥위에 지붕만 얹는다. 정자는 산수 좋고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진 것으로 놀이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된다. 누정은 실제 생활과 거리가 먼 閑居를 위해 지어졌으며, 남성위주의 공간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사방의 경개를 완상하며 음풍농월하며 시도 읊고, 가객을 불러 노래도 감상하던 풍류의 장소였던만큼 마루만 있는 단순한 구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방이 있는 누정도 있는데, 광주, 담양 지방에 있는 누정은 대개 방을 부설하고 있다. 누정에 부설된 방은 강학소(講學所) 혹은 제실(齊室)로 소용되었다. 茅亭과 누정을 참고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누정과 같은 구조를 지닌 모정은 농민들의 생활과 관계가 깊다. 지붕도 대개 짚으로 얹으며, 농경지를 배경으로 세워져 농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누정이 경치가 뛰어난 높은 곳에 세워져 실생활과 거리가 먼 공간이며,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점과 대조를 이룬다.
누정은 휴식 공간이자 모임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누정의 주인이 뜻이 맞는 선비를 불러 들여, 정서를 교감하기도 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밤을 보내기도 하였고, 정치적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기분이 돋구어지면 시를 지어 서로 주고 받고 시조를 한수 읊기도 하였으니 문학의 산실 역활을 톡톡히 하였던 것이다.
광주광역시의 동북방향, 무등산 북쪽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군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정과 원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식영정, 그리고 송강의 별서까지의 코스는 조선시대 정원 조성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황금코스일뿐만 아니라,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이라 불리는 가사문학의 본고장인 것이다.
2. 누정의 역사
정자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우리나라에는 16세기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름난 정자 수만도 885개나 된다. 특히 누정은 따듯한 영남과호남에 많이 퍼져 있다.
누정이 생겨난 것은 穴居생활에서 立柱가옥으로 옮겨서 생활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전망이 좋아야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쉬었을 것이며, 이왕이면 산도 좋고 물도 좋은 곳에 생활터전을 마련하였다가,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유흥공간으로 누정과 비슷한 건물들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누정의 기록으로는 5세기경 소지왕 즉위 10년 정월에 天泉亭에 행차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이전부터 누정이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짙으나 상세한 기록이 없어 고증하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백제의 동성왕이 궁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기렀으며, 무왕도 맹해루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누정은 궁궐에 원림의 조성과 군신간의 휴식처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점차 후대로 오면서 사대부들의 휴식처로 발전하게 되었고, 농경사회가 정착하여 가면서 농사의 관리, 농민들의 휴식처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은 사대부들이 사용하였던 누정들이다.
3. 누정의 명명
누정의 이름이 비록 같다하더라도 계기와 뜻은 각각 다르다. 한자의 해석에의해 누정의 이름은 대개 몇가지 경향에 따라 붙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누정이 위치한 자연과 연관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영월의 요선정은 요선암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고, 남원의 용두정은 용머리와 같은 기암 위에 세워져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물가나 물위에 있는 누정들도 강이름이나 호수 이름에서 연유된다. 자연과 연관된 경우는 지명에 의해서만이 아니라자연의 풍월, 구름, 비 등으로 연유된 것도 많다. 희우정은 가뭄에 비가 오기를 빌다가 단비를 맞고 지어진 이름이고, 영월루는 저녁에 떠오르는 아름다운달을 맞이하여 붙인 이름이다. 동물과 관계된 것으로는 영월의 자규루가 대표적이다. 자규루는 원래 매죽루였으나 단종이 영월에 유배될 때 이누에 올라슬피우는 자규소리를 자주 듣고 자규시를 읊었다하여 고쳐진 이름이다. 누정이름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로는 봉황, 용, 거북 등 상상의 동물과 학, 갈매기등이다. 식물류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군자로 상징되는 매, 란, 국, 죽과 연, 소나무 등이다.
다음으로는 인물의 호칭과 연관된 누정명이 있다. 성명, 별호 등을 따서 지어진 누정의 예로는 양양의 하조대가 있다. 하조대는 이곳의 절경을 탐승하던 하륜과 조준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또 담양의 면앙정, 송강정은 각각 송순과 정철의 호와 동일한 명칭이다. 이러한 누정들은 후손들이 선조를 위해 지은 경우 선조의 호를 쓰기도 하고, 건립한 사람의 호를 쓰기도 한다. 다수가 모여 건립한 경우는 모임의 계나 회의 이름을 따는데, 강릉의 금란정과 취영정, 정읍의 백학정과 난국정이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한문구에서 따온 누정명이다. 이번 답사지인 소쇄원의 경우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과 광풍각이라 한 것은 양산보가 평소에 존경하던 주무숙의 인물됨을 송나라 때의 명필 황정견이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悔灑落 如光風霽月: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면서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다)"이라 한데서 따 온 것이다.
4. 누정의 기능
누정은 경제적 여유를 갖춘 식자층이 멋과 풍류를 누리며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들은 중앙 정계로의 진출의 의지를 버리고 은일자적 삶에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 학문과 작품활동에 치중하게 된다. 작품과 학문활동의 장이 되었던 곳이 바로 누정이며, 누정을 중심으로 당대 명사와 풍류가들이 모이게 되어 시단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식영정을 중심으로 한 식영정 시단과 면앙정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 시단이다. 시단에 대해서는 차차 자세하게 소개하기로 하고 먼저 누정이 지녔던 기능을 몇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누정은 노는 장소이자 경치를 감상하는 곳이었다. 누정의 이름이 자연 산수로 말미암아 붙여진 것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바로 이점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기능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누정이 문학의 산실이 되게 하는 초석을 마련하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 누정은 시단을 형성하는 기능을 하였다. 한 선비가 누정을 짓게 되면이곳을 휴식처로 삼아 찾아오던 사람들은 뜻이 통하는 詩友들이었다. 당시 선비들은 흥이 나면 시 한수를 자연스럽게 읊던 것이 상례였고, 그 시에 응하는 답시를 주고 받으면서 흥취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것이 누정시가 되었고, 누정시단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앞서 말한 식영정 시단은 임억령을 중심으로 임억령의 사위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성산 즉 별뫼를 중심으로한 네사람이 사귐을 가졌는데, 이들이 식영정 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세째, 누정은 학문을 수양하고 강학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곳이었다. 벼슬을 그만두거나 은퇴, 혹은 정치적 상황으로 정계진출에 뜻을 두지 않았던선비들이 대개는 누정을 중심으로 하여 학문과 시문을 즐기면서 조용히 은일하거나 수양을 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사상과 시풍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기도 하였는데, 서하당 주인 김성원이 옆동네 지실마을에 살던 정철을 불러들여 글을 가르친 것이 바로 예가 될 것이다.
네째, 모임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씨족끼리의 모임인 종회나 마을 사람들의동회, 각종 계모임이 바로 이 누정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을 전제로 누정이 세워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괴산의 모선정은 청풍 김씨의 종중이 세운 것이고, 나주 쌍계정은 선조 때의 동중계약부터 보존되어 오는 것으로 건립 취지에 따라 종회, 계회, 동회등이 개최되었던 곳이다.
다섯째, 누정은 활쏘기 수련장으로써의 기능도 하였다. 서울에서 궁술연습장으로 이름 난 곳은 옥동의 동룡정, 삼청동의 운룡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필운동의 동과정 등이다.
여섯째, 변방을 지키는 성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고을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으면 성루를 두는데, 승지를 가려 객관에 따른 누정을 지어 오가던 벼슬아치들의 접대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휴식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히 큰 고을이나 치적을 자랑하던 지방에서는 누정을 무척 사치스럽게 건립하였다한다.
이외에도 누정은 전쟁때의 지휘본부가 되기도 하고, 齋室, 치농, 측후 등 여러가지로 소용되었다. 서거정은 학명루기에서 누정은 나라의 사신을 존대하여 맞이하고, 빈객을 접대하고, 때와 기후를 예측하여 농사를 살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곳이여야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누정이 한가지의 기능보다는 여러가지로의 기능을 지녀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기능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정은 식자층들이 문화활동을 전개하던 곳이었다는 점이다. 식자층들은 당대의 교양인들로 상류문화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누정을 무대로 펼쳐졌던 문화활동은 한국 전통사회의 역사적 발전과 상층 문화권의 구조, 지역문화의 바탕과 특색을 밝히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국문화에서 보이는 삶의 멋과 여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사고는 이러한 식자층들이 지니고 있었던 정신적 기틀이였으며, 이것이 반영된 안목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을로부터 떨어져 울타리가 없는 개방적인 공간에서 삶의 멋과 여유, 자연의순리를 배우고자 했던 것은 이들이 추구하였던 삶의 방식이자 우리전통문화가 지니고 온 강점인 것이다.
5. 누정문학
누정에는 누정기와 누정시가 있게 마련이다. 적게는 한두편 많게는 수백편의 시문을 낳은 누정도 있다. 촉석루의 경우 누정시문은 400편이 넘는다고 한다. 누정이 시문의 산실이 된 까닭은 경치가 빼어난 곳에 건립된데다가 주인이 시문을 즐기던 식자층이요, 그 교우도 대부분이 식자층이었기 때문이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 사돈지간이었던 김인후는 서로 가깝게 지내며 광풍각과 제월당을 소요하면서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소쇄원 48수를 짓고도 그 흥에 못이겨 다시 10수를 더 짓기도 하였다.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도 식영정 중심의 20가지 승구를 가려내어 식영정 20영의 누정시를 남겼다. 누정시는대개 연작이 되기 마련인데, 김성원과 고경명, 정철 등은 임억령에게서 시를배우며 呼韻에 따라 각각 식영정 20영을 지으니, 다시 후대에 이곳을 찾은 시인들도 그들의 시에서 차운하여 식영정 시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경로로 당대를 풍미하던 문장가들이 누정을 중심으로 시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거기에서많은 시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여지승람>>에 소개된 대표적인 누정시인은 고려시대에는 김극기, 안축, 이규보, 이곡, 이첨, 정추, 정이오, 이색 등이며, 조선시대에는 권근, 변계량, 김종직, 이승소, 서거정, 성임, 성현 등이다. 이들은 누정이 건립될 때, 누정기를 짓기도 하고, 뒷날 누정을 유람하면서 회고적으로 누정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흥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누정시에는 일반인의 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시도 있다. 이는 임금들도 누정을 유람하면서 즐기기를 좋아햇고 누정시를 짓기를 좋아햇던 것으로 풀이된다.
누정시는 한문시만이 있었던 것만도 아니다. 국문시가인 가사와 시조도 적지 않다. 면앙정에서 지은 송순의 면앙정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가이며 식영정에서 제작된 정철의 성산별곡도 임억령의 식영정 20영의 영향으로 지어진 가사이다. 시인들은 누정을 찾아 유람하면서 누정시가를 지어 냈으며 이것들은 기행가사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누정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소요하며 출입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사,시조, 한시를 제작하였으니 누정은 시가문학의 산실로써의 역할과 문학발전에 한몫을 단단히 하였던 곳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5. 식영정(息影亭)
가. 신영정 (息影亭) - 정철의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1-1호.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松江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원래 김성원(金成遠)이 1560년(명종 15)에 임억령(林億齡)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서북쪽에는 칸반의 방이 꾸며져 있다. 정철은 노송의 숲 속에 묻힌 이 정자의 정취와 주변의 경관을 즐기면서 〈성산별곡 星山別曲〉을 지었다고 하며 〈식영정십팔영 息影亭十八詠〉도 남아 있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조대(釣臺)․노자암(枏汾巖)․방초주(芳草洲)․서석대(瑞石臺) 등의 승경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두가 물 속에 잠겨버리고, 정자 옆에 세워진 〈성산별곡〉의 시비(詩碑)만이 정철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나. 배롱나무 - (백일홍나무)
[형태]
중국 남부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확실치 않다.
높이 5~6m정도의 활엽수로 7~8월에 붉은색 꽃이 피며
간혹 흰색의 꽃이 피는것도 있다.
[생육환경]
토성을 가리지 않으나 비옥적윤한 토양과 양지를 좋아하며
내한성이 약해서 중부지방에서는 방한조치를 해야 월동이 가능하다.
원산지에 있어서는 건조하고 자갈이 섞인 모래땅이 적지라 한다.
모래가 많이 섞인 곳에 자라는 배롱나무의 수피는 더 아름답다.
[번식]
▶번식은 실생과 무성번식으로 한다.
①실생 : 가을에 종자를 채취하여 노천매장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파종한다.
②삽목 : 우량품종을 증식하기 위해서는 삽목하여야 한다.
3-4월, 6-8월에 가지삽목을 한다.
③그 밖에 휘묻이, 포기 나누기에 의해서 증식시킨다.
[이용]
▶꽃을 관상하기 위한 조경수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절에 이 나무를 많이 심는다.
▶염료 식물로 이용할 수 있다.
- 배롱나무의 잎에는 타닌 성분이 많아서 철을 매염제로 하여
흑갈색 계통의 색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염료 식물이다.
배롱나무는 제멋대로 아무 곳에나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고즈넉한 산사의 앞마당이나 이름난 정자의 뒤뜰, 잘 가꾸어진 무덤 옆에 산다. 그래서 가까이하기에 조금은 먼 당신이다. 조선 세조 때 문신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에서는 자미화(배롱나무)를 두고 ‘비단 같은 RHc이 노을 빛에 곱게 물들어 정원에서 환하게 사람의 혼을 뺄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 있으나 풍격이 최고이다. 한양 公侯의 저택에는 뜰에 많이 심어 놓이가 한 길이 넘는 것도 있었다...’ 고 했다.
나무이름은 처음 백일홍나무로 부르다가 ‘배기롱나무’를 거쳐 배롱나무로 변화된 것 같다.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무백일홍, 목백일홍이라고 이름이 붙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백 일 동안 피어 있는 것일까? 꽃 하나 하나가 백 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꽃들이 연속하여 피기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먼저 핀 꽃이 지면 여럿으로 갈라진 꽃대 아래에서 위로 향하여 뭉게구름 피어오르듯이 계속 피어오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한 번 핀 곷이지지 않고 백 일을 견딘다고 보는 것이다.
배롱나무의 중국이름은 자미화(紫微花)다. 요즘 보는 배롱나무는 대부분 진분홍색 꽃이지만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처음 들어올 때는 연보라색 꽃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나라 때 양귀비와의 인연으로 더 유명한 현종이 중서성을 자미성이라고 불렀던 것은 그 건물 뜰 있는 연보랏빛 꽃이 피는 배롱나무가 좋았거나, 중서성에는 근무하는 관리들의 옷 색깔이 연라보라였거나 했을 것이다. 중국의 대시인 백낙천의 시에,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최자의 ‘보한집’과 강희안의 ‘양화소록’등에 자미화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잎떨어지는 넓은 잎 중간키나무인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는 특징 말고도 껍질이 유별나게 생겨 사람들의 눈길이 끈다. 오래된 줄기의 표면은 연한 홍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 해 보인다.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배롱나무만의 특징이다. 발다닥이나 겨드랑이의 맨살을 보면 간지럼을 태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듯이, 중국사람들은 배롱나무 줄기를 간지럼에 부끄러워 몸을 비비꼬는 모양이라 하여 피양수라 불렀다 충청도 일부 지방에서는 “간지럼나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껍질이 너무 매끄러워 나무 타기으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진다고 해서 “ 원숭이 미끄럼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눌와, 2001
다. 성산별곡(星山別曲)
조선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총 84절(행) 168구이며, 3․4조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4․4조, 3․3조, 2․4조 혹은 2․3조, 4․3조 등도 더러 있다. ≪송강가사 松江歌辭≫․≪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등에 수록되어 있다.
성산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에 있는 지명이다. 정철이 25세 이후에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서 살 때 김성원(金成遠)을 위하여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문인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棲霞堂)․식영정(息影亭)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이다.
내용은 전체를 6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은 서사(緖詞)에 해당한다. 서하당․식영정에 머물며 세상에 나가지 않는 주인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 그리고 선간(仙間) 같은 식영정의 자연경관을 노래하였다.
제2단은 춘사(春詞)로 성산의 봄 경치와 주인공의 생활을 그린 것이며, 제3단은 하사(夏詞)로 신선하고 한가한 성산의 여름 풍경을 묘사하였다. 제4단은 추사(秋詞)인데, 성산의 가을 달밤 풍경을 읊었다. 제5단은 눈 내린 성산의 겨울 경치와 이곳에 은거하는 늙은이의 부귀를 노래한 동사(冬詞)이다.
끝으로 제6단은 결사(結詞)로서 산중에 벗이 없어 독서를 통하여 고금의 성현과 호걸들을 생각하고 그 흥망과 지조를 느끼며, 뜬구름 같은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나 타는 진선(眞仙)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성산동 식영정에 모인 사선(四仙), 즉 김성원․정철․임억령(林億齡)․고경명(高敬命)이 같은 제목과 압운으로 지은 한시 〈식영정잡영 息影亭雜詠〉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탈태(奪胎)시켜 만든 것이다. 즉 엄밀히 말해서 정철 자신의 순수한 창의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작품에 비하여 한어구(漢語句)와 전고(典故)가 많아 한시적인 분위기가 짙고, 한 개인과 지역에 대한 칭송이기 때문에 보편성이 희박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철 자신의 순수한 생활면에서 빚어진 작품이고, 그의 얼과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이 작품을 통해 그의 또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원. 전라남도 기념물 제44호. 고서(古西) 네거리를 지나 창평 쪽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ꡐ鳴玉軒庭苑入口ꡑ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고, 그 옆의 샛길로 접어들어 언덕을 하나 넘으면 네모진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명옥헌정원의 중심을 이루는 연못이다.
못의 크기는 남북 40m 안팎, 동서가 20m 가량되는 방지(方池)로서, 한가운데에 둥근 섬 하나를 쌓았고 주위에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명옥헌 정원의 중심을 이루는 연못 모습
명옥헌은 못 남쪽에 위치한 언덕 아래 못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으로 서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한가운데에 한칸 넓이의 방을 꾸며 놓았다.
건물 동편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을 끌어들여 건물 위에 또 하나의 방지를 꾸며 놓았다. 못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된 섬이 있고, 못 밑에는 ᄀ자형으로 열을 지어 배롱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 정원은 오희도(吳希道)가 외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광해군 치하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피하여 조용히 지내기 위하여 집 옆에 ꡐ망재(忘齋)ꡑ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틈틈이 장계골에서 자연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별세한 뒤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이 아버지가 평소 자연을 즐기던 호봉산(瓠峯山) 기슭의 계류가에 터를 잡아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에 못을 파 꽃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오늘날 전하는 명옥헌정원의 시작이라고 한다.
정철(鄭澈)의 넷째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명옥헌기 鳴玉軒記〉가 전하고 있으며, 계류가 바위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하는 ꡐ鳴玉軒癸酉(명옥헌계유)ꡑ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명옥헌 뒤 언덕에는 1825년(순조 25)에 창건되고 1868년(고종 5)에 철폐된 도장사(道藏祠)터가 있는데, 현재 명옥헌에는 명옥헌이라 새겨진 현판은 없어졌고 ꡐ道藏祠ꡑ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文化財案內文案集-光州直轄市․全羅南道篇-(文化財管理局, 1989).
나. 후산리 은행나무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명옥헌 옆에 있는 은행나무.
지정번호 : 전남기념물 제45호
지정연도 : 1980년 6월 2일
소재지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485-1
크기 : 수고 30m, 흉고지름 7.7m
분류 : 식물
1980년 6월 2일 전라남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키가 30m에 달하며 흉고지름 7.7m, 수관폭이 동으로 10m, 서로 10m, 남으로 14m, 북으로 9.5m의 노거수이다. 확실한 나무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300년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후산리 은행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지금의 호남지방을 두루 둘러보던 중 후산에 살고 있던 선비인 명곡(明谷) 오희도( 吳希道:1583~1623)라는 사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명곡의 북쪽 정원에는 은행나무가 있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인조는 타고 온 말을 이 은행나무에 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를 일명 ꡐ인조대왕(仁祖大王)의 계마행(繫馬杏)ꡑ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 있다.
은행나무의 오른쪽으로는 민간 정원으로 손꼽히는 오희도의 생가 터가 있다. 조선 중기 오희도가 이곳에 자연을 벗삼아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이 장소에 명옥헌을 지었다고 한다.
다. 정원(庭園)
집에 딸린 뜰이나 동산. 집이 사람에 의하여 계획되고 지어지는 바와 같이 정원도 계획되고 만들어져야 한다. 설사 자연 그대로의 동산이 정원의 일부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어지는 집과 관련되기 때문에 만들기 전에 세심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을 계획하고 만들고 가꾸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 사람이 바로 정원사인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의 동산바치는 바로 이 정원사를 말하는 것이다.
정원사나 동산바치는 최근에 널리 쓰이는 조경가와는 상당한 의미의 차이가 있어 조경가가 더 확대된 뜻을 가지게 된다. 원래 서양에 있어서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보다 많은 위락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공원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 또는 근세의 대저택이나 궁궐․수도원 등에 정원을 만드는 조원술에서 탈피하여 이를 사전에 계획하는 조경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조경가라는 이름은 1890년대에 옴스테드(Olmsted)가 자신을 조경가라 지칭한 데에서 시작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조경학의 분야가 확대되어 더더욱 정원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원은 단순히 집이나 궁궐․서원․사찰 등 단위적인 건물에 딸린 뜰이나 동산․못 등의 공간을 가꾸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조경은 미국조경학회평의회의 정의처럼 토지에 관련된 설계 계획, 그리고 관리의 기술로서 자원의 보전과 관리, 경영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적․과학적 지식을 동원한다.
또한 이를 활용하여 자연적인 요소와 인공적인 요소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이와 같은 환경이 유용하고도 유쾌하게 조성되도록 창조하는 기술이라 하겠다. 이로써, 정원이라는 개념은 조경보다 축소된 개념이며 공공적인 차원이 아닌 사적인 소유의 개념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종 류〕 정원은 주택에 딸린 주택 정원, 궁궐에 딸린 궁원(宮園, 宮苑), 사찰의 사찰 정원 및 서원 정원 등 각종 건축물에 따라 양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그 근본원리는 같다. 일반적으로 정원이라 할 때에는 각 건물을 구별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정원은 주로 주택의 것이 주를 이루며 궁궐의 것은 궁원으로 통한다.
또, 궁원 중에는 창덕궁 금원처럼 궁궐 후원에 특별히 만든 것도 있다. 이것은 정원이 일반적으로 어떤 건축물이 지어진 다음 이에 따라 자연히 형성되는 공간에 꾸미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 정원 자체를 계획하여 별도로 만드는 것도 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이런 유의 것으로는 또 별서 정원이 있다.
〔역 사〕 우리 나라 정원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현재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정원이 건축에 딸린 뜰과 동산으로서 인공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적인 요소를 이루어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건축이 건축답게 지어지기 시작한 뒤부터라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중에서 우선 고구려부터 고찰을 하여보면 시조 동명성왕 6년(서기전 32)에 신령스러운 공작이 궁정에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궁궐 건축에 이미 정원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성왕 이후에도 신령스러운 공작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또 장수왕 2년에는 기이한 새가 왕궁에 모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유리왕 3년에는 별궁(別宮)을 지었고, 또 양곡(凉谷)에다 동서(東西) 두 궁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시대는 초기부터 궁궐에 정원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유리왕 22년에는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여 대보(大輔)의 직(職)에 있던 협보(陝父)가 이를 간하였다. 그러나 왕이 노하여 그를 관원(官園)으로 좌천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궁궐의 정원을 관리하는 직종이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최근에 발굴 조사된 안학궁지(安鶴宮址)는 고구려의 정원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 궁은 551년(양원왕 7) 장안성을 축조할 때 만들기 시작한 듯한데, 한 변이 약 620m 되는 방형의 궁성 속에 남궁․중궁․북궁․서궁 등으로 나누어 52개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조산은 남궁의 서쪽과 북궁의 북쪽에, 원림은 동쪽․남쪽․서쪽․북쪽 모두에, 원은 남궁 서쪽 조산 앞에, 연못은 궁성 동쪽 모퉁이에 두었다.
특히, 연못에 흘러드는 물줄기는 성곽 북쪽 벽에 뚫은 수구(水口)로부터 연못 옆으로 하여 남쪽 수구로 나가게 하였다. 이것은 궁궐의 연못을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물을 끌어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 백제의 정원을 고찰하면 백제는 고구려보다는 더 상세한 기록들이 보인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武王條)에 "삼월 연못을 궁궐 남쪽에 파고, 물을 이십여 리로부터 끌어들이고 연못 사방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부여(扶餘)에 궁남지(宮南池)라 부르는 연못을 판 기록이다.
이 연못의 모양은 연못 네 가장자리〔四岸〕라는 구절로 보아 사각형으로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구절은 바로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인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 가운데 하나를 본떠서 작은 섬을 만든 것으로, 연못을 만드는 데에 도가의 신선 사상이 관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의자왕 15년에는 대궐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도 신라시대의 임해전(臨海殿)과 마찬가지로 궁남지를 바다로 생각하고 이를 바라보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이나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석조들은 모두 당시의 정원에 놓았던 석물들로서 당시 정원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여준다.
신라의 정원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서간조에서 서기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이사금조(沾解尼師今條)에서는 252년 4월 용이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 누워 있던 버들이 저절로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궁궐에서 연못을 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통일신라시대인 674년(문무왕 14) 2월 ꡒ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가지각색의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키웠다.ꡓ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 뒷받침해준다. 또, 같은 676년에는 양궁(壤宮)을 짓고 679년에는 궁궐을 중수한 바 극히 화려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또 760년(경덕왕 19) 2월에도 궁중에 큰 못을 파고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개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러한 기록에서 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의 궁궐에는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에 도교와 관련된 선산(仙山)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정원의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통일신라시대의 정원에 대하여 가장 확실히 전해주는 것은 경주 안압지(雁鴨池)와 임해전지(臨海殿址)라 하겠다. 이 연못과 전각은 800년(소성왕 2) 4월에 폭풍이 심히 불어 기왓장들이 날아가고 임해문(臨海門)이 파괴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에 이미 임해전(臨海殿)은 건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임해전이 그 앞의 연못(안압지)을 바다처럼 생각하여 바라본다는 뜻이기 때문에 연못도 이미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조성 시기는 아마도 앞에 말한 674년부터 679년 사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임해전이라는 명칭은 697년(효소왕 6)에 나타나지만, 안압지라는 명칭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최근 이 안압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총 5,800여 평 되는 면적 속에 호안(護岸)길이가 1, 330m이다. 연못의 서측은 동궁(東宮)과 연결되었고, 다섯 개의 건물(정자 등)들이 세워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못 가운데는 괴석(怪石)들이 물 위에만 그 모습을 내밀도록 지름 50㎝ 정도 되는 돌들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다.
북쪽과 동쪽으로는 산봉우리들을 만들었으며, 호안들은 굴곡이 져서 여기에 놓은 괴석들과 더불어 마치 바닷가처럼 보이게 하였음이 밝혀졌다. 또, 연못 가운데는 세개의 섬이 이루어졌었고, 수구는 북동쪽 호안에 나타났다. 아마도 이 못에 물을 끌어들인 것은 북천(北川)의 물인 듯하다.
경주의 고지도에도 북천으로부터 황룡사 앞으로 하여 안압지 옆을 지나 계림을 통하여 남천(南川)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천이 그려져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포석정(鮑石亭)은 중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유상곡지연(流觴曲之宴)에서 연유된 것이다. 돌로 전복 모양의 물 흐르는 작은 도랑을 만들어 술잔을 띄워 보내면서 시를 짓고 즐기던 특수한 정원의 한 예인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일찍이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었던 정원 양식이 그대로 계승, 발전된 듯하다. ≪고려사≫ 의종조에는 ꡒ11년(1157) 여름 4월에 민가 50여 채를 헐고 태평정(太平亭)을 만들고 태자에게 명하여 현판을 쓰도록 하였으며, 아름다운 꽃을 심고 진기한 과실수를 심었다.
또, 기이하고 화려한 것들을 좌우로 늘어놓고 정자 남쪽에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짓고, 그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지붕에 청자 기와를 얹고, 남쪽에 양화정(養和亭)을 짓고 종려나무잎으로 지붕을 덮고, 또 옥석(玉石)을 갈아 관희대(觀喜臺)와 미성대(美成臺)라는 두 대를 쌓았다.
또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었으며, 멀리서 물을 끌어들여 폭포〔飛泉〕를 만든 바 극히 화려하였다.ꡓ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도 정원에는 연못을 파고, 봉래선산(蓬萊仙山) 혹은 방장선산 등 삼신산을 본떠서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못가에는 정자를 짓고, 또 괴석들을 늘어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공으로 폭포도 만든 것은 삼국시대보다 발달된 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형성되었던 정원의 양식은 다만 문헌과 그 유적지를 통하여 고찰이 가능하나, 조선시대부터는 현존하는 유구로써 그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정원의 구성원리와 형식․종류 등은 다음과 같다.
〔구성원리〕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구성 원리가 그 바탕이 된 것으로 이는 동양 삼국(우리 나라․중국․일본)이 같다. 동양의 정원은 일찍부터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자연과 신비가 강조되고, 자연히 자연스러운 형태를 이루게 되어 비정제성(非整齊性)을 가지게 된다. 동양인은 항상 사람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자연 속에 몰입하여왔다.
이러한 태도는 정원에 그대로 반영되어 대자연 속에서 소요자적하던 사람의 자연에 대한 경험을 정원 속에 다시 형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원야 園冶≫라는 중국의 책에서도 ꡒ비록 사람이 만들었기는 하나, 마치 하늘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놓은 것같이 느끼게 한다(雖由人作 宛自天開).ꡓ고 구성 원리를 밝히고 있다.
≪원야≫에 기록된 내용은 흥조론(興造論)․원설(園說)․상지(相地)․입기(立基)․옥우(屋宇)․장절(裝折)․난간(欄杆)․문창(門鎖)․장원(墻垣)․포지(孃地)․철산(酬山)․선석(選石)․차경(借景) 등이다. 이 중 정원 구성 원리의 핵심은 인차(因借)로서 인과 차는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음양오행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인은 지세와 지형에 맞추어 정원을 꾸미고 또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차는 차경을 말하는 것으로 건축물간의 적당한 배치, 그리고 이들이 정원의 경관과 조화되도록 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터 주위에 있는 자연의 경관과도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여 집이나 정원 모두가 자연의 일부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동양 정원의 구성 원리는 그 근본에서는 같으나, 그 세부 수법에서는 동양 삼국이 조금씩 다르다. 중국의 정원은 보통 정원 속에 대자연의 산악․폭포․계곡․동굴 등을 모방하여 만든다. 마치 대자연의 축도처럼 하고, 또 기암괴석을 늘어놓고 문․창살․난간․담장 등에 너무나 많은 변화를 주어 보는 사람을 현란하게 한다.
또, 일본의 정원은 많은 제약과 규칙을 두어 같은 자연을 두되 너무나 인공적인 형태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보고 즐기며, 또 모든 것, 즉 사람이나 건축 모두가 자연의 일부가 되도록 한다. 우리 나라는 전 국토의 약 3분의 2가 산지로 되었기 때문에 도처에 완만한 구릉이 많다.
그래서 집터를 잡으면 대개 집터 뒤로는 구릉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단(段)을 지으며 뒤뜰〔後庭〕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후정의 대표적인 실례는 창덕궁 낙선재의 후정이나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이다. 후정을 꾸미는 일은 동산과 관계되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원사를 동산바치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정원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의 하나가 연못〔池〕이다. 이 연못도 그 터가 연못을 팔 형편이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연못에 심은 연꽃을 바라본다. 하지만, 연못을 팔 수 없는 동산에서는 산정(山亭)을 짓고 연못 대신 석지(石池)를 늘어놓아 연꽃을 키운다. 또, 시냇물〔溪流〕이 흐르면 계정(溪亭)을 지어 냇물을 바라보며 즐긴다.
즉,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정원을 가꾸며, 결코 억지로 꾸미지는 않는다. 이러한 성격은 나무를 심는 데에도 잘 나타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에서는 정원에 결코 늘푸른 나무나 잔디를 심지 않는다.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며 겨울이면 힘찬 가지에 눈꽃이 하얗게 피는 활엽수들을 심는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나 집이나 뜨락 모두가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 자연대로 살고자 하는 것에 우리 정원의 큰 구성 원리가 있다고 하겠다.
〔구성요소〕(1)
석 물 우리 나라 정원에 있어 석물은 가장 두드러진 시각적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담장이나 굴뚝․마당 등은 모두 집을 지음에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석물 만큼은 순전히 정원에 늘어놓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두드러지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또, 석물은 그 종류가 많으며, 종류에 따라 만들어진 석물의 모양도 가지가지로 변화가 많다. ① 물확〔水筠, 石筠〕 : 물확은 돌확이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작은 돌절구를 의미한다. 과히 크지 않은 돌덩어리를 정으로 쪼아 중앙에 큰 홈을 파서 여기에 물을 담아 마당에 놓아둔다.
이 물확은 돌절구로도 쓰이기 때문에 부엌 앞마당이나 부엌 옆마당에 놓일 때가 많다. 정원의 석물로서는 사랑채 뒤뜰에 놓여질 때가 많다. 물확의 모양은 원형․다각형․특수형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각 형별로도 여러 모양을 이루고 있다.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관가정(觀稼亭)의 물확은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놓인 것은 거북이 잔등 위에 용이 몸을 틀어 물 담는 수반을 형성한 것으로 왕궁의 물확답게 정교하다. 교태전의 또 다른 물확은 연꽃 잎사귀로 수반을 형성하였는데, 윗면 가장자리 네 곳에는 방금 물에서 기어 나온 모습의 개구리가 한 마리씩 새겨져 있어 정적인 물확에서 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② 석지(石池) : 석지는 석련지(石蓮池)라고도 하며, 물확보다 크다. 대개 큰 덩어리의 돌을 직육면체로 다듬어서 그 윗면을 파 물을 담고 연꽃을 키운다. 석지는 연못을 팔 수 없는 마당에 잘 늘어놓는데, 대개의 경우 사랑채 앞마당이나 후원에 놓는다.
석지의 모양은 대개 방형이며 특수한 형태의 것이 가끔 보인다. 창덕궁 낙선재 후정의 것은 단순한 직육면체의 석지를 정교하게 조각한 원구의 받침대로 받치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에는 방형으로 된 것과 연꽃 잎사귀 모양으로 조각된 것이 있다.
③ 석조(石槽) : 절의 승방이나 주택의 우물가에 놓고 물을 담던 커다란 돌로 된 물통이다. 이것은 대개 직육면체로 되어 있으나 백제시대의 부여석조나 공주반죽동석조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④ 석함(石函) : 괴석을 담아 마당에 늘어놓는 석물로서, 괴석을 받친다는 뜻에서 괴석대(怪石臺)라고도 한다.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석물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데, 주로 괴석을 담는 대의 평면모양에 따라 방형․다각형․특수형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평면이 방형인 것은 그 전체 모양이 대개 직육면체가 되는데, 각 면에 조각을 하지 않은 단순한 것과 각 면에 특수한 조각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낙선재 후정에는 면에 봉황과 구름을 조각하고 받침대에는 호랑이를 조각한 아주 정교한 방형의 석함과, 면에 구름무늬가 조각되고 받침대는 기단 모양으로 된 석함이 있다.
또한, 낙선재에는 각 면에 꽃잎이 정교하게 조각된 육각형의 석함, 대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팔각형 석함, 받침대를 개다리소반 모양으로 만든 석함 등도 있다. 장서각에는 아무 조각이 없는 육각형의 석함이 전하고 있다. ⑤ 대석(臺石) : 화초분이나 등불 또는 석함을 받치던 석물로서, 그 모양도 방형․다각형․원형․특수형으로 나누어진다. 경복궁 교태전의 후정인 아미산에 놓여 있는 대석은 위의 대와 밑동은 방형이지만 중간 부분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 윗면에는 철제로 된 다리를 고인 듯한 홈이 패어 있는데, 이러한 모양의 것이 서울 동묘 뜰에서는 해시계를 받쳐놓았던 것으로 미루어 이것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창덕궁 금원 안의 돈덕정 앞뜰의 것은 석함을 받쳐 놓는 대로 쓰였다.
창덕궁 금원 안의 연경당 안마당 담모퉁이에 놓인 것은 육각형의 여러 층으로 된 대석이다. 서울 자하문 박씨가에는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대석이 있다. 거북이의 등 위에는 작은 석함을 받쳐 놓았다. ⑥ 식석(飾石) : 식석은 커다란 돌을 조각하여 정원에 늘어놓은 것으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시각적 조형물이 된다.
창덕궁 주합루 앞에는 각 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장방형의 식석이 놓여 있다. 경복궁 수정전 석계 옆 나무 밑동에는 애초 나무가 자랄 때부터 박아 넣은 식석이 있는데, 이에는 음양의 상징적인 결합을 보여주는 듯한 면이 있다.
또, 경복궁 자경전 기단 앞에는 석주 위에 해태로 보이는 동물을 조각한 식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화재를 방지하는 주술적 뜻이 있다.
⑦ 석상(石床) : 석상은 커다란 자연적인 반석 또는 큰 자연석을 판석으로 다듬어 마당에 놓고 그 위에 걸터앉거나 차를 끓이는 데 이용하는 석물이다. 정약용의 다산초당 마당에는 자연석으로 된 석상이 있는데 이곳에서 차를 끓였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 후정 앞에 놓인 석상은 걸터앉을 때 쓰던 석상으로 추정된다.
⑧ 하마석(下馬石) : 노둣돌이라고도 하는데, 이 돌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딛는 돌이다.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기단 앞에는 잘 다듬어 만든 하마석이 놓여 있고, 서울 안국동 윤씨가의 솟을대문 앞에도 직육면체의 커다란 하마석이 놓여 있다. 이와같은 것은 정읍 김동수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샘 터
샘터는 정원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물을 실생활에 공급해 주는 실용성으로도 중요한 것이지만, 연못을 파고 여기에 물을 대주는 구실도 하여준다.
서울 자하문 박씨가의 샘터는 샘터의 바닥을 커다란 장방형으로 하여 그 안을 보다 작은 방형 두 개로 나누고, 한쪽은 방형으로 다른 쪽은 원형으로 물이 괴는 홈을 판 독특한 것이다.
전라남도 대흥사에 있는 샘터는 석축에 방형으로 뚫고 그 안에 물받이 돌을 끼워놓은 것이다. 경복궁 향원정 후편에 있는 샘터는 물이 향원정 방지(方池)로 흘러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큰 원형 속에 방형의 물이 괴는 부분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물이 흘러 나와 보다 작은 방형의 단 사이에 뚫은 둥근 구멍을 통하여 다시 아랫단으로 흐르면서, 연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또 우물 뒤로는 반원형으로 석축을 쌓아, 전체적으로 원형과 방형을 대조시키면서 조화시킨 특수한 샘터이다.
(3) 연못과 정자 연못과 정자는 주택이나 궁궐 건축의 정원이나, 동리의 경치 좋은 곳에 많이 지어진다. 연못은 대개 방형으로 생긴 방지가 일반적이고, 궁궐에 있어 반도지(半島池)와 같은 특수한 형태의 것도 있다. 연못의 가장자리는 막돌로 쌓아 마무리를 하거나, 장대석의 다듬은 돌로 정교하게 마무리하기도 한다.
또, 연못의 중앙에는 작은 섬을 만드는데 이것은 본래 삼신산을 본떠 만든 것으로, 이 섬이 클 때에는 여기에 정자를 만들고 다리로 연못 가장자리와 연결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못에는 연을 심는데, 이것은 불교적인 영향이라 하겠다.
(4) 다리〔橋〕․개천․도랑 주택이나 궁궐․서원 등의 정원에서 빗물을 모아 집터 밖으로 끌어내는 데는 도랑이 필요하고, 또 연못을 팠을 때 샘터에서 흘러든 물이 연못에 넘쳐 집터 밖으로 내보낼 때에도 필요하다. 또한,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연못에 다른 개천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일 때 도랑이나 개천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도랑이나 개천은 정원 속에 물이라는 이질적인 시각적 요소를 구성하여 주고, 또 움직이는 요소로서 정원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창덕궁 연경당의 도랑은 집터 속의 빗물을 모아 터 밖으로 내보내는 구실을 하여준다. 창덕궁 부용정에 설치된 도랑은 빗물을 모아 방지로 흘러들게 하는 도랑이다.
옥산서원의 도랑은 집터 밖 개천에서 일부러 물을 끌어들여 이 서원의 누문(樓門) 앞을 흘러 터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다리는 도랑이나 개천 위에 많이 건축되고, 또 연못 가운데 섬을 연결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다. 다리는 석재로 만든 석교(石橋)가 주종을 이루나 때로 목재로 만든 다리〔木橋〕도 만들어진다.
궁궐 건축에서의 다리를 보면 경복궁에서는 홍례문(弘禮門)에서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는 중간에 영제교(永濟橋)가 건조되었고, 창덕궁에서는 금천교(錦川橋)가, 창경궁에서는 옥천교(玉川橋)가 건조되었다. 이들 다리들은 모두 궁궐 건축에서 그 가장 중심 전각이 되는 정전(正殿)으로 도달하는 중요한 것으로 일반 다리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양식은 개천 바닥에 아치를 쌓아 교각을 만들고, 그 위로 장대석의 도리를 걸쳐, 장대석들을 도리 사이에 보 모양으로 놓아 마무리하였다. 다리의 난간에는 하엽을 놓아 난간두겁대를 받치고, 양측 엄지기둥에는 돌짐승을 조각하였다. 또, 다리 바로 앞 개천 가장자리는 장대석으로 마무리하였다.
여기에 커다란 돌짐승이 물로 내려가려는 모양을 하고 있어 동적인 요소를 이루어주고 있다. 창덕궁 연경당 솟을대문 밖의 돌다리는 좁은 도랑 위에 걸친 만큼 두꺼운 판석을 양측에 얹고 작은 돌기둥을 네 곳에 세운 아주 소박, 단순한 것이다. 경복궁 향원정 연못가에서 연못 가운데 섬에 이르도록 만든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다.
(5) 석단(石壇)
우리 나라의 지형은 구릉지가 많기 때문에 주택․사찰․궁궐 등의 뒷 터에는 언덕이 많다. 따라서, 정원을 꾸밀 때에는 이 언덕에 여러 층으로 단을 쌓게 된다.
이 때 층층이 쌓은 단은 잘 다듬어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거나 막돌로 쌓기도 한다. 그 단 위에 화초․나무를 심고 또 괴석대 등의 석물을 늘어놓는다. 창덕궁 낙선재 후정의 석단은 우리 나라 후정의 대표적인 석단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6) 계단(階段)
정원의 구성 요소가 되는 계단으로는 애당초 건물의 기단에 설치된 계단이 있고, 한편 낮은 터에서 높은 터로 올라갈 때 만들어지는 계단이 있다. 보통의 계단은 막돌로 쌓으나 낙선재 후정에서처럼 석단을 잘 다듬은 돌로 쌓을 때에는 계단도 이에 조화되게 잘 다듬은 돌로 쌓는다.
궁궐 정전의 기단에 만들어진 석계는 전체가 삼분되어 그 중앙부에는 봉황 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면석이 있어 어도(御道)임을 나타내고 있다.
(7) 돌길과 징검돌 궁궐․사찰․서원․향교 등의 경우와 같이 비교적 넓은 뜰을 구성할 때에는 여러 개의 돌로 포장된 돌길이 만들어진다. 특히, 궁궐에서는 임금이 다니는 길은 어도라 하여 일반 길보다 한층 높게 하였다. 종묘의 어도를 보면 길폭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중앙부 양측에는 탄석을 세워 꽂고 돌들을 깔았다.
양쪽 길의 면보다 한층 높게 되어 있다. 징검돌은 흙바닥의 마당에 걸음걸이의 간격에 맞추어 대략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아 비오는 날에도 다니기 편하게 한다. 이들 돌길이나 징검돌은 모두 정원에서 어떤 방향을 암시해주고 움직임을 주는 선적인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강한 시각적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8) 식재(植材)
정원에 심는 식재로는 크게 수목․화초․채소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수목은 건조한 땅에 심어야 할 나무(적송․흑송․금송․졸참나무․갈참나무․매화․해당화․향나무․철쭉 등)와 습한 땅에 심어야 할 나무(잣나무․수양버들․태산목․무궁화)를 구분하여야 한다.
또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과실수(대추나무․감나무․복숭아나무․자두나무․앵두나무․사과나무 등)와 단순히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아름다워 바라보는 나무(석류․주목․산사나무․돈나무․매화나무․모과나무․주엽나무 등)로 구분하여 적절하게 심는다.
또, 그늘에서도 잘 자라나는 나무(주목․돈나무․동백나무․진달래․단풍나무 등)와 양지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은행나무․소나무․참나무․수양버들․매화나무 등)를 잘 구별하여 심는다. 이들 나무들은 정원에 그늘을 형성해준다.
또 그 모양이 아름다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흥미를 일으켜주는 것이다. 이 변화는 형태와 색채에서 동시에 일어나므로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화초는 꽃이 피는 것과 꽃이 피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꽃은 일년생이거나 다년생을 막론하고, 그 크기가 대략 한길 못 되는 것을 말한다.
마당 앞이나 담장 밑에 심거나, 또는 분(盆)에 심어 대석(臺石)에 받쳐놓거나 댓돌 위에 늘어놓는다. 작약․난초․국화․양귀비․박하․모란 등은 아름답거나 향기가 좋은 꽃들이다. 풀은 잔디․새․갈대 등이 있는데 잔디를 마당에 온통 까는 일은 흔하지 않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영향을 받은 뒤에 만든 것이다.
정원에는 채소밭도 가꾸어진다. 채소의 종류는 배추․무․마늘^상추 등으로 담장 밑이나 뒷마당․부엌 옆마당 등 공터가 있으면 심었다. 식생활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실용 정원으로서의 성격도 가진다. 또, 탱자나무 같은 것은 울타리로 쓰임으로써 생울〔生垣〕의 재료가 된다. 이상 말한 식재들은 문헌상에도 나타난다.
문헌상에 주로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괴목․버들․배나무․잣나무․모란․매화․복숭아․오얏․소나무․대나무․산수유․연꽃․철쭉․차 등 굉장히 많다. 이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파한집≫․≪동국이상국집≫․≪보한집≫․≪산림경제≫․≪임원경제지≫․≪양화소록 養花小錄≫ 등에 나타난다.
거의 전체가 철따라 바뀌는 활엽수 계통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가 사계절이 뚜렷한 데서 온 결과라 추측된다.
(9) 마 당
마당은 정원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가 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건축은 집터를 담장으로 쌓고 그 속에 여러 채〔棟〕의 건물을 짓고, 그 사이사이를 다시 담장으로 막기 때문에 여러 개의 마당이 이루어진다. 즉, 앞마당․옆마당․뒷마당․행랑마당․사랑마당․안마당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들 마당 위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으며, 또 석물을 늘어놓게 됨으로써 정원 구성의 바탕이 된다. 또한, 이 마당은 그 바닥을 흙바닥으로 잘 다져서 빗물이 잘 빠지게 한다.
그래서 정원공간에 커다란 수평적 요소를 이루어주기 때문에 수직적인 요소인 굴뚝․난간․건물․수목들의 그림자를 받아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미있는 변화를 이루어주고 있다.
또, 마당은 집터가 구릉을 끼고 자리잡을 때에는 지형에 따라 자연히 높낮이 차가 생긴다. 또 사랑마당․행랑마당 등 마당의 성격에 의하여도 위계성(位階性)이 생김으로써 공간 구성에 동적인 변화를 주게 된다. 또, 주택에서는 이 마당에 장독대가 설치되고,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차일이 쳐지고 멍석이 깔린다.
이로써 내부공간이 다 이루지 못한 기능을 받아 이루어주는 반내부공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궁궐에도 정전의 앞마당에는 품계석(品階石)들이 줄지어 서 있어, 국가의 대사 때 신하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또 어떤 때는 차일이 쳐지고 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당에는 차일의 쇠고리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0) 굴 뚝
굴뚝은 순전히 건축적인 구조물이지만 일단 이것이 건축되면 정원에 있어 중요한 수직적인 시각적 요소가 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굴뚝은 대개 건물로부터 떨어져서 독립된 구조물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것은 수평적인 요소인 마당․연못 등과 좋은 대조를 이루게 된다.
경복궁 교태전의 후정인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형으로 각면에는 무늬를 넣고, 그 지붕은 기와 지붕으로 연기가 나오는 곳에 연가라고 부르는 토기를 얹어 그 창구멍으로 연기를 내뿜도록 하였다. 굴뚝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 정원마다 특이한 시각적 요소가 된다.
(11) 담 장
담장은 집터를 둘러막아 담장 바깥과 담장 안을 구별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원의 경계를 정하여 주고 또 마당에 심은 화초․수목․굴뚝․석물 등의 수직적인 요소들을 한 공간 속에 잡아 매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정원의 중요한 수직적 구성 요소가 된다. 또 담장은 쌓는 방법과 모양을 여러 가지로 달리하기 때문에 정원 안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어 재미있는 시각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12) 기타요소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는 위에서 말한 것 외에도 건축물 자체에 따라 건축되는 난간^문과 창의 살 짜임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서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시각적으로 질감․색채․명암․형태 등의 대조를 이루어 정원의 중요한 요소들이 된다.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신(侍臣)이었던 송순(宋純)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그는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 〈면앙정삼언가 潭仰亭三言歌〉를 지어 정자이름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고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동남향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으며 주두(柱頭)조차 생략되고, 처마도 부연(浮椽 : 처마 끝에 덧 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없는 간소한 건물이다. 주위에는 상수리나무․굴참나무․밤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속에는 아름드리 나무도 간간이 서 있다. 주된 전망은 후면에 해당하는 서북쪽으로 평야 너머로 연산(連山)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면앙정의 풍류운치는 당대에 명사들에게 흠모되었는데, 송순이 지은 잡가(雜歌) 2편에서 그 풍취를 살펴볼 수 있으며, 이 글은 또한 ≪청구영언≫ 등 가집(歌集)에 무명작으로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ꡒ십년을 경영해야 초당삼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대 업스니 돌려두고 보리라.ꡓ 이 노래는 만년에 이 정자를 두고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건물은 간소한 양식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의의가 크기에 1972년에 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중수 때에 원형이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1493(성종 24)~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潭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 태(泰)의 아들이다. 면앙정가단(潭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 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咬)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 판윤으로 특승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盧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때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 潭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1-2호.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정철이 동인(東人)들의 압박에 못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하향하여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하여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하여 1770년(영조 46)에 세운 것인데,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 ꡐ松江亭ꡑ이라고 새긴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ꡐ竹綠亭ꡑ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정철은 이곳에서 〈사미인곡 思美人曲〉을 지었다 하며, 현재 정자 옆에는 그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나. 정철(鄭澈)
1536년(중종 3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ꡒ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ꡓ는 논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 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 短歌雜篇〉 32수, 〈성은가 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울창한 대숲을 뚫고 들어온 한줄기 봄햇살이 온몸을 휘감는다.은은한 죽향과 다향은 가슴에 묻어나고,대잎 스치는 청량한 바람과 소리는 심신을 말끔하게 씻어준다.꿈꾸듯 지그시 눈을 감고 가슴을 비운다.봄날 담양 대숲에 서서 가슴을 열면 500년전의 선비가 되어 송강 정철과 죽로차 한 잔 나누고 면앙정 송순과 시 한수 읊게 된다.
봄의 교향곡은 대밭에서 들어야 제맛이다.
담양읍에서 순창 방향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연두빛 새잎이 터널을 이룬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5㎞쯤 달렸을까.금성면 석현교에서 우회전해 좁은 농로로 들어서자 자운영 꽃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몇년전 땅을 기름지게 하기위해 씨를 뿌렸는데 앙증맞은 자주색 꽃이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요즘은 담양의 논밭이 온통 자운영 꽃밭으로 변했다.
호젓한 들길을 2㎞쯤 더 달려 고지산 남서방향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진 3만여평의 야산에 들어선다.늘푸른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 싼 국내 유일의 죽림욕장인 ꡐ대나무골 테마공원ꡑ이다.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대나무들이 하늘을 찌를듯 쭉쭉 뻗어 울창한 숲을 이룬 왼쪽엔 아담한 주차장이,오른쪽 대숲 자락엔 전설의 고향 ꡐ죽귀(竹鬼)ꡑ를 촬영한 세트 오두막이 음산한 모습으로 기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버들잎 대신 대잎 서너개가 떠 있는 ꡐ죽로천ꡑ에서 냉수 한 바가지를 들이켜 도시의 물과 공기로 오염된 오장육부를 깨끗하게 씻어낸다.죽림욕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봄바람이 지휘봉을 잡은 대숲에선 대나무와 새들이 대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탁 탁 탁 탁…
키자랑을 하던 대나무들이 급기야 허공에서 죽검으로 승부를 겨룬다.속이 텅 빈 대나무라 둔탁하면서도 청아한 공명음이 대숲을 울린다.마치 홍콩영화에서 나오는 무술 고단자들이 대숲을 날아다니며 칼싸움을 하는 듯 하다.
사아악 사아악…
대잎도 질세라 화음을 맞춘다.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낙비 소리같기도 하고 열두폭 비단치마가 속살을 스치는 소리같기도 하다.
딱딱딱딱…
딱다구리 한마리가 대숲에서 자라는 오동나무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다.고음이다.대숲 공기가 부르르 떨며 첼로소리를 낸다.
짹짹짹짹…
참새가 대나무사이로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소프라노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촘촘하게 자란 대나무 사이를 부딪치지도 않고 잘도 피해 날아 다닌다.
교향곡을 들으며 자라서일까.봄날의 대숲은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곳이다.
며칠전 제법 봄비가 축축하게 내리더니 여기저기서 죽순이 불쑥 불쑥 땅을 뚫고 솟아 올랐다.우후죽순이라더니 죽순의 키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한창때는 하루에 60㎝정도 자란다고 한다.담양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빨리 자란 죽순은 하루에 122㎝.시간당 약5㎝ 자란 셈이니 죽순 자라는 것을 못봤다면 둔감한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옛날 담양의 어느 선비가 대숲에서 갓을 벗어놓고 잠시 볼일을 보고 나니 갓이 없어졌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로 죽순의 성장속도는 놀랍다.녀석들은 힘도 세다.아스팔트 틈새도 뚫고 박힌 돌도 밀어낸다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곳 대숲에는 자라는 것은 죽순만이 아니다.대잎에서 떨어지는 아침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키작은 야생차나무가 대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대밭에서 자란 야생차잎은 ꡐ죽로차ꡑ라고 해서 차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다고 한다.곡우를 맞아 연두빛 차잎이 도르르 말린 채 은은한 다향을 풍긴다.
죽향과 다향에 취해 500~600m쯤 되는 대숲 사잇길을 이러저리 거닐다 보면 소나무밭이 나오고,소나무밭이 끝나면 밤나무밭이 이어진다.오뉴월 이곳 대나무밭 테마공원은 죽향과 솔향 그리고 밤나무향기로 정신이 아득해진다고 한다.
대숲길이 끝나는 곳에선 조그만 웅덩이를 만난다.거울같은 짙은 초록빛 물속에 대숲이 잠겨있다.한폭의 동양화다.
스피커를 통해 흐르는 클래식 선율에 맞춰 춘정에 겨운 뻐꾸기가 뻐꾹 뻐꾹 추임새를 넣는다.주인으로부터 곡우차 한잔 대접받고 대나무로 만든 원두막에 눕는다.
온갖 시름을 잠시나마 씻어내고 선비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그곳은 봄날의 대숲이다.
나. 대나무
대과에 속하는 상록성 목본인 대나무류의 총칭.
〔특 징〕ꡐ대ꡑ라고 약칭하기도 하며 한자어로는 죽(竹)이라고 한다. 대나무류는 전세계에 12속 500여 종이 있으며, 우리 나라에는 해장죽속․왕대속․이대속․조릿대속의 4속 14종류가 있다.
대나무의 대표종인 왕대는 중국 원산으로 우리 나라에서 널리 식재되고 있다. 땅속줄기로 길게 옆으로 뻗으며 해마다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에 걸쳐 죽순을 낸다. 죽순 껍질은 흑갈색의 반점이 있고 맛은 쓰다. 줄기의 높이는 20m에 달하나 추운 지방에서는 3m밖에 자라지 않는다.
대나무는 단자엽식물이므로 나이테가 없고 비대생장을 하지 않는다. 줄기는 원통형이고 가운데가 비었다. 표면은 녹색에서 황록색으로 변하며 포엽(苞葉:꽃의 아래에서 봉오리를 싸는 잎)은 일찍 떨어진다.
가지는 2, 3개씩 나며, 잎은 3~7개씩 달리는데 피침형으로 점차 뾰족해진다. 길이는 10~20㎝, 너비는 12~20㎜이다. 꽃은 6~7월에 피며 과실은 영과(穎果:씨가 하나인 딱딱한 열매)로 가을에 성숙한다.
대나무류의 꽃은 주기적으로 피는데 그 간격은 종류에 따라 다르다. 조릿대는 5년, 왕대․솜대는 60년을 주기로 피는데, 대개 꽃이 피면 모죽(母竹)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해 발육되어야 할 죽아(竹芽)의 약 90%가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만이 회복죽이 되므로 개화 후에는 죽림을 갱신하여야 한다.
대나무의 줄기는 종류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른데, 작은 것은 높이 1~2m 이하이고 지름 2㎜ 정도의 것이 있는가 하면 높이 10~30m에 지름 20㎝에 달하는 것도 있다. 줄기의 단면은 원형 또는 반원형이 보통이나 사각형인 것도 있다. 줄기의 빛깔은 담청색이 보통이나 반문이 있는 것도 있고 심지어는 거북무늬가 있는 것도 있다.
〔재 배〕 죽림은 우리 나라 남부지방의 농가소득 증대의 일익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죽세가공품의 수출에 의한 외화획득, 해태생산용 발, 어구, 비닐하우스용 자재, 펄프원료, 죽순의 식용 등 다각적인 효용성을 가지고 있어 매우 수익성이 높다.
우리 나라의 죽림은 약 600ha가 있으나, 죽재의 수요량 급증으로 생산량이 국내수요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여, 연간 20만 속 이상의 죽재를 일본이나 대만 등지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의 죽림 분포가능지역은 강원도 양양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경상북도 안동과 김천, 충청북도 영동, 전라북도 무주, 충청남도 부여로 연결되는 선의 이남지방이나, 죽림조성으로 경제성이 있는 지역은 경상북도 포항과 대구, 경상남도 거창과 함양, 전라북도 전주와 김제를 연결하는 선의 이남지역이며, 이 중에서도 특히 경상남도와 전라남도가 적합한 지역이다.
우리 나라에서 재배가 장려되고 있는 죽류는 왕대〔苦竹〕․솜대〔淡竹〕․맹종죽(孟宗竹)의 3종이며, 이 중에서도 왕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재배의 적지는 연평균기온이 10℃ 이상이며 연중 최저기온이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연간강우량이 1,000㎜ 이상인 지방으로서, 북향 또는 동북향의 완만한 경사지나 평지로 바람이 적고 토심이 60㎝ 이상이며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토 또는 역질토양(礫質土壤)이 적합하다.
대나무는 생장하기 시작하여 수십 일(왕대 20~40일, 솜대 25~45일, 맹종죽 30~50일) 만에 다 자라며 자란 뒤에는 더 이상 굵어지지 않고 굳어지기만 한다. 할아버지대가 손자대를 보게 되면 그 대밭은 망한다는 옛 속담과 같이 나이 어린 대는 세우고 나이 많은 대는 벌채하는 것이 죽림경영의 기본이다.
1, 2년생은 재질이 약하여 죽재로 이용할 수 없고 5년생 이상은 그냥 두면 죽림의 손실이 크므로, 벌채연령은 3, 4년생이 적당하다. 그리고 벌채시기는 생육 중기인 10월에서 그 이듬해 2월 사이가 적기이다.
〔효 용〕 인류가 대나무를 이용한 역사는 대단히 오래 되어 고대사회의 주요한 전쟁무기였던 활․화살 및 창이 모두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산울타리 또는 주민들의 방호용으로도 재배되어 왔다. 또, 붓〔筆〕의 붓대가 바로 대나무이며, 퉁소․피리․대금 등의 악기도 대나무로 만든다.
갓대나 조릿대로는 조리를 만들고, 이대로는 화살․담뱃대․낚싯대․부채 등을 만들며, 왕대나 솜대로는 건축자재 뿐 아니라 가구․어구․장대․의자․바구니․발․빗자루․완구 등 많은 일용품을 제조한다.
그리고 땅속줄기로는 단장이나 우산대를 만들며, 대의 잎이나 대껍질은 식료품의 포장용으로 쓰이는 등 대나무의 이용도는 참으로 다양하다. 보통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걸쳐서 나오는 죽순은 향기가 좋아 밥․단자․죽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댓잎으로는 술을 빚기도 하였다.
약용으로는 왕대나 솜대의 줄기 내부에 있는 막상피(膜狀皮)는 죽여(竹茹)라 하여 치열(治熱)과 토혈(吐血)에 사용하며, 왕대나 솜대에서 뽑아낸 대기름은 죽력(竹瀝)이라 하여 고혈압에 쓰일 뿐 아니라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죽엽(竹葉)은 치열․이수(利水)․청심제(淸心劑)로 사용한다.
〔상 징〕 대는 매화․난초․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져 왔고, 특히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ꡐ대쪽같은 사람ꡑ이라는 말은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 五友歌〉에 나오는 ꡒ나모도 아닌거시 풀도 아닌거시/곳기勘 뉘시기며 속은 어니 뷔연蝎다/뎌러코 사시에 프르니 그를 됴하 悧노라.ꡓ라는 시조는 이러한 대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밭〔竹林〕은 문학작품 속에서 흔히 ꡐ은거지(隱居地)ꡑ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ꡐ죽림칠현(竹林七賢)ꡑ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이미 삼죽(三竹)․향삼죽(鄕三竹)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고, ≪삼국유사≫에는 대에 관한 이야기가 몇 편 실려 있다. ≪삼국유사≫의 ꡐ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ꡑ은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이상한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竹現陵)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으로 미추왕의 신이함을 보인 설화이다.
〈만파식적 萬波息笛〉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 왔는데, 그 산에 신기한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왕이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가 지다가도 날이 개며 바람이 멈추고 물결이 가라앉는 등의 신기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낙산사(洛山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에서는 의상(義湘)이 낙산의 바닷가에서 관음의 현신을 만나 그 계시대로 한 쌍의 대가 솟아나는 곳에다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는데 그 절이 낙산사라는 것이다.
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죽순을 구해서 부모를 보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에서 채록되었다. 이 설화는 부모를 정성껏 모시면 하늘이 돕는다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효행담이다.
ꡐ댓구멍으로 하늘을 본다.ꡑ는 속담은 소견이 좁아 사물의 전모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며, ꡐ댓진 먹은 뱀ꡑ이라는 속담은 이미 운명이 결정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담뱃대에 엉긴 진, 즉 니코틴을 먹으면 뱀이 죽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역경에 처하여 있는 사람에게 좀더 참고 견디라고 격려할 때는 ꡐ대끝에서도 삼년〔竿頭過三年〕ꡑ이라는 속담을 사용한다.
대와 관련된 민요로는 〈대타령〉․〈대나무노래〉․〈오죽대〉․〈한쌍을 치지 마라〉 등의 제목으로 채록된 민요들이 있다.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고, 대지팡이를 짚고 넘어지면 아버지가 죽는다는 속신도 있는데, 이것은 상장(喪杖)으로 대나무를 쓰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또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지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7m. 보물 제506호. 담양읍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을 따라 1㎞ 남짓 가면 넓은 평지가 전개되는데, 흔적은 없으나 절터로 짐작되는 들 가운데 이 탑이 있다.
석탑의 형태는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형성하였고 상륜부는 모두 없어진 상태로 일반형 석탑과는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지대석(地臺石)은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고 그 위의 기단면석에는 중앙에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1개, 양쪽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새겨졌는데, 특히 기단부 높이가 다른 오층석탑들에 비하여 매우 낮게 조성되었음이 특이하다.
기단부의 갑석(甲石)은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면석의 높이에 비하여 두꺼운 편이며 그 밑에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다. 갑석 윗면 중앙에는 일반형 석탑과 같이 1단의 높직한 굄을 마련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으나, 기단부 갑석의 넓이가 초층의 옥개석 넓이보다 좁은 점이 특이하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과 옥개석 사이에 굄을 딴 돌로 마련하여 옥신을 받고 있는 것도 이형에 속한다.
초층 옥신은 다른 조식이 없이 양쪽에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두꺼운 편이며 처마는 경사지고 전각(轉角)에 이르러 가벼운 반전을 보인다. 각층 옥개석 네 귀퉁이 전각부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옥개의 처마 밑은 수평이고 옥개석 받침은 5층까지 모두 3단인데, 3단씩의 옥개받침에 있어서 상하 2단은 각형(角形)이나 중간의 1단은 호형(弧形)을 이루었고 크기도 상단이나 하단보다 커 보인다.
이와 같은 각형과 호형의 혼재는 시대가 떨어짐과 동시에 충청남도와 호남지역의 백제계열 석탑 받침부를 연상하게 한다. 탑신부의 높이는 2층 이상은 알맞게 체감되어 안정감을 준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기단부 면석이 낮은 데 반하여, 초층 옥신이 높아 고준한 감이 있으나 각 부분의 체감률이 적당하여 석탑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당간. 높이 15m. 보물 제505호. 장방형의 단층으로 된 기단 위에 건립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기단의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과 조각이 없으며, 정상면 중앙에는 장방형으로 된 1단의 굄을 마련하여 당간대좌와 양 지주를 받게 하였다.
지주는 방형의 돌기둥으로서 약 80㎝의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서 있는데, 아랫부분은 기단 받침대 안에 묻혀 있어 자세한 구조를 알 수 없다. 당간은 가늘고 긴 8각 돌기둥 3개를 연결하였는데 그 위에 원형의 당간을 올려 마디의 표식이 뚜렷하다.
8각 돌기둥의 연결방법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위아래 돌의 이어진 부분을 반으로 깎고 중간석의 양끝을 또 반으로 깎아 서로 밀접시킨 다음, 각기 철제고리를 돌려서 더욱 단단히 고정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결부분에는 위아래로 원형의 간공(杆孔)을 관통시켜 더욱 고착을 돕고 있다.
당간의 위 끝부분에는 금속제의 보륜(寶輪)이 이중으로 장식되고 풍경(風磬)과 같은 장식이 달렸는데, 현재는 2개가 남아 있다. 맨 꼭대기에는 삼지창(三枝槍)과도 같은 뾰족한 철침(鐵針)이 솟아 있어 피뢰침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부속물들을 고찰하여 볼 때 이 당간은 장식적인 유구가 잘 남아 있는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당간의 바로 옆에는 석비(石碑)가 하나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이 석당간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ꡐ大風折以木代立(대풍절이목대립)ꡑ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큰 바람에 넘어진 것을 1839년(헌종 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의 뒷면에는 유사(有司)․호장(戶長)․읍리(邑吏) 등의 여러 이름이 오목새김되어 있어 이 석비의 건립관계자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오층석탑이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임을 감안할 때 이 석당간도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6-寶物 4-(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13. 미암일기(眉巖日記)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유희춘(柳希春)의 친필 일기초(日記草). 11책. 행․초서체. 보물 제260호. 매 책마다 크기가 다르나 평균 39.5×31.5㎝이다. 원래는 14책이었으나 실본으로 11책이 남아 있다. 그 일기의 일부는 필자의 문집인 ≪미암집≫에 초록, 기재되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 그가 죽기 전일까지의 약 10년 동안의 친필로 쓴 일기이다. 약자․속자가 간혹 사용되었고, 오탈(誤脫)과 연문(衍文 : 쓸 데 없는 글)이 간혹 개재해 있으며, 중간에 파손, 마멸된 자구와 약간 빠진 것도 있다.
명종 말 선조 초의 여러 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 생활, 본인이 홍문관․전라도감사․사헌부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사회․경제 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각 책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제1책은 1567년 10월 1일에서 1568년 3월 29일까지, 제2책은 1568년 3월 29일에서 12월 5일까지, 제3책은 1569년 5월 22일에서 12월 30일까지, 제4책은 1570년 4월 24일에서 7월 8일까지, 제5책은 7월 9일에서 12월 25일까지, 제6책은 12월 26일에서 1571년 12월 3일까지가 기록되었다.
제7책은 1572년 9월 1일에서 1573년 5월 26일까지, 제8책은 1573년 6월 1일에서 12월 30일까지, 제9책은 1574년 정월 1일에서 같은 해 9월 26일까지, 제10책은 1575년 10월 27일에서 1576년 7월 29일까지를 기록하였다. 제11책은 부록으로서 저자와 그 부인 송씨(宋氏)의 시문과 잡록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이다. 따라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며, 이이(李珥)의 ≪경연일기 經筵日記≫와 함께 ≪선조실록≫의 기사 사료가 되었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임체(任遞 : 부임과 교체)와 순력(巡歷) 및 감사의 직무 수행,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의 조직과 운영, 중앙 관료와 지방관과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1936~1938년에 5책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 제8로 두주(頭注)․방주(旁注)를 곁들여 간행한 바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