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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말씀 ♣ 복음묵상 스크랩 2008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대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3 08.07.16 19: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말씀의 초대

교만한 자들에게는 주님의 보속이 내린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거들먹거리면 임금이든 장군이든 주님의 분노가 내릴 것이다. 승리자가 된 아시리아의 임금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제1독서). 철부지는 철없는 어린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그렇게 표현하신다. 믿고 따르는 그들을 애정으로 대하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혜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모른다.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들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에서 철부지는 철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철이 없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그날이 되면’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결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은돈 서른 닢에 스승님을 팔아넘깁니다. 이 모두가 철부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넓디넓은 마음입니다.
철부지는 단순히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세상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주님 눈에는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판단해도 예수님의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권력에 기대거나 인맥을 찾거나 재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배경이 있어야 조직이 잘 돌아가고 탈이 없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주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철부지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앞에서는 철부지가 아닐는지요?

 

 

☆☆☆


 

 부모들은 자식들을 누구나 다 사랑하지만 특히 장애나 어려움을 지닌 자녀들을 더 사랑합니다. 측은한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역시 그런 측은한 마음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부지와 작은 이들, 곧 보잘것없는 사람을 더욱 좋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카인 대신 아벨을, 에사우 대신 야곱을 선택하십니다. 다윗의 여러 형제들 가운데 보잘것없는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 또는 사두가이들을 뽑지 않으시고, 세리나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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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이면 저는 인천교구의 몇몇 신부님들과 자전거를 탑니다. 물론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매우 유쾌한 시간이지요. 그런데 요즘 계속해서 일이 생겨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다가 어제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날씨까지도 도와주는지 해도 뜨지 않고 그렇게 덥지 않더군요. 그래서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손과 발을 가리는 긴 옷이 아닌 편안한 복장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하지만 12시쯤 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해가 뜨지 않아서 좋았는데, 12시를 넘어서 해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뜨거움이 상당한 것입니다. 저는 갈등을 했지요. 이대로 계속 탈 것인지, 아니면 폭염을 피해서 잠시 쉬면서 선크림을 바를 것인지……. 그러나 1시간 정도만 타면 오늘의 일정을 마치기 때문에, ‘1시간 정도야 뭐…….’라는 생각으로 그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계속 탔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제 몸을 화끈화끈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한 여름 바닷가로 놀러갔다가 새까맣게 탄 모습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1시간 정도야 뭐…….’라는 안일한 생각이 저와 다른 신부님들을 벌써 피서 다녀온 사람의 모습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제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얄팍한 저의 지식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저의 어리석음들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모습을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네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에 노력을 하지요. 바로 인간적인 지식을 하느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신과 자기의 이익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기득권만을 도모하지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신과 미움,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자기가 못나고 아직 철부지이기 때문에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했기에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이 자기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철부지일까요?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지혜롭고 슬기로운 척만 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가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어린이 같은 철부지가 되면 어떨까요?

아는 척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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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공간 복음의 공간     

-조성숙 수녀(까리따스 수녀회)-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단락 안에서 “아버지”라고 몇 번이나 부르며 환희의
찬가를 노래하십니다. 그 흥분된 기쁨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오히려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그토록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언젠가부터 깨닫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제 안에 두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공간과 복음의
공간입니다. 복음의 공간 속에서는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즉시 다른 세상 버전으로 옮겨가 버립니다.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자가 되어 사람들 위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주시는 스승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분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소위 내놓을 만한 ‘메이커’는
거의 갖지 못한 분이십니다.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철부지 같은 말투와 어린아이와 같은 그분의 눈빛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며칠을 머물면서
제 안에 “복음 말씀이 진짜구나!” 하는 놀라움이 커져갔습니다.
책을 통해 배워 안다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말씀들이
그제야 “아하!” 하면서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안에서 여전히 힘 있고,
우리의 모순을 꿰뚫으며, 진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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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희 수녀

- 기정희 수녀(춘천 밀알재활원)-

 

내가 사는 곳은 지적 장애인 50명이 생활하는 시설이다. 지능이 낮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참 맑고 순수한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얼마 전 주일이었다.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요즘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지요?”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모두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다투어 말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손을 들더니 남대문 방화 사건이 근래 들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개인의 잘못이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뜻에서 그런 행동은 나쁜 일이라고 하셨다.
보편 지향 기도를 드릴 때였다. 평소와 같이 몇몇 가족은 자신에게 필요한 기도를 했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앞서 남대문 방화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던 친구가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남대문에 불을 지른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잘못은 많이 했지만 용서해 주세요.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해주세요. 불쌍한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갑자기 모두 숙연해졌다. 문제는 있으나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니 남대문 방화자는 당연히 응징을 받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경종을 울리는 그의 기도는 하느님의 목소리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잊은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되물어 보았다. 내면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하느님의 신비가, 단순하고 이웃을 먼저 헤아리는 이 작은 이에게 드러나는 것을 본 그날 우리 장애인 가족이 더욱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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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길을 물어라

 -김찬선신부-

저는 관용적인 우리말을 씹어보는 것이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무심코 쉽게 쓰는 우리말 안에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고,
대단한 영성과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아는 게 병이야!”
“모르는 게 약이다.”
어찌하여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가?

길을 가다보면 길을 섣불리 아는 게 병일 때가 많습니다.
아예 길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을 터인데
섣불리 아는 자기 지식에 의존해 가려다 헤맵니다.
옆에서 모르면 물어서 가라 해도 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고 하시고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도 하십니다.
또 다른 데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고 하십니다.

이 말을 통 털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고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길을 통해야 하고
길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는 사람이 묻겠습니까?
길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데 바로 그 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철부지처럼 겸손하고 단순하게
길을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길이신 그분께서 손수 길을 계시해주시도록 물어야 합니다.
또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길이신 그분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준 사람,
그래서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성녀 글라라가 이에 대해 아주 적절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는 유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연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고 회고합니다.

우리는 헛똑똑이가 되기보다
차라리 길을 묻는 철부지가 되는 편이 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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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의 신비와 복음

-조욱현 신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경험하여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셔서 들려주시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기적을 통해서 증거해 주셨지만, 그것을 보고, 들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음 아프게 체험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안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보신 것이 아니라, 안다는 사람의, 똑똑하다는 사람의 그 알고 똑똑함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을 단죄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 말씀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복음의 말씀을 따지거나,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문제를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 는다고 할 때, 어떻게 그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면서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혼자서 무엇을 결단하기보다 겸손 되이 부모와 웃어른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태도이다. 어린이의 눈을 보면 우리는 그 눈이 얼마나 맑은지를 알 수 있다. 이제 그 아이는 자기 눈에 비치는 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눈빛도 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을 배우는 것도 그렇다. 그 아이는 많이 들은 말을 먼저 하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좋은 말을 가르치면 좋은 말을, 욕을 가르쳐 주면 욕을 하게되는 것이 아이이다. 무엇 하나 계산되지 않은 행동이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겸손하고 주님께 의지하려 하는 사람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구원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며 똑똑함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나는 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나 않은가? 혹은 구원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기 위하여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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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푸체, 땅의 사람들

-김종근 신부-

 

중남미 대륙에는 많은 원주민 부족이 있다. 그들은 500여년 전 스페인·포르투갈을 선두로 한 유럽의 세력들이 밀려들기 전부터 고유의 훌륭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잉카 문명·마야 문명은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부이다.

칠레 남부에는 마푸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현대 문명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땅의 사람들’이란 뜻의 부족 이름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안데스 산맥의 풍부한 산림과 태평양의 다양한 수산자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자와 밀을 재배한다. 소나 말의 힘을 빌려 감자와 밀을 심고 나면 추수 때까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오직 농사에 적당한 날씨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땀을 흘려 열심히 일을 하여 씨를 뿌렸으니 이제 거두는 것은 하늘에 맡길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를 내리고 햇볕을 주시며 바람을 움직이며 농사를 짓게 하는 어떤 큰 힘,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삶 속에서 ‘절대자’, ‘신’의 존재를 체험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그들에게 다가가 그 큰 힘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한다고 설명하면, 금방 “아, 그렇군요. 아멘” 한다. 물이 스폰지를 빨아들이듯 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그 존재에 ‘하느님’이란 이름을 달아드린다. 교리공부를 못해도 성서 말씀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어도 온몸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한국처럼 잘 짜인 성서공부 과정들, 야곱의 우물을 포함한 교회의 각종 인쇄물, 성지순례, 다양한 신심활동으로 바쁘고 지친 몸에는 하느님께서 쉴 자리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느님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에 굳이 하느님이 없어도 잘 굴러가기 때문이다.

‘세상을 누가 움직이는가? 나인가?, 하느님인가?’ 하느님은 나의 주님, 내 구원자, 내 생활의 모범답안이심을 숱하게 말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말과는 다르게 똑똑한 내가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운용해 나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세상을 누가 움직이는가? 하느님인가, 나인가?’ 마푸체 사람들은 하느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없고, 한국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내가 가진 것, 능력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누가 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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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버지를 아는가?

-최승일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아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심으로써, 누가? 즉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사람들”은 “예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어려움을 교묘하게 뚫고 나가는 사람”을 뜻하는 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계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박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어서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함을 단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에 무식함과 우둔함으로 복음을 대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쉬고 있는 교우의 집을 방문하여 “이제 그만 쉬시고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 봅시다.”라고 권고하였더니 그 분의 말씀이 “신부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도 알만큼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책도 여러 종류로 다 읽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회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그래도 성당에는 나오셔야죠?”라고 다시 권했더니만, “신부님, 내가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하고 있어도 아직 성당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도무지 못 느낍니다. 좀 더 공부해 보고 필요성을 느끼면, 그 때 가서 나갈 테니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친적 가운데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하도 기가 막혀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그러면 뭐하러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냥 성경책 한 권을 사다가 읽고, 하느님께 직접 ‘당신을 아버지로 모실테니 나를 당신 아들로 받아주십시오’하면 되지, 부러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기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친척 신부 수녀가 대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년이 지나고 나서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셨겠습니까? 자신이 고집하던 식으로 돌아가셨겠습니까? 그때는 유별나게 성당에 병자성사를 청하고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목자로서 씁쓸한 맛을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가고 마는 것을, 뭐가 그리 잘났고 똑똑하다고 하느님께 도전하다가 이렇게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지만, 복음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는 그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잘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마음, 즉 관리인의 자세로 겸손되이 자신의 시간이나 재능 그리고 재화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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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교만에 빠진 아시리아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를 불충실한 당신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셨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이를 알지 못하고 북왕국(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얕보고 교만에 빠졌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점령하면서 자기들이 그 나라의 신들까지도 굴복시킨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북왕국을 지키지도 못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여 하느님을 얕보고 교만에 빠진 것이다. 자신이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아시리아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한다.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서는 자는 그 대가를 치를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꽃일지라도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것이다. 젊고 성한 모든 것은 늙고 쇠하게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젊음, 성함, 능력 등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러한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언제나 젊고 화려하고 능력 있을 줄로 생각한다. 모든 것을 제 힘과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룰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처럼 자신을 모르고, 자신의 자리를 모르는 것, 그것이 죄다. 자신의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교만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자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이며,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하느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아시리아는 그 힘이 강대해져 하느님으로부터 불충실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교만한 아시리아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시리아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빈털터리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시리아와 똑같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으려 하며, 자신의 업적을 기리려 한다면 우리는 아시리아이다. 그것이 곧 죄이다. 살인, 방화, 강도, 절도를 해야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려고 하는 것이 죄이다.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 곧 죄이다. 그러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을 하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거두어가시면, 그 순간 우리는 진흙에 불과한 먼지라는 점을 깨닫고 살아가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까닭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신다는 점을 깨닫자. 그리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겸손한 신앙인, 예수님처럼 항상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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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와 슬기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김대성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자기 고백적인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 즉 어제 복음에 해당되는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감사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사람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 마음 속 깊은 곳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감사기도의 형식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은, 아무리 가르치고 설명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인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어떤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어떤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낸데...내가 좀 잘하거든....내가 좀 알거든...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는 낫거든....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고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배울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슬기로운 사람,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약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며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혜와 슬기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매일매일 내가 가진 지혜와 내가 가진 슬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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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신부-

 

요즈음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점점 바뀌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힘든 도시생활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려는, 소위 자연친화적 스타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연 속에서 얻고자하는 삶은 “단순함” 입니다. 단순한 생활 방식으로 세상을 보다 쉽고 편하게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즐기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식정보화사회는 점점 복잡
?다양해지고, 여기에 적응해야하는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바뀌어 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변해 갑니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고, 행해야할 의무와 사명이 자꾸 늘어갑니다. 마음이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복잡하고 바쁜 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한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단순함입니다. 복잡
?다양해질수록 더욱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원리와 원칙을 알고, 그것에 충실하는 단순함만이,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어린이처럼 모든 것을 단순하게 보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러합니다. 무엇을 더 많이,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제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원리와 원칙을 알고, 그 정신과 본질에 따라 올바로 행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의미로운 일입니다. 재산, 명예, 권력 같은 것을 이용한 화려함이나, 특별한 재주, 능력 지식 따위의 복잡함은 오히려 신앙생활을 어렵고 힘들게 하고,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올바르고 참된 신앙생활, 쉽고 편안한 신앙생활은 단순함에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그냥 믿고,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사욕 없이 그냥 머루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위하여 그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시는 그 분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모 품안에 평화로이 머무는 어린이처럼, 그저 단순하게 가만히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그래서 내 삶이 쉽고 편안해집니다.

독서의 아시리아 왕처럼 복잡하게 “딴 맘먹고, 엉뚱한 일이나 꾸미면”, 그 만큼 머리가 복잡해지고, 그래서 자신도, 이웃도, 힘들고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깨우쳐주십니다. “단순하라! 그래서 어린이처럼 순수하라. 그러면 하느님도, 세상도, 인간도, 알 수 있고, 그 모두를 가질 수 있다.”

세상이 자꾸만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모든 원리는 하나입니다. 세상사는 사람이나 신자나, 삶의 원리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냥 그 세상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인은 세상에, 신자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냥 거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 사랑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 스타일도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 친화적 스타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생활이 훨씬 더 쉽고 편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e~~~ 편한세상!!”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어린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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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김경식 몬시뇰-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가에 있는 도시들의 오만과 불충을 꾸짖으시고, 반면에 회당장과 하혈하는 부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다음,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예수께서 기적과 말씀으로 밝히시는 메시지를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무식하고 비천하며 버림받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셨음을 감사하십니다.

안다고 자처하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신비가 숨어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타고난 지성과 그동안 배운 지식과 민감한 통찰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숨어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사에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새로 다가오는 진실을 가려버립니다. 자기는 이미 알고 있다는 자만심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버린 탓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멸시받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려있어 무엇이나 듣고 배울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알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부자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많이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편드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부모께 다가가듯이 예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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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을 열며

 어제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요. 사실 저는 비가 오는 관계로 계속해서 운동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비만 오지 않으면 무조건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지요. 도중에 비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어제는 성지에서 유일하게 쉬는 날인 화요일이거든요. 하지만 어제 역시 창밖으로 새벽부터 쉬지 않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더군요. 이제는 비가 지긋지긋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사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듣는 노래에서도 ‘비’에 대한 노래가 많은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비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요즘처럼 계속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겨울에 내리는 눈도 그렇지요. 눈이 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눈이 폭설로 이어지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저처럼 넓은 지역에 내린 눈을 직접 쓸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 강아지처럼 좋아할까요? 이렇게 자연의 적당함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도 적당함은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많이 소유하는 것을 행복의 지름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들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보았을 때, 부자나라의 국민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더 큰 행복지수를 보인다고 하지요. 또한 로또 복권에 맞은 사람들 중에서 행복한 삶을 꾸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기사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이처럼 행복은 과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적당할 때,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을 때, 행복이 부족함을 채우러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립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겠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완벽한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 모두 철부지 같이 못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인간 세상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 모습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는 철부지 같다면 스스로를 낮추고 주님 뜻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으며, 행복도 그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완벽함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벽함을 추구합시다.

빠다킹 신부

 

 

-황영삼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의 말씀에 이어 마음이 닫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고을을 떠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5장 산상설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가난하고, 철부지 어린이 같은 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열쇠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법구경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그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 상처입은 쇠에는 산화되어 금방 녹이 생깁니다. 
그 녹은 점점 자라 어느새 돌아보면 쇠 전체가 녹이 슬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욕심과 거짓, 위선, 오만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우리의 깨끗한 영혼과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점점 커져 내 마음에는 빈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빈자리가 없다면 내 마음이 온통 나로 차있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머무실 수 없으십니다. 

오늘 하루.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조금의 빈자리를 만드십시오.
그것으로 내가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있다면 조금 놓아두십시오.
잠시 그것들과 떨어져. 가난한 마음,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보십시오.

그 빈자리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백남국 신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본당에서 신자분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레지오를 하고, 재속회를 하고, 매일 기도를 드리러 성당에 나오십니다. 또한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너그럽고 희생적이며, 동정심도 많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만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부라고 그들 앞에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척 나서지만 사실 정말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딴에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고 가르쳐 주는 대로 당신을 믿고 따라오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주님 앞에서 조금 아는 지식으로 까불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신부 노릇 하려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게을러도 열심한 척, 믿음이 약해도 강한 척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 맡기면서 사는 겸손한 사제가 존경받고 사목도 잘하겠지요. 그러나 저같이 어설픈 겸손쟁이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말기에 그냥 아는 척, 열심한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그렇다고 착하고 성실한 우리 형제·자매님들께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착한 신자들, 저 때문에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이지요. 그러니 주님 눈 딱 감고 저같이 조금 안다고 껍죽거리는 사람한테도 당신을 드러내 주시면 안 될까요? 신자들 앞에 체면 좀 서게요.

 


-이석희 신부-

 

 우리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 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 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어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 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양승국신부-
 

<헤헤거리며 다시 아버지께로>


많은 아이들을 접해오면서 제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되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철부지’들이더군요. 철부지들의 특징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틈만 나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엄청 사람 힘들게 만듭니다. 때로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듭니다.


남의 집 초대형 수족관을 깨트려 집 전체를 물바다로 만드는가 하면, 고가의 식기 건조기를 넘어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치 않다보니 형들한테 늘 구박받습니다. 가만있으면 좋을 텐데 또 대들다가 신나게 얻어터져 달려옵니다. 결국 철부지와 살아가기란 엄청 피곤합니다. 늘 손길이 많이 갑니다. 신경도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철부지들은 행복을 줍니다. 기쁨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합니다. 큰 욕심도 없습니다. 이중적이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정도 많습니다. 애정표현도 쉽게 합니다. 늘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찾아옵니다.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찰거머리처럼 꼭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사람 엄청 괴롭힙니다. 그래서 엄청 혼도 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즉시 헤헤거리며 다시 다가옵니다. 결국 철부지로 인해 자식 키우는 재미가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전혀 개념 없는’ ‘정신없이 사는’ ‘막 되먹은’ ‘예의도 뭣도 없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그런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엄마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엄마를 찾아갑니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 까지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둡니다. 엄마만이 자신의 인생 전권을 지닌 절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엄마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바로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고상한척, 유식한 척,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척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버지 없이도 아무런 아쉬움 없이 잘 살아 갈수 있다고 여기는 ‘꽉 찬’ 사람, 잔뜩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게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나는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하니 아버지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능력을 알기에 수시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사람, 그분께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가 지은 죄가 진홍빛같이 붉다 할지라도, 오늘 비록 우리가 큰 죄 속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절대로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울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철부지처럼 언제 그랬냐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주님께로 다시 나아가십시오. 활짝 웃으며 그분의 품으로 안기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런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10,5-7.13-16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복 음 : 마태 11,25-27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하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살던 한 양봉업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필리핀을 가게 된 양봉업자는 이 나라가 여름이 길고 겨울이라고 해도 한국의 초여름 같은 날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한국에서보다 최소한 세 배는 벌겠다고 계산을 한 그는 한국의 벌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예상대로 따뜻한 날씨에 꽃이 피는 기간이 길었으므로 그는 갖가지 종류의 꿀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 해에 많은 이득을 보게 된 그는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대규모로 양봉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에는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을 지낸 그의 벌들이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굳이 애써 꿀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지혜로운 삶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허황되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을 빗대어 나무라는 이야기지요. 말 그대로 잔머리를 굴리는 삶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사목자로 사목을 하다 보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빨리 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있으면 구제불능입니다. 그것처럼 변화되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고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구세주가 언제 어디에서 나실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만 알았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자기들을 비판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신 하느님을 ??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달아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불법으로 백성을 선동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단을 했지요. 많이 안다는 자체가 오히려 무서운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잘 모르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고 믿음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그랬고 병자들이 그랬으며 심지어 회당장과 로마의 백인대장까지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체험을 얻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 과거의 자기 경험과 지식의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지요. 저는 사람이 참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새삼 숙고할 때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며 수십 년을 살아가지요.

그런데 인고의 세월이 흐르고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를 알려면 다시 내가 쌓은 그것을 깨부수는 일부터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깨부수지 않으면 옆에 계신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렇게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쌓아왔는데 그것을 다시 깨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깨우친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이만큼 배웠으니 이제 다 되었다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일일신(日日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미래의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를 해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니 한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신약성경을 열두 번이나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신앙 생활을 해 왔어도 한 번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태반인데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하며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열심히 따라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바보여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은 열망에 어린아이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과 함께 한 지난 5년 동안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언제나 심사숙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신앙 생활이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 <사회복지시설 돕기>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하자는 대로 따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대로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하지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내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집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유를 얻게 되지요.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바탕은 역시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26)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지요. 저 역시 여러분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복된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은 완고한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처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매일 매일 새롭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욕(無慾)의 지혜"
-
이수철신부-



얼마 전 미사 중의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이제 기억력도 떨어지고...

  머리 좋아지길 기대하긴 힘들겠구나.
  머리 대신 마음 좋아지는 일에,

  믿음, 희망, 사랑, 겸손, 지혜 등 덕목을 키워가는 데 힘써야 되겠구나.

  나이 들어 조금씩 퇴화되어 가는 신체의 기능을 안타까워할게 아니라

  속사람을 키워가야 되겠구나.

  몸의 눈이 어두워 갈수록 마음의 눈을 밝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느님 떠난 머리 좋은 똑똑한 바보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야 발전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는 한정적인 자원을 고갈시킴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현대 문명입니다.

 

편리와 신속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이

알게 모르게 인간의 내면을 천박(淺薄)하게 만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지칭하는 대상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입니다.
외관상 하자 없는 똑똑하고 유식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부지들이 지칭하는 대상,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무욕의 사람들입니다.


알고 보면 여기서 철부지들은 실속의 본질을 사는 지혜로운 이들이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허상을 사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욕심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욕심 없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지혜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탐욕 덩어리라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무한한 탐욕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탐욕이 눈을 가려버려

학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만듭니다.


똑똑한 머리와 그 많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눈을 가려 패가망신 하는 이들이나

노추(老醜)의 말년 인생 보내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마음 가난한, 무욕의 겸손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도 이들을 알아주십니다.
공부나 머리 부족해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도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임금이 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습니까?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로 가득 찬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서 중 확 눈에 띈 대목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눈에 거슬리는 ‘내’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시리아 임금은 나로 가득 찬 똑똑한 바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똑똑한 바보들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버리시리라.”


아니 하느님을 잊고 끝없는 탐욕의 노예 되어 사는

모든 현대인들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무지(無智)한 현자,

무식한 유식의 철부지 사람들이 새 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문득 계간지 ‘녹색평론’ 89호 책

머리말 마지막 말이 화두처럼 남아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너무나 외적 진보라는 허상에 홀려 살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진보가 아닌 개안, 혹은 회심의 철부지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무아의 겸손한, 무욕의 지혜로운 철부지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어린이가 되라
-강영구신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대에게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어린이의 눈을 보십시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는 어린이의 눈은 투명하고 평평한 거울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오만과 아집으로 비뚤어진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가식과 허위의식으로 흐려지고 때 묻은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린이의 작고 붉은 입을 보십시오.
그 입에 기도와 노래가 담겨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어린이의 입에 거짓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하기 위해서(마태5,37),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어린이의 입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욕하고, 남을 헐뜯고 이간질하며 악담하는 입은 지옥(地獄)의 입구(入口)입니다.

어린이의 작고 앙증맞은 두 손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쥔 것이 없지만 그 손에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모자라서 헐떡이는 탐욕스러운 손으로는 행복을 움켜쥘 수 없습니다. 훔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손으로는 지옥(地獄)을 만들 뿐입니다.

당신도 어린이가 되십시오.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요한3,3).
스스로 죽는 사람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一明)

 마산교구


 

 † 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박상대  신부 -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살 때 이미 소곡(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말하면 어제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선언을 맞은 대상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 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哲學)을 통하여 신(神)의 존재(存在)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神)은 한낱 절대자(絶對者, Absolutum)일뿐, 이 분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육화(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肉化)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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