壽令이 1600년 된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1990년대 초반에 태풍으로 부러져
현재는 밑동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예로부터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이자 대표적인 당산나무!
임진왜란 때에는 영규대사와 많은 승병들이 모여,
이 나무 밑에서 금산벌 전투를 위한 작전을 세우기도 한
호국불교를 증거하는 신수(神樹)!
천년고찰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서기 4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통일신라 의상대사가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종 10대 사찰로 번창했던 명찰이다
충남에서는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봄에는 마곡사의 신록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갑사의 단풍이 아름답다는 의미다.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은 쌀개봉으로 기운을 저하고
쌀개봉은 북으로 꿈틀대며 올라가 관음봉(816m)을 만들고
거기서 용맥은 서쪽으로 내달아 문필봉(756m)을 거쳐
마침내 연천봉에서 마지막 기맥을 일으키곤 비로소 멈춘다.
즉 연천봉이 천황봉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용맥이 완성되는 것이다.
손자가 할아버지와 마주보고 교감을 하는 형국이니 그 기운의 팔팔함을 새삼 말하면 무엇하리요!
계룡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800m급 해발이니까 웰터급 정도 높이지만 펀치는 헤비급의 강도를 지니고 있다.
산 전체가 통바위로 되어 있어서 펀치가 세다.
조각난 바위보다는 통으로 된 바위산의 자기장이 강하기 마련이다.
자기장이 강한 산에는 무당, 도사, 승려가 많이 모여든다.
특히 계룡산의 연천봉(連天峰) 꼭대기 바위에는 조선왕조를 경멸하고 혐오한 반체제 도사 또는
승려들이 남긴 암각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계룡산은 이씨 조선을 반대하고 정씨(鄭氏) 조선의 도래를 갈망했던 ‘정감록파(鄭鑑錄派)’의 근거지가 되는 산이었던 것이다.
연천봉 꼭대기에 새겨진 문제의 암각 글씨는 ‘方百馬角 口或禾生’이다. 방백마각 구혹화생. 이게 뭔 뜻인가?
메시지 내용은 전달하되 아마추어는 알아볼 수 없고 ‘선수’들만 의미를 알아차리도록 코팅 처리한 것이 풍수 도참이다.
그래야만 부작용이 작고 더 신비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방백마각 구혹화생은 그러한 코팅 처리의 전형이다.
내용인즉슨 조선왕조는 건국한 지 472년 만에 종말을 맞는다는 메시지다.
방백은 네모진(方) 백(百)이라는 뜻이다. 400이라는 숫자가 도출된다.
마(馬)는 자축인묘진사오미로 세어가면 오(午)에 해당한다.
오(午)가 말[馬]이다. 오(午)는 십이지 가운데서 일곱째에 해당한다.
각(角)은 뿔이다. 뿔은 대개 2개다. 마각(馬角)은 72다. 따라서 방백마각은 472년이 된다.
‘口或’을 결합하면 國(국) 자가 된다. ‘禾生’을 결합하면 옮길 ‘移(이)’ 자로 통용된다.
구혹화생을 해석하면 ‘나라를 옮긴다’가 된다. 조선이 472년 만에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긴다는 의미다.
조선왕조가 세운 지 472년 만에 망한다는 저주가 묻어나는 묵시록은 엄청난 반란죄에 해당한다.
체제의 탄압을 받은 쪽에서 보면 혁명과 희망의 염원이 어려 있는 예언 아니겠는가!
조선왕조는 1392년에 창업해 1910년에 망했다. 518년이다. 안 맞지 않는가?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 기록된 연도를 계산해 보면 472년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의 기록이다. 1392년에서 철종대인 1863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왕조실록 계산으로 따지면 471년이고 1392년 당해 연도 기록까지 포함하면 472년이 성립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씨 왕조의 등장을 막아보려고 민비 쪽에서도 연천봉에다가 역(逆)공작을 시도하였다.
정씨를 누른다는 압정사(壓鄭寺)를 세웠지만 왕조는 결국 종말을 맞았다.
-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박사의 2022년 2월 14일자 칼럼 스크랩 -
연천봉 정상의 암반이 영발의 산실이다.
수많은 무당과 조선시대의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했던 도사들이 연천봉을 사랑했다.
펄펄 끓는 압력밥솥이었다고나 할까.
실제 연천봉 정상 암반에 있으면 기운이 찡 하고 들어온다.
발끝에서부터 척추뼈를 타고 뒷덜미를 거쳐 머리를 돌아 코까지 내려오는 에너지를 느낀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면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아 놓아야 한다.
이 연천봉 암반은 그 콘센트이다.
음력 보름날 전후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무속인들이 연천봉 암반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거나
기도를 드린다. 1m 차이로 자기에게 기운이 들어오나 안 들어오나를 체크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도 벌어진다.
-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박사의 '영지 순례'_2020년 4월 23일자 발췌 -
등운암의 유래는 부설거사의 아들 등운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이름을 지었는데 ,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불교사의 3대 거사로 꼽힌다.
신라 진덕여왕때 경주에 사는영특한 아이 진광세가 있었다.
불국사에 출가하여 부설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도반인 영조·영희 두 스님과 의기투합해 각지를 돌며 치열하게 정진했다.
오대산을 가던 중 구씨의 벙어리 외동딸 묘화가 그를 보고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죽기를 다하여 인연을 맺고자 원하여 자비보살 마음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등운과 월명 男妹를 두었다.
이제 더 이상 부설은 스님이 아닌 거사였다.
하지만 삭발염의를 하지 않았다고 정진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남매가 성장하자 거사(居士)는 병(病)이 있다는 거짓 핑계로 서해(西海) 백강변(白江邊)에
초려(草麗,초가집)를 지으니 이 곳이 망해사(望海寺)이다.
그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겠다는 결연함으로 면벽과 묵언수행을 이어갔고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영조·영희 두 스님이 옛 벗이었던 부설거사를 찾아왔다.
거사는 그들을 보는 순간 미혹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간파했다.
그는 옛 도반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에 내기를 제안했다.
물이 든 병을 들보에 매달아 막대기로 내려쳐서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두 스님은 의아해하면서도 부설거사의 말을 따랐다.
그들이 내리친 병은 깨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설거사의 병은 깨졌지만 물은 그대로였다.
충격을 받은 두 스님은 더욱 발심해 정진해 깨달을 수 있었다 한다
훗날 아들 등운은 계룡산 등운암, 딸 월명은 내변산 월명암을 창건하였고,
묘화부인은 장흥 가지산 보림사로 옮겨가 맹렬수도 끝에 성불했다고 전한다
등운암에서 바라보면 우선 약간 오른쪽 정면으로
계룡산 제1봉인 천황봉845m)과 제2봉인 쌀개봉(830m) 능선이 눈 앞에 다가오는데
그 기세가 장엄하면서도 수려하다
마치 장성과도 같은 석벽 봉우리 들이 병풍처름 이 터를 향해 있는데
짱짱한 바위 기운이 그대로 쏘아져 몰려온다
참으로 그 맛이 일품인 것이다
풍수가들은 계룡산을
산태극과 수태극이 어우러진 천하명산이라며 찬탄한다
백두대간이 내려오다 덕유산에서 대둔산을 거쳐
계룡산으로 이어진 산맥이 태극 형상이라는 산(山)태극설과,
계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갑천-금강으로 이어지며 태극 형상을 띤다는 수(水)태극설이다.
이 태극의 중심이 계룡산 아래 신도안(新都安)이다.
"자연성릉에서_신영철 대장님, 국공 직원을 비롯한 출연한 스텝들과 함께(2013년 2월 15일 컷)"
한국 불교에는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이름의 독특한 수행처가 있다.
밥이 드나드는 구멍만 남기고 출입문까지 자물쇠로 채워 봉쇄한 방이다.
이 무문관을 처음 만들고, 그곳에서 면벽수행을 한 이가 제선이다.
바로 서울 도봉산 미륵봉 기암 아래 숨어 있는 천축사 무문관이다.
대리석으로 지은 3층 집으로 지금은 시민선방으로 쓰고 있다.
제선 스님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일본에 유학했다.
오사카 시내에 사는 삼촌 집에 들르면 늘 반겨주던 개가 있었다.
이 개가 병이 들자 삼촌이 시키는 대로 교외에 내다버렸다.
도쿄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어 숨을 거뒀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전국 유람 길에 나섰다.
한 번은 죽기로 작정하고 금강산 봉우리에서 몸을 던졌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깨어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리산 산청의 토굴에서 21일간 기도를 했다.
그 마지막날 비몽사몽간에 아들과 상봉한다.
너무 반가워서 쫓아갔는데 아들이 개로 변하는 것 아닌가.
일본에서 버린 개였다. 개가 아들로 태어나 온갖 애를 태우고 떠난 것이다.
그는 ‘인과응보’의 도리를 깨닫고 출가를 결심한다.
그는 1937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혜천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스님이 된다.
그와 동갑이었던 혜천 스님은 이미 ‘지리산 도인’으로 유명했다.
제선은 오대산 상원사, 논산 관촉사, 남해 보리암, 도봉산 망월사 등에서 깊은 수행을 했다.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얼마나 힘을 갖췄는지 테스트 해보자’며 화장(自火葬)을 시도하기도 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가 깊은 화상을 입고 만다.
제선은 ‘출가 도반’인 천축사 주지 정영 스님을 설득해 무문관을 세운다.
1965년 그는 부처님의 설산고행(雪山苦行)을 쫓아,
6년을 작정하고 한 평 방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폐관정진(閉關精進)에 들어갔다.
제선은 “부처님과 같은 실제 힘을 기르기 전에는 나서지 않겠다”며 스스로 지독한 독방 감옥살이를 했다.
제선과 함께 무문관에 든 수행자는 6명이었다고 한다.
제선 스님은 1971년 5월5일 약속했던 6년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끝마쳤다.
당시 기한을 다 채운 이는 제선과 뒷날 직지사 조실을 지낸 관응 스님(1910~2003)뿐이었다고 한다.
언론사들이 앞다퉈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무문관을 나오자마자 점심 공양을 한 뒤 사제인 혜원 스님의 배웅을 받고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조카상좌 일화 스님만 데리고 부산으로 간 제선 스님은 홀로 여수행 배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의 도반과 제자들이 전국으로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제선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산 스님 등 제선문도회가 펴낸
<무문관 수행의 전설, 석영당 제선선사>(비움과소통) 이야기다.
불교신문사 박부영 기자가 여러 증언들을 발굴·취재해 제선의 삶과 구도행각을 재구성했다.
무문관 수행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만큼 혹독하다고 한다.
모든 것을 내던져 ‘깨달음’을 얻겠다는 각오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다.
1972년 시작된 제2차 천축사 무문관 수행에서도 구암·원공 스님만 6년 기한을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요즘 천축사 수행을 따르려는 또 다른 무문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제선과 함께 천축사 무문관을 열었던 정영 스님이 1983년 개설한
공주 갑사 대자암 ‘삼매당’에 이어 1994년 제주 ‘남극선원’, 1998년 설악산 백담사 ‘무금선원’,
2004년 천성산 조계암, 2005년 경주 감포의 무일선원이 무문관 수행을 시작했다.
요즘은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도 세상과의 ‘자기 단절’을 통해 ‘참다운 자기’를 찾는
무문관 수행을 들어간다. 이래저래 ‘전설’의 옷을 벗고 새롭게 주목받는 제선 스님이다.
첫댓글 20대에 걸었던지라 가물한 계룡산 풍경입니다
이제 만추로 들어서는듯한 풍경이네요
허접한 앨범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서!
20대에 걸었던 추억을 소환해주신 여운이님께 감사드리며,
함께하는 산길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모처럼 답사한 갑사에서 동학사로의 단풍길이 예전만은 못하더이다.
높이는 낮지만 웅장한 계룡산행을 함께 할수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뒤늦은 답글을 드림에!
야단치진 않으시리라~ㅎ
의미가 크고
쏠쏠한 인문기행길에
동행해주셔서
감사드림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