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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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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자유토론방 충경공 류형(柳珩) 장군의 묘를 참배하면서 갖는 의문 몇가지 ...
장문포 추천 0 조회 154 24.02.22 11:57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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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선무원종공신록에는 병사(兵使) 류형(柳珩)으로 기록되어 있군요.
    나중에 행주산성에 들리면 둘러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작성자 24.02.22 22:51

    예, 행주산성 인근 행신역에서
    번데미공원까지 도보로 10분 거리입니다.

  • 24.02.22 15:10

    여수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 돌을 류형 장군께서 황해도 병마사로 갔을때 압록 강 줄기 준비해 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순신관련 가장 큰 대첩비였고 이순신장군 비석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본인의 비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이순신장군을 존경한분입니다.

    이순신장군을 잘 따르기도했고 노량해전때 총탄에 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이순신장군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싸움을 지휘 및 승리하는데 일조를 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류형장군은 5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기도한분입니다.

  • 작성자 24.02.22 22:52

    5대 삼군통제사...
    누구 말마따나 충무공의 후계자란 말도 있던데...
    그럴만도 하네요, ㅋ

  • 24.02.23 23:55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돌은 류형이, 대첩비 경위를 적은 동령소갈(비석)은 류형의 증손자 류성채가 세웠고...여수의 섬 횡간도에 가면 각석문이 남아 있는데 "節度使柳星彩.軍官折衝廉奇鐸安海宇.順天府使朴斗世.防踏僉使李以峻.戊寅五月朔日 절도사유성채.군관절충염기탁안해우.순천부사박두세.방답첨사이이준.무인오월삭일"
    절도사 였던 유성채가 좌수영 장수들과 활을 쏘며 놀이를 즐기고 이를 기록했다죠.

  • 24.02.22 19:59

    노량해전 당시 동틀무렵 이순신이 전사한 후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정오무렵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이때 지휘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죠. 이완이라는 설, 손문욱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선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군관 송희립이 지휘권을 가지고 지휘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이순신 기함에는 임란 발발 시부터 활동한 이순신의 측근 군관 송희립이 작전을 지휘하다가 적탄에 맞아 잠시 기절한 후 다시 깨어나보니 이순신이 전사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장자 회와 조카 완이 통곡하려는 것을 막으며 이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지휘를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류형은 이순신이 타는 배에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해남현감으로서 별도의 전선에서 활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나이가 어려서 전체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고 손문욱은 통역 담당이었기에 작전을 지휘할 위치가 아니었죠. 따라서 작전참모 역할을 한 송희립이 주도적으로 지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선조실록과 안방준의 노량기사에 나와 있습니다.

  • 작성자 24.02.22 22:56

    아, 이해가 됩니다.
    상세한 상황 설명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겠습니다.

  • 24.02.23 19:45

    격군님의 글에 부연하자면..
    안내문들에 제힌 기록물들의 출처는 대부분 당대가 아닌 사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작성된 행록들이 많다고 볼 수 있습지요.

    조상을 기리다보니 과장된 부분도 많다고 하더군요.
    (대표적인 것이 있으나 폄하 오해의 소지가 있어 글은 생략합니다)

  • 작성자 24.02.24 11:44

    말씀...감사합니다.
    어쨋든
    ‘.....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그 공으로 부산진첨절제사로 발탁되었다 ' 라는
    묘 앞의 안내문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또한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겁니다.

  • 24.02.25 00:35

    노량해전은, 주장인 이순신이 전사함으로써, 정식 보고서인 장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야간 해상전투인지라 기타 보조자료 역시 부실합니다. 따라서 정설을 확정짓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1. 유가족(이회-)孝 2. 승조원(艦艇乘組員)(송희립)忠 3. 지휘보고권자(손문욱)宦
    전사 후 지휘 자료는 위 3가지가 기본축이고(보고 line과 보고자의 입장 차이), 이들이 변형 조합되어 생긴 파생형도 보입니다. 1, 2, 3. 누구인들 열심히 싸우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 대목은 정신적 가치가 부각되는 곳이고, 이조사회는 孝(親에) 바탕을 둔 사회인지라, 후대 추숭사업이 진행되면서 1孝>2忠>3宦(벼슬살이)의 양상으로 전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1.은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무릅쓰고 싸웠다’로 요약됩니다. 유족 line에서 보면 당연한 주장이지요. 유족이 전군을 지휘했다는 것은 뒤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2.는 격군님의 말씀처럼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패러다임입니다. 주장이 전사했다고
    해서 ‘전투 쫑’은 말이 안 되니까.. 한두 번 처러본 전투도 아니겠고.. 나름 합리적인 전투 매뉴얼이 있었겠지요.

  • 24.02.25 00:36

    3.은 최근에 부각되는 자료입니다. 손(이)문욱이라는 인물이 워낙 수수께끼(귀화인)인지라.. 딱히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임 남해현감이었고, 그보다 실록을 보면 그 이상의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고, 이 시점에 이덕형, 권율 line임은 어렵지 않게 확인이 됩니다.
    전투 참가 여부 <단순 왜어번역용 포로인지- 혹은 이덕형, 권율 line의 독전관 내지는 감시역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순신함에서 계급 순위(次席?)가 높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권율의 입장에서는 ‘도원수부에서 파견한 인물이 수습 독전하여 승리했다.’고 하고 싶겠지요. ps. 이순신 전사 후 진린 함정을 구원하는 장면이 보통 나오는데, 일개 군관인 송희립의 작전(전군 지휘?)이라고 보기보다는 독전관 손문욱의 입김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도 합니다.
    실록에는 ‘손문욱 독전’ 자료가 꽤 중복되어 나옵니다.
    그러나 3.은 당연히 당대에 벌써 반박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 손문욱(孫文彧)은 하찮은 오랑캐로서 우연히 한 배에 탔다가 자기의 공으로 가로챘으므로 온 군사의 마음이 모두 분격해 한다. 하였습니다.

  • 24.02.24 12:50

    彼孫文彧, 以幺麿奴虜, 偶同一船, 掩爲己功, 一軍之情, , 莫不憤憊矣。<실록>

    이 점은 노량해전 후에 이순신 후임 통제사가 무의공 이순신이 아니라 이시언이 임명되는 과정과의 맥락을 비교해 가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저로서는 아직 도저히 힘이 닿지 않는 곳입니다.

    <이상 허접한 ‘망구지생각’이었습니다.>

  • 작성자 24.02.25 22:32

    어쨋든
    동틀 무렵 이순신의 전사부터 전투가 마무리 되는 정오 무렵까지
    그 전투의 치열함은 400 여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에서도 그 처절함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더불어서 그 긴 시간을 (대략 6-7시간)
    과연 지휘관 없이 전투를 치룰수 있었을까요.

    아직 힘이 닿지 않는 곳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나름 이해가 되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 24.02.24 22:26

    대단하신 장문포님^^ 전국 산하를 답사하시는군요. 그 열정에 존경을 드립니다. 궁금해 하시는 점에 대해서는 격군님께서 소상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저도 함께 공부합니다.감사합니다. ^^

  • 작성자 24.02.25 22:33

    늘 배웁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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