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열차에 관한 시모음 5)
기차 /박성우
기차 지나간다
사내가 덜컹거린다, 덜컹
덜컹거리다 제자리에 박히는 별, 무더기별
쏟아지는 그리움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사내가 길다란 악보를 걷는다 멀리
멀어져간 하모니카를 분다
혼자 걷는 어둠속
칸칸이 들어 있는 멜로디는 쓸쓸한 법
기억에서 꺼낸 음표들이
개망초를 흔든다
사내는 기다란 노래처럼 걷는다
기찻길만 긴 것은 아니다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 /남유정
기차가 건너간 뒤
기적소리 오래 허공에 남아
마을 어귀
느티나무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
가물가물 철길은
기적소리를 따라가고
숲의 검푸른 그늘로
서늘하게 슬픔이 번진다
너 떠난 뒤
뒷산에서 한나절 뻐꾸기가 울었다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들고
기차소리를 따라
하염없이 철길을 걸었다
어스름이 마을에 닿을 무렵
느티나무 빈 그네에 앉아 너를 생각했다
그리운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쉬이 잊혀진 마음들
머물렀던 순간은 짧고
간이역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
푸른 기적 소리
어둠을 뚫고
저 멀리 막차가 사라진다
기차 /박선경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은 언제나 포물선을 그리지 천천히 내게서 달아나는 것 당신과 나의
만남이 둥글다는것의 일부 눈동자의 둥근 수평선처럼 더이상 쫓을 수 없는 기억의 저편으로
부터 유연하고 부드러운 외면 포물선이 간직한 낭떨어지 끝으로 언제나 기적소리는 내 눈 앞
에서 휘어지네 나는 캄캄한 뒷통수를 향해 필사적이지 모래바람 속을 더듬어 두 귀를 바짝 선
로에 댄 채, 헐거워진 회전의 중심축으로부터 멀어지는,
또한번
베란다 화분에 심어놓은 다알리아꽃이 피었다지는 동안
당신을 향해 주머니 가득 꽂아둔 마른 잎사귀 같은 손을 떨구네.
호남행 비둘기호 열차 /서수찬
갔다 온데나 돌아 갈 곳 모두
별반 다를 곳이 없는 행색들입니다
아니 더 보태주고 오는 행색들입니다
마음은 벌써 헝클어지고
얼룩은 전부다 닦을 생각을 안합니다
모르는 사이들인데도
등 돌리지 않고
좌석을 마주보게 돌려 놨습니다
터널을 셀 수 없을 만큼 드나 들듯이
목적지까지는 앞 사람들의 속을
몇 번을 관통해야 할 것입니다
저마다 불들이 다 꺼져 있을 법도 한데
희미하게나마
껌뻑거리는 불도 있지만
속마음에다가 일제히 켜 듭니다
그 불빛을 보고 한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안심하고 다녀옵니다
소금은 누구나 다 몇 됫박을
몸 어딘가에 가지고 있어서
삶은 계란처럼 딱딱한 껍질만
벗으면 되었습니다
갑자기 한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그쪽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고
설 익었던지 살 채로 벗겨 집니다
거기다가 나머지 계란도 깹니다
체하지 말라고 기차바퀴는 밤새도록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줍니다.
기차 /이기철
출발의 종류가 몇 가지인가를 기차는 가르친다
떠나면서 손 흔드는 법과 남으면서 생각하는 법이
인류의 양식임을 기차는 가르친다
잘 쓴 소설의 마지막 구절처럼
모든 출발과 이별이 이 한 칸에 배송되는 우편물임을
기차는 가르친다
흔들림은 아이에게 젖 물린 엄마의 잠을
제 흔들림의 방식으로 깨워준다
도시마다 편애의 역을 키운다는 것을 미구엔
저 젖먹이가 기차로부터 배울 것이다
머지않아 기차가 엄혹한 시간임을
배웅의 눈동자들이 사랑을 나눠먹는 빵임을
기차로부터 배울 것이다
흩뿌린 곡식처럼 출발은 활발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곳
그러나 이별은 여운의 양식임을 못 가르치는 이곳
어떤 하루라도 음악적인 일몰을 가진다는 것을
누구든 한 번은 기차에서 배울 것이다
기차 /윤진화
내 까만 머리카락을 타고 기차가 떠나요. 열이 오른 휘슬 주전차처럼 휘파람을 불여 달리는 기차. 지구에서 이름 없는 별까지 달리는 기차. 사실, 목적지도 없어요. 이름 없는 별까지, 라고 아무렇게나 읊조린 걸 사과할게요.
편도뿐인 이 기차에 어떤 노인이 먼저 타고 있었죠. 텅텅 빈 열차, 좌석에 앉지 않고 좁은 통로에 서 있던 노인은 화석처럼 굳었죠. 하지만 그가 담배를 질겅 씹어댈 때마다 비싼 엽궐련 향이 나서 좋았어요. 그의 등에는 업을 이어 만든 통발이 업혀 있었어요.
그 안에는 꼬리를 퍼덕이는 인어 한 마리. 여편네라는 인어는 수천 년이나 늙지 않았대요, 사람을 홀리는 눈과 목소리를 내었죠. '다시는 내리지 못하리, 누구도 내리지 못하리,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나는 시집살이를 견디는 여자처럼 다른 곳에 시선을 주어야 했어요. 기차가 인동 넝쿨 꽃잎이 흐르는 곳에 닿았을 때, 인어의 노래가 창을 타고 뱀처럼 넘어갈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 그루 물푸레나무.
노인은 그 나무를 '이그드라실'이라 했어요. 이그드라실, 이그드라실, 우주의 나무, 이그드라실..... 영겁을 벗은 나무의 속살은 모든 업의 끝이라 했죠. 노인이 굳은 다리를 움직였어요. 안쪽에서 잠긴 문을 열고 기차 밖으로 인어를 내 던졌어요.
자장이 없는 시간을 휘젓는 인어의 노래가 고약하게 풍겼어요.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른 노래 '안녕? 안녕! 몇 번을 꿈꾸어도 변하지 않을 사람. 이젠 안녕......' 내 다리에는 조금씩 비늘이 돋아요, 빈 통발을 든 노인은 웃으며 다가서구요.
아무런 고통 없이 손에 넣은,
누구도 주체하지 못하는 낯선 시간을 달려가는 기차.
여기서 그만 내리고 싶어요. 하지만 안녕..... 짧은 기적을 울리며,
잠시 안녕!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김용락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미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 날 바로 그날 밤
양철 지붕을 쉬지 않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 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겨울 경춘선 /신동호
막차. 겨울은 뼛속까지 밀고 들어왔다. 사랑이 고통이라면 다른 고통쯤은 다 잊고도 남았다. 시간이 가까워오면 조금씩 대화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말줄임표도 사라져갔다. 우리들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을까, 새벽을 기다리며 가난한 대합실의 작은 온기를 나누었을까. 사랑은?
종착역. 끝이 없는 여행은 없다. 없기에 슬프고, 없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혁명은 억지로 봄을 부르지만 겨울아, 왜 사랑은 눈꽃처럼 네 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냐.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는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길 끝에 종종 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건널목. 철로를 따라 우리가 가는 길은 일방적이고 무겁다. 차단기를 내리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가난하고 느린 발걸음들을 가로막았다는 걸 자주 잊었다. 사랑도 혁명도 차단기를 내린 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지점을 지나쳐왔다. 눈은 쌓이지 못하고 그렇게 흩어져갔다.
汽車 /오탁번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을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비둘기호 /김사인
여섯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 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 벽에 기대어 난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웠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리를 더 가야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1960년대 /이시영
전라도에서 완행열차 타고 꼬박 열한 시간을 서서 올라와 새벽녘 서울역 내리면 맨 먼저 달려드는 사람이 온몸을 오바로 감싸고 부엉이처럼 눈만 내놓은 뚜쟁이 아줌마들이었다. "총각, 쩔쩔 끓는 아랫목 있는데 몇시간 푹 쉬었다 가아!" 따라가보면 양동 비좁은 언덕길 다닥다닥 붙은 쉰내 나는 닭장 방, 15촉 전등 아래에 약기운 풍기며 축 늘어진 여자들은 다 순자나 숙자 들이었다. 고향 닭 잡아먹으려고 나 여기까지 왔나? 그러나 그땐 그 누이들이 내게 가장 따뜻한 가정이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서당 이기호
한민족 동맥의 핏줄 가로막혔던 것
뻥 뚫려 뜨거운 피가 흐른다
통일의 염원 싣고 열차는
56년 만에 감동의 눈물 싣고
경의선 열차는 문산역을 출발하여
개성역으로 명실상부*한 혈맥을 뚫고 떠나간다
남북을 오고가는 운행열차
한반도 경제가 열리고
평화가 열리는 새로운 희망의 성과다
문산역 곳곳에 한반도기와 ‘반갑습니다.’
희망의 깃발 떠돌이 바람으로
못 다한 말을 휘날리는 거다
빗장 푼 북쪽 땅으로 육해공로 모두 뚫려
한반도 평화의 첫걸음 분단의 벽을 넘어 선다
한반도 종단철도 중국으로 러시아로 유럽으로
희망의 꿈을 싣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
*2007년 5월 17일 경의선․동해선 열차 시험운행.
*명실상부 : 명실이 서로 부합 함. 이름과 실상이 꼭 맞음.
동해남부선 /전다형
고장 난 자리
이道 저道 불발
이빨 나간 바디
재갈과 자갈 문
침묵과 침목 사이 징검다리
칙칙폭폭
일거수일투족 혀 차다
전전반측 길길 뛰어道
오道 가道 못 한 제자리
폐선, 주저앉은 사다리
환상선 눈꽃열차 /靑山 손병흥
추억들이 눈처럼 소복소복하게 쌓여만 가는
눈꽃 만발한 설산 찾는 낭만적인 겨울나들이
매서운 눈길 운전마저 피할 수 있는 기차여행
달랑 객차 두 량이 전부인 낡은 정선선의 기찻길
강원도 심심산골 눈밭을 헤치며 달리는 여유 낭만
움츠렸던 마음 일상조차 물리쳐버린 넘쳐나는 활력
눈꽃 그윽한 산간지방 둘러보는 환상적인 눈꽃열차
해마다 12월 말에서 다음해 2월까지만 운행 하고 있는
서울역 제천역 추전역 승부역 풍기역 다시 제천역 거쳐
눈이 황홀하도록 한 바퀴 돌아온다고 해서 환상선이라는
자유자재로 두메산골 심산유곡 헤집으며 달리는 환상열차
경의 중앙선 /은석 김영제
경의선과 중앙선이
합쳐져
노선이 동서로
관통되어 편리해졌다지만
너무도 작게 보이는
국토에 눈물이 납니다.
강요하지 마십시오
저 이 기차
안 타렵니다
이 기차의 종착역을 가면
갈 수 없는 땅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환불해 주십시오
저 이기차에서
못 내립니다
전 돈주고 탓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는데
왜 도중에 내려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