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4주차] 피아노로 채우는 일상
오랜만에 악기 연주에 빠져 퇴근 후 일상을 피아노로 채우고 있다. 마침 투고한 논문이 통과되어 등재지에 게재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논문은 안 쓰고 무슨 악기를 연습하냐'는 스스로에 대한 다그침, 가까운 사람들의 의아함에 조금 더 고개를 뻣뻣하게 세워본다. "나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든데 악기 연주를 하다 보면 다 잊혀져.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힐링 시간이야." 말한 후, 피아노 책들을 뒤적거린다. 왜 갑자기 피아노에 빠지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직장에서의 나'와 '그냥 나'를 분리시켜 스스로를 지키려 애썼던 것에서 연유했음을 발견했다.
직장에서의 삶이 팍팍하고 퇴근 후에도 힘들었던 시간들이 머릿 속을 맴돌아 한 달에도 몇 번씩 클래식 공연을 보러 다녔다. 피아노, 바이올린, 오케스트라 연주회 예매를 해두고 예매한 날짜가 다가오면 설렌다. 공연장의 아늑한 의자에 앉아서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때의 들뜬 공기, 연주자의 연주에 정신줄을 그냥 맡겨버리고 따라갈 때의 이끌림, 멈췄던 숨을 돌리고 한층 밝아진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는 인터미션, 연주가 끝나고 맡는 밤공기와 반짝거리는 시내의 야경은 '충만하다'로 귀결된다. 일상을 살아가며 가슴 뛰는 순간들이 몇 안 되는데, 공연을 보러 갈 때만큼은 현실을 벗어나 가슴이 트이는 시간이라 아무리 바빠도 순전히 나를 위해 꼭 확보하는 일정이다. 그 중 피아노 연주회는 특히 시간을 조율해서라도 가게 된다.
예술에 나를 퐁당 담가놓으면 내 마음이 정화된다고 믿어서였을까, 어릴 때부터 집에서 늘 들어왔던 어머니의 피아노소리가 그리워 마음의 고향을 찾듯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서였을까, 저렇게 아름다운 곡을 내가 직접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을까, 아직 뚜렷하지 않지만 지금 아니면 못하겠다 싶어서 몇 일 고민 후 피아노 학원에 상담을 하러 갔다. 기초부터 차근히, 다시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드린 후 레슨 시간을 잡았다. 교대에 다닐 때 피아노 실기 과목이 있어 조금씩 쳤을 때도 단지 악기라는 이유로 재미를 느꼈었는데, 이번엔 정식으로 피아노 개인교습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생각이 많고 복잡한 감정에 그대로 휩쓸려가기도 하는 스스로가 벅차 종종 힘들어할 때가 있는데, 선생님께 레슨을 받고 배운 곡을 반복해서 연습하며 생각이 단순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힘든 마음들, 지친 시간들을 잠깐 꺼놓고(mute) 곡에만 집중하며 마음이 맑아졌다. 대학원 공부를 하며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감수성이 풍부해. 철학도 감성적으로 풀어내.'라는 말을 듣는게 힘들었는데, 악보를 건반에 표현하며 감성을 그저 있는 그대로 쏟으면 되니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했다. 음악을 굉장히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연주자들도 있지만, 클래식답게 악보를 정확하게 구현하되 감성을 오롯이 손가락에 싣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행복하게 피아노를 배우는 중이다.
그렇게 피아노 레슨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 연주회 참가 제안을 받았다. 연습실 밖에서 연습하는 걸 들으시고, 소리가 좋고 잘 치니 마음에 곡을 골라 9월에 있을 연주회에 참여해보는게 어떻냐는 말씀이었다. 연주회까지 시간이 좀 남았고 '또 언제 해보겠어' 하는 마음에 선뜻 수락을 하고 곡을 골랐다. 새벽까지 클래식, 뉴에이지, ost 등 여러 곡들을 들어보며 고른 끝에, 계속 들어도 또 듣고 싶었던 김광민의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 를 선정했다. 그렇게 연주회를 위한 곡 레슨과 연습이 시작되었다.
출퇴근길, 오후 업무, 집안일을 하며 반복적으로 듣고 또 들었다. 계속 들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곡을 연주회 곡으로 선정한 덕분에 곡이 조금씩 무르익고 막막했던 연주가 손에 붙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예술고등학교가 있어서 악기 연습실이 엄청 많은데, 각기 다른 그랜드 피아노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하루 1시간씩 다른 연습실을 대여해 매일 조금씩 피아노 연습을 이어가고 있다. 퇴근하고 저녁 수업 전에 잠깐 짬내어, 토요일 아침 일찍 잠깐, 친정에 들렀을 때 어머니의 피아노로 잠깐씩 그렇게 일상을 피아노로 채워가고 있다.
작가이자 유튜버인 김겨울은 그의 에세이 <아무튼, 피아노>에서 "하나를 깊게 파고들어 가는 걸 즐기는 성향의 사람에게 클래식 피아노는 그야말로 끝없는 노다지라고 할 수 있다(아무튼 피아노, 57)."고 했다. 정말 그랬다. 하나에 꽂히면 깊이 파고드는 나의 성향을 피아노를 치며 한 번 더 발견하고, 또 그런 성격 덕분에 진득하게 의자에 앉아 연습하는 시간이 힘들지 않고 즐거웠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경쟁의 순간이 오면, 내가 더 많이 가져가거나 이겨버려 다른 사람이 슬픈 것도 마주보기 어렵고, 내가 져버려 상대적으로 패배감을 느끼는 것도 싫어 양보해버리거나, 이겨도 마음 편하지 않고 주눅들어 눈치를 봤다. '경쟁'이라는 단어가 갖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춰 살았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니라 나의 곡을 완성시켜나간다는 점에서 충만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매일 조금씩 채워가는 연습,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피아노 치는 것도 꼭 논문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조금씩 글을 쓰다 보면 논문이 진행될 거라며 격려해주시는 지도교수님의 말씀과 오버랩되어, 꾸준히 성실하게 이루어가는 나의 곡, 나의 글, 나의 논문, 나의 예술, 나의 학문, ... 을 꿈꿔본다. 오늘도 시간 여행을 떠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간다. 피아노로 채우는 일상이 퍽 즐겁다.
첫댓글 음악을 좋아하는 저인데. 요즘 너무 많은 일에 벌려놓아서 무엇부터 해야할 지 헤메이고 있는데.. 꾸준하게 집중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 도전이 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