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 E.T. - 대한매일신보 창간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Bristol)에서 출생하여, 머천트 벤처러스 학교(1885-1886, 현재 West of England)에서 수학했다. 1888년 도일(渡日)하여 코베에서 동생 허버트와 ‘베델 브러더스 무역상’을 설립하여 상업에 종사했다. 1900년 5월 26일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과 결혼하여 외아들 허버트 오웬(Herbert Owen Chinki Bethell)을 낳았다. 양탄자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하여 사업을 확장(1901-1904)하였으나 같은 업종 일본인 경쟁회사의 방해와 3차례의 고소로 인하여 사업에 실패했다. 1904년 3월 4일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지의 특별 통신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3월 10일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왔다. 그는 1904년 4월 16일자 신문에 경운궁(慶運宮) 화재를 일제의 방화로 다룬 “大韓帝國 宮中의 廢墟化, 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 제호의 기사를 처음이며 마지막 특종 기사로 실었다. 그리고 1904년 4월 16일 해임되었다. 해임 사유에 대하여 베델은 “크로니클지의 지시는 그 신문의 편집 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직접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은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베델선생 서거 95주년 기념대회 자료) 그 후 1904년 7월 14일, 대한매일신보 창설자 및 사장으로 취임하여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대한매일의 한글판과 영자지 창간호를 냈다. 이 신문은 항일 투쟁의 대변자 기능을 담당했다. 특히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1910년 8월 30일 일제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매일신보로 개제(改題) 되었다. 그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My fight for Korea is heaven ordained.)"라고 했다. 일본의 침략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인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08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선동과 일본에 대하여 적대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두 차례 재판에 회부되었다. 상해로 끌려가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6개월의 근신과 4,000만환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 벌금은 한국인들이 대납했다. 그 후 계속되는 언론 탄압과 영국 정부의 압력, 신문사 간부들의 구속과 경영난 등으로 1908년 5월 27일 신문사에서 물러났다. 후임 발행인은 만함(Marnham)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심장병)되어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1909년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고종황제는 그의 죽음에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天下 薄情之 如斯乎)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양기탁(梁起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국의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大英男子 大韓衷, 一紙光明 黑夜中, 來不偶然 何遽奪, 欲將此意 問蒼窮)”이라는 한시를 썼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고 유언했다. 일생을 항일 투쟁에 바친 우리 민족의 벗이며 은인이었다. 양화진에는 "大韓每日申報社長 大英國人 裵說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 뒷면에 쓴 추모의 글은 일제가 망치로 쪼아 지워 버렸다. 8.15 광복 후 전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1964년 사적을 다시 적어 옆자리에 건립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베델의 부인 마리 모드는 신문사가 자금 난에 허덕일 때 사재를 헌납하고 남편이 별세한 뒤에는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오직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인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輓詞)와 조문(弔文), 남들은 휴지라고 하는 빛 바랜 남편 발행 신문만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외아들과 손자에게 베델의 항일투쟁사를 가르치며 평생을 ‘한국사랑’으로 살다가 1965년 7월 2일 90세로 별세했다. 양화진에 베델 부부가 합장되기를 희망해 본다.
[언론인이었던 베델(Bethell, Ernest Thomas)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원래 베델은 영국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1904년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베델의 조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부동항을 얻는 것이 주목적)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도 일본을 편드는 기사를 싣는 것이 유리했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베델은 양기택,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총합소로 대한매일신보사는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더욱이 1908년 4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베델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짜내었고,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에서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서 3주간 금고형에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심신이 약해진 그는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별세하였다.
1910년 양화진 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해방 후 19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 비를 세워 양화진에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