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소드 5. 수리남 ■
최은택 9단의 부친 최부동씨.
붕어눈 같은 눈을 꿈뻑꿈뻑 거린다.
방금전 고향 동생이자 선우의 모친인 선영이 부탁해 잠시 그녀의 어린 딸 베이비 시팅을 하고 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유진이가 말한다.
"아저씨, 우리 잼있게 놀아요."
"허~~ 그래 뭐하고 놀까?"
"종이 인형이랑 옷들 오려 주세요."
큰일이다. 요즘 수전증이 오려나... 섬세함이 요구되는 수작업에 부쩍 자신이 없어지고 있는 중..
"좀 오려주거라."
급기야 방구석에서 바둑 수련에 여념없는 택이에게 내민다.
택, 인형과 인형 옷 몇벌이 그려진 도화지 제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10분이 지나도 자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그 깊고 해맑은 사슴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부전자전이라고 역시나 몹시 과묵하신 아빠 최부동씨, 보다 못해 살짝 역정내신다
"자나?"
"뭐가 선이고 뭐가 후인지..... 인형을 옷에 맞춘다는 생각으로 인형을 먼저 오려야 하는지... 옷을 인형에 재단한다는 생각으로 먼저 오려야 하는지... 아빠, 가위는 지금 제 손에 있지만 가위가 자르는게 아니거든요. 제마음이 자르는 거거든요..."
'허~~ 날 닮아 그렇게 단순했던 녀석이 바둑판만 들여다보며 살더니 만사가 쓸데없이 심오해졌구나 허~~'
"택이 오빠. 의미를 부여하지마.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오만가지에 의미부여 한다고들 난리짆아. 거기 부화뇌동하지말고 그냥 생각이란걸 하지마. 아무 생각없이 그냥 오려줘 오빠"
눈이 휘둥그레지는 최씨 부자.
어떻게 여섯살짜리 꼬마입에서 이런 말들이...알고보니 신동인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택.
"유진아. 너 니네 오빠 닮아 이렇게 똑똑한거야?♡♡"
"응 티비에서 봤는 건데 울 오빠가 설명해줬어."
'허~~ 쌍문1동에서 전교 1등만 하는 남매 나오겠구먼. 선영아, 니 얘들 아주 똑 소리가 나는구나 허~~'
같은 시각, 88 올림픽 선수단 입,퇴장식 피켓 걸들로 선정된 서울시내 각학교 여학생들이 효창공원에 집결, 첫 연습을 하게 되었다.
지도교사는 미모의 배화여고 무용쌤 한탁희씨.
"얘들아. 이번 올림픽 피켓 걸의 생명은 워킹이야. 니들 다 한복 입고 입장 하는거 알거야. 한복입으면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데 워킹이 뭐가 중요할까 싶지? 한복입고 속도있게 걷다가 스텝 꼬여봤니?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최소 중경상으로 가는 거야. 한복에 휘감겨 수습불가 사태가 올 수 있단 거지 ."
"근데요 쌤."
연습생중 하나가 질문한다. 덕선이다.
"명단 보니까 저는 수리남 피켓걸이라는데 수리남... 이거 진짜 나라 이름 맞아요?"
(맞어맞어. 세상에 그런 나라가 있었나? 웅성웅성~)
(명찰을 보며)
"쌍문여고 덕선이라구? 당연히 대회 참가국으로 여기 오는 엄연한 국가지. 피켓걸이 자기가 대표할 국가에 대해 국가 존재여부 조차도 의문을 가진다는건 피켓걸의 자긍심과 동기부여에 너무 치명적인 거야. 넌 수리남에 대해 공부해와서 내일 연습시간에 발표한다. 알았지?~~~*^^"
다시 워킹 지도 들어가는 탁희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얘, 난 그 명단 첨 받았을때 오타 난줄 알았어. 내 30 평생 그런 이상한 나라 이름 첨이야. 진짜,, 나라 맞어??"
석양에 붉게 물들어가는 쌍문동의 저녁 하늘.
오늘도 역시나 책상앞에 웅크리고 앉아 열심히 하고있는(무얼?) 큰아들의 등짝을 보며 말씀하시는 라미란 여사.
"정봉아 너 또 공부하는거야? 저녁 먹고 하자. 넘 무리하면 안돼."
"어머니 저 지금 바쁩니다. 나중에 먹을께요."
'955 마리 완성. 드디어 1000 마리가 목전이구나... 만옥씨, 오로지 만옥씨만 생각하며 한마리 한마리 접었습니다. 이 학들에 깃든 나의 마음과 손길을 만옥씨가 느껴야 할텐데...... '
종이학 작업 너무 열심히 했더니 온몸이 뻐근해지는 정봉. 그래 잠시 쉬었다가 열접하자. 쉬는 데는 공부가 최고지. 공부만한 휴식이 없다.
정봉은 본인의 심심풀이 땅콩 혹은 여가용 도서라 칭하는 맨투맨 종합 영어를 펴든다.
"어디 보자... 어라? 최신판 고사성어, 속담 독해? 뭐야 왜이리 단촐해."
● 일전에 몇몇 분들이 임시(?) 슬로건들 올리셨던 기억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극소수만 업뎃했어요
<이하 맨투맨 사이비 종합영어 193쪽>
Stone dead forever
무너져내리는 돌집은 영원히 무너져 내리게 둘지라.
(그럼그럼 그게 예의지...)
Are you dead yet?
매사신중, 확인사살.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건너라.
(좋은 말이다. 만옥씨랑 결혼하면 가훈 삼아야겠다)
Yesterday don't mean shit
어제 싼 똥은 치우지말라.
(음... 뒀다가 언제든 치워면 된다는 거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라는 휴머니즘이 느껴진다)
Where death is most alive
귀신 씨나락 까먹는 곳이 존재하나니.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어)
Destroy what destroys you
인과응보. 가는 정 오는 정
(예전 독해때 Love us or hate us 계보를 잇는 공명정대함의 끝판왕이구나)
Show must go on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하느니.
(앗 진리다.. 그만 쉬고 학 계속 접으란 경고인가...)
각자 저녁식사후 쌍문동 아해들은 아지트인 택이 방으로 집결했다.
"덕선아 너 올림픽 피켓걸 한다매? 너가 맡은 나라는 어디야? 독일? 프랑스? 사우디?"
"으으응~~ 수리남이야."
답변하는 애도 듣는 애들도 모두 애매모호한 눈빛.
도룡뇽이 묻는다.
"수리남??? 그거 영어 맞어? 나라 이름이 남해 어디 마을 이름 같어.."
(웬수같은 짜식...)
"무식한 것들. 공부 좀 해라 공부. 공부해서 남 주냐"
"덕선아. 니 입에서 그 말 나올 입장은 아니지."
심오하기를 접고 아무 생각않기로 결심한 택이 입에서 아무 생각없이 자연스레 튀어나온 말이다.
택이에게까지 디스당한 덕선.
"수리남은 남미 북부쪽에 있는 나라야."
정환이 갑자기 학원강사 모드로 돌입하며 수리남(Suriname) 해설에 들어간다.
"아무래도 덕선이가 본인이 안내하는 나라가 너무 생뚱맞을 것 같아 백과사전을 찾아봤어. 수리남은 우리가 익히 아는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그리고 유럽연합 EU에 맞선 세계연합 총재 후보 매노워 지지 세력들이 결집해 있는 나라 가이아나- Guyana- 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인구 60만의 작은 나라야. 한반도의 1.6배쯤 되는 면적을 가졌는데 수산 산업과 목재업이 국가 근간 산업이래. 의외인데 네덜란드어를 사용한다는군"
듣고 있노라니 과외때 국가 지리학 설명에서 보여준 보라누나의 카리스마가 떠오르는 선우.
'보라누나도 국가 소개 끝내줬지. 보라 누나.... 보고싶다 심보라..... 보라야 ...'
보라 생각에 급기야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지며 또 시작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싸아해지는 방구석 공기. 아해들의 눈총을 한몸에 받고 있슴을 깨달은 선우, 웃슴 수습 들어간다.
정환이의 열강을 들은 덕선, 너무 기쁘다. 숙제가 한방에 해결됐다.
"어이 개정팔~~ 나에 대한 배려심이 이렇게 넘쳐날줄 몰랐는데? 친구 덕 좀 보자. A4용지에 복사해서 낼 등교 전에 좀 주라. 나 오늘 정환이에 대한 감사 차원에서 올만에 담다디 쏜다. 렛츠 고우~"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
담다디다담 담다디담~~~
덕선의 무아지경 담다디 세러모니. 몸치인 덕선이가 유일하게 안무 마스터한 곡으로 공짜로 보는게 송구해질 정도로 환상적인 춤을 시전해준다.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본다.
진짜 귀엽다...
우리 덕선이 짱이야...
순간 도룡뇽, 찬물에라도 끼얹힌듯 정신이 확 든다. 아뿔사....
"야 짜식들아 좋냐? 좋아? 덕선이가 저렇게 우리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개다리춤까지 춘다는 건 우릴 전혀 남자로 안본다는 거야. 아무리 우리들이 개브랄티 친구들이라지만 비참해진다야..."
선우, 괜히 기분이 나빠질락 말락 했지만 그녕 넘어가는 분위기, 덕선의 개다리춤에 계속 호응한다. 보라누나만 날 남자로 보면 돼.
택이는 여전히 귀에 걸린 입이 도무지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난 좋아. 귀여워 미치겠어♡♡♡"
정환이만 낯빛이 스톤데드빛으로 변했다. 도룡뇽의 말이 사시미처럼 마음을 후벼판다 더이상 덕선의 개다리춤에 호응할 기분이 아니다. 그런거야 심덕선? 그렇게나 남자로 보이지 않는거냐?.........
담다디는 그날밤 쌍문동에서 각기 다른 감정들을 품고서 그렇게 울려 퍼졌다.
뭔가를 도통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덕선이가 피켓 걸 연습을 단 하루도 안 빠지고 정말정말 열심히 했다.
오죽하면 탁희쌤 왈
"우리 피켓 걸들이 자랑스럽다. 정말 열심히 한다. 특이하게 무명 국가 피켓 걸들이 더 가열차게 연습하는데 지도교사로서 감동받을 지경이다. 그중 특히 수리남 피켓 담당 학생은 수리남에서 감사패라도 줘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피땀어린 정성으로 연습한다."
오늘도 각자의 바쁘고 고단한 하루를 보낸 뒤 모두 모여 둘러앉은 저녁 밥상.
티비에선 스포츠 뉴스 중계중이다.
<<< 서울 올림픽을 일주일 앞둔 현재 갑작스런 불참 통보를 해온 선수단이 있습니다. 태능 선수촌에 나가있는 송사랑 기자 나와 주세요 >>>
<<< 네 이곳은 각국 선수단 맞을 채비로 한참 분주한 선수촌입니다. 올림픽 개막식을 일주일 앞둔 현재, 남아메리카 수리남 선수단의 불참 통보로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된 선수촌은 당황하고 있습니다. 수리남 정부는 현재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상황인데요. 교포 출신 황 모 목사의 현지 마약 밀수, 밀매에 전 안기부 출신 박 모씨 그리고 전직 경찰 출신의 하 모씨가 개입된 대대적인 마약전쟁이 수리남 국가 내전에 준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어 급기야 정부는 올림픽 불참을 통보해왔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엔비에이 뉴스 송사랑입니다 >>>
밥숟가락 떨어뜨리는 덕선.
"우리 덕선이가 하는게 바로 저 나라 아니당가? 솔차니 날벼락이구마이."
"다된 밥상에 재 뿌리는 황 모 목사가 도체 누구고? 고마 쌔리삐까마. 덕선아 괜찮대이. 또 다른 기회가 안 오겠나. 아가 고마 울그래이."
엄마 말대로 덕선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잠비아 공화국 피켓 걸이 아파 대타로 뛰게 된 덕선이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88 서울 올림픽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수리남... 아프리카 잠비아보다도 더 인지도가 낮은 나라, 무명중에 무명 나라이고 그런 곳에도 사람들이 사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한국인들조차 일찌감치 그 머나먼 미지의 나라에 둥지 틀고 살고 있었던 거다. 우리가 전혀 볼 수 없을 뿐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시베리아 벌판에서도, 페루의 고원지대에서도, 이름모를 나라, 장소에서도 여전히 사람들 살아가고들 있다. 똑같이 웃고 울며, 지금 이시각에도...
https://youtu.be/nM-kA9eqjuI?si=KmtuzQocsGbHsGG4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첫댓글 왠열!!^^ In Conspiracy with Satan!!^^
수리남 엄청 재밌었죠.. 씨이익
GRRRR~!!! ^^ 다시 돌아온 왠열...^^
역시 재밌습니다
수리남!!! 왠열!!!
Yesterday don't mean shit
수리남 재밌게 보았는데 말이죠
저도 수리남 재밌게 보았습니다.
님의 소설도 그 못지 않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거기 부화뇌동하지말고 그냥 생각이란걸 하지마.
- 감동입니다 -
최부동씨~~^^*
왠열~~~^^
너무 우껴요 ㅎㅎㅎ 😆
탁희 🤣🤣🤣
주겨블구마이
으역시~~^^*
하하하
추앙합니다
왠열
왠열
Yesterday Don't Mean Shit~♡
왠열
재밌어요~!! -_^
와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