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간이역 등에 관한 시모음 1)
사라진 역 /우대식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여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역을 폐쇄했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서울역 /주원익
광장에서 종소리가 열리다
우리는 다만 손상되고 마모되면서 여기 도착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
우리는 낡은 구두를 신고 아주 서서히 사라지는 폐허를 산책한다.
잿가루 날리는 경전처럼 눈이 그친 하늘
고철 불덩이 떨어지는 시가지 경비견들이 밤새도록 하얗게 짖어대고
물소리 끊어진 그곳에서 열차가 떠나면
폐허 위에 집을 짓는 우리의 잠 속에서
런던, 도쿄, 서울, 베를린, 라싸, 스톡홀름의 하늘이 흐른다
흐르는 별빛, 흐르는 강들, 우리는 물질의 꿈을 깨부수고
차디찬 돌덩이들이 암흑처럼 떠오른다
우리는 다만 벽돌을 쌓고 문을 내면서 서울을 통과하는 꿈을 꾼다
세계는 금빛으로 하늘 지붕들을 감싸고
깨어나면 우리는 다만 손상되고 마모되면서 벽을 쌓고
문을 연다
다시 석정역* /김정호(美石)
더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엇갈린 운명이라도
차마 네 곁을 떠날 수가 없구나
이런 우리 가난한 사랑도
가다 쉬어갈 수 있는
간이역이라도 있으니
그래도 행복하지 않느냐
사랑한다고 말 한 마디 못했지만
이별과 만남이 머무는 곳에
더 아픈 사랑도 수없이 보지 않았느냐
언젠가는
녹슨 세월의 길목에 서서
뜨거운 눈물 흘리며
죽기 전 한 번은 이루어 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이라고
그 때까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만
이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전남 화순군 춘양면에 소재한 간이역(경전전)
간이역 /김이진
열차가
잠시 쉬어가듯이
나도 쉬어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삶에 지친 심신을
가을햇살에 맡기고
그렇게 잠들고 싶다
아프다
몸뚱이도
지친 마음도
밤새 울어대던 바람처럼
그렇게 신음소리를 낸다
도려내야한다
썩어 곪아 터지는 그곳에
메스는 숨을 죽이고 있다.
기차역 /강보철
오늘도
사람들은 길을 떠나고
오늘도
사람들은 돌아오고
가느다란
두 개의 선 위로
기차는 오고 간다.
기차
사람들을 삼키고
기차
사람들을 내뱉고
하루를 집어삼킨다.
꿀꺽
연천역의 오월 /草岩 나상국
오월의 어느 한날
연천역에는 나풀나풀 하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기차 안손님들
입에서는 배꽃향이
한잎 두잎
하얗게 쌓이어갑니다
하얀 배꽃이
꽃눈이 되어
철길을 따라서
훨훨 날아다닙니다.
그날
산에는 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이슬비에 옷 젖는다고
이내 이슬비에
옷이며 배낭이며
천근만근의 무게로
젖어듭니다
비가 내리는 산중엔
모두가 떠나가고
그 빈 골짜기마다
깊이깊이 침묵이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낮에도 꽃이 피고 지는
산속엔
밤이면 멧돼지 노루 고라니 토끼가
뛰어놀고
뻐꾸기도 울어대는
오월이면 고사리 고비 취나물 다래 순
산나물도 지천입니다
저물어 가는
연천역의 하늘엔
하얀 배꽃이 눈송이처럼
날리어 쌓이어 가고
사람들은 하얗게
눈을 밟으며 서둘러
기차에 오르며
연천에서의 하루를 싣고
떠나갑니다.
오월의 어느 한날
연천역에는
하얀 눈이 배꽃 향으로
내립니다.
수색역 /이병률
복잡한 곳일수록
들어갈 때 구조를 외우면서
나올 때를 염두에 둡니다
재채기를 할 때 얼른 양손이 나서는 것처럼
모든 순서가 되었습니다, 당신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당신이 산다고 했습니다
그 역의 막차 시간 앞에서 서성거리다
추운 그 역 광장에
눈사람 만들어 놓고 왔습니다
종착역 /김환식
버림받은 자식들이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겨누고 있다
수족은 모두 휘어 있고
성한 관절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도 한때는
거뜬히 한 생을 건사했을 것이지만
이젠 삶의 무대에서 퇴출된 것이다
생각이 어긋나듯
모서리가 뒤틀린 창문들이며
자유롭게 찢어지고 구멍 난 판자 조각들이
켜켜이 목숨을 퇴적시켜 놓았다
햇살은 정오의 경계를 무단 침략한 채
삼켰던 그림자를 다시 길게 토설해 내고
잘게 가슴팍을 부순 거울 조각들도
날카로운 송곳이를 드러낸 채
고단했던 일상을 반추하고 있다
삶이란
유물처럼 쌓이면 매장되는 것이란 것을
지천명을 넘기 전에 알았더라면
선량한 당신의 가슴을 난자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측은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그믐밤처럼 적막하다
신기루에 눈이 멀었던 세월 때문일 것이다
삶의 종착역도
하나의 거룩한 허상일지 모른다
넓은 고물상 마당에는
앞뒤없이 뒤엉킨 흉상들이
서로의 임종을 모질게 지켜보고 있다
추전역 /오세영
세속도시를 버리고
등고선을 좇아 높이 높이 올라왔나니
활엽수림대(闊葉樹林帶)를 지나서 침엽수림대(針葉樹林帶)를 지나서
숨가쁘게 달려온 한 생
드디어
하늘의 문턱을 넘는다.
이번의 정차 역은 하늘역
잊지 말고 내리자.
아차 놓치면 다시 돌아가는 지상은
슬픈 열대(熱帶),
내 여기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가. 추전역
허공에
무지개를 하나 끌어와 다리를 놓고
구름밭을 다져 레일을 깔았나니
한 생이 가는 길은 여로(旅路)
하늘 가는 티켓 하나 덜렁 사서
야간 열차에 오른다.
아, 태백준령(太白峻嶺),
그 빛나는 태양 아래 문을 연
천제단(天祭壇) 입구의 그 추전역.
군산역에서 /신성호
새만금 넓은 바다 위에
꿈꾸던 첫사랑의 노래는
푸른 파도를 타고
군산항 부두가에 닺을 내린다
뱃고동 소리에 춤추는
바다 갈매기는 신이 나고
푸른물 출렁이는 금강 하구둑에서
오똑 솟은 오봉산을 바라보니
힘차게 달려가는 열차소리에
산기슭 노닐던 산노루도 내달린다
가슴 아픈 이별도 있다만은
못견디게 그리운 만남도 있으려니
언제나 변함없는 그 사랑으로
오늘도 희망찬 군산역이어라
폐역(廢驛) /신경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초저녁
여인숙 입구에 새빨간 새알 전등
급행열차가 쉴새없이 간다
완행도 간간이 덜컹대며 지나다가
생각난 듯 기적을 울리지만
복덕방에 앉아 졸고 있는
귀먹은 퇴직 역장은 듣지 못한다
멀리서 화통방아 돌아가는 소리
장이 서던 때도 있었나 보다
거멓게 썩은 덧문이 닫힌 송방 앞
빗물 먹은 불빛에 맨드라미가 빨갛다
늙은 개가 비실대며 빗속을 간다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없다
양평역 /김기월
기차는
마음을 싣고
푸른 하늘을 가르며
들판을 가로질러
풀꽃 향기 가득한
양평의 품속으로 달려갑니다.
연밭에 피어난 향기 설렘으로 다가오고
널따란 들판 위 자전거는 신바람을 냅니다.
하늘과 강물이 친구 되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흐르다 만나는 곳
산모퉁이 돌아
이름 모를 꽃들이
싱그런 산들바람으로
다가와 인사를 하면
목 길게 빼고
그리움이 마중 나오는 양평역으로
기차는 바람처럼 달려갑니다.
간이역 /김수영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부드러운 능선 위로
갑자기 쏟아지는 붉은빛
어디까지나 파고드는 고요함
녹슨 철길에 뻗는다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
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
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오르는 뭉게구름
기차를 기다린다
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
길 위가 편안하리라
서울역 /김기월
사람들이 오고가는 플랫폼
각양각색의 모습들
떠나는 사람 슬픔으로 이별하고
만나는 사람 반가움으로 맞이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걸까
어디로 떠나고 시픈 걸까
오고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 혼자만이 길을 잃엇네
초점 잃은 눈으로
찾는 것은 추억이다
구둔역에서 /목필균
마지막 기차를 떠나보내고
기찻길은 바람의 놀이터가 되었다
까까머리 단발머리 학생들
보따리장수 어버이들 태우고
긴 세월 수없이 오가던 구둔역에
중앙선 따라 요금표만 붙어있다
역장도 역무원도 없이
8877열차가 정물로 서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졌다
철길 따라 흘러가는 노래들
말줄임표가 아닌 마침표의 끝
구둔역엔 바람만 철길을 타고
흘러간다
서울역 /권미영
서른 해 남루했던
삶의 단편을 퇴고하고
상경했던 그해 겨울
연하장 같은 하얀 눈이
새해 인사처럼
우편함 속에 날아들고
첫눈 내릴 때
서울역에 가면
첫사랑을 만난다 했던가
개찰구가 토해내는
인파 속에서 우연처럼
서성이며 너를 기다렸고
때론 사랑에 불시착한 연인처럼
우리는 잠시 머물다
기차에 오르고 또는 내리고
그리움처럼 첫눈이
서울역에 모여들면
보내지 못한 한 마음이
오랫동안 대합실을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