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의 심복. 다테家의 중신으로 대국을 헤아릴수 있는 안목
을 가졌다. 때문에 마사무네는 중요한 일을 할때마다 가게쓰나의 조언
을 구했다. 아들 시게나가(重長)는 사나다 유키무라(眞田幸村)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2) 가미 노부쓰나 (上線信綱)
우에노(上野)의 토호(土豪)였고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나리모리
(業盛)에게 임관되었다. 애주염류(愛州殮流) 검술을 익혀 이것을 발전시
켜 신염류(新殮流)를 창시하였다. 나가노가 우에스기에게 멸망후 무사수
행을 떠나 천하제일 검성의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3) 가모 우지사토 (蒲生氏鄕)
아명은 쓰루치요(鶴千代). 오미에 세력을 펼치고 노부나가의 상경전을
저지하던 사사키 롯가쿠(佐佐木六角)의 중신 가모 가다히데(浦生賢秀)의
아들. 히노(日野)성에서 농성하다 노부나가의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맞
아 항복할것인가를 고민하는 아버지 가다히데와 할아버지 사다히데(定
秀)를 설득, 노부나가의 진영으로 나아가 항복하게 했으며, 노부나가의
진영에서도 전혀 위축됨 없이 '롯가쿠가의 중신인 우리 가모家가 항복
했으니 거기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해야지 않겠는가' 라며 노부나가의
딸을 자신의 신부감으로 달라고 요구할 정도의 뛰어난 식견과 담력을
가지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에 흔쾌히 응해 우지사토를 사위로 삼았
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서 아네가와 합전 등에 참전하여 무공을 쌓았다.
문무에 걸쳐 뛰어난 기량을 보여 히데요시가 두려워했으며, 그의 기량
을 인정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간토 8주를 주어 전봉시켰을때 우
지사토를 아이즈(會津) 92만석을 주어 이에야스와 에치고의 가게카쓰를
견제하게 하였다.
(4)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아명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 어렸을때부터 히데요시의 시동으
로 여러 합전에 참가해 무공을 쌓았다. 시즈카다케 합전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과 더불어 시즈카다케 칠본창(七
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전국통일후 히고 남부 20만석 영지를 하사받아 다이묘 반열에 오른다.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에 출병해 함경도 방면으로 진
공, 조선의 두 왕자를 사로잡는 등 눈부신 무공을 세웠다. 또한 호랑이
사냥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필두로 하는 문치파측의
감찰관과 마찰을 빚는다. 이것이 뒷날 기요마사가 세키가하라 합전때
동군의 이에야스측에 가담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물론 히고 북부 10
만석의 다이묘인 유키나가가 서군에 가담해 있었기 때문에 동군에 가담
했을수도 있겠지만 그 후 그가 취한 행동을 보면 히데요시의 유자인 히
데요리가 이에야스에게서 신변을 안전을 보장 받을수 있게 하려는 배려
에서 동군측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승리한 동군측에 가담한 덕택에 유키나가 소유의 영지까지 합쳐 히고
일국의 영주가 되었다. 그와 비견되기도하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무용
에만 치우친 단순한 무장이었던것과는 달리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성(熊
本城)을 쌓는 등, 당대 일급의 축성가로도 이름을 날렸고 내정에서도 뛰
어난 수완을 보여준 명장이었다.
(5)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원래는 고니시 야구로라는 상인이었다. 그러나 그 용기와 수완으로 히
데요시에게 발탁됐다. 꾀가 많아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나 언
제나 소심할 정도로 신중하였다.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다. 뒤에 세키가하라
합전에서 패해 처형당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고 한다.
(6)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小早川陸景)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3남으로 모리家의 발전에 조력했다. 모토나
리가 죽은후 데루모토(毛利輝元)을 보좌하였다.
모리 테루모토의 좌우에는 두 사람의 명장이 있는데 이를 이숙(二叔)
또는 주코쿠의 이천(二川)이라고 하는데 한명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이
며 다른 한명은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를 말하는 것이다. 고바야카
와 다카가게는 히데요시에 맞서 모리군의 총대장으로 활약했다. 외교에
도 뛰어났으며 산요 방면에서의 군정을 맡았다. 임진왜란때 일본군 총
대장으로 조선에 출병하기도 했다.
(7) 구로다 간베에 (黑田官兵衛)
절름발이며 다케나가 한베에와 더불어 히데요시의 군사진을 이룬다.
한베에가 죽은 후 히데요시의 정책 자문자로서 조언을 했다. 또한 밀사
로도 많은 활약을 했다. 만년에는 그 지략과 용략이 히데요시를 두렵게
해서 부젠 12만석의 녹에 봉해진다.
(8)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
구로다 간베에의 아들.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 무공을
세웠다. 임진왜란때 조선으로 건너가 활약하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합전
때는 동군에 속해 공을 세워 다이묘 반열에 올랐다.
(9) 깃카와 모토하루 (吉川元春)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아키의 호족 깃카와家의 양자로 들어갔다.
강용으로 이름이 높아 '鬼吉川'이라 불려졌다. 산음방면의 군단장으로
활약했으며 진중에서 태평기 40권을 서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0) 기타바케 도모노리 (北昌具敎)
이세(伊勢)의 다이묘. 노부나가의 이세 정벌군에 맞서 진두에 서서 싸
웠다. 오노우치성(大河內城)에서 농성하며 선전하다가 노부나가의 차남
인 노부카쓰(織田信雄)가 후계자가 된다는 조건에 항복을 하지만 후에
노부카쓰와의 불화로 살해되고 만다.
(11) 나가노 나리마사 (長野業正)
야마우치(山內) 우에스기의 가신. 주가의 멸망후에도 거성인 箕輪城에
남아 신겐의 침공을 여섯 번이나 격퇴하였다. '나리마사가 있는한 上州
를 손에 넣을 수 없겠구나'라고 신겐을 한탄케 한 지장이다.
(12)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류죠지(龍造寺)家 최고의 무장으로 주가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지용겸
비의 장수이다. 치쿠고의 웅(熊) 료죠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를 도와
규슈에서 류죠지가 세력을 떨쳐울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적은 군세에 류죠지의 수만 군세가 무너
진 이후 몰락의 길을 걸은 료죠지가의 주군인 마사이에(政家)에게서 국
정을 위임받아 실권을 장악해 치쿠고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임
진왜란에서 수군으로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과 함께 싸웠다. 도쿠
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해 히젠의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후에 사가(佐
賀)번의 초대 번주가 된다.
(13) 다치바나 도우세쓰 (立花道雪)
오토모 3가로의 한사람으로 젊은날 벼락에 맞은 다리를 못쓰게 되었
다. 하지만 가마를 타고 오토모군의 선진을 이끌어 활약해 '벼락의 화
신'이란 별명을 얻었다.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으며 71년이란
생애를 전장에서 보냈다. 그의 무명은 저 멀리 도카이 지방까지 퍼졌다
고 한다.
(14) 다카야마 시게토모 (高山重友)
통칭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독실한 그리스챤 다이묘중 한명. 노부
나가, 히데요시 휘하에서 선봉장 등으로 맹활약한 유능한 무장이다. 다
도에 뛰어난 조예가 있었다. 히데요시가 천주교 다이묘들에게 신앙을
버릴것을 강요하자 영지도 버리고 낭인이 될 정도로 신심이 깊은 그리
스챤이었다. 가가의 마에다家에 다도 사범으로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가
루손(필리핀)으로 추방된다.
(15) 다카하시 소운 (高橋紹運)
치쿠젠 이와야(岩屋)의 성주. 치쿠젠에 침입해온 시마즈의 대군을 이와
야성에서 맞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아들 무네시게(宗茂)는 다치바
나 도우세쓰의 양자가 되었다.
(16) 다케나가 한베에 (竹中半兵衛)
본래는 사이토 요시타쓰의 가신이었으나 히데요시로부터 삼고의 예를
받아 하데요시의 군사가 된다. 기발한 지모를 구사해 히데요시를 도왔
다. 주고쿠 공략도중 급사해 뭇 장수들을 한탄케 하였다. 단 17명으로
난공불락이라는 미노의 이나바 산성을 함락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지략
이 너무 뛰어나 히데요시가 두려워했다고 한다.
(17) 다케다 가쓰요리 (武田勝賴)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사남(四男). 문무겸비의 인물로 신겐사후 가
독을 이었다. 신겐이 죽은후 가이(甲斐)로 돌아온 그는 여러 가신들과
민심이 아직도 신겐에게 쏠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보다 못함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어 어떻게해서든 아버지보다 못하지 않음을
보이려고 작은 승부에 집착하고 끊임없는 전쟁을 일삼게 된다. 미노의
이와무라성(岩村城), 도도우미의 다카텐진성(高天神城)을 공략하는등 대
외강경책을 펼치나 그 적극성이 다케다家의 명을 단축시키는 계기가 되
었다. 또한 중신들의 조언을 듣지 않던 것도 패망의 원인이라 할 수 있
다. 도쿠가와 오다의 연합군에 대패하고 추격당한 끝에 결국 젊은 나이
에 할복 자살한다.
하지만 사실 신겐이 죽은후에도 다케다家의 무력은 강했다. 그 당시의
싸움은 칼을 들고 서로 이름을 들먹이며 무사(武士)끼리 일대일로 싸우
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렇게 싸워서는 다케다의 기병이 너무나 강함을
알고 있던 노부나가는 조총을 수천자루 빌려온 후 바리케이트를 치고
그 뒤에 조총부대를 숨겨놓은 후 일부러 지는 척하며 적을 벌판으로 유
인하여 조총으로 벌집을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사정신에 어긋나
는 듯 한데, 하여간 이 싸움에서 다케다는 대부분의 병사와 마사까게
등 중신들을 수없이 잃고 패망하게 된다.
"신겐을 사모했던 다케다군은 전술면에 있어서도 신겐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였다."라고 대망에 써 있다. 이미 전술은 칼에서 창으로, 창에서
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건만...
(18) 다케다 노부시게 (武田信繁)
신겐의 동생으로 형 못지 않은 재능을 가졌다. 그래서 아버지 다케다
노부도라(武田信虎)는 노부시게에게 가업을 물려줄 작정이었으나 이를
안 신겐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집안싸움 끝에 아버지를 이기고 이
웃의 이마가와에게 볼모 비슷하게 보내 버린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형
의 능력을 알고 충성을 다해 신겐의 한팔이나 다름없는 역활을 한다.
하지만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에서 전사하고 만다.
(19) 다케다 다카노부 (武田高信)
야마나(山名)家에 임관되었으나 주가의 내분을 이용해서 독립하여 농
성을 했지만 야마나 도요쿠니(山名豊國)에게 항복하였다.
(20)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
다케다家는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를 시조로 하는 무가의 명문으
로 18대 다케다 노부도라(武田信虎)때에 전국 다이묘가 되었다. 신겐은
그 노부도라의 장남이다.
부친의 적극적인 정책에 반대하여 그를 추방하고 대를 이어 당주가 되
었다. 최정예 기마군단을 이끌고 임기응변의 지모로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혔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일본 제일의 무략가 다케다 신겐은 13살때 첫 출전
을 했으며, 16세때는 단 300명으로 군사로 아버지도 낙성시키지 못했던
거성을 단숨에 해치운적도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어가
면서 점점 더 노련미를 갖추게 되고 가는 곳마다 뛰어난 전법으로 승리
를 일구어 명성을 날렸다. 그는 전장에 나가면 형세를 관망하면서 미리
짜놓았던 수많은 계책을 하나하나 실행시킨다. 적이 공격해와도 견고한
바위처럼 꿈쩍도 안했으며 미리 정해진 계책으로 하나하나 막아가며 절
대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이런 신중한 그에게 일생동안 단 한번도 참
담한 패배를 맛보지 못하게 했다.
가이와 시나노 그리고 스루가, 도도우미, 미카와, 히다의 일부를 다스
리는 대영주로 웅대한 전략과 야망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휘력
을 가진 다이묘였다. 가이의 호랑이라 불리웠으며 전국에서의 그의 영
향력은 엄청났다. 그의 이름 앞에서는 젊은 날의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
가와 이에야스는 한낫 풋나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50대의 나이에 접어들어 첫 상경전을 시도하는데 미카타가하라
(三方原)의 전투에서 도쿠가와 오다연합군을 멸망직전까지 몰고가는 대
승을 거둔다. 이마가와 요시모도(今川義元)가 죽은후 겨우 미카와(三河)
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겐의 군사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바빴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에야스에게는 훗날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에야스가 직접 "나는 군사적 전술은
신겐에게서 배웠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매일 당하기만 해도 적의 실력
을 보고 배울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다케다 가문에는 이 신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아들 다케다 가
쓰요리(武田勝賴),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房), 나이토 마사도요(內藤昌豊),
야마카타 마사카게(山縣昌景)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명장들이
진영을 이루고 있다. 거기다가 산악지대인 가이의 병사들은 용맹하기
그지없어 그야말로 전국최강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상경전이 진행되어 전국통일의 꿈을 품고 있을때 그
는 오랫동안 앓아오던 숙환으로 병사하게 되며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52세의 나이로 마감한다. 그는 짧다면 짧은 생애동안에 가이 지방만을
지배했던 다케다家를 가이, 시나노, 스루가를 지배하는 전국유력가문으
로 만들었으며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무략을 소유한 인물로 평가받았
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일본 열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21) 다테 마사무네 (伊達政宗)
다테家는 시조 도모무네(朝宗)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의 오슈정
벌에 참가한 공으로 오슈 다테군을 하사받은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
다.
14대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는 오쓰 수호에 임명되었으나 적자 하루
무네(伊達晴宗)와의 내분이 일어났다. '천문의 대란'이라는 이 상극은 가
신들과 호족들을 끌어들여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난은 결룩 하루무
네의 승리로 끝나고, 요네자와로 본거지를 이동했다. 16대 데루무네(伊
達輝宗)은 쇼마(相馬)家, 모가미(最上)家와 싸웠다. 그리고 이 데루무네
의 뒤를 이은것이 바로 독안룡(獨眼龍)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이다.
마사무네를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웃인 모가미家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사무네가 태어났을때의 모가미家의 당주는 외삼촌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였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어미니 요시히메(義姬)
의 오빠로 마사무네의 아버지 데루무네와는 앙숙지간이었다.
요시아키는 아버지 모가미 요시노리(最上義守)를 무력으로 누르고 은
거를 강요, 당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18세때에 이미 홀로 10여명의 산적을 물리쳤을 정도의 힘과 지
모의 소유자였다.
다테 데루무네에게 시집을 가 마사무네를 낳은 요시희메또한 귀희(鬼
姬)라는 이명을 가질 정도의 당찬 여자였다. 여기엔 두가지 에피소드가
전하는데 하나는 - 요시희메가 다테家로 시집을 가는도중 멧돼지가 행
렬중으로 돌진해왔다. 이것을 본 요시희메는 가마에서 내려 1발의 화살
로 돌진해오는 멧돼지는 쓰러뜨렸다. 또 하나는 모가미에서 가독상속문
제로 아버지 요시노리와 오빠 요시아키와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때
남편 데루무네의 승락을 받아 양군이 대치하는 중앙에 포진해서 오빠와
아버지를 설득 정전시켰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 요시희메는 장남 마사무네보단 차남 쓰루마루(竺丸)를 편애했다.
마사무네가 어릴때 요시희메가 음모인지, 실수인지 어머니가 준 약을
먹고 오른쪽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독안룡이라는 이명이 여
기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그 어려움을 견뎌낸다. 여기엔
마사무네의 재능을 알아주고 그를 보호해준 아버지 데루무네의 정성도
무시될순 없었다.
그의 생애 최대의 전투였던 진토리바시(人取橋) 합전에선 아버지를 잃
었다는 슬픔에 이성을 잃고 난전속으로 뛰어드는등 무모한 행동도 서슴
치 않았으나 결과는 소중한 가신들의 전사였다. 그 뒤 벌어진 스리아게
하라(褶上原) 합전에선 난적 아나마(盧名)家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히데
요시에게 수적열세로 고개를 숙이고 만다.
그뒤 히데요시의 죽음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합전에선 우에스기군의 명
장 나오에 가네쓰구와 접전을 벌이는 등 실리적인 대외정책을 펴나갔
다.
강자의 틈에서 홀로 일어나 24세에 오쓰의 패자가 된 마사무네는 권모
술수가 뛰어나 도요토미, 도쿠가와정권 밑에서 광대한 영지를 지켰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
속해 그의 천하인에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후로도 이
에야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松平忠輝)에게 모반을 품게하는 등
여러 계략을 실행해 이에야스에게 있어 무시못할 존재로 남아있었으나
이미 천하는 도쿠가와의 것이었고 그의 천하인에 대한 꿈은 좌절될수
밖에 없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종종 말했다. "내가 20년만이라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22) 다테 시게자네 (伊達成實)
다테家의 맹장으로 진토리바시(人取僑), 스리아게하라(褶上原) 합전등
에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지 못한 일
로 불만을 가지고 다테家를 떠났으나 후일 다시 돌아오게 된다.
(23) 도리이 모도다다 (鳥居元忠)
이에야스의 순푸 인질시절때부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아버지인 도
리이 다다키치(鳥居忠吉)는 오카자키(岡岐)성에서 이에야스가 성인이 되
어 오가자키로 복귀할때까지 이마가와家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
록 그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모도다다는 이에야스의 시동으로 이에야스 곁에 있었다. 이에야스가
요시모토의 사후 독립하자, 모도다다는 이에야스 휘하의 무장으로 용맹
을 떨쳤다. 혼노사의 변 직후 舊 다케다家 가신들의 폭동으로 인해 살
해당한 오다家의 무장 가와지리가 지키고 있던 가히 지방이 주인을 잃
게 되자 이에야스는 급히 진격 시나노와 가히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모도다다를 가히에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한다.
세키가하라 합전 직전 이에야스는 간토에 있는 자신의 병력을 소집하
기 위해 당시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후시미성(伏見城)을 떠난다. 이에야
스는 곧이어 미쓰나리 등이 후시미 성으로 밀어닥칠 것을 예견했지만
전략상의 요충인 후시미성을 포기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 모도다다에게
후시미 성의 수비를 명한다.
당시 모도다다는 다리를 저는 등 나이가 들어 은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듯 했지만 명을 받들어 수천의 명력을 이끌고 후시미성 방위를 한
다. 이에야스가 떠나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미쓰나리의 수만 병력이 진
격하여 후시미성을 겹겹이 에워싼다. 모도다다는 수천의 병력을 지휘하
여 서군의 맹공에 굴하지 않고 후시미성을 지켜낸다. 그러나 가족을 인
질로 하여 배반을 강요당한 이가(伊賀)패 닌자들중 일부의 배신에 의해
후시미성의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모도다다는 성 내의 전 병력과 함께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전 병력과 더불어 옥쇄한다. 후일 미카와(三河)무
사의 귀감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24)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전국제일의 출세자.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마을의 농군의 자식으
로 태어나 전국의 다른 영웅들과는 다르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기지와 재치가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중용되어 나중에는
일본전국을 지배하는 간파쿠(關白)가 된 인물이다.
어릴을때는 히요시(日吉)라고 불렸다. 전공을 세워 노부나가에게 중용
되자 이름을 기노시타 도쿠치로(木下藤吉郞)로 개명했다. 뒤에는 하시바
히데요시(柴田秀吉)라고 개명한다(이는 오다家의 명장이었던 시바다 가
쓰이에와 니와 나가히데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며 각각 성을 따 온것이
라 한다).
놀라울 정도 기지로 노부나가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부하
였다. 생김새가 원숭이 같았다하여 사루(원숭이)라 불리웠으며, 사람을
포섭하는 재주가 뛰어나 많은 노부나가가 패권을 잡는데 큰 공헌을 했
다.
그러나 친구이기도 했던 미쓰히데가 혼노사에서 노부나가를 죽이자 군
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패권을 이어 받아 일본전국을
통일했다. 나중에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모든 신하들중에서 뛰어
나다는 뜻)라는 성을 하사받아 이름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개명한다.
말년에는 조선과 명에 세력을 넓히고자 조선에 두 차례 병력을 보냈으
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전쟁중 죽고 말았다.
(25)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에도 막부의 창시자. 미카와의 소영주였던 마쓰다이라(松平)家는 7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淸康)대에 전국 다이묘가 되어 미카와(三河)를
통일했다. 그러나 기요야스가 가신에게 살해당하자 미카와는 사실상 이
마가와의 분국이 된다.
이런 힘없는 마쓰다이라家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에야스는 18년이란 세
월을 순푸에서 볼모로 자랐다. 1560년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자 이에야스는 영지인 오카자키성(岡崎城)을 회복해
이마가와家로부터 자립해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이에야스
는 영내에서 이마가와의 잔존세력을 몰아내고 미카와를 재통일하고 성
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德川)으로 개명한다.
하지만 다케다 신겐에 맞서 거의 죽음직전까지 가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실력을 쌓아 일본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노부나가가 혼노사에
서 죽고 히데요시가 그 뒤를 잇자 히데요시와 협력해 전국을 통일했다.
히데요시의 사후 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를 대신해 섭정
을 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서군을 이겨 지지기반을 굳히고, 1603
년 세이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에도(江戶)막부를 열고, 1615
년 오오사카성을 공격하여 도요토미씨를 멸망시켰다.
(26) 료죠지 다카노부 (龍造寺貴信)
외조부 이래의 숙적인 쇼니(少貳)家를 멸망시키고 오토모의 쇠락을 타
고 규슈 5國 2島를 점령하였다. 히젠의 웅(熊)이라는 이명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고 만다.
(27) 마쓰나가 히사히데 (松永久秀)
능구렁이란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까? 소영주이지만 노부나가가 강
성해지자 노부나가쪽에 냉큼 붙어 버린다. 자존심도 없는 영주여서가
아니다. 오직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쓰는 처세술의 일
인자이다. 노부나가도 이 히사히데가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용가치를 느꼈는지 살려두었다. 계략이 뛰어나 노부나가
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부나가가 이 사람을 이에야스에게 소개했을때 한 말이 있는데, "이
사람은 세상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3가지를 한 사람으로 쇼군(將軍)
을 죽이고, 자기 주인인 미요시(三好)를 죽이고, 남도의 대불전을 불태
운 마쓰나가 히사히데라는 자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28) 마에다 도시이에 (前田利家)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등과 같이 노부나가의 시동 출신으로 아버지
는 오다家의 중신이었다. 오케하자마 합전 직전, 친구인 아이치 주아미
와의 사소한 말다툼 끝에 그를 살해하게 되자 오다家에서 도망쳤다가
후에 용서받고 다시 복귀하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나가히데보다도 그
의 출세가 늦은 원인이 아닌가 싶다.
아사쿠라의 멸망 후 호쿠리쿠(北陸:에치젠에서 엣츄에 이르는 지역)의
방어 임무를 담당하게 된 시바다 가쓰이에(柴田勝家)의 휘하로 배속되
어 노토(能登) 일대의 방어를 담당한다.
혼노사의 변 후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주도권 다툼의 절정이 된 시즈
가타게 전투 직전까지 둘 사이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던 도시이에는 시즈
가타케 합전에서 가쓰이에를 외면하고 친구인 히데요시측에 가담한다.
이후 가가(加賀) 백여만석의 영지를 획득하며 오대로(五大老)의 한 자리
를 차지한다.
히데요시의 사후 간토 일대에 광대한 세력으로 오대로 중에서 단연 두
각을 나타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견제할수 있는 유일한 영
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히데요시도 이런 실력을 인정하고 히데요리의
불안한 입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에야스를 히데요시의 후견인으로, 도
시이에를 히데요시의 사부로 삼는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도시이에가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는 어긋나게 된다. 도시이에가 히데요시 사후 1년만에 지병으로 사망하
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의 마에다家는 이에야스의 편을 들어 에도 막
부 성립 이후에도 120여만석의 광대한 영지를 자랑하는 대영주로 남게
된다.
(29) 마에다 게이지 (前田慶次)
조선출신의 용장으로 마에다 도시이에의 형인 요시히사(義久)의 양자
가 되었다. 도시이에가 마에다家를 계승하였을때 낭인이 되었다. 천하무
쌍풍운의 도를 깨우쳐 일본 제일의 창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후에 穀藏
院忽之齊라고 이름을 칭하며 우에스기家에 임관한다. 193cm의 거구였다
고 전한다.
(30) 모가미 요시아키 (最上義光)
데와(出羽)의 모장(謀將). 희대의 책모가로써 아버지를 강제로 은거시
키고 형제를 암살하여 다이묘의 자리에 올랐고 그후 정략결혼과 반대세
력의 말살을 통해 모가미家의 지위를 굳혔다.
(31) 모리 란마루 (森蘭丸)
노부나가의 시동. 시동이라고 해서 잔심부름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가신이나 마찬가지여서 임진왜란때 조선에 왔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히데요시의 시동들이었다. 그 시동들
중에서도 이 란마루가 특별한 이유는 노부나가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봤
다는 것말고도 노부나가의 남색(男色)의 상대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32) 모리 모토나리 (毛利元就)
모리家는 모토나리가 당주가 될때까지는 아키(安藝)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모토나리가 당주가 되면서 스오(周防)의 오우치 요시다카(大內
義陸)에게 장남 다카모토(陸元)를 볼모로 보내, 오우치家의 힘을 얻어
숙적 아마고(尼子)家의 침략을 격퇴했다.
또 아키의 깃카와(古川)家에 2남 모토하루(元春)를, 비후(備後)의 고바
야카와(小早川)家에 3남 다카가게(陸景)를 각각 양자로 보내 모리양천체
제를 확립해 아키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의 모반에 의해 오우치家가 멸망하자, 이즈쿠시
마 전투에서 스에군을 격멸하고 이 승리에 의해 스오, 나가도(長門)을
병합하고 아마고家를 멸망시키고 서국제일 다이묘에 올랐다.
(33) 미요시 마사나가 (三好政長)
호소카와(細川)의 가신. 미요시 게이지(三好長慶)와 함께 호소카와 하
루모토를 몰아내는게 조력했다.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 무야소도(武野紹
搗)에게 다도를 배우고 수많은 명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34) 바바 노부후사 (馬場信房)
다케다家의 중신. 야마카다 마사카게(山縣昌景)와 더불어 다케다군의
주축이다. 마사카게는 패배를 알면서도 돌격 끝에 장렬한 전사를 한 반
면 노부후사는 패배를 인식하고서 어떻게 해서든지 가쓰요리를 안전하
게 피신시키는데 전력을 다하려고 후미를 맡다가 적에게 목을 베인다.
가쓰요리는 덕분에 무사히 도망가는데 성공하지만 이미 여기서 다케다
가문은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35) 사나다 마사유키 (眞田昌幸)
사나다 유키다카의 삼남. 겉과 속이 다른자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게 평받은 희대의 모장. 세키가하라로 향하는 도쿠가와 히데다다(德川秀
忠)군 3만 8천을 수천의 병력으로 교란시켜 히데다다군을 시나노에 못
박다 두었다. 이런 그를 이에야스는 평생 두려워했다고 한다.
(36) 사나다 유키다카 (眞田幸隆)
다케다 가신으로 사나다家의 시조이다. 신겐이 2번 공략해 실해한 시
나모의 거성을 모락으락 낙성시켜 지모가 신겐보다 뛰어나다고 인정 받
았다. 이후 신겐의 참모로 각지에서 활약했다.
(37) 사나다 유키무라 (眞田幸村)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남. 기이 구도산에서 오사카 성에 입성해 도쿠가
와 대군을 상대로 분전하였다. 오사카의 겨울과 여름의 합전에서 소수
의 병력으로 도쿠가와의 대군에 맞서 이에야스의 대군을 패주시켰으나
총탄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합전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역
시 사나다 유키무라야말로 일본 제일의 무사다'라고 극찬하였다.
(38) 사이토 요시타쓰 (齋藤義龍)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미노의 영주가 된 인물. 난공불락의 요새인 이
나바 산성에서 마음편하게 지내다가 병에 걸려 죽고 만다. 문둥병에 걸
려 죽었다라는 말도 있다.
(39) 사이토 도산 (齋藤道三)
전국시대 군웅들 가운데에는 그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출신이 확실치 않은 사람이 많다. 사이토 도산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마치 무슨 영화의 제목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실력 한 가지만으로 분쟁을 수습하여 일국의 주인이 되는 예가 많았다.
도산은 호죠 소운(北條早雲)과 함께 전형적인 전국다이묘이란 평을 듣
고 있다.
구전되어 오는 소문에 의하면 도산은 지방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토
의 법화종(法華宗) 계통의 묘카쿠사(妙覺寺)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그 절
에서 뛰쳐나와 기름 행상을 하였다.
이 무렵 미노국(美濃國)은 수호 도키(土岐)家의 상속문제로 분쟁이 일
어나 두 파 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전란에 시달린 농민들
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수호대(守護代) 사이토 도시쿠니(齋藤
利國)와 도시치카(利親) 부자가 피살되는 등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노국에 들어온 도산은 수호 도키가의 중신 나가이(長井)에게 접근하
여 기름 행상을 그만두고 무사가 되었다. 그는 나가이의 신임을 얻기
위해 나가이의부하인 니시무라(西村正元)가 죽자 그의 후계자가 되고
수호 도키 마사요리(土崎政親)의 동생 요리아키(賴藝)를 섬겼다.
그 후 도산은 평소 상속분쟁에서 패배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요리아키
에게 모반할 것을 권유한 끝에 요리아키로부터 언질을 받고 1527년 스
스로 가와테성(川手城)을 공격하여 수호 마사요리를 에치젠으로 추방하
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요리아키는 손 하나 까딱 않고 미노국의 수호
가 되었으며 도산은 한 고을의 성주가 되었다.
1533년 도산은 그의 은인인 나가이를 요리아키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그리고 수호대 도시요시(齋藤利良)가 병사하자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1539년 5월 마침내 미노국 수호 요리아키를 공격하여 오와리
(尾張)로 축출하였다. 그리고 구가(舊家)의 성을 승계할 때마다 이름을
바꾸어가며 20여년 후 마침내 미노국을 빼앗아 수호의 자리에 올랐다.
이처럼 도산은 기회를 포착하는데 민감하여 살모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책략과 음모에 출중한 솜씨를 보였지만 1556년 그의 아들 요시
타쓰(義龍)와 대립했을 때 자기 편에 가담한 자가 한 사람도 없어 고립
상태에서 패사하고 마는 참혹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이 도산의 죽음
이야말로 인과응보의 실증을 보여주는 산 교훈이라 할 수 있겠다.
(40) 시노부 사시나 (佐野?鋼)
가노(下野)의 의 성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죠의 오다와라성 공략때
군공으로 임관되었다. 그후 가노 서천산의 3만 9천석의 치안 대리인으
로 승격을 하지만 은거해서 천덕사의 승려로 입적하여 검술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41) 시마무라 간아미 (島村實何)
우라카(浦上)의 가신. 가중의 세력을 독점하기 위해 우키다 요리이에
(宇喜多能家)를 모살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요리이에의 손자 나오이
에(宇喜多直家)에게 살해당한다.
(42) 시마즈 요시히사 (島津義久)
시마즈(島津)家는 가마쿠라시대에 사쓰마 수호로 임명된 이래 오오스
미, 휴가를 더해 남규슈 3개국을 메이지시대까지 지배했던 명문 무가였
다.
전국시대에 남규슈는 시마즈성을 명칭하는 각가문이 3개국에 분립, 여
기에 하극상의 흐름을 타고 성장한 제가들과 항쟁하고 있었다. 이것을
평정하고 전국다이묘으로 탈피시킨것이 16대 당주 시마즈 다카히사(島
津貴久)였다. 그 아들 요시히사, 요시히로의 대에는 휴가에 침입해온 오
토모(大友)군을 대패시키고, 히고의 사가라(相良), 히젠의 료죠지(龍造
寺)를 얻고, 오토모의 부젠, 치구젠을 더해 규주전토를 지배하에 넣었다.
뒤에 히데요시의 침략을 받고 결전을 치루지만 뒤에 항복해 시마즈家의
명맥을 보존한다.
(43)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다카히사의 차남으로 이토(伊東), 오토모, 아소(阿蘇)를 분쇄하여 시마
즈家를 강성하게 만든 맹장. 임진왜란대 조선으로 건너가 명의 대군을
격파해 이름을 날렸다. '鬼島津'란 별명을 얻었다.
(44) 시미즈 무네하루 (淸水宗治)
모리家의 영지인 다카마쓰성(高松城) 성주.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은 모
리家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를 필두로 작전회의를 여는데 여기서 시미
즈는 이미 강한 히데요시를 맞아 가문에 충성을 하는 길은 죽음밖에 없
다고 총대장에게 말하고 영지로 떠난다. 후에 히데요시의 요구를 받아
들여 흔쾌히 자결하는 모리家의 충신이다.
히데요시의 요구란 다름아닌 모리家의 10국중 5국의 양도와 다카마쓰
의 성주인 무네하루의 자결이었다. 무네하루는 성안의 5천의 인명과 가
문의 안정을 위해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는 무사도 정신의 표본이다.
(45) 시바다 가쓰이에 (柴田勝家)
오다군 제일의 맹장. 노부나가가 에치젠(越田)을 평정한후 기타노쇼(北
の庄)를 거성으로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마에다 도시이에 등과 호쿠
리쿠를 평정. 노도(能登), 엣츄(越中)에 진출해 우에스기에 대항했다.
오다家 사대천왕중의 하나로 노부히데대부터 중용되었다. 노부히데 사
후 차남 노부유키(信行)를 지지하여 노부나가를 지지하던 사쿠마 다이
가쿠(佐久間大學)가 지키던 성채를 공격하다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용서하고 이후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다짐
한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미노 공략, 상경전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그는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 공략의 선봉으로 나서 전공을 세우
고 이후 호쿠리쿠(北陸)지방의 공략을 담당한다. 에치젠의 기타노쇼(北
の莊)를 근거로 하여 엣츄(越中)의 우에스기(上衫) 세력과 맞서고, 우에
스기 겐신의 사후 엣츄까지 진출한다.
혼노사의 변 후, 히데요시에 대항해 오다가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결국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양자 가쓰도요(勝豊), 도시이에 등의 배반과 휘하
장수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의 판단착오 등이 겹쳐 대패하고 기
타노쇼로 들어가 농성한다.
이어 들이닥친 히데요시 군에 의해 기타노쇼 성은 포위되고 가쓰이에
는 천수각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봐라! 이름난 귀신 가쓰이에의 할복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가 뒷
날의 본으로 삼아라." 라는 말을 마치고 가쓰이에는 최후를 마쳤다. 이
때 노부나가의 누이였던 오이치 부인도 함께 죽었다.
오다가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노부나가가 멧돼지라고 평할 정
도로 저돌적이었다. 노부나가 휘하의 중신이면서 뛰어난 장군으로 혁혁
한 공을 세워 오다가의 사대장중 필두라 할만 했다. 그러나 그는 구시
대의 전형적인 무장이었지 능숙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결국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게 되었다.
(46) 소마 고타로 (風魔小太郞)
정보수집과 적지교란에 활약. 호죠家 5대의 치정을 음으로 양으로 도
운 相州 난파의 두령. 신장은 7尺2寸이고 눈은 옆으로 찢어졌고 입으로
부터 이빨 4개가 삐져나와있었다고 한다.
(47) 아사이 나가마사 (淺井長政)
오미의 영주로 노부나가의 누이 오이치를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아버
지 아사이 히사마사(淺井久政)때부터 이웃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朝倉義景)와는 동맹관계였다.
나가마사는 오다와 싸울의사는 없었으나 아버지 히사마사의 고집으로
인하여 아사쿠라와 연합하여 오다에 반기를 든다. 아사쿠라를 치러가던
노부나가는 후방에서 아사이가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미노로 철병
한다(물론 아사쿠라, 아사이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고). 하지만
결국 오다의 기치앞에 아사이도 아사쿠라도 멸망하게 되며 아사이 나가
마사는 자결을 하게 된다.
(48) 아사쿠라 소우데키 (朝倉義滴)
본명은 노리카게로 생애를 전투에 몸담은 전형적인 전국무장. 잇꼬종
도(一向衆), 롯카쿠(六角), 오다(織田) 등과 싸워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런 그의 무용전은 朝倉宗適話記에 남아 있다.
(49) 아사쿠라 요시카게 (朝倉義景)
원래는 에치젠의 영주로 다카가게의 대에 오닌의 난이 발발 서군에 속
하나 에치젠 수호대의 보임을 조건으로 동군으로 배반해갔다. 에치젠의
패권을 목적으로 가이, 시바家와 다퉜다. 그 결과 에치젠 일국을 수중해
넣고 우지카게, 탁경, 다카가게 3대에 걸쳐 잇코종도와 싸워 나가며 영
국지배에 힘을 쏟았다. 요시카게의 대에 긴키에 진출한 오다 노부나가
와 대립해 아사이家와 연합해 이에 맞섰으나 오무미 아네가와에서 대패
했다. 1573년에 오다군이 에치젠을 침공당해 요시카게는 패사, 아사쿠라
家는 멸망했다.
(50)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義昭)
천하의 통치권을 가진 장군(將軍). 하지만 이름뿐인 허수아비에다 권위
만 앞세우고 자존심만 살아있는 인물이다. 근처 영주들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노부나가에게 보호라는 명목으로 잡혀 살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해서든 권위와 영광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술수를 부린다.
(51)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
젊은 날에는 아케치 주베에(明智十兵郞)라고 불렸다. 각국을 유랑하며
여러가지 학문을 익혔다. 노히메(濃姬)의 어머니인 아케치 마님과 친척
이었기에 사이토 도산(齋藤道三)과 가까웠다. 각국을 유랑한 것도 도산
의 영향인 듯 하다.
무사이면서도 뛰어난 학자였고 특히 총포술 등 기술분야의 지식이 뛰
어났다. 도산이 죽은 후 떠돌아 다니다가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의 가신이 된다. 후에 노부나가에게 그 재주를 인정받아 가신이 되어
여러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다.
재능과 공적이 매우 뛰어나서 히데요시, 가쓰이에, 가즈마스와 더불어
오다가 사대천왕의 하나로 활약한다. 긴키 평정후 단바(丹波), 사카모토
(板本)등 80여만석의 영지를 획득한다.
이렇게 노부나가에게 후대를 받으면서도 그는 내심 노부나가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적이고 침착한 성품으로 격한 성격의 노부
나가와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격식등에 구애받지 않는
혁신자였다면, 미쓰히데는 구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였다. 또 노부
나가는 교양 등에 그다지 얽메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고의 소유자였지
만, 미쓰히데는 당대의 일류 교양인중 하나로 자부할만큼의 소양이 뛰
어났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외에도 그들은 판이할만큼 달
라 미쓰히데와 노부나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 했다. 단지 능력만을 인
정할 뿐이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불같은 성격을 두려워했다. 성역인 히에이 산
을 망설임없이 불태우는 모습은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미쓰히데의 눈에
는 악마로 보였을 것이다. 또 하야시, 사쿠마 같은 중신들을 거침없이
내치는 모습이나 사돈이었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를 용서도 없이
들이치는 노부나가의 일련의 행동들은 미쓰히데에게 자신의 앞날에 대
한 불안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대담한 히데요시나 우직한 가쓰이에
와는 달리 능력은 뛰어났지만 소심했던 미쓰히데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
게 믿게 되었다.
산요 지방을 공격하며 승전보를 울리는 히데요시에 비해 단바 평정 이
후 미쓰히데는 그다지 공훈을 세울 일이 없었다. 산음도 지방 공략의
총대장으로 내정은 돼 있었지만, 출격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노부나가의 동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를 방문하게
되고, 노부나가는 접대역에 미쓰히데를 임명한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
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 생각하고, 이에야스를 놀라게 할 정
도의 호화 접대를 준비한다. 그러나 모자람만 못하다 했던가. 이 거창한
접대는 노부나가의 근왕심을 자극한다. '이런 호화판 접대라면 천황폐하
를 접대할땐 어쩔 것인가'란 질책을 하고 곧바로 접대역까지 교체시키
는 수모를 준다.
게다가 곧이어 '병력을 소집하여 주코쿠의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가
싸우라. 지금의 영지 대신 산음도의 전부를 주겠다'라는 명까지 받았다.
소심한 미쓰히데에게 이 명령은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다. 승진시킨다는
명령같으나 아직 산음도는 모리가의 소유여서, 영지인 단바와 사카모토
를 몰수 당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히데요시의 휘하라니.
결국 미쓰히데는 모반을 결심하게 되고, 병력을 몰아 주코쿠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아즈치를 떠나 교토의 혼노사에 머물고 있던 노부나가를
급습한다. 노부나가는 혼노사에서 항전하다 불을 지르고 자결하고, 노부
나가의 장남 노부다다(信忠)는 니죠(二條)성에서 항전하다 자결한다.
미쓰히데는 곧이어 공경들을 움직여 조정으로부터 대의명분을 얻어내
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긴키 일대 다이묘들
을 포섭하여 자기를 지지하게 만들지 못했고, 히데요시를 비롯한 노부
나가의 심복들이 미쓰히데에 대항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데 충분한 시
간을 주고 말았다.
결국 야마자키(山岐)에서 미쓰히데는 패하여 도망치던중 폭도들에 의
해 피살당하고 말아그의 야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쓰히데의 반란은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 제일의 실
력자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히데요시는 가쓰이에를 제압하고
노부나가의 아들들도 실력으로 제압, 노부나가의 뜻을 계승하여 전국
통일을 이룬다.
(52) 안고쿠지 에케이 (安國寺惠瓊)
아키(安藝) 수호였던 다케다(武田)家의 후손. 승려의 신분으로 있던 중,
모토나리의 신임을 얻어 모리가를 위해 외교승의 역할을 수행한다.
히데요시가 주코쿠 원정에서 다카마쓰(高松)성 공략에 난항을 겪는 중,
혼노사의 변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급히 대치하고 있
던 모리군과 휴전협정을 맺으려 하는데, 이 때 에케이는 모리 측의 사
자로 히데요시의 진중을 방문한다. 협정의 조건은 모리 측에게는 가혹
하게도 다카마쓰 성을 지키고 있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의
할복과 다카마쓰 성의 양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모리가가 이것을 받
아들이기에는 그때까지 무네하루가 보여준 충절이 너무나도 안타까웠
다. 그러나 에케이는 히데요시가 천하의 패권을 움켜쥘 것을 예상하고
모리가에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히 권한다. 에케이의 이 예측은 맞
아떨어져서 당시 모리가가 취한 행동에 대해 히데요시는 五大老의 한
자리로 보답을 한다.
세키가하라 합전에서는 미쓰나리에 호응하여 주군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대장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에케이 일생의 최대의 오
판이 되고 말았다. 서군은 패하고 데루모토는 조코쿠 일대 100여만석의
대영주에서 스오(周防), 나가도(長門) 일대 30여만석의 다이묘으로 전락
했고, 자신은 교토에서 미쓰나리, 유키나가와 함께 효수되고 말았다.
(53)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 (山中鹿之介幸盛)
원래 아마고(尼子)家의 가신이었으나 모리(毛利)에게 가문이 멸망한 뒤
아마고 요시히사(尼子義久)를 받들어 게릴라전을 하며 모리를 괴롭히고
있다가 히데요시의 서방원정때 구로다 간베에의 주선으로 히데요시의
진중으로 들어간다. 히데요시는 이 사람을 보고 그 용모가 범상치 않음
에 놀라 그의 내력을 묻자 그가 미쓰히데와 합세하여 시기산 공략때 싸
워 미쓰나가의 용장 가와이 히데가게의 목을 벤 사나이임을 알고 더욱
놀라게 된다.
히데요시가 모리의 선봉 우키다 나오이에(于喜多直家)를 공격할 때 큰
공을 여러번 세웠다. 우키다 군은 히데요시보다 이 시카노스케를 더 무
서워하여 이름만 듣고도 성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였다.
(54) 야마모토 간슈케 (山本勘助)
제국을 유랑하며 문무에 정통. 신겐의 초대군사 이타가키 노부카다의
추천으로 다케다 신겐에 봉공. 이후 신겐의 군사로서 활약했다. 1561년
가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를 보호하기 위해
대신 전사하였다.
(55) 야마카다 마사카게 (山縣昌景)
다케다家의 중신. 난장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지략과 무용은 훌륭한
가신이 많은 다케다 가문에서도 최고였다. 다케다 신겐을 섬기다가 신
겐이 죽은 후 가쓰요리를 계속 섬긴다. 나중에 가쓰요리의 무모한 돌격
작전을 수행하다 오다군의 조총세레 앞에 쓰러지고 만다.
(56) 야세시게 미쯔 (遊佐停光)
다케야마(富山)의 가신. 메게이(溫井)와 권력다툼에 패해 주가를 떠났
다. 메게이가 죽은후 다시 복귀 우에스기와 오다의 사이에서 주가의 존
귀를 위해 모략을 사용하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음을 당한다.
(57) 야큐 무네노리 (柳生宗矩)
신음류(新陰流)의 검술가. 아버지 세키슈사이(石丹齊)와 함께 도쿠가와
家에 임관되었다. 히데다다(秀忠), 이에미쓰(家光)의 병법 전수가이며 이
에미쓰의 대단한 신임을 얻어 1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58)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오와리(尾長)의 다이묘(大名)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세자. 본래 노
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수호인 오다家의 봉행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신의 대에 주가를 압도해 오와리를 통일하였다. 하지만 노부히데가
죽고 노부나가가 당주가 되자 일족,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두 물
리치고 오와리를 재통일하였다. 이후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각지를 전전. 미노, 오미 등 기내 전역을 평정하고 명목뿐인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전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그의 행동은 거의 영웅적으로 또한
미치광이로 묘사되어 있다. 놀라운 전략가이며 기라성 같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전국을 종횡했다. 일개 오와리의 다이묘에서 시작하여 천하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성격은 질풍노도와도 같아서 일단 머리속에서 결정을 내리면 실
행에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놀라울 정도로 냉철하고 사람을
위압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지만 엄청날 정도로 독선적이기도 하여 절
하나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이 원인이라면
원인이겠지만, 한참 통일에 박차를 가해 일본의 패자로 군림할 무렵 혼
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죽고말아 그의
꿈인 천하포무(天下布武)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후 그의 이상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59) 오다니 요시쓰구 (大谷吉繼)
젊었을 때는 미남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출중한 용모였으나 후에 문
둥병에 걸려 실명까지 했다.
뛰어난 지략과 용명으로 히데요시가 총애했으며,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에 대항해 다른 다이묘들을 규합할때도 가장 먼저 친구인 요시
쓰구에게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단지 친구일뿐만 아니라 그 능력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시쓰구는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에게
대항하려는 것을 그만두도록 권했으나 미쓰나리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
고 서군측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합전에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히데요시의 조
카)가 이끄는 군사가 배신하려 한다는 예측을 하고 히데아키가 진치고
있던 산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결국 히데아키는 배신을 하고 요시쓰
구는 몇배에 이르는 히데아키의 군사가 산 아래로 돌격해 오는 것을 전
력을 다해 막아내었지만 결국 역부족,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60) 오하라 셋사이 (太原雪齋)
이마가와家의 외교·정략을 담당했던 승려로 유능한 무장이기도 하다.
가히의 다케다, 간토의 호죠와의 거듭된 항쟁을 삼국동맹을 맺게 하여
종식시켰다. 이것은 후일 셋사이 사후 요시모토가 안심하고 상경전을
벌이는 일조하기도 한다.
이 후 오다家와의 수차례 전투와 마쓰다이라家의 원조 요청때 오가자
키 성에 주둔해 이마가와군의 총대장을 맡았다. 이마가와 상경을 반대
하던 그가 죽고 난 후 요시모토는 곧 상경전을 벌이고, 오케하자마에서
노부나가의 급습을 받고 전사한다.
(61) 오토모 소우린 (大友宗麟)
가마쿠라(鎌倉)시대부터의 분고수호로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스오(周
防)으로부터 세력을 뻗는 오우치家와 북규슈의 패권을 걸고 싸웠다. 요
시나가때에 전국다이묘화되고 요시아키때에는 히고 수호직을 획득 거기
에 오우치 요시다카의 군을 패퇴시키고 치쿠고 지배를 강화했다.
요시아키 사후 가독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을 제압한 것이 소우린이었
다. 소우린은 오우치家의 멸망을 틈타 히젠, 부젠, 치쿠젠을 평정해 규
수 6개국의 수호가 되었다. 한편 소우린은 크리스트교를 보호했으며 스
스로도 세례를 받았다. 크리스트교국 건립을 꿈꾸었으나 북상하는 시마
즈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해 그꿈은 좌절되었다. 또한 크리스트교 신앙과
음탕한 취미가 가신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62) 우사미 사다미쓰 (宇子美定滿)
우에스기의 군사이며 전술의 스승이다. 중국에서 전술을 배워와서 우
에스기에게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우에스기 겐신의
이름도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63) 우에스기 가게카쓰 (上杉景勝)
겐신 사후 우에스기家를 이었다. 노부나가에게 엣츄까지 침공당했으나
혼노사의 변에 의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후에 도요토미와 동맹을 맺어
도요토미家의 5대로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64) 우에스기 겐신 (上杉鎌信)
시조는 후지와라(藤原) 제 19대 시게후사(重房)이다. 전국최강이라 불
리는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은 간토의 웅(熊) 호죠 우지야스에게
압박되어 에치고에 피신한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성과 관직을 물려
받고 간토, 시나노에 출병해 신겐과 우지야스를 압박했으며 엣츄를 평
정했다. 그러나 노부나가와의 결전준비중 뇌일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곤
(昆)의 군기를 흔들며 돌진하는 모습은 마치 군신(軍神)과 같았다고 한
다.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의 숙적인 우에스기 겐신은 1529년 에치고
의 수호다이묘인 나가오가(長尾家)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나가오
가게도라(長尾景虎)였다.
1507년 수호다이묘 나가오 다메가게가 수호 우에스기 후사요시를 패사
시키고 그의 사촌인 사다자네를 옹립하였다. 그러자 관동관령이었던 후
사요시의 형 아키사다(上杉明定)가 8천의 병력으로 에치고를 침공하자
다메가게와 사다자네는 엣츄로 도망쳤다. 그러나 1년동안 세력을 만회
한 다메가게는 재 반격하여 관령 아키사다를 패사시켰다. 이로서 에치
고가 평정되는듯 했으나 이번에는 에치고내 부의 反다메가게파가 수호
사다자네를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다메가게는 사다자네를 유폐
시키고 반대파들을 타도함으로서 에치고를 재 평정한 후 1536년에 죽었
다. 다메가게가 죽은 후 장자 하루가게(春景)가 그 뒤를 계승하였다.
이때 겐신의 나이는 겨우 7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가스가야마성의
주인이 된 겐신의 형 하루가게가 유폐된 사다자네를 다시 수호로 영입
하려 하자 가신들이 반대, 겐신을 옹립하게 되어 다시 분열하였다.
겐신은 1548년 형 하루가게를 은거시키고 12월 말 가스가야마성으로
들어감으로서 전국다이묘 우에스기 겐신은 드디어 천하에 등장하게 되
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1552년 관동의 호죠 우지야스(北條氏康)에게 압박되어 에치고로 피신
한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성과 관직을 물러받고 관동관령(關東管領)
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신겐의 압박을 받은 시나노의 무라카미(村上)
가 망명해 와 겐신은 막강한 호죠가의 우스야스와 가히의 신겐을 상대
로 싸우게 되었다.
1554년에 이마가와, 다케다, 호죠가의 3국동맹이 체결되어 겐신은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555년 신겐과 가와나카섬(川中島)에서
격전을 벌렸으나 무승부로 돌아갔고,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중재로 강화
를 맺고 휴전을 했다. 1560년 오케하자마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죽음으로 3국동맹은 깨졌고 1561년 겐신은 가마쿠라의 쓰루오카 하지만
의 신사앞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관동관령직과 우에스기가의 성
을 양도받고 이름을 나가오 가게도라에서 우에스기 가게도라로 개명하
게 되었다.
겐신은 출병하여 신겐의 오다와라성을 포위하였다. 근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1개월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신
겐이 오다와라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자 겐신은 오다와라성에서 철
수하고 시나노로 철수, 1561년 9월 가와나카섬에서 제 4차 가와나카섬
전투를 벌리게 되었다. 이 싸움은 양측으로서는 전군을 총동원한 건곤
일척의 대격전으로 전국시대에서도 손꼽히는 전투이다. 신겐의 고쇼군
병력은 2만, 겐신의 병력은 1만 8천으로 백중지세였다. 막상막하의 대결
을 벌렸으나 결국 겐신의 패배로 돌아가고 신겐은 시나노의 전략거점인
가와나카섬을 제압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출병한 병력의 60%이상의 손
실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신겐은 동생 노부시게의 전사를
비롯해 수많은 맹장, 용사들을 잃는 피해를 입어 한 동안은 출병하지
못했다.
1573년 신겐이 상락전중에 병사함으로서 다케다가는 서서히 몰락의 길
을 걷기 시작했고 겐신은 시나노에 침입, 노토와 기카가가 등을 정벌하
여 영지를 확장했다. 노부나가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나가시노전투에서
다케다가의 가쓰요리가 대참패를 당하자 겐신은 노부나가의 세력을 견
제하기 위해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깨고 다케다가와 동맹을 맺는 한편
상락준비를 개시했다.
겐신은 에치고에서 엣츄, 가가에 진출하여 노부나가에 압박을 가하자
노부나가도 시바다 가쓰이에를 에치첸의 기타노쇼로 파견, 일전을 준비
했다. 1578년 상락준비가 끝나고 출병바로 전날에 갑자기 뇌출혈로 급
사하고 말았다.
겐신은 신겐의 최대 맞수였다. 겐신을 신겐과 비교하는 경우가 참 많
은데 이것은 두 사람 모두 최고의 무장들이면서 두 사람의 전투방식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신겐은 속담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
간다'는 식이라 질것 같은 싸움은 아예 하지 않는다. 조용히 힘을 축적
하고 기회가 생기면 완벽한 준비를 하고서야 겨우 출전하는 것이다. 겐
신은 이런 종류의 싸움과는 좀 다르다. 신겐이 지는 싸움을 하지 않는
반면 겐신은 지는 싸움을 이기게 하는 사나이이다. 그의 야전능력은 실
로 귀신같다고 알려져 있어 노부나가도 그의 생전에는 감히 견줄 생각
을 못하고 어떻게든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신겐과 겐신이 다섯번 싸웠다는 가와나카지마(天中島)에서의 싸움에서
도 서로 명백한 승패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겐이 쫓기는 듯한 인상
을 준다. 신겐이 어지간하게 준비를 하고 나갔을까를 생각해 보면 겐신
의 전투능력은 일반사람의 상식을 뛰어넘을 것이다(군사수도 언제나 겐
신이 적다). 천중도의 싸움에서의 일화중에는 신겐이 타고 있던 배위로
겐신이 직접 칼을 들고 신겐에게 습격을 가하여 신겐이 죽을뻔 하였지
만 신겐이 들고 있던 부채로 겨우 막아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다. 물
론 후세 사람들이 반쯤은 지어낸 얘기겠지만 그만큼 겐신의 무용이 탁
월했음을 설명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종교적 신앙으로 무장되 있으며 스스로 비사문천의 화신이라 불렀다.
부하들도 그를 그렇게 생각했고 겐신에 대한 충성심과 신뢰는 가히 절
대적이었다. 전투전에는 겐신부터 말단까지 땅에 엎드린채로 기도를 드
린 후 겐신이 돌진이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용맹스럽게 적진을 향
해 돌격했다.
그는 상락에 별로 흥미가 없는 듯하지만 사실 그의 영지인 에치고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출병하기가 어려운데다 바로 앞에 강력한 숙적인
다케다가와 호죠가 등이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케다 신겐이 죽고 다케다가의 세력이 몰락하자 곧바로 상락준
비를 한 것이다. 그는 다케다가와 자주 전투를 했지만 항상 승부를 짓
지 못했다. 그 이유도 동장군의 위협때문이었다. 다케다가의 신겐 역시
애써 겐신과 승부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월후의 용과 싸워 이기는 승
부욕보다는 천하평정이라는 대망이 신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겐신은 승부에서 이겨도 겨울에는 반드시 점령지를 버리고 에치고 퇴각
하기 때문에 신겐으로서는 승부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 만큼
양측 모두 강적이었다는 것이다.
겐신은 스스로를 비사문천의 화신이라고 불렀다. 부하들도 그를 그렇
게 생각했고 겐신에 대한 충성심과 신뢰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전투전
에는 겐신부터 말단까지 땅에 엎드린채로 기도를 드린 후 겐신이 돌진
이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용맹스럽게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겐신은 물론 출가한 승려였다. 그래서 전투가 없는 겨울에는 성의 깊
은 방에서 수행을 쌓았다. 그것이 겐신에게는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술을 좋아했고 그의 죽음도 과음에서 비롯된 것
이리라.
신겐도 말년에는 승려로 출가했다. 아마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자신의
수명을 염려하게 되었고 그것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일본전국시대관련 여러 소설에서 정의의 화신으로 미화되어 나온
다. 물론 상당수의 대부분의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과장되거나 미화된
것임에 틀림없지만 다케다가에서 소금이 없자 우에스기 겐신은 적국에
보내줌으로서 다케다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
점이 그를 상락이라는 자기욕심과는 거리가 먼,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정의의 화신으로 묘사하게 한 것이다.
(65) 이마가와 요시모토 (今川義元)
전국시대 당시에 여자가 혼자서 돌아다닐수 있는 곳은 순푸뿐이었다하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순푸의 치안을 잘 유지되어 있었다. 순푸의 번성
은 교토에 못하지 않다는 말도 순푸를 비롯한 이마가와 령(領)의 번성
정도를 알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마가와 가문의 재력이 대단함은 요시모도가 상경할때 동원한
병력이 4만 5천이란 점에서 놀랍기까지 한다. 당시 신겐은 1만 2천, 겐
신은 1만, 노부나가는 6천 정도를 동원할수 있을 뿐이었다.
삼국동맹을 체결해 후방의 안전을 기한 것이나 마쓰다이라家를 복속시
킨 것,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자신의 부장으로 삼은 것, 오와리 국경의
소가문들을 잘 장악한 것 등 요시모도가 녹녹찮은 군주였음을 알 수 있
게 해주는 증거가 많다. 그리고 상경전을 하며 오다령에 진입할때 마쓰
다이라가를 전위로 삼아 피해를 줄이려 한것이나, 척후대를 지속적으로
보내 주민의 폭동을 탐색하며 나간 것 등 군사적 신중성도 무시 못한
다.
요시모도의 본진에 접근했던 노부나가 정예가 만약 오까베 모토모부의
부대와 만나서 반전을 벌이는 사이 요시모도의 본진이 기요스를 쳤다면
노부나가는 그 자랑인 아쓰모리 한번 불러 보지도 못하고 갔을 것이다.
(66)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히데요시의 근위시동중 하나. 꾀가 많아 주군의 생각을 앞질러 생각하
고 약간은 경망한 끼가 있어 히데요시가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히데요
시의 시동중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무장파(武將派)의 대표적 인물
인데 반해 미쓰나리는 문치파(文治派)의 대표적 인물이다.
(67) 이시카와 가즈마사 (石川數正)
순푸(駿府)의 이마가와 우지사네(今川氏眞)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쓰키
야마(築山)마님, 다케치요(竹千代)후의 德川信康), 가메히메(龜姬)를 우지
사네와 담판을 해서 오가자키로 귀환하는 공적을 세웠다.
노부야스의 할복사건 후, 오카자키(岡岐)성의 성주 대리로 임명되었다.
혼노사의 변 후, 히데요시가 천하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도쿠가와가의
대부분의 중신들은 히데요시에 항전하자는 의견이었으나 유독 가즈마사
만이 히데요시와 화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다른 중신들에게 히
데요시와 내통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고 그는 가족들을 데
리고 히데요시에게로 투항한다. 히데요시는 그를 후하게 대접해 도쿠가
와가의 나머지 중신들이 가지고 있던 의혹을 더 굳힌다.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로 간 것은 도쿠가와 가의 결속을 더 굳히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화친파인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로 감으로
서 강경파들의 히데요시에 대한 반감을 더 키울 수 있고 내심 화친을
바라는 중신들도 화친하자는 의견을 냈다가는 반역자로 몰릴것이 번하
기 때문에 화친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서 도쿠가와 가
가 내분에 빠지지 않게 된 것이 가즈마사가 노렸던 바라면... 가즈마사
는 보기 드문 충절과 지략을 겸비한 무장이라 할 수 있겠다.
(68) 이이 나오마사 (井伊直政)
'井伊の赤備'로 유명하다. 세키가하라 합전때 군감으로서 참전해 퇴각
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해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를 전사시켰다. 하지
만 이때 입은 상처로 죽고 만다.
(69) 이케다 데루마사 (池田輝政)
노부나가 휘하의 명장 중 하나인 이케다 쓰나오키(池田恒興)의 차남.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첫번째 대진이었던 나사쿠데·고마키(長久手·
小牧)합전에 히데요시군의 선봉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참전했다. 쓰나오
키가 이에야스 군의 배후를 우회하여 오가자키 성을 공략하러 진격 중,
급히 되돌아 온 이에야스군에 의해 배후공략이 실패로 돌아가고 군단은
거의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아버지 쓰나오키, 형 모토스케(元助), 매부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모리 요시나리(森可成)의 장남, 모리 란마루의 형)이 전사하고, 데
루마사는 겨우 퇴각할수 있었다. 형의 전사로 그가 가독을 승계하게 된
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를 따라 동군측에 참가, 후쿠시마 마
사노리(福島正則)와 더불어 선봉을 다투기도 했다. 전후 하리마 일국을
영유하게 된다. 풍채는 보잘것 없었다 한다.
하지만 신중하면서도 상황판단 등이 뛰어난 유능한 장군이었다 한다.
정치에도 능했고, 다도에도 소양이 있었다. 하리마 재상이라는 별칭이
있다.
(70)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
시고쿠(四國)의 다이묘. 노부나가가 교토를 장악하였는데도 모리와 연
합전선을 펼치는 등 굴하지 않고 버틴다. 후에 히데요시는 구로다 간베
에를 보내어 대항하게 한다.
(71) 핫도리 한조 (服部半臧)
닌자의 다이묘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가 닌자를 이끌고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鬼의 半藏이라고 두려움을 갖게 했지만 정을 아는 무장
으로 도쿠가와 노부야스(德川信康)의 介錯 祭에서는 칼을 떨어뜨리고
그곳에 엎드려 울었다 함. 닌자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72) 호소카와 후지다카 (細川藤孝)
아시카가 장군과는 인척관계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에치젠
등으로 방랑하는 동안 그를 보좌했다.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와는
막역한 친우이다. 노부나가가 미노 평정 후, 자신에게 원조 요청을 하러
요시아키의 사자로 온 미쓰히데를 포섭하며 요시아키를 원조하겠다고
약속하자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간다.
이후에도 명목상으로는 장군가의 가신이었으나 '장군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는 한, 후지다카는 노부나가를 배신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라
는 맹세를 한 것 등으로 볼 때, 이미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어 있었다고
봐야 하겠다.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 대해 공공연한 대적 행위를 하자,
후지다카는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에게 의탁한다. 이후 노부나가
밑에서 공훈을 세워 단고(丹後)의 영주가 된다. 혼노사의 변 직후, 친우
인 미쓰히데가 딸 다마코(珠子)와 후지다카의 적자 다다오키(忠興)가 결
혼한 사돈인 점을 믿고 지지를 요청한 미쓰히데의 요청을 거부하고 히
데요시측에 선다.
다도, 시문 등에 뛰어난 당대 일류의 교양인이었으며 적자 다다오키에
게 가독 상속후 유사이(幽齋)라고 일컬으며 은거했다.
(73) 호죠 우지야스 (北條氏康)
호죠家는 이마가와(今川)의 객장 호죠 소운이 이즈에 자립해 세워 미
우라家를 멸망시키고 사가미를 평정 관동의 패자로 떠오른 가문이다.
이마가와 요시모도(今川義元),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 유력 전
국다이묘들과 싸우며 무사시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우지마사(北條氏
政)때에는 사가미, 가즈사, 시모우사, 무사시 등을 병합 관동의 패자로
불려졌으나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격을 당해 우지마사는 할
복하고 그의 아들 우지나오는 고야산에 추방되어 호죠家는 멸망했다.
(74) 호죠 쯔나나리 (北條綱成)
이마가와 가신인 후쿠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의 아들. 호죠 우지쓰나
(北條氏綱)의 딸을 맞아서 호죠(北條)씨로 성을 바꾼다. 우에스기 노리
마사(上彬憲政), 우에스기 도모마사(上彬朝定),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의 연합군 8만에 포위당한 하월성을 3천의 병력으로 수비하여 관
동진출의 일대 결전이었던 河越의 野戰의 승리자가 되다.
(75) 혼간지 코사 (本願寺光佐)
난세에 승병을 이끌고 일어난 인물로 노부나가가 이웃의 영주들을 정
리하면서도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혼간사의 잇코종(一向宗)의 승병들이
었다. 신자들로 구성되 있어 단결이 잘 되고 어디서 나올줄 모르는 게
릴라전이 무서웠다. 승병들은 특히 신무기인 조총에 능숙해 일등사수가
많았다.
(76) 혼다 마사노부 (本田正信)
도쿠가와 가신으로 이에야스의 심복이었다. 미카와(三河) 잇꼬종도 발
란에 가담하였고 제국을 방랑한 후에 돌아와 이에야스에게 중용을 받았
다. 행정과 지략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이에야스는 친구라고 불렀
다고 한다.
(77) 혼다 헤이하치로 다다카쓰 (本多平八郞忠勝)
이에야스가 [나에게는 너무 과한 부하]라며 극찬한 명장. 아네가와, 미
카다가하라, 나가시노, 고마키, 세키가하라 합전등 주요 합전에 참가 많
은 전공을 세웠다.
혼다 다다카쓰는 미카와의 명물 사슴뿔 투구를 썼는데 적군들은 이것
을 보기만해도 겁에 질렸다고 한다.
'패자는 조용히 있는다'와 '하룻강아지 범 무서워할줄 모른다'라는 상대
의 기존 관념을 최대한 활용해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으로 상대를 궤
멸시켰다. 다케다와의 합전시 대참패를 당한후 단지 몇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추격해 오는 적군에게 역습을 가해 도리어 다케다군이 겁을 먹
고 도망쳐 버리게한 인물이 바로 다다카쓰이다.
노부나가는 그를 삼국지의 장비(張飛)에 비교한적이 있다. 다혈질이어
서 싸움에 나가지 말라는 이에야스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자기의 직속
만을 이끌고 대군에게 싸움을 걸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 패해
겨우 성에 돌아오는것이 상식인데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대공을 세우는
운 좋은 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