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건 프리먼의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는 뭔지 모를 공허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영화는 예상을 훨씬 벋어났으며 나는 다시 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일 이 영화가 장르 물의 성격 아래 눈물의 감동을 제시했더라면 나는 차라리 훌훌 가슴을 털고 일어섰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가 이끄는 삶의 관점과 자세는 분명 여타 드라마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분명 방황한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정리 내렸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삶에 관한 한 분명히 극단적 현실주의자다. 적어도 그의 전작인 '미스틱 리버'와 이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만을 봤을 때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그는 결코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대해 적절히 미화하려는 생각도, 80세가 넘은 노인으로서 수십 년의 삶을 경험한 현자(賢者)의 지혜를 젊은 세대에게 가르치려는 자세도 없다. 미래에 관한 장밋빛 고민도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에 대한 담백한 회상도 없다. 현실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을 느릿하고 건조하게 펼쳐보일 뿐이었다.
'미스틱 리버'가 우연과 오해가 결합한 친구들의 비관적 삶을 통해 미국 사회를 (보수적인 시각으로) 냉철하게 꼬집으려는 공화당 지지자의 뚝심 있는 관조가 드러난 작품이었다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좀 더 개인적인 삶의 기술(記述)에 가깝다. 물론 여기에는 그 어떤 낭만적인 삶의 조명(照明)도 포함되지 않고, '권투'라는 스포츠의 특성을 통해 실베스타 스텔론 '록키'에서 느꼈던 가슴 아린 성공담을 예상한 관객들의 기대 역시 무참하게 짓밟아버린다. 오히려 영화는 반대쪽으로 나아간다. 한 여성의 인생을 완전히 묵살하고 관객에게 패배의 펀치를 먹이는 것이다.
힐러리 스왱크가 잔인하게 연기하는 '매기'가 영화 복싱 무대를 누비며 상대 선수를 다운시킬 때 내가 느낀 것은 잡초 같은 인생을 산 여성의 성공기가 이제부터 시작되리라는 기대감보다는 뭔가 알지 못할 불안감에 가까웠다. 아무리 그녀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고 할지라도 이런 식의, 첫 번째 라운드에서 끝내버리는 화통한 승리가 계속되니 그 희열이 반전되어 뭔가가 벌어질 것 같다는 불편함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고, 그녀가 인생의 최고정점에 오르는 순간 감독은 일체의 관용 없이 그녀를 퇴락시켜 비정한 현실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영화가 다시 시작된다. 노장의 장르 물의 성격을 가진 수작이 중반 이후 삶을 차갑게 어루만지는 걸작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어떤 이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 얼마 가지 않아 '아예 시작조차 하지 말았으면'이라고 대뇌이게 되는 절망적인 고통으로 변할 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직 많은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 화려했던 순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차라리 덜 화려하고 덜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좀 더 안전하고 오래 삶을 영위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 속에서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며 차선(次善)의 행복을 즐길 것이다.
하지만 이미 80년을 살아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삶의 가치'에 관하여 나와는 다른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 화려한 순간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였던 순간이라면? 내 평생에 한 번 꿈이라도 꿔봤으면 하고 바라던 그 순간이 십 년이 넘는 인고(忍苦)의 세월 끝에 바로 눈앞에 와 있다면? 과연 그 순간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 후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꿈을 현실화할 것인가. 매기는 후자에서 답을 찾은 여자였고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영화 속 매기는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며 다시 오물 창보다도 못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에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살을 선택하려 한다. 이미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맛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바라는 모든 꿈을 이루었으니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매기가 경험하게 되는 현실의 상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안정감 있게 연기한 프랭키의 과거와의 우연성과 묘하게 결합한다. 여기서 우연성이란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과거와 현실의 묘한 일치감으로써 수많은 영화가 영화의 극적인 감흥을 위하여 과거의 실패를 현재의 승리로 승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의 수위를 높이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노장의 방법 역시 여타의 플롯에서 완전히 벋어난다. 그게 이 영화가 또 걸작인 이유다. 과거의 실패가 왜 꼭 현재의 성공과 연계되어야 하는가. 그건 판타지요, 보편적 관객의 요구에 적합하게 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고 감독은 주장한다.
프랭키의 우연성은 두 번의 실패로 연결된다. 하나는 과거 에디(모건 프리먼이 연기한)가 타이틀 전에 섰을 때 그의 눈을 보호하지 못한 실패요, 하나는 매기가 상대방의 반칙에 의한 펀치에 쓰러질 때 그녀의 머리를 보호하지 못한 실패다. 이것 역시 인생이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서 과거의 경험과 부딪히고 다시 아파해야 하는 현실이라고 감독은 주장한다. 그가 그 실패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고, 상처가 아무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삶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항상 예상치 못한 미완(未完)의 상태이기에 더욱더 비참하고 그 특성에 의해 인생은 가치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에 대한 해결책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키의 개인적 선택에 의미를 둔다. 프랭키가 매기를 안락사하는 순간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한 놀람의 표현이기보다 스크린에 투영된 비참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의 방법으로 인한 안도감이다. 프랭키의 마지막 행동에 매기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인생을 마감하며 병원을 조용히 나간 프랭키는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레몬 파이를 먹었던 곳을 비추며 암시적으로 그의 존재를 표현한다. 절망적이기는 하되, 희망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관객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 희망이라는 존재가 아주 적기에, 나는 그것이 더욱더 커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 에디는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체육관 문을 열 것이고 많은 복서가 가장 화려한 순간을 꿈꾸며 수많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할 것이다. 인생의 정점이 찰나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 이후 나머지 삶이 파멸에 처할지라도 인생에 대한 관점과 자세는 충분히 아름답다. 이것이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전하는 삶의 방법일까. 생각에 빠져든다.
글쎄요, 한국 드라마 속의 갈 데까지 가버린 인물 설정과 갈등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저한테는 이야기 자체가 큰 재미는 없었습니다. 인생의 정점이 아무리 짧다해도 나머지 삶이 파멸에 처할지라도 현재를 중시한다는 이야기는 역시 슬램덩크에서 이미 큰 감동을 받았었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고 해야 될까요...TT
첫댓글 한방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병실에 누운 주인공의 숨소리가 영화보기를 힘들게 하더군요.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글쎄요, 한국 드라마 속의 갈 데까지 가버린 인물 설정과 갈등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저한테는 이야기 자체가 큰 재미는 없었습니다. 인생의 정점이 아무리 짧다해도 나머지 삶이 파멸에 처할지라도 현재를 중시한다는 이야기는 역시 슬램덩크에서 이미 큰 감동을 받았었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고 해야 될까요...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