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데이 (외 2편)
김사리
나와 나 사이
다정한 간격이 쳇바퀴를 돌지요
변함없는 거리를 재고 있어요
초코파이 하나 둘 셋 하고도
π day
오늘은 내가 던진 주사위를 내가 받는 날
그림엽서 속으로 파이가 들어갑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우표를 붙인
엽서 위로 자줏빛 꽃비가 흘러내릴 때
나무의 말, 나무의 군더더기도 따라 흐릅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숨어들자
빛 쏟아지는 바닥 위로
쌓이는 건 낙엽이 아니라 침묵입니다
여백을 아끼는 저 나무의 어기찬 의지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차지합니다
이 가을을 누구에게 부칠까요
사라져버린 가로수 거리로
이 엽서 띄워 보내면
그 옛날 그 나무들 반짝 되살아나
나는 자전거에 올라탄 앳된 소녀
시간의 페달을 밟고
엽서가 사라진 거리
여기 갈색비 내리는 가로수길에 서서
어제와 오늘의 관계와
오늘과 나의 관계를 짚어보고 있어요
일정한 거리에서 변함없이
푸른 기억이 복제되고 있어요
*원주율: 원둘레의 길이와 원의 지름의 비율. 보통 근사값 3.14로 사용되며 기호는 π로
나타낸다.
세 번째 눈
두 눈을 지운 자리에서 손가락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손가락 끝에 생긴 눈이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해제된 약속이 풍경을 이끌고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인공 시선과 눈물을 파는 상점은 뜻밖의 비밀
시선의 종류와 눈물의 농도에 따른 면죄부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울지 마, 소리에 돌아보면
얼굴을 감싼 손가락이
적당한 시야로 멀어지거나 다가오는 얼굴
말을 건넨 얼굴이 원하는 눈빛으로 당신은 말을 합니까
한결같은 시선의 껍질을 벗기면 마침내 원하는 눈빛이 나옵니까
빛을 보면 재빨리 터져버리는 눈망울들
등을 대고 말하는 습관이 전염되는 동안
창문 많은 눈을 부릅뜨며 푸른 하늘을 가리는 동안
그림자를 가진 젖은 눈빛을 더는 떠올리지 않을 거예요
어둠을 매만지면 심장에 쌓아둔 빙하가 녹아 밑바닥까지 쓸어가 버리고,
거리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난시
홍차가 생각을 우려낸다
붉은 응접실엔 처음부터 푸른 색깔은 없다
앙리 마티스의 생각이 나뭇잎을 물들인 것처럼,
찻물에 잠긴 찻잔의 내면은
당신의 머릿속을 물들일 음모
홍차가 점점 더 붉어진다
지금 찻잔은 붉은 것들의 작업실
찻물을 젓는 당신의 이 순간은 숨이거나 쉼
붉음은 찻잔 가득 번져보는 혼자만의 노동
회오리친 찻잔 속에서 홍차가 홍차일 때
귀뚜라미는 오래 울며 밤을 식히고
달을 씻은 연못이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간다
급정거한 오토바이가 길을 막은 생각에 부딪혀 쓰러진다
치킨 두 마리가 종이봉투를 뚫고 나와 껴입은 튀김옷을 벗고 맨살로 해체된다
찻잔 속 충혈된 눈동자는 새벽녘에야 눈을 감는다
⸺시집 『파이 데이』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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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리 / 본명 김현미(金賢美). 1968년 경남 밀양 출생. 2014년 계간 《시와 사상》으로 등단. 시집 『파이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