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은 설교가 아니다.
사무엘상 3:19-20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사무엘상 9:6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10년 전인 2006년, 제가 예언에 관해서 처음을 쓴 책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입니다. 종교적이어서 예언의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고전14:1, 5). 그러나 한국 교회는 거꾸로 특별히 예언을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예언사역을 하면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이런 교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쓴 것이 이 책입니다.
7년 후인 2013년, 저는 다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을 쓸 당시 저는 '왜 바울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지?' 하는 의문과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의 예언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가 매우 존경했던 세계적인 선지자가 꿈을 꾸고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미트 롬니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저는 그 예언을 알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틀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저런 말을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대선 전날 중보기도회 때 그런 우려를 성도님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대선에서 롬니가 아니라 오바마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제가 '살아 있는 전설'이요 '선지자들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렸던 그분의 예언을 듣고 불안감을 느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포함하여 명성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틀리는 것을 너무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에게 해주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예언은 대부분 맞았습니다. 정확하고 공명이 되고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예언들은 너무 자주 틀렸습니다. 맞는 것보다 틀리는 것이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까지 우리나라든 해외든 미래에 대한 예언이 항상 적중하는 선지자를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일로 저는 충격을 받았고 예언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이런데도 교회 안에서 예언사역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심각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 5)는 성경의 명령만 없다면 당장 예언사역을 접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 예언사역에 대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닥을 잡고 정리한 것을 책으로 낸 것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였습니다.
다시 4년이 지난 지금, 저는 또다시 예언에 대해서 설교하고 책으로 출판하려고 합니다. 저는 예언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권수로만 따져도 족히 100권이 넘을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예언사역을 해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언하는 교회로 알려졌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많은 선지자들로부터 개인 예언을 받았고, 그분들과 가족과 친구처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렇게 누적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저는 예언사역의 허와 실을 파악할 수 있었고, 예언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고 책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는 이 시리즈 설교(책)를 통해 저는 여러분에게 예언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드리고 총정리를 해드릴 것입니다. 특히 왜 세계적인 선지자들까지 그토록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자주 틀리는가?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릴 것입니다.
성경은 선지자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사무엘상 3:19-20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그러나 요즘 선지자들의 예언이 가을철의 낙엽처럼 우수수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예언들이 온 땅을 뒤덮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예언들이 빗나가서 예언의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즉 덕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예언을 받고 싶지도 않고 예언에 대한 기대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수많은 예언들이 빗나갔습니다. 참 선지자는 소수였고 거짓 선지자는 다수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언이 틀리면 모두 거짓 선지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또 초대 교회 때에도 너무 무질서하게 예언하였고, 많은 예언들이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언사역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2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 구절은 흔히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종교적인 교회에 대한 경고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교훈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언의 은사를 너무나 많이 오용하여서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편지를 써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살전5:20)."
그 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선지자요 교사로 부름받은 분이고 예언사역을 멸시하는 종교적인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이라는 책에서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사적인 예언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적인 예언을 오용함으로 삶이 파괴되고 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나를 사적인 예언에 사용하시므로 나는 매우 신중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적인 예언 분야에서 너무나 많은 오류를 보았고, 그것이 진짜 예언사역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놀랍게도 저와 여러분이 느꼈던 회의와 갈등을 해긴 목사님도 느꼈습니다. 비록 그분은 바른 예언사역을 했지만 주변의 빗나간 예언사역들을 보면서 많은 갈등을 하고 깊은 회의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언사역은 원래 이런 것일까요? 바꾸어 말해서, 오늘날은 사무엘처럼 정확한 예언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현재의 상황을 보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성경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 설교를 통해 먼저 예언에 관해 총정리를 한 후에 제가 깨닫고 발견한 답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이 설교가 예언사역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 시간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기도하는 교회』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와 결론에 대해서 썼습니다.
"1979년에 내가 『영적 은사와 교회성장』(Your Spiritual Gifts Can Help Your Church Grow)이라는 책을 썼을 때 나는 어려운 결정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은사의 목록이 나타나 있는 세 곳인 롬 12:6, 고전 12:10, 엡 4:11에 언급되어 있는,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말씀에 대해서보다 충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쉬운 볼리비아에서 돌아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주석들 중에서 대부분은 예언의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설교하고 해석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오순절적인 은사 운동에 근거한 교회 성장에 대해서 깊은 탐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담대하게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기도하고 연구하고 협의한 후에, 나는 그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을 설교가 아니라 계시로 정의했다. 나는 '예언의 은사는 거룩하게 기름 부으심을 받은 발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에게 제공해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언은 설교일까요? 아니면 성령의 감동 중에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일까요? 답은 후자입니다! 예언과 설교는 다릅니다. 설교는 설교고 예언은 예언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일관성 있게 이 사실을 주장해왔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나오는 '예언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은사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와 예언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다"라고 말해왔습니다. 설교는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성령의 감동 중에 즉각적으로 받은 것을 가감 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와 예언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이 예언이 설교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이 설교를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교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김세윤 교수님은 여자가 설교하고 사역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언을 설교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자가 사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설교를 뜻한다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달리 성령 운동을 하는 목사들은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부터 알았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죠!
먼저, 월리스 해플린 2세는 『이제는 예언 사역 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언의 은사가 대단히 낯설다. 그래서 예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먼저 예언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 먼저 예언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몇몇 현대판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 '예언'(prophecy)이라는 단어를 '설교'(preaching)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선 설교는 예언이 아니라는 것부터 지적해야겠다. 설교가 본질상 예언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설교 자체를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대개 다년간에 걸쳐서 경험하고 학습한 것을 가지고 설교한다. 반면에 예언은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거나 배운 적이 없는 것을 미리 준비할 새도 없이 완전히 순간적으로 즉석에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언할 때, 말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감동하신 것만 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성경 본문을 읽거나 인용하면서 그것이 예언을 대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시의 기록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 계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개별적으로 친히 말씀하길 원하시며 좀 더 자세하게 삶의 방향을 지시해주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예언이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개별적으로 응답하신다. 예언과 기록된 성경 말씀은 서로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또, 그래엄 쿡은 『이렇게 예언하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성경은 예언과 가르침을 구분한다. 여러 군데에서 성경은 가르침과 예언을 사역의 은사라고 언급하며 이 두 가지 은사는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돕는다는 공통된 목적이 있지만 기능은 다르다고 기록한다. 교회에선 항상 이 두 가지 은사에 대한 필요가 존재하며 어느 한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우월하거나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은사가 사용될 것인가는 우리의 취향이나 우선순위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은사에게 다른 목표가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사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간단히 말하면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인생, 성장 및 헌신 등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들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언은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성령세례와 방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은 설교가 아니다(하지만 설교에 예언의 요소가 들어 있을 수는 있다).
예언과 설교가 동일하다면 설교를 준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설교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고 권면하지 않았는가.
방언과 통역을 위해서는 힘쓸 것이 없다. 예언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성령의 영감으로 오기 때문이다. 물론 설교하는 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내용을 전할 수는 있다. 이것은 영감이며 예언이다."
그러면 어떻게 신학자들이 거의 단체로 오해하고 있고, 가장 실력 있는 신학자들조차 오해하는 것을 성령운동을 하는 평범한 목사들이 이렇게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그 비결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성경을 아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성경과 성령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고린도전서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런데 문제는 학자들이 성경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개 성령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이없는 착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운동을 하는 목사들은 성경은 학자들만큼 모르지만 성령님을 압니다. 그래서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 학자들보다 쉽게 정곡을 찌르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물로 그들 역시 학자들이 연구해서 알고 있는 진리들 중 많은 것들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고 균형이 필요합니다. 학자들은 성경을 알 뿐 아니라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성령운동 하는 목사들은 성령을 알 뿐 아니라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를 피하고 진리를 옳게 분별하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성령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론이나 견인의 교리 그리고 계시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해가고 있습니다. 몇 가지 고무적인 예를 들어드리죠!
먼저, 저명한 신학자 토마스 슈라이너 교수는 『로마서』 주석에서 짧고 강력하게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설교 혹은 가르침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또, 세계적인 조직신학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는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과 가르침의 차이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에 근거한다(cf. 행11:28, 21:4, 10-11. 눅7:39, 23:63-64. 요4:19, 11:51에 소개된 예언에 대한 이해를 참고하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계시를 받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예언이 없다.
대조적으로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행위나 교사가 하는 일 등 '가르치다'라는 동사가 묘사하는 어떤 활동도 신약에서는 계시에 근거해서 한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가르침이란 단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행15:35, 11:11, 25. 롬2:21, 15:4. 골3:16, 히5:12), 또는 사도들의 교훈의 반복 내지는 설명을 가리킨다(롬16:17, 딤후2:2, 3:10 등). 우리는 그것을 '성경 가르침' 혹은 오늘날 '설교'라고 부른다."
한 장 뒤에서 웨인 그루뎀은 또 이렇게 썼습니다.
"이 둘의 구분은 명백하다. 만일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성경의 본문에 대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 (신약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가르침이다. 그러나 만일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다. 물론 잘 준비된 가르침이 전혀 계획에도 없던,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주신 보충 자료에 의해 중단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것은 예언이 가미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총신대 이한수 교수님도 『교회의 세속화 문제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은 은사적인 설교나 교훈이라고 볼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주일에 하는 설교가 구약의 예언 기능을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설교를 예언으로 보려고 한다. 이런 주장 속에는 예언은 사도 이후 시대에는 중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이 가지고 있었던 역할이 신약에 와서, 특별히 사도시대 이후에 와서 설교의 기능 속에 편입되어 들어왔다고 보는 견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설교'(케류그마)를 곧 '예언'으로 동일시한 구절은 아무 데도 없다. 물론 예언 가운데는 교육적이고 권면적인 요소가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 예언자로 인정된 사람에게 설교하고 가르칠 권한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31절 참조). 31절을 보면, 예언을 통해서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권면을 받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이 곧 설교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
바울이 언급하는 은사들 중에는 '가르치는 것'과 '예언'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성령의 내적인 어떤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에 은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은사적인 가르침은 회중들의 직접적인 필요에 부응하여 성경이나 전승을 풀어서 잘 설명해주는 행위를 지칭하지만, 반면에 예언은 성경에 대한 사색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또는 천사 등) 직접 계시된 내용을 인간이 선포하는 것을 나타낸다."
과거에는 예언이 설교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게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결국 회복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편, 방금 소개한 이한수 교수님의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주일에 하는 설교가 구약의 예언 기능을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설교를 예언으로 보려고 한다. 이런 주장 속에는 예언은 사도 이후 시대에는 중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이 가지고 있었던 역할이 신약에 와서, 특별히 사도시대 이후에 와서 설교의 기능 속에 편입되어 들어왔다고 보는 견해가 자리 잡고 있다."
예언을 설교로 이해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칼빈입니다. 그런데 그는 은사중지론자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예언을 설교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비성경적인 은사중지론의 잔재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거나 마지못해 인정하더라도 어떻게 하든 평가절하하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의 잘못된 성향이 그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력 있는 학자들이 예언을 설교로 착각하는 것은 그들이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이다 보니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있을 리 없고, 그런 상태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지식만 있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설명하려 들다 보니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학자들의 오류는 한참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즘은 장로교에서도 거의 다 방언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고신 교단에서도 방언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방언보다 더 중요한 은사가 예언입니다.
고린도전서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러므로 방언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예언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아시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학자들이 종교적이어서 뭐라고 말하든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린도전서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데살로니가전서 5: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바울이 말한 대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절대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