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개공(五蘊皆空)'은
'오온은 다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라는
뜻으로 옮기기도 하고,
'오온이 다 비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오온'은 다섯 가지 '온(蘊)'을 말합니다.
흔히 알고 있는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이죠.
'오온개공'은
반야심경의 핵심 중 하나로,
'오온이 모두 공적함을 밝게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뜻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 一切苦厄)'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온개공'의 이치는
'나'라는 것에도,
주변에서 보는 물체에도
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모든 인식이 생기기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무념(無念)이며,
이 무념의 상태가 지속되면
줄탁동시가 되는 어떤 한 순간에
“지혜의 완성”이 성취되어
무명의 벽을 무너뜨리고
견성성불하게 된다고 합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반야 심경 오온
오온이 공하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오온이 공(空, Śūnyatā)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과 재액에서 벗어났느니라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공'은 미묘한 뜻을 갖고 있으나,
일차적인 뜻은 '없음'이다.
2019. 1. 21.
오온개공(五蘊皆空)
눈먼 아이가 본 풍경
반야심경 이야기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반야심경의 첫 대목을 보면
'조견오온개공
(照見五蘊皆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조견'이란
말 그대로 '비추어본다'는 뜻입니다.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비추어본다'고 하니
뭔진 몰라도 뭔가 색다르게
보는 방법인가 봅니다.
'오온개공'이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오온'이 '모두 텅 빈'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오온'은 또 뭘까요?
그게 뭐기에 모두 사라져
텅 비게 되었다는 건가요?
'오온'은 있어야 좋은 건가요,
없어야 좋은 건가요?
아무렴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께서
정신 건강에도 안 좋은 걸
체험해 보겠다고
'깊은 반야바라밀 수행'에
빠지셨을 리는 없겠지요?
오온은 다섯 가지 '온(蘊)'을 말합니다.
흔히 알고 있는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이죠.
<색·수·상·행·식>이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하지요.
그럼 '온(蘊)'은 또 뭔가요?
한자 사전을 찾아보니 '쌓을 온'자라고 하네요?
뭘 잔뜩 쌓아놨는데
그 내용물에 따라서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는
말인가 봅니다.
<일반쓰레기>, <캔>, <종이>, <유리>, <플라스틱>...
뭐 그런 거겠죠.
(갑자기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나오는 'X덩어리'가 생각나네요. 약간은 연관도 있을 듯... ^^;;)
암튼 '온'은 좋은 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우리와 세상 사이에
이놈의 <오온>이 끼어들어
온갖 왜곡질을 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여(如如)'하게 세상을
체험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눈·귀·코·혀·몸·의식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세상'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오온에 의해) 오염되어버린다는
것이지요.
(우리 상식과는 달리
'빗물'은 가장 깨끗한 물이라고 해요.
지상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오염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런 오염된 식자재를 우리 마음속에서 아무리 지지고 볶고 썰고 다듬고 양념해 봐야
오염되기 전에 '있던 그대로'의 청정하고 순수한 맛을 볼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산속에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사랑'이 묻어있는
'색온'으로 산을 내 마음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겠죠.
그런 다음에 <수·상·행·식>으로 이리저리 요리해서 먹어보고는 그 체험 결과를
다시 <색> 금고에 저장을 합니다. (훈습)
그렇게 <오온>은 뺑뺑이 돌며
점점 더 많은 <오온>을
쌓아만 갑니다.
어떤 이들은
'색'은 물질세계를 의미하고,
'수·상·행·식'은 정신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오온은 모두 우리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과정들입니다.
(모든 종류의 감각·지각·인식
기능을 포함합니다.)
오온이 모두 사라지고
텅 빈 상태에서 느끼는
바깥세상 모습은 어떨까요?
그야 체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겠죠.
체험해 본 분들은 아무 생각 없이도
'명명백백하게 모든 걸 아는'
크나큰 지혜가 생긴다고 하네요?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우리의 의식은
무한히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이른바 '반야'의 경지입니다.
어떤 의식의 조작도 없이(무위·無爲)
외부 존재를 순수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직관'의 세계라고 합니다.
(서양철학에서도
그 존재의 가능성은 알았지만,
실존을 증명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이르는 현실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순수직관'.)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오로지 '선禪'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술가들이 흔히 체험한다는
그 직관의 세계도 알고보면
'순수직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들은 오온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
더 큰 오온 덩어리를 갖고 있는
예술가도 많습니다.)
세상과의 경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설사 세상과 내가 접촉하는
경계점까지 다가가서
바깥세상을 본다고 해도
이미 '색온'에 의해 오염된 상태로
입력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뿐이죠.
그것은 오온이 텅 빈 '순수직관'과는 다른 것입니다.
단지 <행.식>등에서 이루어지는
<오성.이성.반성>의
과정을 제거하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다가가 좀 더 근원적인 감성적 체험을 하는 '직접지각'에 불과합니다.
예술적 창작 행위가
감각·지각·감성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합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성·오성·이성·반성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술이 순수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그런 모습의 '자연'은
스스로의 원리에 따라
변할 수는 있어도
'창작'하지는 않습니다.)
감수작용(외부세계를 받아들이고 느끼는 작용)을 담당하는 <수온(受蘊)>의 결과물은
<좋음>, <싫음>, <좋지도 싫지도 않음>의 세 가지로 나타난다고 하죠?
그점을 생각해 보면
예술은 감각기관은 커녕
<수온>의 울타리조차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얘기가 너무 딱딱하죠?
재밌는 이야기로 바꾸어 봅시다.
세상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경로는
6가지(눈·귀·코·혀·몸·의식)이라고 합니다.
(眼耳鼻舌身意)
그중에서 우리 의식을 가장 강렬하게
지배하는 <눈>에 대해 함 살펴볼까요?
제가 '오온개공'을 생각할 때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런 일러스트나 만드는 짓은
'수행'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
이런 생각놀이(희론)는
번뇌의 종자가 된다고 합니다만...
누가 또 압니까?
<한 생각 돌이키면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데
숙취에서 깨어날 때
한 순간이라도 '오온'이 몽땅 사라지고
'텅 빈' 찰나를 경험하게 될지요. ^^;;
그림 내용이 너무 단정적이죠?
제가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얻고 와서
진리를 전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런 모델로 <시각인식과 오온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저 밑에 무시무시한 '아뢰야식'이 보이죠?
저놈이 아주 중요한 놈입니다.
컴터로 말하면 '하드디스크' 내지는 데이터베이스(Database) 같은 것이죠.
우리가 살아생전에 체험하고 행하는 모든 '업(카르마)'이 아뢰야식에 저장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바깥세상을 받아들일 때
오온으로 작용하여 이리저리 실상을 왜곡하고
우리 마음을 조작합니다.
아뢰야 DB 속에 <명색(名色)>이 있습니다.
<명>은 '키워드'고 <색>은 '속성정보'지요.
이 <명색>을 가지고 외부세계를 비추어보며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허상을 만들거나 본성을 왜곡시킵니다.
DB를 잘 구축해야지 이게 엉망이 되어버리면 정신 세계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궁극적 목적인 해탈은 아뢰야 DB를 초기화시켜 텅 비게 만드는 것이죠. ^^)
육신이 죽게 되면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8가지 마음 중에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 5가지 마음과
'의식'이라는 마음과
'말나식'이라는 마음은 소멸해서 모두 사라지지만
저놈의 아뢰야식만은 하드디스크로 남아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아뢰야식 하드가 우리 몸뚱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무선 통신으로 연결되어 영계에 설치된 '원격 하드'란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뢰야 하드에서 그 내용에 따라 '업장(業場)'의 전파를 발생시킵니다.
그 전파의 질에 따라 가장 적합한 '새로운 컴퓨터'가 배정되어 생산라인에서 조립된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새 컴퓨터를 부팅하면
아뢰야 하드에 저장된 데이터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물론 그 사실을 새 컴퓨터는 전혀 모른다고 하지요? ^^
('전생' 소프트웨어를 돌리면 아뢰야DB에 있는 내용을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얘기가 한참 빗나갔는데 암튼,
관자재보살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 수행으로
저 오온이 텅 빈 상태를
비추어 보셨다는 겁니다.
이렇게요.
<오온개공의 상태에서 '비추어봄'>
(색에도 두 종류가 있어서 '유표색', '무표색'으로 나뉘는데 머리아픈 얘기는 담에 하기로 하죠? ^^;;)
오온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사진>과 우리 <눈(eye)> 얘기 좀 해볼까요?
사진을 배우게 되면
우리 인간의 눈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갖게 되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눈의 망막에 비친
세상 모습은 어떨까?"입니다.
우리 망막은 화소수(해상도)는
얼마나 되고 색상은 몇 가지나
인식하고 촬상면
(상이 맺히는 곳. 필름/CCD/CMOS) 크기는
얼마나 되고....
카메라에 비유하자면 필름에 해당되는
우리 눈 망막에 비친 세상 모습.
과연 어떨까요?
<우리 눈의 '망막'에 비친 세상 모습>
ㅎㅎ 못 믿겠죠?
하지만, 어쩝니까. 그렇다는데.
이건 뭐 컬러 사진도 아니고 흑백 사진도 아니고...
초점은 일부만 선명하네요.
시꺼멓게 된 부분은 또 뭐죠?
누가 눈동자에다가 껌을 붙여놨나요?
아하, 이른바 '맹점(blind spot)'이군요.
우리 망막에는 빵꾸난 부분이 있지요.
(근데도 우리는 전혀 빵꾸난 걸 못 느끼지요?
우리 뇌는 그곳을 무슨 내용으로 메꾸었길래
멀쩡하게 보이는지...)
맹점에 관해 궁금하시면
제가 5년 전에 올렸던 포스트 <뇌는 최첨단 뽀샵 프로그램>을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왜 제 눈에는
위의 사진처럼 보이지 않고
아래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거죠?
<'본다'고 느끼는 이미지>
ㅎㅎ 그건 우리의 육안(肉眼)이 '보는' 게 아니고
우리 심안(心眼)이 '느끼는' 것입니다.
육안이 보는 것(망막에 비친 상)과
똑같이 볼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만
비슷한 느낌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한 곳에 시선과 초점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절대로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만 주변을 느끼면
그게 실제 육안에 비친 모습과
어느 정도 느낌이 비슷합니다.
어느 한 순간(찰나)에
우리가 실제로(육안으로)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은 장면 전체가 아니라
아주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세상 모습을 찍는 것도 아니고
망막에 비친 장면을 찍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심안이 보고(느끼고) 있는
심상(心象)을 찍는 것입니다.
심안은 바깥세상에서 들어오는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느끼는 게 아니라
오온이 생산해내는
여러 가지 <관계>로부터
느끼는 것입니다.
오온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심안에 비친 심상도 모두 다릅니다.
나의 심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서
선글라스 빌려주듯이
나의 '오온'을 빌려줄 수는
없는 법이기에
내 '심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줘야 하지요.
문제는 내 심상을 만들어낸
구체적 '요인'들이
바깥세상 풍경의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면 전체를 몽땅 사진에 담아 버리면
이상하게도 같은 심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강렬했던 찰나의 심상이
바닷물 어디엔가 빠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죠.
내가 보았던 실제 심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이것이었을까요?
대충 정리해 보면,
1. 카메라에는 심안이 없습니다.
2. 인간의 육안은 사람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3. 인간의 심안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4. 사진은 심안이 본 것을 담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