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리 ‘곧은골’에서 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됐다. 야산 끝자락에서 발견된 유해는 땅 밑 30㎝ 깊이에 묻혀 있었다. 곧은골은 6·25전쟁 때 북한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으로 알려져 왔던 곳. 양구군은 지난 5월 24일부터 이 곧은골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펼쳐왔다. 6·25 참전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 발굴 작업이 지자체 단위에서 이뤄진 것은 처음이었다.
양구군 곧은골의 유해 발굴 작업이 성사되는 데는 곧은골 희생자 유가족인 엄영현(75)씨의 증언이 절대적이었다. 엄씨는 소문으로만 내려오던 곧은골 학살 현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구체적인 학살 장소를 증언했다. 현재 양구군은 곧은골에서 발견된 첫 번째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를 해놓은 상태이다. 엄씨는 자신이 눈으로 본 희생자 수만 수십 명이라고 말했다. 주간조선은 지난 6월 18일 강원도 양구읍 공리에 살고 있는 엄영현씨의 집을 찾았다. 엄씨의 집 바로 뒤에 잘 꾸며져 있는 산소가 있었다. 곧은골 집단학살의 희생자인 엄씨의 아버지 엄기성씨의 무덤이다. 엄씨의 부친은 1951년 음력 10월 9일 곧은골에서 인민군 총탄에 희생돼 집단 암매장됐다. 엄씨가 부친의 시신을 곧은골에서 현재의 장소로 옮기기까지 소설 같은 사연 속에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모두 녹아 있다. 양구군청 등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임을 한 후 산소 밑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엄씨는 1951년 당시 12살이었다. “어휴~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이지. 아직도 그때 일이 생생해. 아버님 산소가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던 집이었어요.” 엄씨가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되살려낸 곧은골의 비극을 엄씨의 목소리로 정리했다. 6·25 발발 전 양구군은 38선 이북, 북한 땅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선이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난리통에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세상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북한 치하 양구군청의 직원이었다. 개전 몇 개월 만에 국군이 양구에 입성했다. 국군은 군청 직원들을 모두 소환해 ‘공산당과 끝이다’는 자술서를 받았다. 아버지도 자술서를 썼다. 1951년 1·4후퇴 때 국군이 이 서류를 폐기하지 않고 철수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인민군은 자술서를 쓴 사람들을 모두 ‘반동분자’로 분류하고 색출에 혈안이 됐다. 아버지는 동네사람 3명과 함께 마을 뒷산 동굴에 숨어 있다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양구군 수인리 강을 건너 친지 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정보를 입수한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인민군은 집을 둘러싸고 집중사격을 했다. 1명은 죽고 아버지를 비롯해 3명은 체포됐다. 양구군 내무서로 끌려온 아버지는 고문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매일 내무서를 오고가며 밥을 해 나르고 속옷·저고리 등을 보초병에게 주고 돌아왔다. 체포되고 보름이 지났을 때 어머니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사를 간다면서 옛집을 나서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아침이 되자마자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을 부탁했지만 나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에 내무서 보초병에게 밥을 전달하고 와서도 불안했던 어머니는 계속 내무서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10여명의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 끌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혹시 아버지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달려갔지만 행렬은 사라진 뒤였다. 얼마 후 멀지 않은 곳에서 수십여 발의 총성이 들렸다. 조금 있으니 곧은골 쪽에서 내무서원 2명이 총을 메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설마 사람을 죽였을까” 하면서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다음 날 내무서에 아버지 밥을 전해주러 갔다. 그날도 보초병은 아무 내색 없이 밥을 받아들고 들어갔지만 석연치 않았던 어머니는 젖먹이 여동생을 업고 어제 총소리가 들렸던 곧은골로 올라갔다. 산 위에서부터 훑고 내려오는데 계곡 초입에 있는 밭에 빈 구덩이 1개와 엉성하게 흙이 덮여 있는 구덩이 3개가 보였다. 옆에는 탄피도 흩어져 있었다. 11월의 날씨는 이미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맨손으로 정신없이 구덩이에 덮여 있는 흙을 파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흙 속에서 낯선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구덩이에는 모두 7구의 시신이 있었다. 피투성이의 시신들을 한 구 한 구 확인했다. 그 구덩이에 아버지는 없었다. 등에 업혀 있던 여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산 위에서 인민군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들키면 끝이었다. 어머니는 100여m 아래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 피투성이 손을 씻고 여동생에게 젖을 물렸다. 눈물도 마르고 시신을 보고도 무섭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고 한다. 오직 구덩이 속에 남편이 없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단다. 울음이 그친 아이를 들쳐 업고 어머니는 다시 두 번째 구덩이를 팠다. 시신들은 오래 감금생활을 한 탓에 수염이 모두 덥수룩한 데다 피범벅이 돼 있어서 얼굴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두 번째 구덩이에도 없었다. 세 번째 구덩이째, 시신을 하나하나 들추고 피범벅이 된 얼굴을 확인해 가던 어머니는 맨 밑에 있는 시신을 보고 숨이 막혔다. 아버지였다. 내무서에 넣어줬던 옷들은 어떻게 했는지 맨몸에 팬티만 걸치고 있었다. 얼굴보다 먼저 팬티를 보고 남편임을 알아봤다. 자신이 만들어준 팬티였다. 무슨 정신으로 내려왔는지,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구덩이를 흙으로 대충 덮고 집에 온 어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변고를 알리고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다음 날 새벽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곧은골 학살 현장으로 갔다. 아버지는 철사로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다른 시신들 밑에 눌려 있었다. 시신을 꺼내기 위해서는 다른 시신들을 들춰내야 했다. 아버지는 왼쪽 가슴과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이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 총검으로 오른쪽 뺨을 찌른 흔적이 있었다. 총검에 찔리면서 치아 3개가 부러져 있었다. 처참한 시신을 보고서도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시신을 구덩이에서 5m쯤 떨어진 참나무 밑에 가매장하고 표시를 해두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 30세였다. 내려오는 길에 비어 있는 구덩이가 눈에 띄었다. 내일 또 학살이 예정돼 있는 것 같았다. 3일 후 인민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숨겨놓은 아버지를 내놓으라면서 총검으로 여기저기 찌르고 다녔다. 아버지의 죽음을 모르는 줄 알고 집단학살을 감추기 위해 쇼를 한 것이었다. 며칠 후 국군이 재입성한다는 소문이 나고 인민군들이 마을을 돌며 북쪽으로 피란갈 것을 강요했다. 쫓기다시피 피란길에 나섰다. 현재 양구군에서 유일하게 북한 땅이 된 수입면 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어머니가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를 학살한 인민군 소굴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방향을 틀어 마을 사람들과 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국군에게 희생될 뻔한 일도 있었다. 지금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날 아침 중공군 패잔병 5명이 집에 숨어들어 밥까지 해먹고 나오는 것이었다. 국군 수색대가 출동해 집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도망가던 5명 중 한 명은 죽고 4명은 생포됐다. 국군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밭에 세워놓고 중공군을 도와줬다면서 사살하려고 했다. 어머니가 군인의 바지를 붙잡고 “남편이 인민군에게 학살됐다”면서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군인은 “아군 피해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당연히 총살감이지만 부상자가 한 명도 없으니 살려 준다”면서 물러갔다. 12살에 가장이 되면서 겪어야 했던 고생을 말하자면 하룻밤을 새도 부족하다. 6남매 중 병으로 4명이 죽고 나와 남동생만 남았다. 아버지 시신을 발굴할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던 여동생도 어릴 때 죽었다.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도 형제를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농사짓고 나무하고 밥해 먹으면서도 양구농고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가매장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 현재의 산소로 모신 것은 1958년이었다. 1951년 정전협정 회담이 시작된 후 양구군은 주민 소개 대상 지역이 됐고,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원주수용소 등에서 살았다. 거기서 살다 양구군이 수복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지금의 산소에 모셨다. 어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아버지가 학살됐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아버지보다 두 살 위였던 어머니는 서른둘에 혼자가 돼서 1996년 80세를 일기로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엄씨 문중은 어머니 김옥순을 효부 명단에 올렸다. 어머니는 우리 앞에서 누구보다 강인했다. 힘들고 지칠 때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버텼다. 나라면 절대 시신 구덩이 앞에서 어머니처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