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시대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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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나오지 않을 역사 14 - 절간이 된 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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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이 우이동의 절 화계사 근처에 있었다. 방학 때 종종 서울 올라와 며칠 머물곤 했는데 그 즈음 들은 얘기가 있었다. “대통령이 한신대학교를 너무 싫어해서......” 아마도 서울대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빨리 접했던 대학의 이름인 듯 싶다. 큰집 근처에 있었던 한국신학대학교는 당시 유신 체제의 권좌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매우 괘씸하고 골치 아픈 종기와도 같은 학교였다. 자잘한 것 같지만 몹시 아프고 확 터뜨려 버리자니 곪을까 두려운 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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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 하면서 제멋대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한 ‘장로님’ 이승만 대통령 이후 한국 기독교는 신과 구를 막론하고 반정권 투쟁을 벌인 일이 적었다. 하지만 굴종의 세월을 거쳐 1970년대에 접어들고 박정희 정권이 점차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기독교 역시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며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가톨릭 원주 교구에서 정부의 부정부패 반대 시위가 터져 나오고 정부가 강경 조치를 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직격탄을 퍼붓는다. “이 법은 북한(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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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선포된 뒤 개신교 쪽에서도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유신 다음 해 부활절은 신구교 연합행사였고 여기에 일부 목사와 전도사들은 “사울왕아 회개하라”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플래카드를 걸고 전단을 뿌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지만 무위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극동의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사울 왕보다 훨씬 집요하고 잔인했다. 이때의 시위 준비를 빌미로 “부활절 예배 장소에 모인 10만여 군중을 4개 방향으로 유도, 방송국을 점거하고 이어 중앙청을 비롯한 관공서 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는 등 내란음모를 기도했다”는, 이른바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예배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뻥튀기를 자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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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울은 골리앗이 돼 가고 있었다. 키가 3미터에 이르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대적하기조차 어려운 거인이었다는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나올 놈은 나오라고 윽박지르는 형국이었다. 유신이라는 방패를 들고 긴급조치라는 칼을 휘두르는 이 거한 앞에서 3천5백만 국민의 대다수는 숨을 죽였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다윗은 있는 법. 한국의 기독교인들 일부는 다윗처럼 팔매를 들고 나선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한국의 골리앗 역시 곱징역과 고춧가루물을 휘두르며 외쳤다. “어서들 오너라.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사무엘상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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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윗들의 진지 가운데 가장 튼실했던 것이 한국신학대학교였다. 유신 선포 뒤 숨 죽이던 한 해가 가고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에서 시위가 터져 나왔고 이 시위 진압과 관련하여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던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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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유신 투쟁의 구호가 간간이 어둠을 찢고 나오는 가운데 한신대학교에서도 “학생회장 이창식과 대의원 의장 김성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 양심상 안이하게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학생들이 11월9일부터 열흘 동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채플실에서 예배와 토론으로 신앙적인 결단과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한 이론적인 무장을 계속했다.” (문동환, 길을 찾아서, 한겨레신문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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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다윗들이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선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다윗처럼 아직 돌팔매 솜씨가 여물지 않아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지 못했고 갑옷에 튕겨 나갈 뿐이었으나 어쨌든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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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스승들도 난처했다. 수업 거부가 진행되니 강의할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닐니리야 놀러 갈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고 손 놓고 있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애들이 골리앗과 맞선다는데 신학대학 교수 처지에 다윗을 나무라던 다윗의 형들처럼 “니들이 뭘 안다고 이래?” 윽박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윗과 함께 돌팔매 휘두를 수도 없고. 결국 교수들도 모여서 기도하기로 했다. 허기사 종교인들에게 기도만한 무기가 있을까. 아마 교수들의 머리 속에는 2년 전의 위수령이 떠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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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이미 광기의 전조를 보였다. 1971년 교련 반대 데모로 촉발된 전국적 시위에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으로 답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에 ‘제적자 명단’을 내려 보냈다. “자르시오.” 한신대학교의 경우 4명을 학교에서 내쫓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한신대학교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본 대학 학생들이 학원 질서를 파괴한 사실이 없다고 판단하여 학칙에 의한 제적을 할 수 없음.”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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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교수들이 다윗이었다. 위수령 하의 골리앗은 군대를 파견했고 중앙정보부 한신대 담당 요원이 교수 회의장에 뛰어들었다. “교수님들 국가원수 체면을 좀 살려 주십시오.” 아마 그 요원도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4명 가운데 2명은 자퇴서를 냈고 2명은 제적으로 마무리되긴 했으나 한신대 교수와 학생은 그렇게 머리를 풀고 옷을 찢으며 골리앗에 대해 분노의 깃발을 세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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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973년으로 돌아와서, 유신 정권은 또 다시 한신대학교에 학생들 제적을 요구해 왔다. 그 즈음 한신대 교수 문동환은 학장실에 들렀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김정준 학장이 바리깡을 들고 자기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뭡니까 화계사로 출가라도 하려는 겁니까 당황하는 문동환에게 김정준 학장은 안병무 교수의 제안에 따라 학생들을 지지하는 교수들 전원 삭발을 진행하기로 했음을 전한다. 바야흐로 한국신학대학교는 외관상(?)으로 화계사 승가대학이 됐다. 백발 또는 염색한 흑발이 무성하던 머리는 까까머리로 바뀌었고 학생들은 교수들의 머리 앞에서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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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몇몇이 이발관으로 달려갔는데 하필 쉬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아무 가위나 들고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턱턱 잘라냈다. 가위가 없는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뜯어서라도 삭발을 할 기세였다. 어떤 전언에 따르면 교직원들도 일부 동참했고 심지어 학교 버스 운전사 아저씨도 삭발 행렬에 동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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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학생들의 단식 투쟁이 끝나던 날 민머리의 교수와 학생들은 부둥켜 안고 함께 울었다. 그리고 한국 길거리 데모 역사에서 유구한 역사와 생명력을 자랑하는 노래를 울부짖으며 불렀다. “우리는 한신 가족 좋다 좋아, 함께 죽고 함께 살자, 좋다 좋아, 무릎을 꿇고 살기 보다 서서 죽기 더 원한다, 우리는 모두 한신 가족’ 그때 그들은 정녕 다윗이었다. 한 학년에 50명 가량. 전체 200명 가량의 미니 대학교 한신대학교는 골리앗의 이마로 날아갈 물맷돌로 뭉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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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엉킨 가래같은 피울음이 한 바가지 토한 후 김정준 학장은 강단 앞의 한신대학교 교기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면도칼이었다. 예리하게 날 선 면도칼로 학장은 자신의 학교의 상징을 찢는다. 갈기갈기. 북북. 난자한다. 학생을 지켜주지 못하는 학교에 대한 자괴, 그 학교에서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자신들의 무기력, 학생들에게 골리앗의 칼처럼 육중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범벅이 된 칼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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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다시 돌아오면 이 교기를 꿰맬 것입니다.” 그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였을지는 굳이 적을 필요도 , 상상을 오래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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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패배주의를 심어 주고 그것 때문에 자살을 쉽게 하고 있다는 한치의 어김없는 개소리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뜻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역사는 결단코 패배의 역사가 아니었으며 대한민국을 부정하기는 커녕 독재로부터 자유롭고 더 많은 사람들의 더 큰 자유를 추구해 온 진정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온 역사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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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최악의 암흑 속에서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누군가 싸웠고 누군가 그 뒤를 따랐고 두려워도 눈 감지 않고 그를 지켜봤다. 그 역사를 밝히는데 패배주의 따위가 어디서 범접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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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마약 먹은 중늙은이 웅얼거림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이 “좌편향 좌편향”을 우물대면서 도대체 무슨 ‘승리주의적’ 교과서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그 교과서에는 이렇게 골리앗과 싸워 온 다윗의 역사는 없을 것이다.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해 그 거한을 쓰러뜨린 물맷돌의 역사는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는 절대로 패배한 역사가 아니다. 패배를 해 온 자들은 오히려 지금 패배주의를 논하는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