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의 解放과 女性의 解放을 위해 鬪爭한
한 女性의 이야기
해방 50주년을 맞은 지난 8월 부산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 여사가 국가로부터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꼭 50년 만이고 여사가 세상을 뜬 지 5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여사의 조카 박의정 씨(여사의 큰오빠 朴文熺의 장남), 부산의 박의영 씨(박문희의 차남)1)는 오래 전부터 여사의 활동을 밝혀 역사의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 열심히 증빙자료를 모아 왔다. 가끔 부산의 지역신문에서 여사의 활동을 소개하기도 하였으나2) 박차정 여사의 활동과 사상 등은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는 못해 왔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된다. 하나는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식민지하에서는 공산주의자들까지도 포괄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48년 남북간의 협상시에 월북하였으며 북에서는 58년 숙청이 될 때까지 고위층을 지낸 의열단 단장 若山 金元鳳의 아내인 朴次貞에게 역사적 눈길을 돌릴 수 있는 현실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여사 역시 일제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위원을 지내는 등의 활동을 해 왔기에 민족주의계열의 운동에만 정통성을 부여해 온 우리 현실 속에서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남북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치상황은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마저도 반쪽의 역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또 하나는 식민지하에서의 여성들의 투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민족의 해방을 위해 국내외에서 투쟁하였으며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운동의 다양한 부문운동에서 투쟁하였고 여성운동을 본격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런데도 여성들의 활동이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많다. 특히 국외에서의 항일투쟁에서 여성들의 몫이 컸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시사되면서도 구체적 내용들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박차정 여사의 경우에도 여성이기에 그에 대한 평가가 소홀히 되어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본고는 식민지시대 부산지역 출신 여성들의 활동과 투쟁사를 고찰해 보고자 하는 일시도로 대표적 여성투사였던 박차정 여사의 삶과 투쟁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 것이다. 자료들을 충분히 모은 후에 좀더 심도 있는 논문으로 엮을 것을 기약해 본다.
항일분위기에서 성장
박차정은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 복천동 417 번지에서 아버지 朴容翰과 어머니 金孟蓮의 3남 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당시 박차정의 집안은 일제의 식민지체제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로 하여 항상 우리의 식민지적 현실에 대해 직시하고 항일의식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더구나 1919년 3·1운동이 있기 얼마 전 아버지는 민족의 현실을 비관하고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어머니 김맹련은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삯바느질을 하는 등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머니 역시 사상적으로 무장된 그런 분이었는데, 동래군 기장면 출신으로 若山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었던 若水 金枓全3)과는 육촌 사이었고 金枓奉4)과는 사촌의 사이였다.
이 같은 가계로 보더라도 어머니 역시 잠재된 강한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기에 박차정의 형제들이 어려서부터 강한 항일의식을 갖고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동래일신여학교 시기항일의식의 심화기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전신인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895년 호주장로교여자선교회연합회의 여자 전도사들이 좌천동의 한 초가에서 소녀들을 모아 주간학교를 차리면서 시작되었는데, 1909년에는 3개년 과정의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925년 6월에는 동래로 신축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부산진일신여학교와는 완전 분리, 운영하였다.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는 4년제로, 교과과정은 선교계 학교의 설립 목적에 부응하면서도 민족정신의 교육과 한국인에게 보다 중요한 조선어, 역사, 지리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5).
때문에 이 학교는 1919년 3·1운동시에 부산지역에서의 초기운동 전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즉 3월 10일 교사 朱敬愛, 朴時淵 등이 고등과 학생 11명과 함께 11일 밤 9시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호응하여 군중 수백 명이 힘찬 시위를 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부산경남 3·1운동의 효시를 이루었던 것이다.6)
이러한 민족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가정에서 키워 온 항일의식이 더욱 강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말하면서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독립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일신여학교의 스트라이크는 항상 박차정이 주모자가 되었고 일경의 경계가 삼엄한데도 늙은 노파로 변장하고 여학생들의 가정을 순방하면서까지 스트라이크를 지도하고 연락을 취했다.
당시의 박차정의 항일의식과 현실관은 그가 동래일신여학교의 교지였던 『日新』 2집에 실은 「徹夜」라는 글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자전적 성격을 지닌 글로서, 내용은 일제하에 옥사를 한 어떤 독립투사의 아들과 딸이 고아가 되어 추운 겨울밤 사회의 냉대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밤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일제하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상징화한 것으로, 어려운 가운데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겨 나간다고 하는 우리 민족의 해방을 염원하고 그것을 수행해 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는 글이라고 하겠다. 이 글은 15세의 어린 소녀가 쓴 글이라기에는 너무나 강한 현실인식과 사회의식,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담고 있는 강인한 글이었다.
학창시절의 이러한 철저한 항일의식과 투쟁정신은 자신의 오빠인 박문희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컸다. 당시 박문희는 明治大學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후 동래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며 청년운동에 앞장서고 있었으며,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신간회의 주도층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박차정은 당시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숙부 朴日馨으로부터도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아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아보았고 동래노동조합원 신간회동래지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박차정은 이 때 교제한 인물들의 영향과 사상 서적의 탐독을 통해 사상적으로 한층 원숙한 상태에 들어갔다.7) 그리고 근우회가 설립되면서 동래지회의 설립에 앞장섰다.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것은 1929년 3월 9일이었다.
근우회 활동시기여성운동의 지도자로
박차정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은 근우회 활동에서부터였다. 1924, 5년경부터 민족해방운동 내 일각에서 논의되던 협동전선론은 1926년 초부터 구체적인 움직임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1월의 '정우회선언' 이후 온 운동계를 휩쓸었다.
여성운동계에서도 협동전선론이 논의되어 전국적 통일기관의 결성에로 나아갔고 마침내 1927년 5월에 근우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근우회는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계열의 여성단체들과 사회주의계열의 여성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통일기관으로 출발하였다.8)
근우회는 신간회와 같이 반제·반봉건운동을 자기 과제로 하고 그 강령을 "첫째, 조선 여자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키 위하여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하며 둘째, 조선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한다"고 하였다.9)
행동강령으로는 ①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정치적 차별 철폐는 후에 첨가),
②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③ 조혼폐지 및 결혼의 자유(이혼의 자유 후에 추가),
④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⑤ 농민부인의 경제적 옹호,
⑥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후에 산전 4주 간, 산후 6주 간의 휴양과 그 임금 지불로 강화),
⑦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업 폐지,
⑧ 교육의 성적 차별 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⑨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⑩ 노동자·농민 의료기관 및 탁아소 제정 확립(⑧, ⑨, ⑩조는 후에 첨가) 등이었다.10)
근우회는 회장체제가 아니고 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 움직여졌다. 제1기의 중앙집행위원 21인은 재경활동가로 채워졌으며 민족·사회 양 진영이 균형을 이루었는데, 지방에 지회들이 속속 설립되고 그 대의원들에 의해 전국대회가 치러진 1928년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지회 출신이 대거 참여하게 되고 사회주의진영이 압도하게 된다.11) 당시 지회는 대략 64개 지역에 설립되었는데 사회주의계가 조직한 곳 60%, 사회·민족 양 진영이 협동하여 조직한 곳 19%, 민족주의계 조직 21%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12) 이는 지회가 사회주의계열에 의해 움직여졌음을 말한다.
박차정이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중앙회에서 본격 활동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근우회의 변화 속에서 제2회 전국대회가 열렸던 1929년 7월부터였다. 이 대회의 중앙집행위원 선거에서는 지회의 세력에 따라 집행위원을 배분하였는데 각 도별로 대의원들이 모여 전형위원 1인씩을 선출하고(지회가 많은 경남·함남 각 2인) 그들이 집행위원을 정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이 때 박차정은 경남의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전형위원들에 의해 선출된 33인 중앙집행위원으로, 또한 33인 중에서 선정된 14인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즉 박차정은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이제 근우회의 핵심멤버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담당했던 업무는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이었다.13)
박차정이 주도하고 있었던 동래지회는 1928년 5월 10일에 결성된 사회주의계가 결성한 지회였다. 당시 동래에는 1921년 5월에 결성된 동래여자청년회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28년 4월 20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여자청년회를 해체하고 근우회 지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지회가 조직되었다.
이 때 여자청년회에서는 "동회의 강령과 목적이 근우회와 같은 이상, 따로이 한 단체를 만들어 둘 필요가 없으므로" 여자청년회를 해체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근우회의 조직원칙을 충실히 이행한 대표적 사례로서, 연령상 청년에 속하는 회원은 동래청년동맹에 입맹키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성과정에서 당시 여자해방운동 촉진을 목표로 1926년 1월 2일에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赤洸會의 간부였던 李水先, 朴小守 등도 근우회 지회에 참여하였다.14) 동래지회는 당시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1929년 전국대회에서는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차별 철폐건'을 건의하였다.
1931년의 정기대회에서는 해소는 당분간 보류하되 "금후로는 특히 노동여성운동세력의 강대책을 주방침으로 하자"는 결의를 하였다.15)
이처럼 동래지회는 당시 많은 지회 중 가장 확실한 이념을 갖고 운동을 전개하였던 지회로서 중앙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는 박차정을 중심으로 동래지역에서의 청년운동,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왔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오면 박차정의 활동이 컸다.
근우회사건의 주동으로 검거, 구속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출판과 선전 일을 맡고 있었던 박차정은 명실상부하게 근우회의 핵심간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때 그의 큰오빠 박문희도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상무위원으로 교육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 근우회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에서의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는데 바로 '근우회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에서 박차정이 중심역할을 하였다.
원래 근우회에서는 창립 당초부터 학생동맹휴교에 관심을 보내는 일련의 조사와 지원을 계속해 왔고,16) 1929년 7월 대회에서는 "교육의 성차별 철폐와 여자의 보편교육 확장"을 결의한 바가 있다.17)
그 후 전주여자고보사건에는 직접 관계하여 맹휴를 지도하였다.18) 11월 광주학생사건에 이어 12월 서울에서 학생시위사건이 일어나자 배후세력으로 주목되어 근우회의 박차정·허정숙·정종명이 신간회의 인사들과 함께 검거되었다가 풀려났다.19)
오빠 박문희도 같이 검거되었다.20) 이 사건 후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생들에 의한 보다 구체적 행동과 민중적 봉기를 목적으로 한 제2차 시위운동이 1930년 1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근우회가 바로 리더학생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이 '근우회사건'21)은 박차정·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하여 일어났다.
이는 원래 12월부터 구상한 것으로, 1월 9·10일경에 서로 의논하여 여러 학교의 사정을 고려한 뒤 15일 오전 9시 30분 일제히 시위를 하였는데, 참가 학교는 이화·숙명·배화·동덕여고보·근화·실천·정신·태화여학교·여자미술·경성여자상업·경성보육학교 등 11개 학교였다.
이러한 시위를 준비하는 데 허정숙과 박차정이 앞장서서 각 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학교의 분위기와 사정을 알아보고 각 학교끼리의 연락방법 기타 일체의 것을 지시하였다. 사건 발생 직후 일제는 근우회를 그 배후로 지목하여 간부들에 대한 일제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박차정을 비롯하여 정종명, 박호진, 정칠성, 한신광, 허정숙, 백덕수, 류덕희 등이 검거되었으며22) 최종적으로 박차정과 허정숙이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박차정은 처음 서대문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일시 석방되었는데23) 1930년 2월 고향인 동래에서 다시 검거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24) 그리하여 그는 2월 8일 구인되고 2월 9일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되었다.25)
이후 2월 9일(1차 심문), 2월 12일(2차 심문), 2월 13일(3차 심문) 세 차례의 심문 후 2월 15일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26)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어, 2월 16일자 보고서에는 박차정이 통의동 오빠 박문희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는 중에 있다고 보고되었다. 그리고 2월 20일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검사국으로 기소가 성립된다는 의견서가 제출되었으나, 2월 28일 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처리되었다.
중국으로 망명, 그리고 결혼
이 때 박차정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하여 불기소로 나온 후 한 달 간 꼬박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와 중국으로의 망명을 권하였는데 이는 그의 둘째 오빠인 朴文昊가 밀파한 사람이었다.
박문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서 활동하였고 당시에는 의열단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중앙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차정은 청년을 만난 후 간단한 여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땅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경찰은 그의 근황으로 "오빠 박문호가 여러 차례 오라는 소식을 전하고 여비까지 송금한 실정이며 거기에 고창 출신으로 상해유학생이라 칭하는 정모가 박차정에게 박문호의 소식을 갖고 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고 또 대구 출신 정모가 조석으로 두 번 박차정을 내방하였고 저녁 내방 시에는 쟁담을 나눈 것이 목격되는 등, 이 점들이 박차정의 도피와 관계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극력 수사중"이라고 하고 있다.
이 때가 대략 1930년 3월 4월쯤이라고 생각된다. 박차정은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가서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과 1931년 3월에 결혼하였다.
의열단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위원으로 활동
이후 박차정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멤버로서 활약하였다. 의열단27)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로 폭력을 독립투쟁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고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대만총독, 친일파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을 암살대상으로 규정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정하였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부터 대대적인 암살 파괴활동에 들어갔다. 의열단의 의백이었던 김원봉은 1922년 신채호 선생을 만나게 되고,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의 지침이 될 역사적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을 23년 1월 작성하였다. 약산이 이끌던 의열단의 암살 파괴운동은 제1, 2, 3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즈음 세계적인 사회주의운동의 성장과 국내의 노농대중운동의 발전은 의열단에도 변화를 요구하게 되고 의열단의 자금모집이 힘들어지면서 의열단의 활동은 침체기에 들어갔다.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많은 사람을 사귀었는데 이 때 사귄 사람들이 이후의 의열단의 활동에 힘이 돼 주었다.
김원봉은 1928년 상해에서 안광천과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폈으며,28) 곧 북경으로 가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1929말)을 세움29)과 동시에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웠다.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은 중앙부를 두고 조선지부(1931.4), 북경지부(1930.8), 만주지부(1930말)를 두었다. 박차정은 안광천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부에서 김원봉, 박건웅, 박문호, 이영준, 이현경 등과 함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가 바로 중책을 맡았다는 것은 국내에서의 박차정의 활동이 김원봉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려 주며, 이러한 활동 직후 평생을 투쟁의 동지로 살았던 김원봉과 결혼한 것 역시 박차정의 투쟁성과 활동성이 당시 의열단에서 높이 인식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레닌주의 정치학교는 1930년 4월부터 1931년 2월 사이에 2회에 걸쳐 21명의 학생을 훈련시켜 국내로 보냈다.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의 공산청년동맹 준비위원회 및 강릉농민조합운동과 관련해 1934년 체포되었다.
의열단의 혁명간부학교 교관으로
32년 남경으로 옮긴 후 박차정은 약산을 도와 혁명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하였다. 약산은 국민정부와 제휴하여 혁명간부학교를 개설키로 하여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특히 국내에서 학생을 모집하여 올 것을 구상하고 이에 노력하였다.
바로 이 일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박차정의 오빠 박문희였다. 당시 약산과 박차정은 박문희에게 여러 차례 와 달라고 협조를 부탁하였는데, 박문희는 박차정의 병문안을 들어 조심스럽게 8월 남경을 방문하였고, 학생모집의 협조를 부탁받은 박문희는 약산으로부터 운동자금으로 300원을 받고 9월 고향으로 돌아와 학생모집에 나섰다.
신간회 회원이었던 愼秉垣, 동래노동조합원이었던 김영배·문길환·최창학 그리고 동래의 이무용 등 5명을 설득하여 이들에게 20원 내지 25원을 주어 중국으로 가게 했다. 이들은 혁명간부학교 제1기생이 되었다.
박문희는 이후에도 단원모집에 주력하였는데 1934년 2월 3일 검거되어 3월 16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6월 19일 징역 2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30) 혁명간부학교의 개설에 앞장섰던 박차정은 1932년 10월 20일 개교하자 여자부 교관으로 여자부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31)
이 때부터 박차정은 林哲愛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일본측의 자료에는 이 이름이 많이 쓰여지고 있다. 이 혁명간부학교의 교관들은 대개 의열단원으로 오랜 경험을 쌓아 온 인물들이었다.
혁명간부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각종 비밀공작법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의 혁명의식을 강화하고 실천운동에서 필요한 변론을 훈련시키기 위해 1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933년 4월에 1기 졸업생을 내고 1936년 10월까지 3기의 졸업생을 냈다. 졸업생들은 공작임무를 부여받고 2∼3명이 한 조가 되어 공작지로 떠났는데32) 제1기생에게는 조선과 만주에 의열단 지부를 만들도록 하였고 제2기생에게는 노동자·농민·학생 등 기본군중에 기초하여 유격대를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의열단의 국내공작은 실패로 돌아가 1936년 당시 체포된 사람이 1기생 12명, 2기생 14명, 3기생 1명, 교관 1명, 모집 연락원 7명 등 모두 35명이었다.33)
민족혁명당의 남경부녀회를 결성하고 활동
1935년 7월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혁당)이 결성되자34) 박차정은 핵심멤버로 활동하였다.35) 김원봉의 의열단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과 함께 유일당 결성을 위해 민혁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민혁당은 좌우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진보적인 내용의 17개 강령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몇 개를 보면 ① 구적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확립하고,
②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하며,
⑨ 토지는 국유로 하여 농민에게 분급하고,
⑪ 국민의 일체의 경제활동은 국가의 계획하에 통제한다고 하였다.
박차정은 민혁당 내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최창익·허정숙·한빈 등 사회주의자들이 입당하는 등의 변화가 거듭되고 있었던 즈음인 1936년 7월에 이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해외의 조선부녀의 총단결로 전 민족적 통일전선을 편성하기 위해 결성된 부녀회의 기본인식을 보면 "우리 조선의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박으로 인권이 유린되어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여성들은 운동을 해 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우리 여성이 봉건적 노예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식민지적 박해에서 벗어나 진정하게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되어야 하고 조선의 혁명이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에서 진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호로는 "전 조선부녀는 총단결하자, 민족혁명전선에 무장 참가하자, 남녀의 차별을 철폐하자, 각국 부녀해방운동과 연결하자"가 내세워졌다.36) 이러한 부녀회의 기본인식과 구호는 과거부터 오랫동안 여성문제를 고민해 왔고 여성운동을 해 왔던 박차정 여사의 기본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복무단장으로 활약
민혁당은 일본의 중국에 대한 끊임없는 공습 가운데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1937년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을 선언하였다. 민족전선의 목적은 조선 국외 및 국내의 전 민족혁명가를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한·중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며, 직접 혹은 간접으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항일전선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조직은 기존의 각 당과 단의 존재와 독자성을 인정하고 이들 단체가 모두 인정하는 공통된 강령 위에 연맹 형태로 조직되었다. 박차정은 이 때 일본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하였으며 오랜 옥고 끝에 숨진 안창호의 추도회를 개최하였다.37)
민족전선은 김규광·류자명을 편집인으로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을 발간(1938.4.10 창간, 반월간지)하였다. 박차정은 林哲愛라는 이름으로 창간호에 「敬告日本的革命大衆」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는 앞서의 방송원고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었다.
제3호(38.5.10)와 제5·6호(38.6.25)에서는 「朝鮮婦女與婦女運動」이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건하에서 조선 여성의 법률적 구속, 정치적 압박, 사회적 불평등 지위 등 여성의 현실을 분석한 다음, 우리 나라의 여성운동을 3·1운동 이전, 3·1운동기, 3·1운동 이후, 1927년 이후, 광주학생운동 이후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제 중국의 전면항일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우리 부녀자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어나 신성하고 위대한 민족해방전쟁에 참여하여서 조국의 자유를 회복하자고 하였다.38)
이 글은 앞서의 남경부녀회의 선언문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여성운동과 민족해방운동과의 접목을 강조하고 있다. 소수 지식층 여성이 중심이 되는 여성운동, 또는 개별적 사안에 대한 여성운동이 아무런 성과를 가져다 주지 않음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드디어 1938년 10월 10일 한·중연합전선의 형식을 빌어 항일무력으로서 조선의용대가 漢口에서 결성되었다.39) 김원봉 등에 의해 지도되었던 초기 의용대는 조선민족 입장에서의 중국항전 참가, 일제 타도, 조국해방의 임무를 자임하며 창설되었고 그를 수행하기 위한 공작으로 전선공작, 적후공작, 동북진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40)
박차정은 22명으로 구성된 隊本部 婦女服務團의 團長을 맡아 활동하였다.41) 이 때 박차정은 의용대원들에게 인간적으로도 매우 친절하게 대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에 앞장섰다.42) 당시 의용대 본부에는 최동선(여)을 단장으로 하는 3·1소년단이 있었고, 여자포로들도 훈련소에서 1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 퇴소함과 동시에 의용대 대원으로 전입되어 의용대 내에 여자대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박차정은 이러한 여성대원들의 선봉에서 싸웠다.
1940년 당시 의용대의 대원수는 총 314명에 달하였다. 이즈음 1939년 2월 박차정 여사는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이는 여사가 의용대활동에 앞장섰음을 말하여 준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네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진출했다. 화북으로 진출한 조선의용대는 太行山脈 일대의 八路軍 구역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제휴하여 활동하기에 이르렀고, 김원봉의 화북행은 이루어지지 않아 의용대 주부대와의 연계 및 그 지도권까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중경에서 의용대 일부만을 지도하고 있었던 민혁당의 김원봉은 1941년 12월에 임정 참여를 당의 확고한 노선으로 정하고 임정 개조투쟁에 참여하였으며 44년 5월에 임정의 군사를 통괄하는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중경으로 옮겨 온 이래 박차정과 김원봉은 남안에서 살았는데, 박차정은 김원봉이 임정의 군무부장에 취임했던 즈음인 44년 5월 27일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35세의 나이로 어려서부터 민족해방, 여성해방을 위해 항일투쟁에 혼신을 다했던 여사는 해방을 1년 앞두고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해방 후 김원봉은 꼭 간직했던 박차정의 부상시에 입었던 '핏덩이가 말라붙은 속적삼'을 가져와 친가동생인 부산의 朴文夏에게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귀국하면서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김원봉은 월북하였고 박문희 역시 전쟁중 생사가 불명하여 김씨, 박씨 양 가문은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고초를 겪었고 박차정의 항일투쟁은 역사의 뒤안에 묻혀 버렸다. 여사의 활동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와 유품들은 이러한 와중에서 흩어지고 분실되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1) 미국에서 살고 있는 박의정 씨는 오래 전부터 고모인 박차정 여사의 활동을 정확히 밝혀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왔으며, 지난 93년 2월에는 남편은 월북하고 슬하에는 자식이 없어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밀양의 박차정 여사의 묘소를 말끔히 단장하기도 하였다. 박의정 씨는 박차정 여사가 활동했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구해 왔는데 몇 년 전에는 필자에게도 박차정 여사에 관한 사항으로 연락을 해 왔다. 아쉽게도 1996년 1월 미국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고 한다. 동생 의영 씨는 부산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박의사 숭모회 설립을 적극 준비해 왔으며 올해부터 동상과 기념관건립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키 위해 힘쓰고 있다.
2) 『동래신문』 1992년 2월 4일, 9월 7일, 1993년 2월 1일.
3) 약수 김두전은 경성공업학교 응용화학과 출신으로 東京의 正則학교에 몸을 담기도 하였는데 일찍이 김원봉·이명건과 의형제를 맺고 산·물·별 등 자연의 이름에다 같을 若, 같을 如를 앞에 붙여 호를 若水·若山·如星으로 정하였다(염인호, 『김원봉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2, 26쪽). 원래 약산이 이들과 같이 활동하려고 하였으나 이들은 "독립운동은 반드시 해외에 나와서 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다 같이 국내로 돌아가 대중을 기초로 하여 일을 하자"고 주장하고 헤어졌으며(朴泰遠, 『若山과 義烈團』, 백양사, 1947, 21쪽), 이후 김약수는 일본에서 1920년에 설립된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시작으로 북성회를 이끌고 북풍회파를 주도하여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등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고(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청계연구소, 1986 참조) 대한민국제헌국회의 부의장까지 진출했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한다.
4) 약산 김원봉과 함께 활동하다가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연안으로 가서 1942년 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화북조선독립독맹의 위원장이 되었으며, 해방후 북한으로 가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하고 김일성과 제휴하여 북한정권을 키워 나가 국가주석의 위치에까지 오른 연안파의 거두였다. 56년 8월에 발생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최창익과 함께 숙청되었다(염인호, 앞의 책, 396쪽).
5) 부산직할시 교육위원회, 『부산교육사』, 1987, 68∼70, 106, 115∼117, 121∼122쪽.
6) 위의 책, 150∼151쪽.
7) 박일형의 영향과 그 이후의 여사에 관한 것은 1930년 2월 19일, 「서대문경찰서 警部補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검사에게 보낸 의견서」의 내용에 의한 것이다. 박차정에 관한 경찰의 의견서 심문서는 박의영 씨가 수집한 자료를 이용한 것이다.
8) 남화숙, 「1920년대 여성운동에서의 협동전선론과 근우회」,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9, 38∼41쪽;한국여성연구회 편, 『한국여성사』, 풀빛, 1992, 149쪽.
9) 원래의 강령은 "一.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 一.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이었는데, 이것이 1929년 전국대회에서 수정되었다.
10) 남화숙, 앞의 글, 43∼44쪽;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90∼91쪽. 근우회 창립시의 행동강령은 7개 조항이었는데 8·9·10조항과 각 조항마다 후에 첨가하였다는 것은 1929년 전국대회에서의 수정된 행동강령이다.
11) 제2대 중앙집행위원에는 사회주의계열이 늘어나서 23인 중 18인(78%)이 사회주의계열이었고, 중앙집행위원(23명) 중 지회(12명)가 차지하는 비율이 52%로 지회의 진출이 괄목할 만하였다. 이 같은 좌파집행부의 구성은 기독교계 명망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한국여성연구회, 앞의 책, 159쪽;남화숙, 앞의 글, 76∼78쪽).
12) 남화숙, 앞의 글, 102∼103쪽.
13) 위의 글, 79∼81쪽;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제3권, 91∼98쪽;경성지방검사국,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1929년 7∼9월, 245쪽.
14) 『동아일보』 1926년 12월 27일, 1928년 4월 26일:『조선일보』 1928년 4월 24일.
15) 『조선일보』 1929년 10월 27일;『동아일보』 1931년 5월 6일.
16)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사건(1927.5∼8)에 개입하였으며, 경성여자상업학교 맹휴(1928.2∼5), 진명여고사건에 개입(한국여성연구회, 앞의 책, 168쪽).
17)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29년 대회에서 새로운 행동강령으로 채택되었다. 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제3권, 96쪽.
18) 『동아일보』 1929년 8월 3일, 10월 3일. 학생이 퇴학처분되자 근우회 전주지회는 처분해제권고문을 발송했으며 이에 허정숙·정칠성이 종로서에 구속되었다.
19) 『조선일보』 1924년 12월 5일.
20) 『동아일보』 1929년 12년 4월;『조선일보』 1929년 12월 4일.
21) 이 사건의 개요는 앞서의 「의견서」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2) 『동아일보』 1930년 1월 18일. 오빠 박문희도 검거되었다.
23) 『동아일보』 1930년 1월 31일.
24) 『조선일보』 1930년 2월 11일.
25) 『동아일보』 1930년 2월 11일. 句引 留置 일자 등은 서대문경찰서 발부의 원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26) 서대문경찰서의 심문조서 참조.
27) 의열단에 관한 것은 다음을 참고하였다. 염인호, 앞의 책;박태원, 앞의 책;김학준·이정식,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1988;한홍구·이재화,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총서 3』, 경원문화사, 1986.;송건호, 『의열단』, 창비, 1985;김창수, 「의열단의 성립과 투쟁」 『한국민족독립운동사 4』, 1988;노경채, 「김원봉의 독립운동과 사상」 『백산학보』 30·31합, 1985;염인호, 「상해시기(1922∼25) 의열단의 활동과 노선진보적 민족주의 노선의 성립」 『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28) 이정식·김학준, 앞의 책, 95쪽.
29) 『조선일보』 1935년 8월 24일 호외. 조직의 결성 시기와 명칭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1930년 8월 무산자전위동맹을 결성하였다는 자료도 있다(염인호, 앞의 책, 133쪽).
30) 이재화·한홍구, 앞의 책, 118∼119, 249∼252쪽. 박문희의 검거(『동아』 1934년 2월 19일), 박문희의 송국·단식(『동아』 1934년 3월 15일), 공판(『동아』 1934년 6월 14일), 2년형을 받음(『동아』 1934년 6월 23일).
31) 사회문제연구회, 『사회문제자료총서 1』, 252쪽;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임정편』, 578쪽.
32) 일부는 한국내로, 일부는 만주로 파견하고 일부는 중국 각지에 파견하였다(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827쪽;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577∼578쪽).
33) 이재화·한홍구, 앞의 책, 5쪽.
34) 민혁당에 대하여는 강만길, 「조선민족혁명당성립의 배경」 『한국사연구』 61·62합, 1988;강만길, 「조선민족혁명당의 성립과 그 역사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1990 참조.
35) 사회문제자료연구회 편, 『사회문제자료총서 1』, 21쪽. 이 자료의 '민족혁명당간부당원동정조'를 보면 박차정 여사가 간부로서 활동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36)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民族主義運動篇』, 原書房, 573∼574쪽.
37)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2』, 259쪽.
3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총서 2』, 160∼162, 189∼190, 229∼230쪽.
39) 의용대에 관하여는 김영범, 「조선의용대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한상도, 「김원봉의 생애와 항일역정」 『국사관논총』 18, 1990 참조.
40) 의용대의 임무는 ① 중국 내의 조선혁명역량 및 조선동포를 동원하여 중국항전에 적극 참가 혹은 그를 지원함, ② 조선혁명의 지역적 특수임무를 완성하고 조선혁명운동을 추동함으로써 조국을 해방시킴, ③ 일본의 군민을 쟁취하고 동방약소민족의 반일본제국주의군벌 투쟁을 발동시킴(추헌수, 앞의 책 3집, 77쪽).
41) 김영범, 앞의 글, 484∼485쪽. 1940년 2월에 작성된 편제편성에 따른 것이다.
42) 강만길, 「민족혁명당의 태항산의 항일투쟁」 『사회와 사상』, 1989.12, 106쪽.
이송희 교수 (신라대학교사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