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야 할 인생들
요한복음3:1-8
뉴욕의 이발사조합이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특이한 이벤트를 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센트럴파크에서 몇몇 노숙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솜씨 좋은 이발사들이 나와서 노숙자들의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주고, 또 깔끔하게 면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 한 양복을 입히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발사들은 자랑스럽게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이발이 때로는 인생을 변화 시킵니다’라는 광고까지 찍었습니다.
그리고 협조를 구해 호텔과 레스토랑에 취직까지 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발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직장을 구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노숙자들은
다음 날 다시 거리로 가서 노숙을 했고,
출근을 하지 않아 하루 만에 직장에서도 쫓겨났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그들의 변화가 외형적인 변화에 불과했고 외형적인 변화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쫓아다니며 죽이려고 했을 때 오히려 다윗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는 두 번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깊은 굴속에 들어가 볼일을 볼 때 그 안에는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 같았지만 그 마음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을 쫓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두 번째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밤중에 사울이 거하는 곳에 몰래 잠입한 다윗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는 사울 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사울 왕의 창이 있었습니다.
그 창으로 찌르면 단번에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그 창과 물병만갖고 돌아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사울왕은 이번에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더 이상 다윗을 쫓지 않겠다며 자기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 이후에도 내가 사울의 손에 붙잡히겠다는 생각을 갖고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망명을 신청합니다.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을 생각할 때 사울왕은 마땅히 변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더 이상 다윗을 쫓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윗을 쫓는 일을 계속하였고 죽일 계획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사람은 정말 변하기 어려운 존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울왕도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들도 똑같습니다.
사울왕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솔직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변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의 요소를 갖고 태어납니다.
어릴 때에는 아무런 죄가 없고 천사와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죄의 요소가 잘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지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점차 성장하면서 속에 있는 죄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오염된 사회를 경험하면서 더욱 죄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 속에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죄의 성품 때문에 인간은 좀처럼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사회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교육을 통하여 사람을 변화시키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법의 힘을 빌어서 죄를 짓지 못하도록 억제하기도 합니다.
죄를 범하면 벌금, 징역, 무기징역, 사형과 같은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서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도덕과 종교를 통하여 인간이 지녀야 할 올바른 삶의 가치와 자세를 가르쳐서 인간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날마다 죄의 결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각종 질병이 발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가운데 신음하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먹지 못해서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질병이나 기아에 희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늘 염려와 불안과 고통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 영원한 사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근본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그 변화 때문에 평안이 임하게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도리며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밤중에 자기를 찾아온 니고데모를 향하여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거듭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좀 더 확대해서 말씀드리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볼 때 거듭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어린이 찬송 중에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찬송이 있는데,
그 가사를 보면 ♪‘돈으로도 못가요, 힘으로 못가요, 벼슬로도 못가요, 지식으로 못가요, 어여뻐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가요’
그러나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오직 거듭날 때 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겉으로 볼 때는 정말 행복하고 평안하고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최선을 다했던 당시에 한 6천명밖에 안 되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국회의원정도 되는 권력자였습니다.
거기다가 돈도 많은 부자였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당대의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 있고 유명하고 지식도 있고 어디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 비해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먼저, 나이가 많이 어렸습니다.
짐작하건데 니고데모는 60-70대 정도로 추측하는데 예수님은 이제 30이 갓 넘었습니다.
랍비라는 이름은 갖고 있었지만 갈릴리 나사렛 시골에서 올라온 학문도 없고 이름도 없는 무명의 랍비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사람이었고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니고데모와 예수님과는 정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하고 힘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춘 니고데모가 별 볼일 없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니고데모에게도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모든 삶이 평안하고 어디 하난 부족할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도 문제가 있었고 근심걱정이 있었습니다.
인간역사에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솔로몬도 그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서 무엇이 부족해서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것은 지금도 충분합니다.
그것 때문에 행복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의 문제, 인간 삶의 문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외적인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 니고데모를 향하여 주님은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명예와 권력과 부를 가지고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변화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거듭남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먼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계속되는 축복의 나라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천국의 삶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런 축복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 값을 치러 주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죄에 얽매여서 죄의 노예로 살지 않게 됩니다.
모든 죄를 사함 받음으로 우리는 죄의 형벌을 받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거듭나는 삶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고 거듭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5절 말씀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물은 일반적으로 세례를 의미하고 성령은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죄의 사람이 의의 사람으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멸망 받을 사람이 영생 얻을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잘한 일은 없습니다.
다른 일은 잘 못했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가장 잘 살은 사람이고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셨고 그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하셨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성령님이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데에는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잊지 마시고 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는, 거듭남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므로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형상을 입었고 본질이 바꾸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듭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자질이 생겼고 성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모트는 37세까지 캐비닛 제조공으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어느 겨울 그는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교회를 보고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그때 존 하야트 목사가 요한복음 3장으로 ‘거듭나는 도리’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래, 나도 거듭나야 한다.’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게 됐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내 망치 소리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전에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행복한 목공으로 완전히 변화되었고 삶도 점점 풍요로워졌고 자기가 일하던 목공소가 그의 소유가 됐고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모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고 예수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찬송시를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듭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22.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