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간이역 등에 관한 시모음 3)
당산역에서 /박철
겨울새 날아간 자리에
봄꽃은 피고 지고
아직도 해질녘엔
쥐불 따라 논둑을 걷던 아이들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느냐 아우야
영등포 로터리 인간시장에 나가
누군가 빈손으로 되돌아오는 시각
떠나간 만큼 모여드는 이곳에선
오늘도 끝없는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에 기대어 창밖으로
흔들거리며
한강물에 첨벙 마음을 던지는
단 한 사람 있다
깊숙이 달아나는 한 사람 있다.
정동진역 /노향림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지상의 겨울 간이역 /(宵火)고은영
어긋난 능선에 너는
은색 달빛으로 매양 허무하게 부서져 내리고
여울 깊은 산간 오지
어느 기다림으로 섰길래 너는
검은 흙으로 부서지는 바람을 여위며 섰다가
다 못한 사랑처럼 푸르름으로 슬퍼졌느냐
고적한 외로움에 나부끼던 저 고립은
구불진 계곡마다 기다림에 지친 물살로 굳고
빈 대궁으로 고사해 가기까지 저 혼자 흔들리며 춤을 추다가
지상의 가장 높은 간이역에서도 낮은 포복으로 엎디어 숨죽인
마른 손을 내밀어 사랑을 채색하느냐
겨울의 심장으로 골진 대지에
단단한 허리가 잘려나가고 무거운 주검으로 널린
나무들의 몸통에서 계절은 이제 갈 짓자 걸음으로 취해있다
본디 천하디 천한 슬픔으로 뒹굴던 모든 울음 위에
흘러가는 것들의 행방을 묻는다면
영혼의 생채기는 더욱 극심해질 것이리
그저 묻지 않고도 흘러가는 세월 그뿐임에랴
어느 조각으로 흩어진 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사랑하여도 사랑을 입지 못하는 남루한 넋도 허망하나니
잎 지는 가지에 한껏 부딪혀 뒹굴다 사라져 갈 운명 속에
보랏빛 들쭉나무 열매로 초라하게 영글어가는 삶도
형벌같은 아픔을 물고 비로소 윤슬에 익어가고
가람의 어느 물결 소리에 옹골진 울음을 풀어놓으리
매지 구름 저 산을 넘어올 때 산돌림 죽죽 나려오고
혹은 깊은 겨울 하이얀 눈송이로 그린 비 너는
사나래처럼 사뿐히 오더라도
탱탱 언 땅 끝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를 가슴에 묻고
안식하지 못할 철로 위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낡은 기차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느릿한 걸음으로
세월의 안개 너머로 사라져 갈 것이기에
나의 영혼은 언제나 시려운 베개를 들고
이 겨울 한뎃잠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냐
산돌림 : 옮겨 다니면서 내리는 비(소나기)
윤슬 :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가람 : 강
매지구름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사나래 : 천사의 날개를 뜻하는 우리말
그린비 : 그리운 남자를 뜻하는 우리말
종착역 /온기은
사랑의 향기 가득한
화원에서도
가시 울타리를 넘어야 하는 아픔이
따르기도 하여
생의 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가끔 외로움에
비상등이 켜지기도 하는가보다
울타리 안에는
꽃향기 가득한
아름다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삶의 문들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찌르는 고통에 신음하며
잠시 멈춤 선에서
머뭇거리면서도
미련한 탓인지
창자까지 다 게워내는
쓰디쓴 고통을 맛보고 나서야
사랑의 기차를 타고
행복의 종착역에 도착하는가보다.
구둔역 /최정신
승차권 팔지 않는 간이역,
주인 잃은 들꽃이 빈 뜨락을 지킨다
동해나 남해가 종착이던 녹슨 철길
타인을 지인으로
지인을 타인으로 품고 보내던
중앙선 침목은 회억을 지우며 천천히 늙어간다
누군가를 보내거나 기다려 본 적 없이는
생生의 담금질도 없다며
발길 당기는 에움길이 고전적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명命은 그런 것일까
구둔이란 팻말도 지켜내지 못한
비야鄙野의 풍경이 시울에 젖는다
시간이 멈춘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산 풀 내음 싣고 오가던 기차는 기적소리로 사위고
역무원 푸른 깃발은 가뭇한 풍경,
빛바랜 이정표만 기다림의 현재진행형이다
변심한 애인처럼 구둔역을 버리고
잡풀 흐드러진 황톳길에 역마살을 싣는다
간이역 /이기영
까만 산자락 간이역
지붕에는 키 작은 잡초를 이고
현관문은 사슬과 녹슨 자물쇠
광부였던 사람들이
떠나야만 했을때
배웅이 간간히 이루어진 곳
마지막 기적소리에
백발의 역무원은
경례를 붙히고 울먹였다지.
대합실 의자는
시간을 품은 먼지와
뒹구는 열차표 한장
더 녹슨 기찻길 따라
침목은 갈라지고
봉선화는
깨진 유리창에 얼굴을 비춘다.
간이역 풍경 /심의표
인적 드믄 시골 간이역
적막감 도는 대합실
중년의 한 여성
온 종일 벤치에 기대앉아
누굴 기다리고 있는가.
오가는 사람도
쉬어가는 열차도
끊긴지 벌써 오래인데
언제까지 외로이 앉아
애태우며 있으려는가.
열차 지나갈 때마다
신호의 깃발 펄럭이고
풀렛트 홈 줄지어 선 가로등은
말없이 졸고 있는데.
밤은 깊어만 가는데
마성역에서 /김찬일
기차가 오기 전에 첫눈이 먼저 왔다.
역사에 불 켜지고
가로등 불 빛 끝나는 곳에도 눈이 내리면
눈 내리는 플레트홈에 한 장면으로 서 있는
은발의 나탸샤가 나타나는 것이다. 뒤를 이어
사랑하는 남자와 포옹한 채 쓰러지고
더 갈 수 없는 두 사람 위에 눈이 덮이고
사라진 나타샤의 사랑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먼
기적 소리로 들려와 모두 가슴이
뛰게 되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도 떠난 사람도
눈 속에 잠자는 나타샤의 사랑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기차가 떠난 마성역에
흰눈만 소복소복 쌓여가는 것이다.
간이역 /연곡 장화순
사랑의 씨앗으로 태어나
알 수 없는 미지로 가야 하는
공간과 공간 사이
짧지 않은 삶의 시간을
머물고 있는 우주 공간은
내 삶의 간이역
북풍에 차가워진 몸
유리창 투과해 들어와
한참을 머물러
몸을 데워가는 안방은
햇빛 간이역
이름 없는 그림쟁이
첫사랑을 담아 놓은 듯한
파스텔 톤 벽의 소녀
해맑은 웃음이 아름다운 역
해넘이까지 몇 사람이나 태울까
유리창 넘어 들어오는 햇살에
시간표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채화 같은 간이역
마음이 달려가는 기차역 /정세일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기차역에는
언제나 잊어버린 그 소녀가
추억 속에서 하얀 교복을
입고 기다리는 생각을 합니다.
얼굴이 유난해 해 맑아서
가을 하늘처럼 한점
구름이 없던 그녀의
나의 추억 속에서의 정지되 있는 모습은
나의 추억 열차가 달려가는 역에서
오늘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산밑에 우리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동네에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
기차였습니다
그녀는 늘 웃으면서 언제나 그 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나는 언제나 늦을 때마다 헐떡거리며
기차를 타고 했으니까요
긴 굴을 돌고 돌아갈 때마다
기차는 달려가느라 힘이 들었지만
나는 늘 기차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기대어 서서
웃으며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만을 찻곤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추억의 기차를 타고 다시 간다면
하얀 교복을 입고 댕기 머리를 곱게 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오늘도 기차가 달리는 나의 추억 언덕 위에는
하나둘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꽃을 피우고 흔들리고 있는데
능내역 /전영관
햇살은 문을 열 줄 몰라 창으로 들어온다
열차 시간에 늦어 의자에 주저앉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집 한 번 들리지 않는 탕아 자세로
화물열차가 제 성질에 못 이겨 지나친다
노인네들이 흘리고 간 중얼거림이 탄력 없이 늘어져
의자에서 흘러내린다
대낮인데 어쩌라고 홀딱새는 울어대는지
낮이 길어 저녁 먹고도 샛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땅거미가 강을 건너오는데 홀딱새가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운다 손님 없는 칼국숫집 여자의 귓불을 훑어댄다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으슥한 곳을 아는데
둘이 앉으면 오목하니 맞춤인 자리도 있는데
데리고 갈 사내가 없다
기차는 남은 봄을 태워 떠나고
역사 마당엔 이른 여름만 들끓는다
지나던 바람이 배롱나무의 가려운 허리를 긁어준다
토란밭이 있던 자리, 머위가 솜털을 고르며 땡볕을 견디던 공터는
이제 없다 방학마다 놀러 오는 서울 아이들처럼 매끈하고
그 아이들 아버지 양복만큼 반듯한 집들이 차고앉았다
햇살은 열차 시간표를 보려고 벽을 오르고
낮잠에 반쯤 젖은 적막이 다음 열차를 기다린다
기울어진 오후가 일어나려다 쓰러질 듯 창틀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는 동안
배롱나무 언저리를 맴돌다 시틋해진 바람이
제 재주만 믿고 철망을 통과하려다
찢긴 종아리를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옛날 간이 역 /김길남
지나가던 바람 쉬어가고
강아지들 놀이 터 였던
간이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궁전으로 변했다
중앙선이 그렇더니
경춘선에도 호화 궁전이 들어섰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오가 며 서지도 않던
기차가 머물다 간다
그냥 쳐다만 보고 가던 오던
그 곳에
타고 가던 사람들이 내린다
옛날 이 곳을 지날 때면
그냥 궁금하여 뒤 돌아 보며 보며
꼭 내려보고 싶은 곳에
보물이라도 숨어있을 듯해
두리 번 해 반닥
해가 저문다
순천역 /문경기
연향마을 은은한 연꽃향기
바람결에 실려오고
순천만 정원 꽃들이 춤추면
멀리 기적소리 들려오네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 따라
고향 그리움 안고 달려온 하행열차
숨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한려수도 쪽빛 바다 푸른꿈 실어
희망품고 서울로 가야할 상행열차
긴 여정에 가슴 설렌다
갈등과 반목의 아픈 역사
동서화합 이루려는 경전선 선로에
따뜻한 정이 흐르면
삼산을 돌아온 이수의 물결
팔마의 전설을 실어와
죽도봉 연자루에 안개꽃으로 피는데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고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아름답고 정겨운 순천역
푸른 신호등 켜지자
초침과 시침의 속삭이는 시간속에
청명한 고운하늘 남겨두고
연꽃향기 날리며 열차가 떠나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