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양대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예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금하신 것은 다른 사람을 겉모양, 외모, 또는 자신의 감정이나 취향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않도록 판단하지 말라.(마 7:1)"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죄와 불법, 허물에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는 엄격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짝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별하고 옳지 않은 것을 판단하고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리라.(마 7:5)"고 하신 것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잘못된 것을 지적해주어도 하나님의 눈에는 위선자가 됩니다(마 7:4,5). 그러나 위선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불의와 죄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거나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일입니다.
거룩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와 불의를 꾸짖고 진리와 공의에 대해 당당히 말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 모든 모양의 악을 삼가라.(살전 5:21,22)"
"죄짓는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자들도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영적인 분별력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알고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취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선악(善惡)과 진위(眞僞)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판단이 필요할 때는 평가하고 판단하되 다만 그것이 의로운 판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판단은 사람의 생각이나 육신의 뜻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판단은 사람을 살리는 판단이 되어야 합니다. 판단하는 것이 정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정죄를 한다면 그것을 통해 사람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잘못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훈계는 무조건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려면 최소한 자신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다른 사람을 더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그 다음에는 판단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악의적이고 위선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적해주고 세워주기 위한 권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가 참된 신자입니까?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까? 그런 사람은 이세상에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에 완벽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러면 누가 참된 신자입니까? 순종하는 신자입니다.
잘못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체질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잘못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육신을 굴복하고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참된 신자들이며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일,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일만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고, 때로는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다가올 때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주님 앞에 머리 숙이고 무릎 꿇는 사람이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대언자의 준엄한 지적과 책망을 받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다윗 왕은 그러한 점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서 사울 왕은 왕으로 택함 받을 때는 겸손했지만 나중에는 왕이 된 후에는 교만한 육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을 때에도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과 죄를 회개하는 대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급기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순종이라는 단어가 평가절하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소위 ‘웰빙족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이 시대의 조류와 유행에 맞추어가는 스마트하고 고상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세상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고 우직하게 말씀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을 투박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신자라고 비판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이 성경말씀에서 세상의 가르침으로 급격하게 바뀌어 가는 세상입니다.
특히 '웰빙족 기독교인'들은 '순종'(obedience)의 덕목을 시대에 뒤떨어진 하류층의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부복하는 순종은 영원히 그 의미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특히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하는 것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