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고생의 뒤끝
나윤자는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배를 떠안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폭넓은 임신복을 입지 않
아 그녀의 배는 더 표 나게 불러보였다. 생활이 어지간하면 다 사 입게 마련인 임신복도 입
지 못한 그녀의 입성에서는 가난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기 없이 까칠하고 기미 낀 얼굴
에서도 궁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나윤자는 식품점 앞에 이르러 몸을 사리며 가게 안을 힐끔힐끔 살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
득 올케가 애를 낳아 가게에 안 나올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올케가 가게 안에 있는지 없는
지 눈치를 살피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참 이상하고도 묘한 일이었다.
가게를 차리는 데는 올케의 돈이 땡전 한 닢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왜 그리 올케의 눈치가 보
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올케는 뒤늦게 시집을 와서 가게나 좀 보며 호강하고 살았을 뿐이
다. 그런데도 어머니마저 갈수록 더 올케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었다.
“엄니. 그러지 말아요. 엄니가 왜 며느리눈치 보면서 살고 그래요? 돈 한 푼 보탠 게 있어
요. 무슨 고생을 한 게 있어요. 눈치는 올케가 엄니 눈치를 봐야지요. 안 그래요?”
나윤자는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이런 식의 말로 오기를 부렸다.
“금메. 고것이 참 요상시럽고 얄랑궂은 거이야. 메누리란 것은 시집올 때 달르고. 첫 아그
낳아서 달르고. 둘째 낳아서 달르고 헌다등마. 그 옛말이 워찌 그리 딱 맞는지 몰르겄다. 메
누리는 지 자석덜 밑천삼아 기를 세우는디 시엄씨야 자꼬 늙어감서 차차로 똥친 작대기 돼간
께 당연지사 아니겄어. 지 영감이나 살었으면 또 몰르겄는디. 영감도 웂이 혼자면 더 천시당
허는 법이여.”
갈포댁의 시름겨운 대꾸였다.
“엄니. 그것이 무슨 맥빠지는 소리에요. 엄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살았는데. 이 식품점
도 어디 오빠 혼자 힘으로 일으켰어요? 엄니가 죽을 등 살 등 고생고생해서 일으킨 거지. 엄
니는 당당하게 호강하면서 살 자격이 있다구요. 엄니. 혹시 오빠가 장가들어 맘 변한 것 아
니에요? 내가 오빠한테 한판 따질까요? 엄니 제대로 모시게 올케 언니 길 똑바로 잡으라
고.”
“아서. 아서. 니넌 출가외인이여. 니나 메누리 노릇 잘허도록 혀. 나야. 암시랑토 안 혀.
요런 가게 번듯허니 채래놓고 끄니 걱정 안험서 돈 모트고 사는 요것으로 천하를 다 얻은 것
이여. 나가 인자 머시럴 더 바래겄냐. 공연시 불란 지기덜 말어. 나라 상감도 심이 덜 차는
대목이 있는 법인께.”
한 가닥이라도 어머니가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 나윤자는 견디기 어려웠다. 어머니
만 생각하면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눈물이고 서러움이고 쓰라림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어머
니가 겪은 온갖 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돈 좀 여유 있게 쓰며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하고 며느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올
케가 밉기도 했지만 더 야속한 것은 오빠였다. 오빠가 올케를 확 휘어잡고 어머니를 깍듯하
게 모시게 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빠가 손이 그런 것 때문에 계속
한풀 꺾이고 있는 것인가....... 그 생각이 들면 자신도 그만 기가 수그러들었다.
나윤자는 한숨을 쉬며 식품점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복남식품점ㅡ 여기 올 때마다 그 간판
을 올려다보는 것도 버릇이 되어 있었다. 오빠의 이름을 딴 그 간판을 보면 그래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무리 변두리 동네라지만 서울에서 버젓이 간판 단 식품점을 차리고 있다는 것
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오빠가 손가락 네 개를 잘리고 공장에서 쫓겨났던 그때의 암담하고
기막혔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이만저만 잘 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름이 근사해서 식
품점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그전의 구멍가게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
자면 미국산 음료 냉장고가 자리 잡고. 그 옆에 음료박스가 높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두 개의 미국 음료회사는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네 음료를 서
로 많이 팔게 하려고 유리문이 달린 소형냉장고와 함께 간판 붙여주는 일을 앞 다투어 했
다. 그 바람에 구멍가게들은 ‘식품점’이라는 새 이름을 얻으며 공짜로 아크릴 간판을 달
게 되었다. 그 간판들의 양쪽 끝에는 두 음료회사의 상표가 선명하게 붙어있었다. 냉장고에
서 시원하게 된 그 음료의 톡 쏘는 맛은 금방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들었다. 그 비싼 미
제 음료 때문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가난한 냉차장사들은 그나마 살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엄니이ㅡ.”
나윤자는 어머니를 부르며 식품점 안으로 들어섰다. 길게 늘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머
니를 향한 안쓰럽고 안타깝고 서러운 온갖 정이 담겨있었다. 다른 말은 다 고쳤으면서도 어
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불렀던 그대로 여전히 ‘엄니’였다.
“이. 니 워쩐 일이여? 몸도 무거움시로.”
다듬고 있던 파를 던지며 갈포댁이 벌떡 일어났다.
“또 뭐하세요? 그저 잠시도 쉬지 않고.”
나윤자는 마땅찮은 얼굴로 파를 쳐다보았다.
“이. 손놓고 있으면 멀 허냐. 노느니 염불허는 거이다. 얼렁 앉어라. 심드는디.” 갈포댁
은 쪽마루에 수북한 파 쓰레기를 치우며. “쬐깐 묵고살 만혀짐스로 시상이 요상시럽게 변해
간다. 파고 마늘이고 다듬고 까놓고 허지 않으면 사가덜 않으니 말이여. 여자라고 생긴 것
은 다 편차고 작정들 허고 나스는 풍존디. 요러다가는 콩나물꺼정 다듬어서 폴아야 될 날이
올랑가 무섭다. 말 타면 경마 잽히고 잡다는 옛말이 어찌 그리 딱 맞는지 몰라.” 그녀는
구시렁거리듯이 말했다.
“엄니. 벌써 콩나물도 깨끗하게 다듬어서 파는 세상이 됐어요. 여기야 변두리니까 아직 안
그렇지만.”
나윤자는 무겁게 몸을 앉히며 안쓰러운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머시여? 발써 워디서 그런일이 벌어지고 그려?”
“으응. 나도 그냥 들은 얘긴데. 저어기 강남 부자 아파트촌 상점은 다 그런대요. 콩나물만
이 아니라 무도 배추도 더 손댈 것 없이 깨끗하게 다듬어서 판다는데요. 뭘.”
“얼랴. 무시 배추꺼정도? 그려. 으쩌겄냐. 돈이 말허는 시상잉께. 그리 편케 한시상 못 살
아 보는 것이 빙신이제.” 갈포댁은 한숨을 쉬며 쪽마루에 앉더니. “니 무신 일 있는겨?”
하며 딸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응. 엄니도 알지요? 묘숙이 언니라고.”
“하먼. 알제. 니 끌어준 사람 아니여.”
“예. 그 언니가 글쎄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 듣고 안 가볼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빈 손으
로 갈 수 없으니까 여기서 뭘 좀 살 겸 엄니도 볼 겸해서 왔어요.”
“중병이면 무신 병인디? 그 사람도 살기가 에롭다고 안 혔어?”
갈포댁은 계속해서 파 다듬는 일손을 놀리며 걱정스럽게 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주름진 얼
굴에도. 흰 머리카락들이 희끗거리기 시작한 머리에도 고단한 세월이 담겨 있었다.
“글쎄 말이에요.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중병인지 모르겠어요. 그 언니도 고생만 죽도록 하
고 살았는데. 큰일이에요.”
나윤자가 한숨을 쉬며 파를 집어들었다.
“아서. 아서. 그냥 앉었기도 심드는 몸으로 무신 짓이여.” 갈포댁은 딸한테서 잽싸게 파
를 빼앗고는. “그야 젊은 날 고상고상험서 살었응께 중병이 들지야. 머심살이 20년에 남은
것은 황천길 갈 골병밖에 웂다고 혔니라. 열다섯에 머심으로 지게지고 나섰으면 서른다섯에
발써 황천길 가게 몸이 파삭파삭허니 되야부렀다 그것이여. 사람 몸이란 것이 다 한도가 있
는 것인디. 근디. 니넌 요새 워쩌냐?” 말을 하다보니 불현듯 딸 걱정이 되어 그녀의 말꼬리
가 다급해졌다.
“그저 괜찮아요.”
나윤자의 두 손이 불룩한 배 위로 옮겨졌다.
“또 아픈디는 웂는겨? 아그 노느 것은 워띠여? 잘 차고 그려?”
일손을 멈춘 갈포댁은 걱정스러운 빛으로 연달이 물었다.
“예.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윤자는 고갯짓까지 하며 웃었다. 그러나 하루에 한두 번씩 눈앞이 아뜩해지도록 현기증이
일어나고는 했다.
“그려. 막달잉께 아무 일도 웂어야제. 워디 아프고 요상시러운 기운이 있으면 금세 말혀라
잉?”
갈포댁은 딸의 손등을 쓸었다.
“예. 오빠는 어디 갔어요?”
“이. 도매상에 물건 허로 갔다. 하매 올 때가 다 되야간다.”
“손도 불편한데 이제 그만 앉아서 물건 받으면 안돼요?”
“느그 오빠 통고집 알지야? 빵허고 콜라 빼놓고는 요 파 한 단꺼정 그냥 앉어서 받는 물건
은 하나또 웂다. 자전거로 물건 대는 사람들 물건은 1원이 더 비싸도 비싸고. 같은 물건이라
도 오래 되고 그런 것이라고 뿌득뿌득 큰 시장 도매상으로 나간당께로. 허기사 고상이 쪼깐
되드라도 그리 야물딱지게 혀야제. 굳은 땅에 물 괴드라고 그간에 그리 지독시리 두 눈에 쌍
불 키고 혔응께 이리 터잡았제. 우선 묵기는 꼬깜이 달드라고 편헌 것 좋아험서 앉어서 물
건 받고 흘룽할룽 혔드람사 이리 든든허니 되얐을 것이냐. 끔 한 통 폴아야 1원이 안 남는
디. 멫 년 동안에 이 가짓수 많은 물건들이 골백번 돌아나감스로 도매상 상대혀서 떨어진 이
문만도 얼매냔 말이여. 느그 오빠 겉은 젊은 사람도 웂다. 하먼. 그리 지독시리 혀야제. 요
가게 채린 돈이 워디 그냥 돈이가니. 지 몸땡이허고 바꾼것인디.”
누가 흉을 보는 것도 아닌데 갈포댁은 아들을 철저하게 두둔하고 있었다. 나윤자는 듣고 또
들은 그 말을 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오빠를 장하게 생각하는 그 말을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
고 되풀이했고. 자신도 언제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듣기 좋은 노래 같기만 했다. 아무런 가
망 없이 망쳐져버린 줄 알았던 오빠의 신세가 이렇게 펴진 것이 너무나도 다행스럽기 때문이
었다. 풀빵하나를 제대로 사먹을 수 없었던 시절에 이런 상점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부자
로 보이고 부러웠던가. 지금도 풀빵도 못 먹고 일에 시달리는 공원들이 숱한 것을 생각하면
오빠는 부자가 된 셈이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언제 또 다녀오셨어요?”
나윤자는 상점에만 나오면 생각나는 천두만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한 열흘 전에 댕겨왔다. 거그 땅이 걸어 농사 잘되는디다가. 농사 지어갖고 식구 수대
로 똑겉이 갈라묵은께로 시상에 근심 걱정이 웂다는 것이여. 내외가 살도 올르고. 신간 편
케 뵈는 것이 거그 잘 찾어간 것이등마. 그 아자씨는 천상 농사꾼이여.”
“마음 편하게 잘 사시면 참 다행이네요. 근데. 지난번에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다같
이 농사지어 식구수대로 똑같이 가른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땅이 개인 것이 아니
면 게으름피우는 사람도 있고. 꾀부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영 복잡할 것 같은데. 그러면
아저씨 같이 부지런한 사람만 손해 보게 되잖아요.”
나윤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쩍어했다.
“이. 나도 고것이 요상시러봐 안 물어봤드라냐. 글 안 해도 께을른 사람도 있고. 살살 힘
진 일 피허는 꾀살이도 있고. 교회 돈 돌라서 달아나는 숭헌 사람도 있고. 베라벨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이여. 워떤 인종은 돈 돌라 달아났다가 멫 달 만에 빈털터리 되야 갖고 금메 거
그로 끼대들어 왔드란다. 사람들이 전부 ‘저 못된 놈 경찰에 넴기라’고 야단이 났는디.
그 목사님 허시는 말씸이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디. 그 잘못을 회개허먼 되
는 것이라’고 험서 그 사람을 교회로 딜고 가 기도시키고 그대로 받아줬다는 것이여. 근디
또 기맥힌 일이 벌어졌어. 멫 달 있다가 그 사람이 또 돈을 돌라갖고 내뺀 것이여. 그리고
또 얼매가 지내서 그 사람이 빈주먹으로 거그럴 찾아들었던 마다. 근디 목사님은 또 웃는 낯
으로 그 사람을 대험서 용서헌 것이여. 그런 목사님을 봄스로 사람들은 감복허고. 일도 열성
으로 허게 된다드라. 그라고 목사님 내외간도 딴사람들허고 똑겉이 농사짓고. 나누는 것도
똑겉이 허고 헝께 아무도 불평헐 것이 웂이 한 덩어리가 되야간다는 것이여.”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분은 아마 사람이 아닌가 봐요.”
나윤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려. 나도 니허고 똑같은 말을 혔는디....... 거그가 바로 천국이 아닐랑가 몰르겄다. 느
그 아부지가 살아 기셨드라면 우리도 거그 가서 말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인디. 느그 아부지
도 천상 농사꾼이었응께.”
갈포댁은 목소리가 잠겨들며 눈을 훔쳤다. 남편을 생각하는 그녀의 눈자위는 붉어져 있었다.
“그래요. 마음만으로도 나도 그런데 가서 살고 싶으네요.”
그곳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나윤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 있잖아요. 우리 집에 콜라 한 빡스하고. 설탕 3키로 짜리 하나 배달해 주세
요.”
그때 손님이 밖에서 목청 크게 말했다.
“예에. 안녕허세요. 곧 배달허겄구만요. 무슨 잔치 있으세요?”
갈포댁은 딸하고 말을 할 때와는 다르게 서울말투를 쓰며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예에. 우리 애 생일이라 저희 친구들을 부른다는데 뭐 특별히 줄 게 있어야지요. 적당히
생일상 차려주고. 애들 좋아하는 콜라나 마시게 해야지요.”
“예에. 애나 어른이나 콜라는 다 좋아헝께요. 곧 배달허겄구만요.”
환한 웃음을 피워내며 갈포댁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는 손님을 대하는 게 아
주 몸에 익어 있었다.
“니 머 묵고 잡은 것 웂냐?”
물건을 팔아 기분 좋은 기색이 담긴 얼굴로 갈포댁이 딸에게 물었다.
“아니요.” 나윤자는 고개를 젓고는. “배달 들어왔으면 오빠가 빨리 와야 할 텐데. 나도
온 김에 오빠 보고 가야하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아나. 요것 갖다가 얄팍얄팍 썰어서 계란에 부쳐 묵어라. 기운 채래야 아그 잘 낳고. 기
운 채리는 디는 괴기가 질잉께.”
갈포댁은 빨간 비닐포장이 된 소시지 두 개를 내밀었다.
“엄니. 싫어요. 이 비싼 걸 팔아야지. 오빠도 없고. 물건 그냥 들어내는 것 올케가 딱 질색
하잖아요.”
나윤자는 물러나 앉는 몸짓을 하며 손을 저었다.
“하이고 싼지그나. 고것이 배와묵은 보초가 웂어서 그 모냥이제. 나가 날이날마동 허는 일
을 품삯으로 쳐봐라. 요까짓 것 수백 개가 당허는가. 여러 소리 말고 싸게 챙겨.”
갈포댁은 우왁스럽다 싶게 딸의 손가방을 뺏어 소시지를 넣었다.
“엄니이.......”
나윤자는 가슴 찡해지며 울상을 지었다.
“애비는 일찍 떠나불고. 오빠는 손꾸락 몽땅 짤리고.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캄캄허고 막막
헌 집구석 혼자 띠미고 발싸심험서 고상고상헌 것이 뉘기여. 니 아니었음사 그 숭악헌 시절
을 워찌 견뎌냈을 끄나. 그런 공 하나또 몰르고 늦게 시집와서 무신 행짜여. 행짜가. 시상
이 드럽고 빌어묵게 되니라고 메누리란 것들이 씨엄씨도 몰라보고. 시누이도 몰라보고. 다
망헐 놈에 풍조제.”
갈포댁은 다듬은 파들을 묶으며 성깔 돋은 푸념을 하고 있었다.
“엄니. 손자들 예쁜 것만 생각하세요. 힘든 일도 차츰 손을 떼구요.”
나윤자는 어머니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야말로 평생 고생에 시달리며 집안을
이끌어 왔는데 아직까지도 궂은일만 해야 하는 것이 속상하고 가슴 아팠다.
“그려. 손지새끼덜 이쁘고. 세 끼 밥걱정 안 허고 입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천복을 누린다
고 생각혀야제. 인간사 내리사랑만 있제 치사랑은 웂다고 혔응께 메누리헌테 위함받고 잡어
허는 것이 물줄기 위로 돌릴라는 욕심이겄제.”
갈포댁은 휘늘어지는 한숨을 쉬었다.
“엄니. 나 왔어요.”
밖에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음마. 아범 왔다!”
“예. 오빠에요.”
갈포댁과 나윤자의 말이 겹쳐지며 그들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윤자 왔어. 윤자.”
갈포댁이 앞서 밖으로 나가며 말했고.
“그래. 몸은 좀 어떠냐?”
나복남이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어머니를 뒤따라 나온 여동생을 보고 웃었다. 그
는 살도 많이 오르고 화색도 좋아보였다.
“응. 그저 괜찮아. 오빠는?”
나윤자도 오빠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기미가 두껍게 낀 얼굴에 드러나는 웃음은 어쩐지 쓸
쓸하고 춥게 느껴졌다.
“나야 맨날 이 짓이고. 넌 그저 괜찮으면 어쩌야. 싹 괜찮아야지.”
나복남은 자전거 뒤에 실은 커다란 대바구니에 묶인 굵은 고무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그 대
바구니 위에는 밑에 담긴 것만큼의 높이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물건들은 지대로 다 혔어?”
갈포댁은 손 빠르게 물건들을 내리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며 몸짓에서는 조금전의 수
심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예. 대충 하기는 했는데요. 그나저나 큰일났어요. 무슨 물가가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
이 줄창 올라가기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물가가 오르면 이익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장사만
안 되는데. 빌어먹을.”
나복남이 투덜거리며 침을 내뱉었다.
“당최 고것이 무신일인지 몰르겄다 이. 잘살게 되얐다고 자꼬 나팔이나 불어대덜 말든지.
잘살게 되얐으먼 물가가 잠잠허든지. 참 요상시런 시상 아니여? 누구 애 터져 죽일라고.”
“미친 새끼들. 다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해서 그래요. 위에 있는 놈들은 다 도둑놈들이고 대
학생들은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맨날 데모를 해대니 나라꼴이 될 게 뭐예요. 개새끼들.”
“아이고. 누가 듣겄다. 지발 그런 입바른 소리 씸벅씸벅해 버릇 허지 말어. 잽혀가서 졸갱
이치면 누구 손해여. 요런 험헌 시상에서는 무신 허고 잡은 말이 있어도 그저 입 봉허고 사
는 것이 질이여. 해방되고 정신웂이 어지러울 적에 이쪽저쪽에서 당헌 사람들은 다 말 자리
나 헐지 아는 사람들이었응께. 하먼. 말이 사람 잡는 법이여.”
갈포댁은 질색을 하며 빈 주먹질을 해댔다.
“아이고. 모르겠어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인지. 혼자 죽을 때까지 해먹을라면 물가
나 안 오르고 사람 살기 좋게 해놓든지. 물가 이리 오르게 엉망진창 만들었으면 대학생들 말
대로 물러가든지. 이건 죽도 밥도 아니니까 사람 열 안 받게 생겼어요. 신경질 나게.”
나복남은 입으로 할말은 다 하며 손은 부지런히 놀려 물건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아서. 아서. 그런 말 헌다고 들어주는 것 아니고. 시상이 바꽈지는 것도 아닝께 그냥 속으
로만 그러려니 혀. 시끌시끌허고 무서운 시상에서는 나 못난이네 험서 입 봉허고 사는 것이
질이랑께로. 나 말 알겄지야?”
갈포댁도 아들이 내려놓는 물건들을 부산하게 옮겨놓으며 할말은 야무지게 다하고 있었다.
서민들이 물가 오르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은 괜히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경제기획원에
서는 지난 10년간 기초 생필품 값이 최고 1.200퍼센트 올랐다고 집계하여 보도하고 있었
다. 정부기관의 집계가 그러니 소비자들의 체감 물가가 어떨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니 몸도 션찮응께. 무거운 것 들 생각 말고 요 과자 선물쎄트로 혀라. 보기 좋고. 속 실허
고. 가뿐헝께 이보담 더 존 것이 웂다.”
갈포댁은 여러 가지 과자가 든 종이상자를 딸 앞에 내놓았다.
“그래. 중병환자면 밥맛도 없을 텐데. 오래 두고 먹기도 좋겠다.”
나복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럼. 좀 보기 좋게 싸줘.”
나윤자는 오빠에게 말하며 손지갑을 꺼냈다.
“왜. 돈 낼라고? 관둬. 딴 사람도 아니고 전묘숙이 그 사람한테 가는 건데. 우리한테 고맙
게 해줬으니 이런 때 한번 갚아야지.”
나복남이 포장지를 꺼내며 웃었다.
“그려. 오빠 말대로 혀라. 장자가 특별허니 맘쓰는 것잉께로.”
갈포댁이 냉큼 말을 받았다.
“이럴라고 온 것이 아닌데......”
나윤자가 멋쩍은 얼굴로 오빠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찮아. 그나저나 그 사람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병이 든 건가. 무슨 병인진 모르지만
중병이라니 큰일이다.”
나복남은 오른손이 불편한데도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해나가며 말했다. 긴 세월에 걸친 숙달
로 오른손은 왼손을 보조해가며 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뻐스 올르고 내릴 때 조심허고. 오늘이사 워쩔 수 웂다만 더 나댕길 생각허지 말고. 막달
잉께 그저 조심허고 또 조심혀야 써.”
갈포댁은 상점 밖까지 따라 나오며 딸에게 일렀다.
“알았어요. 그만 들어가세요.”
“그려. 핑허니 가.”
갈포댁은 말에 맞추어 빠른 손짓을 했다.
나윤자는 얼른 돌아섰다. 눈물이 솟구치려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만 대하면 눈물
이 나려고 했다. 시집을 가고 나서 생긴 증상이었다. 어머니....... 뜻 모르게 서럽고 눈물
나는 대상이었다. 홀로 외롭게 늙어가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갈포댁은 무겁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멀어지고 있는 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삼키고
또 삼키는 눈물이 목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불쌍허고 짠헌 것........ 복쪼가리도 잔생이 웂고 징허고 징허게 고생만 허고....... 다 에
미 애비 잘못 타고난 것이 죄제. 부잣집에 태였드람사 그 인물에 머시가 모지랜 것이 있었
을 것이여. 그나저나 아그나 지대로 잘 낳아야 헐 것인디. 묘숙이만 고상혀서 중병 들었간
디. 저것도 겉보기로 표 안 나게 골병 들었응께 그 숭헌 일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썩 당헌 것
이제. 삼신할메요. 아무 탈웂이 아그 잘 낳게 굽어살펴 주십소사. 굽어살펴 주십소사. 굽어
살펴 주십소사.
갈포댁은 정화수 떠올린 마음으로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그녀는 딸 걱정으로 요새도 늘 마
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딸은 큰아들이 구멍가게를 차리고 난 다음부터 제 월급을 모으고
모아 늦은 시집을 갔다. 그런데 1년이 넘어서야 임신을 한 딸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피
를 쏟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몸 간수를 잘못한 실수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두 번째 임신에
서도 유산을 했고. 세 번째 임신도 유산이었다. 그제서야 몸이 부실한 것을 알고 병원을 찾
아갔다. 병원에서는 표 나게 아픈 데는 없는데 몸이 너무 허약하다고 했다. 다시 한약방을
찾아갔다. 어떻게 살았길래 젊은 사람 몸이 맥이 잡히지 않을 지경으로 이 모양이냐며. 몸
이 이리 냉하고 종잇장 같으니 유산을 안 할 수 있느냐며 한의사는 한참이나 혀를 찼다. 기
를 돋우고 몸을 덥게 하는 보약부터 먹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보약 값이 너무 비쌌다. 몸
이 부실해 연달아 유산을 시킨 것도 면목이 없는 일인데 그 비싼 약값을 사위보고 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염색공장에 다니는 사위의 월급은 저희들 살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며느리 모르게 큰아들에게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큰돈이라서 그랬겠지
만. 큰아들은 덜 좋은 기색 끝에 보름을 끌어 돈을 내놓았다. 제 마누라 모르게 돈을 마련하
느라고 그런 눈치였는데. 그게 그렇게 역정나고 서운할 수가 없었다. 딸이 집안을 위해 고생
한 것에 비하면 며느리는 호강만 하고 살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왜 큰아들은 제 여동생을 위
해 쓰는 돈을 당당하게 내놓지 못하고 마누라 눈치를 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딸은
보약을 먹은 다음 다시 임신을 했다. 조마조마한 가운데 유산을 면했지만 그러나 불안을 떼
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딸은 두 번이나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몸이 아팠다. 심한 어지
럼증도 몸이 붓는 것도 허약한 몸에 애를 가진 때문이라고 했다. 딸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
서 사위에게 면목 없고. 큰아들에게 옹색스러웠고. 딸에게는 한없이 죄스러웠다.
나윤자는 몇 번씩 다리쉼을 해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산동네 비탈을 올라갔다. 전묘숙이 이
산동네의 무허가 판잣집을 장만한 것은 재작년이었다. 그때 그녀는 춤을 출 듯이 좋아했었
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집 없는 서러움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었
다. 그 집은 전묘숙의 힘으로 장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전묘숙의 남편은 연탄공장에 다녔다. 그 벌이로는 가난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전묘숙은
시집을 가서도 미싱사 생활을 끝내지 않았다. 은행의 여 행원들을 비롯해서 모든 직장의 여
직원들은 시집을 가는 것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듯이 미싱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러나 보세가공이 번창하면서 결혼한 미싱사들도 전보다 월급이 한 급 낮은 하청공장에서 일
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전묘숙은 어떤 하청공장으로 들어가 계속 재봉틀을 돌려댔다. 남
편의 벌이로는 먹고 살고. 자기가 버는 돈은 한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으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억척스레 일을 해서 무허가 판잣집이나마 장만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랴. 전
묘숙네 판자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나윤자는 좁은 마당으로 들어서며 인기척을 냈다.
“언니. 언니.”
쪽마루 아래에는 여자 신발이 놓였는데 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언니. 언니. 자요?”
나윤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방문을 질벅거렸다.
“누. 누구세요?”
방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나예요. 윤자.”
나윤자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머. 윤자가 왔구나.”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는 전묘숙을 보는 순간 나윤자는 깜짝 놀랐다. 삐쩍 마른 얼굴이 거
무스름하게 변한 여자. 그건 딴사람처럼 변해버린 전묘숙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그 얼굴. 대
여섯 달 동안에 그렇게 변해버린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윤자는 전묘숙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몸도 무거운데........ 그래도 윤자가 찾아왔구나. 고마워.”
전묘숙이 웃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어디가 아픈 거예요?”
“나....... 오래 못 살아.”
“네에?”
나윤자는 소스라쳤다.
“암이래....... 폐암.”
전묘숙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나. 언니. 어쩜 좋아요.”
나윤자의 목소리에 울음이 젖어 있었다.
“참 기막혀. 살 만 하니까.......”
전묘숙의 병색 짙은 얼굴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좀 안 된대요?”
안타깝게 말하는 나윤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넘쳐났다.
“어쩔 수 없대. 너무 늦어서. 윤자 애기 돌은 못 보게 생겼어. 앞으로 길어야 반년이래니
까.”
“언니. 언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살았는데 한 때를 못 보
고.......”
둘이는 함께 울고 있었다.
“그래. 고생 많이 하고 살았지. 결국 그 고생이 날 잡아먹은 거야. 그 지독한 먼지 구덩이
가.......”
“언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왜 하필 언니가.......”
“어쩔 수 없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어떻게 하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
을 낳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것들을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애.”
전묘숙은 울음을 추스르며 어깨를 떨었다.
“언니. 어떡해요.”
“나. 윤자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나 떠나고 난 다음에 우리 두 애들 좀 가끔 찾아봐
줘. 새엄마 밑에서 눈칫밥 먹고 살아야 할 텐데. 윤자가 가끔 찾아보면 애들도 의지가 되
고. 새엄마도 함부로 못할 것 아니겠어? 그래 줄 수 있지?”
“어언니.......”
나윤자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내가 친정어머니도 없고 여동생도 없는 형편에 윤자한테 이 부탁을 하고 나
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네. 그만 울어. 괜히 뱃속 애기한테 해로워. 그나마 윤자가 애 낳는
것은 보고 떠나게 돼서 다행이야. 윤자는 나처럼 되지 말고 한세상 보고 살아야지.”
전묘숙은 다시 나윤자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나윤자도 한 손으로 전묘숙의 손등을 어루만
졌다. 서로 겹쳐져 있는 그녀들의 손은 보통 여자들의 손이 아니었다. 오랜 미싱사의 생활
로 이상하게 휘어져 돌아가는 듯한 손가락 마디에는 군살이 박혀 있었다.
“애 낳기 전에는 더 오지 말어. 힘들어 뵈는데. 애 낳으면 바로 연락 주고. 내가 꼭 가서
축하해 주고 싶으니까.”
대문까지 따라온 전묘숙이 한없이 쓸쓸하고 슬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언니......”
나윤자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전묘숙을 바라보기만 했다. 흔히 하는 ‘몸조리 잘 하
세요’나 ‘힘내세요.’하는 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 조심해서 어서 가.”
“언니이.......”
나윤자는 비탈길을 내려가며 새로운 눈물로 가슴이 젖고 있었다. 전묘숙은 겨우 서른여섯밖
에 안 된 나이였다.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하다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
다.
“그래도 금녀는 참 잘됐어. 남편이 사우디에 가서 벌어 보낸 돈 야무지게 잘 모아서 17평
짜리 아파트를 샀지 뭐야. 시집갈 때는 운전수라고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 팔자가 폈지. 더
미싱에 안 매달려도 되고. 우리들 중에서 젤 잘된 거지.”
언젠가 전묘숙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강금녀라고 괜찮을 것인가?
불현듯 스친 생각에 나윤자는 깜짝 놀랐다. 그 생각에 겹치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나는 괜찮을까.......?
이 생각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이 일어
났다. 나윤자는 허둥거리며 어느 집 담을 붙들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어지럼증이 전신을 휘
감고 돌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떨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고. 땅
이 흔들리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한바탕 휘돌아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가
까스로 눈을 떴다. 눈앞에 빨강. 노랑. 파랑. 색색가지의 별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녀
는 다시 눈을 감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놀라고 울어서 이리 심한 모양이구나.......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이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현기증은 배가 불러오를수록 자주
일어나고. 심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도 미싱사 생활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그때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우리 봉제공장 출신들은 온갖 병으로 골병이 들대로 다 들어 시집가봤자 3년 써먹기 어렵
대.”
여공들이 모여앉아 농담처럼 하고는 했던 말이었다. 그때 웃고 말았던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쳤다.
아니야. 아니야. 설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을라구. 난 보약도 지어 먹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몇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섬찟
놀랐다.
피!
그녀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아래가 축축했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나윤자는 샛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겨
를도 없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축축히 젖은 팬티 밑을 훔쳐 손을 꺼냈다.
“휴우......”
어깨가 쳐져 내리도록 안도의 숨을 토해내며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손에는 피가 묻어 있
지 않았다. 아까 심하게 몰아친 어지럼증을 참아내느라고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는 것
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왈칵 끼쳐오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굴을 감쌌다.
보름쯤 지난 늦은 밤이었다. 행인도 드물고 상점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장모님. 장모님. 문 좀 열어요. 큰일 났어요.”
어떤 남자가 이미 문을 닫은 복남식품점의 함석문짝을 마구 두들기며 외쳐댔다.
“자네가 워쩐 일이여? 무신 일이여?”
쪽문이 왈칵 열리며 갈포댁의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모님. 크. 큰일났어요. 집사람이 배가 아파서 정신이 왔다갔다해요.”
“고것이 무신소리여. 몸 풀라면 안직 보름도 더 남았는디. 언제보톰 그려?”
“모르겠어요. 야근하고 돌아오니 아파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어요.”
“글먼 시방 집에 있어?”
“예에”
“아이고메. 답답헌 사람아. 급헌 사람 병원으로 옮기고 왔어야제. 가세. 싸게 가세.”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윤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윤자야. 윤자야. 정신 놓덜 말어. 이 응등물고 정신채래야 써.”
갈포댁은 딸을 감싸 안고 애가 탔다.
“이거 임신부도 태아도 위험합니다.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의사의 말이었다.
“야야. 얼렁 살려만 주시씨요.”
갈포댁은 떨리는 두 손을 의사 앞에 모았다.
나윤자는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수술동의서에 손도장을 눌렀다.
산신령님. 터줏대감님. 삼신할메요. 우리 윤자. 불쌍헌 우리 윤자. 굽어살펴 주십소사. 삭
신 녹아내리게 고상만 허고 산 불쌍헌 우리 윤자 굽어살펴 주십소사. 그 불쌍헌 것이 한시
상 보고 살게 굽어살펴 주십소사.
복도에 놓인 긴 나무의자 끝에 쪼그리고 앉은 갈포댁은 온 마음을 쏟아 빌고 있었다.
두 시간이 넘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
“애는 무사한데 산모가.......
의사는 굳어진 얼굴을 돌렸다.
“머. 머시라고라?”
갈포댁이 비틀비틀하다가 푹 쓰러졌다.
“장모님. 장모님!”
사위가 허둥지둥 갈포댁을 끌어안았다.
갈포댁은 한사코 멀어져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가물가물 정신을 잃고 있었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3 부 불신시대 4 (10권)ㅡㅡㅡ 49. 고생의 뒤끝
정태순
추천 0
조회 36
06.07.20 19:54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