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머 리 말 Ⅰ. 우구데이 및 뭉케 시기의 남송공격 Ⅱ. 쿠빌라이의 즉위와 남송공략책의 수정 Ⅲ. 양양(襄陽)․번성(樊城) 공방전의 시말 맺 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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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13세기에 접어들며 유라시아 대륙은 급격한 군사적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바로 내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건설된 몽고제국의 정복사업 때문이다. 12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몽고부족은 그저 그렇고 그런 유목세력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 무렵 몽고초원 일대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간 뒤엉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화를 보이기도 했으며, 또 이러한 불화가 때로는 심각한 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세기 후반 몽고부족에 이수게이와 테무진이라는 영웅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등장으로 이전까지의 세력균형은 무너지고, 초원사회는 몽고부족에 의해 급속히 통합되어 갔다.
테무진에 의해 초원의 유목지대가 통일되는 것은 대략 12세기말의 시점이었다. 이러한 통일을 바탕으로 테무진은 1206년, 유명한 오논강변의 쿠릴타이에서 칭기스칸으로 즉위하였다. 몽고족을 형성하는 주요 부족들의 수장이 모인 회합, 즉 쿠릴타이를 소집하고, 여기서 초원사회 최고 정치지도자인 칸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몽고제국의 수립이다.
초원지대 유목민들의 역량을 결집시킨 몽고제국의 군사력은 곧바로 사방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장 먼저 남쪽의 서하, 다음으로는 동쪽의 금(金), 이어 서요(西遼) 등이 무적의 몽고 기병대에 의해 무너졌다. 훗날 유럽인들에 의해 ‘타타르의 평화(Pax Tatarica)’라고 불리게 되는 대제국의 건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외 정복에 나선 몽고 기병대의 전투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엄청난 기동력과 규율, 그리고 치밀한 정보수집에 기반한 적응력 등은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13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몽고 군대는 불패의 신화를 쌓아갔다. 그 어떠한 상대방도 몽고의 군사력 앞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파미르 고원의 서부에서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호레즘 왕국이, 몽고의 공격 앞에 거의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린 것은 그 단적인 예의 하나이다.
이와같은 몽고제국의 대외정복은 13세기 중반이 되며 강남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왕조, 남송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런데 이 남중국의 무력해 보이기만 했던 국가 남송은, 몽고제국의 무력에 맞서 의외라 하리 만큼 강인한 저항력을 보여준다. 몽고와 남송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는 것은 1234년의 일이었다. 이때로부터 1270년대 중반까지, 남송은 불패를 자랑하던 몽고 기병대의 전진을 무려 40년 이상이나 저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몽고의 남송정복전에 있어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이다. 양양과 번성은 양쯔강의 중류 지역, 그것도 지류 가운데 하나인 한수(漢水) 유역에 위치한 성채였다. 이곳을 둘러싸고 1268년 이래 1273년까지 무려 4년여에 걸쳐 원조(元朝)와 남송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승패는 곧바로 패자인 남송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양양․번성 전투의 패배로부터 남송의 패망까지는 불과 3년이 걸렸을 뿐이다. 남송은 1230년대 이래 1260년 전후까지 몽고군의 대대적인 남침을 두 차례나 막아내었다. 하지만 1268년에 시작된 국지적인 전투, 양양․번성의 공방전에서 실패하고는 곧바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본논문에서는 몽고와 남송 사이의 공방전에 있어 가장 정채나는 대목, 즉 양양․번성의 전투에 대한 개괄을 시도하고자 한다. 몽고와 남송이 개전하게 되는 사정에서부터, 1230년대 우구데이 및 1250년대 뭉케 시대의 남송 공략 과정을 더듬어보고, 이어 양양․번성의 전투가 시작되는 전후의 사정, 그리고 그 시말까지를 가능한 한 평이하게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울러 남송 정권의 방어체계, 무장 집단에 대한 통제구조 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검토를 행하고자 한다.
Ⅰ. 우구데이 및 뭉케 시기의 남송공격
1232년 1월 우구데이 휘하의 몽고군은 금(金)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금측은 진천뢰(震天雷)라는 대포를 앞세워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인 1233년 5월 수도 개봉을 빼았겼다. 금의 황제 애종(哀宗)은 개봉이 함락되기 전 탈출하여 하남성 남부의 채주(蔡州)로 도망갔다.
이렇듯 몽고군의 금 공벌전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기, 몽고와 금은 모두 남송에 사자를 파견하여 그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먼저 사자를 파견한 것은 몽고였다. 몽고는 1232년 12월 양양(襄陽)에 주둔해 있는 남송의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사숭지(史嵩之)에게 사신을 보내, 금 공격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금의 채주를 송과 연합하여 공격하자는 것, 그리고 송에게 군량을 제공해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숭지는 몽고측의 제의를 수도에 즉시 보고하였다. 남송 조정에서는 그 수락여부를 둘러싸고 쟁론이 벌어졌다. 일부 신하들은, 과거 북송시기 금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켰다가, 뒤를 이어 금의 공격을 받아 화북을 빼앗겼던 전철을 밟는 것 아닌가 하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금을 멸망시켜 옛 원수를 갚자는 압도적 다수의 주장에 묻혀버렸다. 남송은 1233년 6월 몽고측에 사자를 보내 그 제의의 수락을 통보하였다.
금의 사자는 이미 남송이 몽고의 제의를 수락한 이후인 1233년 8월에 찾아왔다. 금은 남송과 몽고 사이에 맹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의 사자는 남송에 대해 호소하였다.
몽고는 40개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서하에 이르렀습니다. 서하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남송일 것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것,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남송이 우리와 동맹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남송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금의 사자가 아무리 간곡히 하소연을 해도 남송은 이미 방침을 정한 후였다. 남송은 금의 연대 제의를 일축하고, 몽고와 체결한 맹약에 따라 이 해 10월 명장 맹공(孟珙, 1195~1246)을 파견하여, 몽고의 금 공격을 지원토록 하였다. 맹공은 군대 3만명을 이끌고 채주에 당도하였다. 이러한 몽고와 남송의 연합군에 의해 1234년 정월 마침내 금은 멸망하고 말았다.
맹공은 자살한 금 애종의 유골을 지니고 개선하였다. 남송의 조야는 상하 할 것 없이 원수를 갚고 국치를 씻었다는 기쁨에 휩싸였다. 황제 이종은 금 애종의 유골을 종묘에 모셔진 휘종․흠종 두 황제의 초상화 앞에 바치고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였다. 이어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금 멸망의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이 행해졌다.
이러한 흥분이 가시고 난 후 이제 몽고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대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내외 대신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대략 사숭지를 중심으로 하는 신중론자들과, 재상 정청지(鄭淸之)를 중심으로 하는 적극론자들이 팽팽히 맞섰다. 신중론자들은 몽고를 자극하지 말고 국경에 대한 방비에 진력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적극론자들은 화북일대로 진군하여 옛 북송의 영역을 수복하여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적극론자들의 주장은, ‘몽고군은 이미 북쪽으로 복귀하고 하남 일대에는 아무런 군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군사정보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견 대립 속에서 황제인 이종은 적극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종은 자신의 치세 동안 하남을 회복한다는 공업을 이루고 싶어했다.
이에 따라 1234년 6월 하남일대를 수복하기 위한 군대가 파견되었다. 남송의 군대는 무인지경을 달려 개봉과 낙양에 입성하였다. 북송시대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이들 도시는 오랜 전란의 끝에 거의 폐허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남송군의 진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송군은 군량 부족에 허덕였던 데다가 곧바로 몽고군의 역습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빈 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출정 명령을 받고 당당히 출발한 지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남송의 역사서에서는 이러한 하남 일대에 대한 진공을 ‘단평입락(端平入洛)’이라 부른다.
몽고는 남송측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았다. 1235년 2월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의 축성이 완료된 직후 쿠릴타이를 열어 남송의 정복을 결정하였다. 남송 정벌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의 3군으로 편성되었다. 서로군은 우구데이의 둘째 아들 쿠텐(闊端)의 지휘 아래 사천방면으로 진군하고, 중로군은 셋째 아들 쿠추(曲出)의 지휘 아래 양자강 중류의 양양(襄陽) 일대로 진격하기로 결정되었다. 동로군은 장군 구운부카(口溫不花)의 통솔 아래 회남 지역으로의 진군을 담당하였다. 남송정벌군은 몽고와 거란, 그리고 한인 정예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몽고군은 먼저 서로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사천일대를 점령한 다음, 양자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와 중로군과 합류하고, 이어 다시 동로군과 만나 수도 임안으로 진격한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몽고군의 진격은 처음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1235년 6월 사천지역으로부터 회남에 걸치는 장대한 전선에서의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된 후, 대략 1년 정도가 지나자, 남송측의 중요 거점들이 함락되기 시작했다. 서로군의 경우 1236년 9월, 이전까지 몽고군의 진격을 가로막았던 장군 조우문(曹友聞)을 패사시키고, 10월에는 성도(成都)․이주(利州)․동천(潼川) 등 사천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였다. 중로군 또한 1236년 3월 양양 수비군의 내분을 틈타 요충지 양양을 확보하였으며, 4월에는 또다른 요충지 영주(郢州)를 점령하였다. 동로군은 애초부터 중로군 쿠추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강회평원이라는 기병의 활동에 적합치 않는 지역으로의 진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로군의 활동은 중로군의 남하를 지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도 진격을 계속하여 1237년 7월경에는 양자강 연안의 황주(黃州)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몽고군의 진격은 이런 정도가 고작이었다. 남송측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때의 방어전에서 특히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맹공(孟珙)이다. 그는 1236년 11월 쿠추에 대신하여 새로이 중로군의 지휘를 담당한 테무테이(特穆爾岱)의 강릉(江陵)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1239년 3월에 이르기까지 몽고군에 연승을 거듭하여 영주․양양 등의 요충지를 탈환하였다. 또한 사천지역의 전황이 급박해지자, 1239년 12월 이 지역으로 급파되어 몽고군의 동진을 저지하였다. 이 무렵 몽고군은 중경까지 점령한 후 동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맹공은 삼협(三峽) 동방의 귀주(歸州)․협주(峽州)․송자(松滋) 등지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군대를 파견하여 요충지인 기주(夔州) 등지를 수복하였다.
이렇듯 전황이 몽고측에 결코 유리하지 않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인 1241년 12월, 우구데이가 사망하였다. 이후 몽고군은 대부분 철수하고, 이것으로 남송과 몽고 사이에 벌어졌던 첫 번째 본격적인 전투도 6년여만에 종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몽고의 남송에 대한 공략이 완전히 소강국면에 접어든 것은 아니었다. 1240년대를 통해서도 접경지역의 곳곳에서 양진영 사이에 간헐적인 전투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국지전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이 사천지역의 전투이다. 우구데이의 사망과 함께 몽고군이 철수한 후, 사천지역의 방어를 총괄한 인물은 여개(余玠, ?~1253)였다. 그는 1242년 사천안무제치대사(四川安撫制置大使)에 임명된 후, 거의 연년에 걸친 몽고군의 침공을 막아내며, 이와 병행하여 산성의 수축과 둔전을 실시 등을 통해 효율적인 대몽고 방어체계를 구축해냈다. 그의 재임시기 10여년을 통해 수축된 산성만도 10여개에 이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합주(合州)의 조어성(釣魚城)이었다. 이 조어성은 훗날 뭉케 시기의 대대적인 남침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개는 산성을 수축하여 주의 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이들 산성의 주치(州治)와 성도평원(成都平原)의 둔전를 연결하는 산성방어 체계를 수립하여, 몽고 기병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우구데이의 사후 몽고의 내정은 매우 불안정한 양상을 보였다. 우구데이는 처음에 자신의 셋째 아들 쿠추를 계승자로 생각하였으나, 1236년 10월 그는 남송과의 전투 도중 사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241년 12월 우구데이가 죽자 카툰 투르게네가 섭정을 맡아, 자신의 소생인 구육(貴由)을 대칸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투르게네의 책략에 의해 구육이 제 3대 칸으로 즉위한 것은 1246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병약한 구육은 2년만에 사망하고 다시 한 동안 대칸의 자리가 공석인 채로 시간이 흘렀다. 이 사이 칭기스칸 일족은 심각한 내분 상태에 빠졌다. 제 4대 칸 뭉케(蒙哥)는 이러한 일족내의 심한 알력 속에서 가까스로 즉위하였다. 뭉케는 1251년 즉위한 이후에도 반대파들을 제압하고 제국의 기강을 세우는 일에 한참이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12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뭉케는 중단되었던 남송 공략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어 남송은 또다시 중대한 위기국면에 빠졌다.
뭉케가 대군을 이끌고 남송을 향한 친정에 나선 것은 1258년이었다. 이때의 원정군은 대략 세 개의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뭉케 자신은 주력군인 서로군을 이끌고 사천을 공략하고, 중로군은 아우인 쿠빌라이(忽必烈)가 통솔하여 양자강 중류의 악주(鄂州)를 점령하기로 했다. 이밖에 별동대로서 이미 1257년 말 이래 남하하여 운남의 대리(大理)를 거쳐 안남(安南)을 공격하고 있던 우량카다이군이, 남으로부터 북진할 것을 명령받고 있었다. 최초의 계획은 뭉케의 서로군이 사천일대를 정복한 후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악주에서 쿠빌라이의 중로군 및 별동대인 우량카다이군과 합류하여 일거에 강남지방으로 진군한다는 것이었다.
뭉케가 지휘하는 서로군은 1258년 12월경까지 중경일대의 이른바 천동(川東)을 제외한 모든 사천지역을 장악하였다. 천서(川西)와 천북(川北), 천중(川中) 일대를 점령하고 중경지역을 향한 진공의 형세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중경지역으로 진격하는 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중경의 서북방으로 부강(涪江)과 가릉강(嘉陵江)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조어성(釣魚城)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곳에는 합주(合州)의 지주(知州) 왕견(王堅)이 군민(軍民) 10여만 명과 더불어 지키고 있었다. 뭉케는 1259년 정월 사자를 파견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왕견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사자를 살해하고 강력한 저항의 의지를 보였다. 뭉케는 격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친히 조어성 아래로 진군하였다. 유명한 조어성의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몽고군은 수많은 공성(攻城) 병기들을 사용하여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조어성의 군민들은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4월에 들어서는 몽고군 일부가 한 차례 외성에 진입하기도 했으나 왕견은 곧바로 야습을 통해 몽고군을 바깥으로 몰아내었다. 이렇게 대치하는 사이 장마가 연 20일간이나 계속되자, 몽고군 진영에는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뭉케는 전략회의를 소집하여 장수들의 의견을 물었다. 조어성을 방치한 채 악주로 가서 쿠빌라이군과 합류하자는 의견에서부터 조어성을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함락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심지어 남송 공략을 중단하고 북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뭉케는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이런 상태로 7월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뭉케가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뭉케가 사망하자 사천의 몽고군은 즉시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한편 쿠빌라이가 이끄는 중로군은 1258년 11월 남진하기 시작하여 하북과 산동․하남일대를 거쳐 이듬해 여름 양자강 북쪽 기슭에 도달하였다. 뭉케 사망의 소식은 이 무렵 쿠빌라이에게 전해졌다. 쿠빌라이의 부장들은 북쪽으로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전공을 세운 후 이를 바탕으로 대칸 지위의 쟁탈전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자 했다. 쿠빌라이는 진군을 계속하여 9월초 형호북로의 중심도시 악주를 포위하였다.
악주가 몽고군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임안에서는 커다란 소동이 발생했다. 당시 강대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환관 동송신(董宋臣)과 같은 인물은 경원부(慶元府)로의 천도까지 주장하는 형국이었다. 남송조정은 신속히 악주에 대한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가사도(賈似道, 1213~1275)를 우승상겸추밀사로 삼아 원군을 총지휘하게 하였으며, 여문덕(呂文德)으로 하여금 사천의 군대를, 그리고 상사벽(向士壁)으로 하여금 호남의 군대를 이끌고 신속히 악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이처럼 남송측의 지원군이 당도하자 두 진영 사이의 대치가 계속되었다. 9월 이래 몽고군은 악주를 포위하고, 양자강을 건너 남쪽 기슭에는 남송의 원병들이 견제하는 상황이 넉달 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12월 가사도는 조정의 재가를 얻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몽고측에 강화를 요청하였다. 남송이 몽고에 대해 칭신(稱臣)하고 매년 막대한 물자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뭉케의 사후 몽고 중앙 정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것에 조바심을 내고 있던 쿠빌라이도 이를 수용하고 철수하였다. 남송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이른 바 ‘악주의 전투(鄂州之役)’는 이렇게 종결되었으며, 아울러 몽고와 남송 사이에 전개되었던 두 번 째의 대대적인 공방전도 끝이 났다.
Ⅱ. 쿠빌라이의 즉위와 남송공략책의 수정
가사도는 쿠빌라이군이 철수한 후 조정에 상주문을 올려 몽고군을 패주시켰다고 보고하였다. 독단적인 강화의 사실은 숨긴 채 전승을 통한 격퇴라고 허위 보고를 했던 것이다. 몽고군에 의해 악주가 포위되었을 당시 극심한 공포 상태에 빠졌던 수도 임안에서는, 몽고군이 가사도의 전공에 의해 격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거에 전승의 무드에 젖어들었다. 1260년 4월 승리의 영웅 가사도가 개선하면서 임안의 고양된 분위기는 절정에 달하였다. 황제 이종은 가사도를 위국공(衛國公)에 봉하며, ‘송조를 멸망의 위기에서 보위해 낸 고굉지신(股肱之臣)이로다.’라고 말했다. 가사도는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점차 권력을 수중에 장악하여 갔다. 남송 멸망시까지 이어지는 16년간에 걸친 가사도 전권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264년 이종이 죽고 뒤를 이어 탁종(度宗)이 즉위하였다. 이종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만년에 훗날의 탁종을 의중에 두고 이를 재상 오잠(吳潛)에게 타진하여 보았다. 하지만 오잠은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반면 가사도는 이종의 뜻을 꿰뚫어보고 그것에 부회하였다. 이를 계기로 오잠은 재상의 직위에서 실각되고 가사도만이 홀로 재상의 직위에 있게 되었다. 탁종은 즉위 후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터라, 가사도에게 최상의 예의를 갖추었다. 심지어 그가 입조할 때 답배(答拜)를 하고, 감히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스승(師臣)’이라 칭할 지경이었다. 황제가 이러하니 여타 신하들도 그에게 아첨하기에 바빴다. 모두들 가사도를 가리켜 ‘주공(周公)’이라 칭했다고 한다.
한편 악주의 포위를 풀고 돌아간 쿠빌라이는 1260년 3월 자파 일색의 쿠릴타이를 열어 후임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뭉케가 남송 공략을 위해 출정하며 수도 카라코룸의 유수(留守)에 임명해 두었던 아릭부케(阿里不哥) 역시 뭉케 사후 후임 대칸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아릭부케는 쿠빌라이측의 쿠릴타이가 열린 직후인 4월, 서둘러 카라코름에서 자파를 소집하여 쿠릴타이를 열고 마찬가지로 대칸에 즉위하였다. 동시에 두 명의 대칸이 존재하게 되자 양진영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몇 년을 끌었으나 결국 화북지방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쿠빌라이의 실력이 아릭부케를 압도하였다. 1264년 아릭부케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하고 만다.
쿠빌라이는 대칸의 자리에 오른 직후인 1260년 4월 학경(郝經)을 남송에 사자로 파견하였다. 새로운 대칸의 즉위를 전하고 아울러 양국간의 화의를 종결짓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사도는 몽고측의 사자가 와서 화의를 논의할 경우, 자신이 악주에서 추진했던 독단적인 강화가 밝혀질까 두려워했다. 또 몽고군을 격퇴시켰다고 과장하여 보고했던 사실이 허위로 드러나서도 매우 곤란했다. 가사도는 이종에게 화의를 수용해서는 안된다고 강경하게 진언했고, 이에 따라 이종은 ‘맹세코 몽고와 화약을 맺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8월 회하(淮河)를 건너 남송 영내로 진입한 사자 학경의 일행은 진주(眞州)로 호송되어 감금되었다. 학경은 이로부터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16년간이나 이곳에 구금되어 있어야만 했다.
화의를 위해 파견된 사자가 남송에 의해 구금되자 쿠빌라이는 진노했다. 학경이 구금된 이듬해인 1261년 5월 쿠빌라이는 남송측에 사자를 보내 학경의 구금을 힐책하였다. 이에 대해 남송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7월에는 강경한 어조의 남송 토벌 조령을 발포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아릭 부케와의 내전이 다급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남송에 대한 토벌을 실행에 옮길 여유가 없었다. 쿠빌라이는 2년후인 1263년 2월에도 다시 사자를 보내 학경을 구금한 연유를 힐문하였다. 남송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신 학경의 구금, 그리고 그 배경이 된 가사도의 단독 강화와 그에 대한 불이행, 이는 쿠빌라이에게 남송 정벌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1274년 바얀(伯顔)을 사령관으로 하여 남송 토벌에 나설 때 그 격문 중에도, ‘가사도의 약속 위반 및 학경 구금의 잘못을 문책한다.’는 구절이 명기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의 저항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내분을 종식시킨 후 남송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런데 이번의 남송 공략은 이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전면공격과는 전연 전략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앞서 우구데이 및 뭉케 시기의 남침은, 모두 사천을 주공략대상으로 삼는 전면전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남송을 제압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사천이 아닌 양자강 중류지역으로의 남하를 시도했다. 그것도 대군을 동원한 전면적인 개전이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를 선택하여 이곳을 지구전으로 정복한다는 방식이었다. 쿠빌라이가 선택한 전략적 요충지는 양양이었다.
쿠빌라이는 1250년대말 뭉케의 명령을 받고 악주로 진군할 당시부터, 이전의 남송 공략책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59년 그는 악주를 향해 남진하는 도중 두영(杜瑛)이란 인물을 불러 효과적인 남송 공격의 방략에 대해 자문하였다. 이에 대해 두영은, ‘먼저 양양과 번성을 제압하고 이곳으로부터 강물을 따라 내려가 배후를 습격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59년 6월 복주(濮州)에 진주하였을 때에도 그는 모사들에게 재차 남송 공략책을 묻고 있다. 이러한 모색을 통해 쿠빌라이는 양양 선공책을 채택했던 것이다.
몽고측에서 양양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은 구육 시기였다. 이정(李楨)이란 인물이 상주문을 올려, ‘양양은 강남과 사천을 잇는 요충지이며 송의 인후부에 해당합니다. 이곳을 점령해두면 장차 송을 정복하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전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쿠빌라이가 대칸으로 즉위한 직후인 1260년에도 동일한 주장이 개진되었다. 곽간(郭侃)이란 인물이 남송을 정복하는 방략을 올리며, ‘양양을 선공하는 방식으로 송을 정복하자.’고 주장하였다. 남송은 동남지역에 위치하는 만큼 존망의 관건은 양양이라는 것이다. 양양을 함락시키면 나머지 양주(揚州)라든가 려주(廬州) 등의 전략적 가치는 소멸되므로, 이들 지역을 방치하고 곧바로 임안으로 진격하게 되면, 나머지 지역은 저절로 평정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곽간의 주장은 훗날 쿠빌라이에 의해 그대로 남송 공략 방식으로 원용되기에 이른다.
쿠빌라이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양양 선공책을 채택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1261년 몽고에 투항한 남송의 장수 유정(劉整, 1213~1275)이었다. 그는 1267년 쿠빌라이에게 상주하여, ‘남송 정복은 양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양양이 함락되면 나머지 지역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자신이 이 전투에 있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바치겠다고 나섰다.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여 그와 아주(阿朮)를 도원수에 임명하여, 이듬해 9월부터 양양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양양은 어떠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양양은 고래로 남양(南陽) 분지의 남방 창구격에 상당하는 곳이었다. 한중(漢中) 지역에서 발원한 한수(漢水)가 섬서의 남부와 호북의 서북방을 흘러, 거의 직각으로 남방의 영주(郢州)로 흘러가는 곳, 그곳에 양양은 위치해 있었다. 북쪽으로는 한수가 흘러 성을 끼고 남방으로 굽어지고, 성의 남쪽으로는 현산(峴山) 산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성의 서쪽 10리에는 만산(萬山)이 서부의 장벽 역할을 하며, 남쪽으로 7리에는 현산(峴山)이 또 장벽과 같이 솟아 있었다. 양양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지니고 한수의 교통을 제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한수의 남안에 본성인 양양성이 있고 북안에는 번성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성 사이에는 한수를 가로질러 나무를 심고, 이들을 연결하여 쇠줄로 매어둔 부량(浮梁)이 가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양양의 전략적 중요성은 남송시대의 인물들도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남송초의 무장 악비(岳飛)는 이 양양을 두고 ‘중원을 회복하는 근간이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홍자기(洪咨夔)란 인물은 ‘천하의 대세는 사천이 머리이고 회남이 꼬리이다. 그 척추에 해당하는 지역이 양양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양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비단 송대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청대의 고조우(顧祖禹) 같은 인물은 유명한 저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양양과 번성은 천하의 척추이다. 중원이 차지하면 이를 토대로 동남지역을 아우를 수 있고, 동남에서 차지하면 마찬가지로 이를 근거로 서북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남송시대를 통해 양양은 그 전략적 지위에 걸맞게 관리되었다. 조정으로부터 중신이 파견되었으며 정예병사가 배치되었다. 그런데 우구데이의 남침이 있던 1236년, 부장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몽고군에게 실함되어 버렸다. 이후 성곽은 크게 훼손되고 거주민들도 흩어져 양양성은 거의 폐허화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양양이 다시 남송에 의해 수복되는 것은 1239년의 일이었다. 바로 명장 맹공(孟珙)에 의해서였다. 맹공은 탈환 후 황폐해진 양양성의 재건을 위해 진력하였다. 병사를 모집하고 무너진 성곽을 보수해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의 재정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장대한 양양성을 단기간에 복원할 수는 없었다. 양양성이 가까스로 1236년 몽고에의 함락 이전 상태로 복귀하게 되는 것은 1250년대초에 들어서였다. 1251년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로 임명된 이증백(李曾伯)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양양성을 재차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 그리고 정예 병사 및 풍족한 군량’을 지닌 전략적 거점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267년 12월 유정(劉整)이 쿠빌라이에게 양양선공책을 제의하고,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여 양양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남송의 존망을 결정짓게 되는 양양․번성의 전투는 이와 같은 곡절을 밟아 시작되었다.
Ⅲ. 양양(襄陽)․번성(樊城) 공방전의 시말
1268년 9월 10만에 달하는 몽고군이 아주(阿朮)와 유정의 지휘 아래 남하하여 양양을 포위하였다. 양양을 공격하는 몽고군에는 한인출신의 보병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주변에 하천과 산지가 분포한다는 것을 감안한 군대의 편성이었다.
몽고군은 양양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원군 파견을 차단하기 위해 외곽지역에 봉쇄망을 구축하였다. 몽고측은 1268년 9월의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기에 앞서 양양성을 둘러싼 주요 거점들을 확보한 상태였다. 번성의 동쪽을 통해 한수와 합류하는 백하(白河)의 어귀라든가 양양성 서쪽에 위치한 만산(萬山) 등이 그렇게 이미 장악되어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양양성의 포위와 함께 그 남방의 호두산(虎頭山)까지 점령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봉쇄로 말미암아, ‘성채가 꿴 구슬과 같이 연결되어 사방 수십 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몽고군은 이러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양양성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성의 함락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공성전 대신 포위한 채 기진맥진해지기를 기다리는 지구전’을 채택했던 것이다.
당시 양양성에는 여문환(呂文煥)이 양양 지부로서 방어전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급박한 사정을 즉시 상관이자 형인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여문덕(呂文德, ?~1269)에게 보고하였고, 여문덕은 조정에 알렸다. 보고를 접한 남송 조정은 즉각 지원체계의 구축에 나섰다. 하귀(夏貴)를 연강제치부사(沿江制置副使)로 임명하고 장세걸(張世傑)을 경호도통(京湖都統)으로 임명하여 양양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게 하였다. 몽고군의 포위가 길어지고 양양의 전세가 급박해지면서 남송 중앙정부의 지원체계도 더욱 강화되었다. 1269년 12월 여문덕이 사망하자 1270년 정월 이정지(李庭芝, 1219~1276)를 경호제치사로 임명하였으며, 1270년에는 전전부지휘사(殿前副指揮使) 범문호(范文虎)를 파견하여 전전사(殿前司) 및 회남일대의 군대를 총지휘하게 했다.
이렇게 파견된 남송측의 지원군들은 이후 수 차에 걸쳐 몽고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기는커녕 거의 대부분 몽고군에게 패퇴당했다. 이를테면 1269년 3월 장세걸이 기병 및 보병, 수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여 몽고군에게 약간의 타격을 가하였으나, 7월에는 하귀가 전선 3,000척과 군대 5만명을 이끌고 몽고와 전투를 벌여 대패했다. 1270년 9월에는 범문호가 전선 2,000척을 이끌고 나섰다가 패배하였으며, 이듬해인 1271년 6월에는 역시 범문호가 10만에 달하는 수군을 이끌고 양양으로의 진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양양․번성의 공방전이 지속되는 동안, 양양성은 사실상 외부로부터의 군사적인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송측의 지원군들은 몽고군의 포위망을 뚫고 수차에 걸쳐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첫 번째의 물자지원 성공은 몽고군이 포위한 이듬해인 1269년 봄에 있었다. 연강제치부사인 하귀가, 한수의 수위가 상승한 것을 이용하여 양양성에 의복과 식량을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귀는 몽고군의 습격이 두려워 성내에 진입하지도 않은 채, 성 아래에서 여문환과 몇 마디 말만 나누고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의 물자 공급은 포위하고 있는 몽고군에게 커다란 당혹감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몽고군은 한수의 남방에 목책(木柵)을 부설하여 지원군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1269년 12월의 일이었다. 목책 부설은 장홍범(張洪范)이란 인물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그는,
조정에서 양양을 공격하며 지구전을 채택하고 있는 것은 인명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을 포위하고 저들의 기력이 쇠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 번 하귀가 한수의 수위 상승을 틈타 성내에 의복과 식량을 보내주는데도, 우리는 앉아서 보기만 할 뿐 제지할 도리가 없었다. 양양은 남쪽으로 강릉(江陵)과 귀주(歸州)․협주(峽州) 등과 인접해 있으며 장사치와 여행자․군대 등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기력이 쇠잔되기를 기다리겠는가? 남쪽의 관자탄(官子灘)에 목책을 부설하여 동쪽으로부터의 지원을 끊어야 한다. 그것이 저들로 하여금 속히 쇠잔하게 하는 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수용하여 양양성 남쪽의 한수를 가로질러 목책이 부설되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양양성에 대한 지원은 한층 어려워졌고 양양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이후에도 양양에 대한 물자 지원은 몇 차례 더 성공하였다. 예컨대 1271년 5, 6월 사이 한수의 수위가 올라가 몽고군이 설치한 목책과 보루 등이 물에 잠겼을 때, 경호제치사가 군대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고 의복과 소금․미곡 등을 양양에 보급해 주었다. 하귀 또한 식량 수천 석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이때를 마지막으로 남방으로부터의 물자지원은 단절되었다. 이후도 몇 차례 물자 지원의 시도는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몽고군에 의해 격퇴되고 만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몽고측의 공세도 강화되어 갔다. 1269년 초에는 중신 사천택(史天澤)을 파견하여 양양 공벌전을 지원하게 했으며, 1269년 2월에는 2만명의 지원군을 증파하였다. 사천택은 성벽 포위전에 특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1271년에 들어 쿠빌라이는 남송측이 양양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각방면의 군대로 하여금 동시에 남송을 공격하게 했다. 몽고군의 공격은 특히 5월 이래 집중적으로 전개되어 중경, 가정(嘉定), 로주(瀘州), 여주(汝州) 등지가 침공을 받았다. 한편으로 양양포위가 장기화하자, 쿠빌라이는 1271년 일한국으로부터 포장(炮匠)을 데려와 회회포(回回砲)를 개발하게 하여 양양․번성의 전투에 투입시켰다.
1272년이 되면서 원군(元軍)의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 해 3월 유정과 아릭카야(阿里海牙)가 이끄는 군대가 번성의 외곽 토성을 점령하였다. 이곳을 지키던 남송 병사 2,000여명은 모두 전사했다. 이어 아주의 군대는 번성에 대한 공격을 강화시켜 갔다.
이 무렵이 되면 양양․번성은 거의 완전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원군의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원조는 물론이려니와 물자의 공급도 중단되어 있어서, 성내의 물자 부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 식량은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나 소금과 땔감․의류 등이 특히 부족하였다.
이렇게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남송측의 지휘관들 사이에는 지휘계통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경호제치사 이정지가 양양에 대한 지원활동을 총괄토록 되어 있으되, 전전사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범문호가 이정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정지는 양양에 대한 지원을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하고 나섰다. 즉 양양성 남부가 아닌 북방으로부터의 지원을 구상한 것이다. 이정지는 건장한 민병 3,000명을 모집하고, 이들 사이에 인망이 있던 장순(張順)과 장귀(張貴)라는 인물들을 총책임자로 삼았다.
1272년 5월 22일 한수의 수위가 높아졌을 때, 장순․장귀가 이끄는 민병 3,000명은 양양에 공급하기 위한 물자를 가득 싣고 양양 북방의 균주(均州)를 출발했다. 장순․장귀는 출발에 앞서, ‘이번 길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혹시라도 주저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빨리 떠나기 바란다. 우리의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달라.’라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이들 군대는 24일 저녁 원군의 방어선에 다다랐다. 풍랑이 일고 있는 속으로 원군의 전선들은 강폭을 빼곡이 메우고 있었다. 앞선 장귀의 횃불을 신호로 민병대는 돌진해갔다. 민병대가 결사적으로 돌진하자 빈틈없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원군의 대오가 흩어졌다. 하지만 이 저지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후미를 맡고 있던 장순이 전사했다. 민병대는 25일 새벽 무렵 양양성 아래에 당도하였다. 성내의 사람들은 지원군이 온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으며 사기가 충천해졌다.
장귀는 최초 양양성에 보급물자를 인도한 다음 즉시 남으로 뚫고 내려가 양양과 남방 사이의 통로를 재개시킬 심산이었다. 하지만 여문환이 양양에 체류하며 같이 방어에 나서자고 강권하자, 장귀는 마지못해 한 동안 양양성에 머물렀다. 그러다 9월에 이르자 장귀는 애초의 계획을 실현시키겠다고 나섰다. 여문환도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장귀는 먼저 은밀히 하귀에게 사람을 보내 이 계획을 통보하였다. 하귀는 장귀의 군대가 원군의 저지를 뚫고 내려오면, 양양성 남방의 용미주(龍尾洲)에서 기다렸다가 엄호해주기로 약속하였다.
장귀는 약속된 시각에 양양성을 나서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원군측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만반의 대비를 마친 후 기다리고 있었다. 장귀의 민병대는 놀라운 분전을 거듭하며 원군의 저지선을 뚫고 남하하여 용미주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귀는 용미주에 왔다가, 비바람이 몰아치자 원군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이틀전 철수한 상태였다. 용미주에 도달한 장귀의 군대는 하귀의 지원군을 찾았지만 아무 데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방비의 상태에서 매복해 있던 원군의 습격을 받아, 장귀의 군대는 모두 몰살되었다.
양양․번성에 대한 지원은 이들 장순․장귀의 활동이 마지막이었다. 양양․번성은 이후 완전한 고립상태에서 원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양양에 대한 지원을 담당한 남송측의 장수들은 자신들의 영역내에 머물며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1272년 말에 들어서며 원군은 양양․번성에 대한 동시의 공격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여 번성부터 함락시키기로 했다. 한수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이들 두성 사이에는 부교(浮橋)가 부설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군민들이 왕래하며 상호간 방어전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원군은 두 성 사이의 상호 원조를 차단하기 위해,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도끼로 쇠줄을 절단한 다음 부교를 불살라 버렸다. 이제 번성은 본성인 양양성으로부터 격리되었고, 그 내부에는 우부(牛富)가 지휘하는 700여명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번성을 원군은 회회포를 이용하여 치열하게 공격하였다. 결국 1273년 1월 12일 번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번성을 함락시킨 후 원군은 양양성으로 쇄도하였다. 번성을 공략하는 데 사용한 회회포도 이리로 옮겨졌다. 이 회회포가 바윗돌을 퍼부어대자 성내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부장들 가운데 원측에 투항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여문환은 조정에 상주문을 올려 번성의 실함 사실을 보고하고, ‘죽음으로 지켜내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전황은 이미 결정적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자신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성벽을 순시하며 남방을 향해 통곡하였다고 한다.
원측은 양양성을 함락시키기 전 여문환의 투항을 권유하기로 했다. 당시 원 조정의 대신들은 그에 대해,
여문환의 일가는 대대로 남송의 중요 무직을 거쳤다. 중앙 정계의 요직 가운데 일족 자제들도 많다. 이러한 관계로 여문환은 남송 조야에 있어 누가 현명하고 누가 어리석은지, 남송 산하의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견고하고 어느 것이 허술한지, 또한 남송 군대의 많고 적음과 그 허실이라든가, 남송 군사 및 정치의 옳고 그름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인물이다.
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1273년 정월 본디 여문환의 휘하에 있다가 원측에 투항한 당영견(唐永堅)을 보내 여문환의 항복을 권유하였다. 여문환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릭카야가 나섰다. 그는 몇 명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양양성 아래로 갔다.
그대는 실로 몇 년 동안이나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양양성을 지켜왔도다. 이제는 나는 새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그대의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기고 계시다. 만일 투항한다면 필시 높은 관직을 내리실 것이다. 결코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
여문환은 머뭇거렸다. 아릭카야는 화살을 부러뜨리며 맹세하였다. 또한 곁에 있던 장정진(張庭珍)이 말했다.
우리 군대는 일찍이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없었다. 너는 고립된 성에 갇혀 있고 탈출로도 끊겼다. 바깥으로는 지원군도 전연 없다. 너는 성을 지키다 죽었노라는 헛된 공명을 바라고 있다만, 그렇다면 성내의 사람들은 다 뭐란 말이냐?
이 말을 듣고 있던 여문환의 부하 장수들도 투항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여문환도 버티지 못하고 원에 투항하고 말았다. 1273년 2월, 이렇게 하여 1268년 9월 이래 계속되어온 양양․번성의 공방전은 4년 반만에 원군의 승리로 끝났다.
맺 음 말
양양성을 함락시키고 난 후 원군은 1년 반 정도에 걸쳐 전열을 재정비했다. 오랜 공방전에 지친 군대를 휴식시키는 한편, 향후 양자강을 따라 진군할 것에 대비하여 수군을 보강하였다. 새로이 편성된 공격군의 총지휘관으로는 바얀(伯顔)이 선정되고 그 휘하에 아주 및 아릭카야, 그리고 양양성에서 투항한 여문환이 배속되었다. 이렇게 진용을 갖춘 20만 대군의 원군은 1274년 9월 한수를 따라 남하하였다.
원군은 강력히 저항하는 영주(郢州)를 우회하여 11월말 악주에 도달하였다. 악주에는 연강제치부사 하귀가 대군을 이끌고 방어하고 있었으나, 불과 한 달만에 함락되어 버렸다. 이듬해인 1275년 초 바얀이 이끄는 원군은 여문환을 앞세워 양자강을 따라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양자강 연안의 유력 부장들은 거의 대부분 원군이 접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문환의 권유에 따라 항복해 버렸다. 강주(江州)를 지키고 있었던 명장 여문덕의 아들 여사기(呂師夔), 안경(安慶)에 주둔하던 범문호 등이 그들이었다.
이처럼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수도 임안의 태학생들은 재상 가사도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원군의 진군을 저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굴복하여 가사도는 1275년 정월 13만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원군과 결전을 벌인다는 생각은 없었다. 강화를 통해 원군의 진격을 정지시키려 작정하고 있었다. 가사도는 심복을 바얀에게 보내, 칭신(稱臣)하고 세폐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타진하였으나 바얀으로부터 여지없이 거절당했다. 가사도는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275년 2월 그는 손호신(孫虎臣)이 지휘하는 보병 7만과 하귀가 지휘하는 전선 2,500척을 정가주(丁家洲)에 결집시키고 남하하는 원군과 일전을 벌였다. 여기서 남송의 군대는 가위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패배하였고 가사도는 양주의 이정지에게로 도망갔다. 이 정가주의 전투로 인해 남송의 방어력은 사실상 무너졌다.
원군은 진군을 계속하여 3월 초 건강(建康)에 진입했다. 바얀은 이곳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각처에 군대를 보내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한편 임안 진군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아주를 회남일대로 파견하여 임안과 회남 사이를 차단하고자 했으며, 아릭카야는 양자강 상류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아울러 동문병(董文炳)은 양자강 하류의 소주(蘇州)와 상주(常州) 지역으로 진격하게 했다.
1275년 11월 준비를 완료한 바얀의 군대는 건강을 출발하여 수도 임안으로 향했다. 이미 방어의 능력을 잃은 남송은 거의 무저항의 상태로 원군의 진입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276년 정월 섭정을 맡고 있던 사태후(史太后)는 원군에의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남송정권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양양․번성의 전투가 종료된 시점으로부터 치면 3년, 바얀의 군대가 양양을 출발하여 진격을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헤아리자면 불과 1년 4개월만의 일이었다. 양양․번성의 공방전은 의심할 나위 없이 남송정권의 운명을 가름짓는 전투였던 것이다.
이렇듯 양양․번성의 전투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남송 조정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양양성의 구원을 위해 이정지, 하귀, 범문호 등의 예하에 최고의 정예병을 동원하고 있었던 점이라든가, 혹은 이들의 지원부대 및 양양성의 군민들에게 막대한 재정을 투여하고 있었던 사실이, 그러한 남송 조정의 인식을 잘 반영해준다. 실로 양양․번성의 전투 당시, ‘조정은 온 천하의 재력을 다해 양양이라는 일개 성의 구원을 위해 진력’하였던 것이다.
(≪역사문화연구≫ 17, 2002년 12월)
문체가 깁니다만, 위의 글을 충분히 보충해줄 수 있는 얘기이고 사실상 원과 남송의 균형이 이루어지다 무너진 전투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글이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되어서 좋은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삼국지에서도 양양성, 번성은 매우 중요한 성으로 나오죠. 양양성은 당시 형주의 군웅이었던 유표의 도성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