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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탕트초기 미국의 중국접근 적(敵)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마상윤 카톨릭대학교
2014년 4월
동북아 데탕트-탈냉전 국가대외전략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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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미국과 중국은 아시아 냉전의 주요 당사국이었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까지 했으며, 그만큼 양국 간의 상호불신과 경계심은 대단히 컸다. 미국에서 중국은 소련보다도 더 교조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인식되어왔으며, 냉전의 상황 하에서 적대적 국가와 관계를 개 선하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냉전적 불신과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양국 은 1970년대 초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2년 2월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 하이라이트였는 바, 이로써 미중관계 개선은 데탕트기 국제정치에서 가장 주목 받는 사건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1970년대 초 데탕트 국면에서 미국이 중국에 접근하여 외교적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 도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그 교섭의 과정을 검토하며, 아울러 미중 접근의 국제정치적 결과에 대해 평 가하는 것이다. 미중 양자관계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의 시각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으나, 이 글은 미 국외교에 주로 초점을 맞추면서 다음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미국은 어떤 이유에서 냉전 대립의 주된 당 사국이었던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서게 되었는가? 적성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무엇이었으며, 미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나? 이 과정에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Henry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미중교섭의 결과는 무엇이었으며, 그것 이 오늘날 미국 외교 및 미중관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미중관계 개선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의미 있는 역사연구의 대상이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력적인 연구주제이다. 1970년대 초 미중관계의 일대 변화가 오늘날의 미중 관계와 그에 따른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첫째,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함께 미국의 상대적 쇠 퇴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물론 미국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회복에 가장 큰 국정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대외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Nasr 2013). 그런데 이와 같은 미국 국력의 상대적 쇠퇴는 1970년대 초에도 비슷하게 관찰되었던 바, 당 시에 미국이 여기에 어떻게 외교적으로 대응했는가는 오늘날 미국의 대외전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 용한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다.1 둘째, 오늘날 국제정치의 가장 큰 화두는 미중관계의 향방이다. 과연 기성 패권국인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가? 아니면 양국은 앞으로 보다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고 강화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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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이상 이 질문에 대해 주관적 의견 이상의 대 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미국이 외교적 접근을 통해 공산주의 적성국이었던 중국을 “암묵적 동맹”(tacit ally)으로 변화시켰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비추 어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한다.2 1970년대 초에 제시된 미중관계 방정식의 난이도는 오늘의 문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당시의 해법에 대한 연구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 또한 미래를 전망하는 데 어느 정도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초의 미중관계와 양국 교섭에 대해서는 영미학계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에야 기밀 해제 된 외교문서를 기초로 한 연구물이 나오기 시작했다.3 그러나 아직 국내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물론 1970 년대 초의 미중 데탕트가 당시 한국의 정치 및 국제정치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의 정치와 외교를 다루는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미중관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 경우는 있다(홍석 률 2012). 하지만 미중관계 자체가 연구의 주된 대상으로 설정되었던 경우는 없으며, 이런 점에서 본 연구 가 우리 학계의 현대 미중관계사 연구에도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II. 미중 데탕트의 기원
1. 미국의 상대적 쇠퇴
1969년 1월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닉슨은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다.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행정부의 부통령을 지냈던 시기부터 이미 그는 반공주의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굳 혔다. 닉슨은 또한 현실주의자이며 국제주의자였다. 그는 국제정치가 기본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굳게 믿었으며, 미국이 국제질서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미국과 국제질서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 으나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피로를 가중시켰다. 1965년 존슨 (Lyndon Johnson) 행정부가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 무렵 그 누구도 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하 지는 않았다. 미국이 대규모 정규 병력을 투입한 만큼 공산세력은 곧 소탕될 것이고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반도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반공전선은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미국은 수렁에 빠져든 듯 했다. 1968년 말까지 미국은 536,000명의 베트남 참전병력 중 30,500명의 전사자를 냈다. 165만 톤에 이르 는 폭탄을 남베트남 및 북베트남에 쏟아 부었고, 500여대의 항공기가 손실되었다. 연간 200억 달러에 달 하는 전쟁비용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1966년 7.9 퍼센트에서 1967년 9 퍼센 트, 그리고 1968년 9.7 퍼센트로 늘어만 갔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경상수지적자와 이에 따른 금 해 외유출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베트남전쟁에 따른 재정지출증가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금 유출 이 지속되었고, 인플레 압력 또한 높아져서 1968년 미국 경제는 연 5 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에 시달 리게 되었다(Young and Kent 2004, 348-349). 국내정치적으로도 반전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본래 미국 시민들은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참전 결정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반전운동이 나타나고 확대 되었다. 특히 1968년 음력설을 맞아 전개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대대적 공세는 공산세력의 건재를 과시 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미국여론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성질서에 대한 청년층의 반감과 저항이 표출되었고(Gaddis 2010, 14), 이에 동조하는 여론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1960년대 말 미국은 국내적으로 가중되는 정치 및 경제적 어려움을 맞이하고 있었다. 국제질서 또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국제적 세력균형 변화가 중요했다. 첫째, 서유럽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파괴를 딛고 경제적 부상을 이루었다. 이중 프랑스와 독일 같은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 은 커진 경제력과 자신감을 배경으로 보다 독자적인 외교행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드골 (Charles de Gaulle) 대통령은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1966년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탈퇴했다. 독일도 1966년 12월 기독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대연정이 성립된 이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외상의 주도 하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동방정책 (Ostpolitik)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의 단결력 약화를 우려하게 되었다.4 둘째, 미국의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국제적 변화는 소련의 군사력 강화였다. 소련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핵전력 및 운반능력 확충에 집중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968년경에는 미국과 대등한 수준 의 전략무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소가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제2차 공격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하영선 1989, 232).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 상실을 의미했다. 물론 소련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제침체가 계속되었고, 공산권 내부의 분열도 표면 화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독자노선을 추진했고, 후술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 국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즉 미국의 국력만 일방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이 국제적 위상의 상대적 약화를 겪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도 회복을 위 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1969년 출범한 닉슨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은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의 국제정치학 교수였던 키신저(Henry Kissinger)를 국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키신저가 공화당을 지지하고 국제문제에 정통한 학자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의 임명은 다소 의외로 여겨졌다. 키신저는 닉슨이 아니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록펠러 (Nelson Rockefeller)에게 오랫동안 정책자문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닉슨과 키신저는 철저한 현 실주의자이며 또한 국제주의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둘은 또한 공개적인 외교 접근보다 은밀한 협상을 통한 타협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공식적 관료조직을 거치지 않고 계통을 뛰어넘어 일을 진행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적 환경변화 속에서 어떻 게 하면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미국의 국익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함께 직면해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외교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Hanhimäki 2013, 37-39).5 미국이 처한 국제정치의 환경 변화에 닉슨과 키신저는 어떻게 대응하려 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닉슨 과 키신저가 최고정책결정자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남긴 연설과 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닉슨은 1967년 7월 29일 보헤미안클럽에서 한 연설을 통해 미소 데탕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국제 적 세력균형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련이 핵무기 톤수에서 미국을 앞서기 시작했고, 운반수단에 있 어서도 1970년에 이르면 미국과 대등해질 것이며, 중국도 곧 핵 운반능력을 갖출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닉슨은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에 나서야 하며, 소련과 비교해 대등한 핵전력만 보유해 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닉슨은 경제적으로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무 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고, 외교적으로도 “소련 지도자들과 대화를 통해 오판의 가능성을 줄이고 서 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모색하여 긴장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 닉슨은 또한 1967년 10월 외교 분야의 유력 시사매거진 <포린 어페어즈>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nam)라는 에세이를 통해 새로운 아시아정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닉슨은 미국이 장기화 되는 베트남 전쟁에 사로잡혀있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면서 미국 외교가 베트남에 서 벗어난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의 아시아는 스스로 안보를 위해 노력해 야”하며 미국은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후일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으 로 정식화되었다. 이 글에서 또한 주목할 내용은 중국에 대한 것이었다. 닉슨은 10억 인구의 중국이 영원 히 국제적 고립 상태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국가를 위협 한다면 세계도 안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 이었다(Nixon 1967, 113-125; U.S. Department of State 2003b). 키신저는 1968년에 출간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 쟁점들”(Central Issues of American Foreign Policy)이라는 에세이에서 미국 외교의 기본과제를 새로운 다극질서의 출현이라는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미소 양극질서가 군사 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극질서로 변화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정 치적 다극질서 하에서 미국은 더 이상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국제질서의 안정을 주도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은 여전히 물리적으로는 초강대국이지만 미국의 역할은 정치적 차원에서 여타 강대국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 키신저는 또한 미국이 다른 강대국들과 국제질서의 성격 에 대한 합의를 형성함으로써 국제적 안정을 도모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스스로의 국익을 추구해야 한 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키신저는 미국이 이런 역할을 담당하려면 외교적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고 했는 데, 이는 외교가 도덕주의적이고 법률주의적 경향을 띄는 국내여론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곤란하다는 의미였다(Kissinger 1968; U.S. Department of State 2003c). 닉슨과 키신저의 정세인식은 닉슨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키신저는 1969년 12월 백 악관 기자회견에서 미국외교의 기본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미국 외교정책을 새로운 기반 위에 세워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습니다. 전후 20년간 미국외교는 마샬플랜(Marshall Plan)을 이끌 었던 원칙에 따라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크게 변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역 할이 커졌습니다. 그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있습니다. 신생국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더 이상 단일한 세력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보다 덜 일방적으로 미국적인 기반 위에 국제관계를 건설해 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d).”7 1970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1970년대 미국외교정책: 평화를 위한 새 전략”(U.S. Foreign Policy for the 1970s: A New Strategy for Peace)이라는 보고서에도 키신저의 구상이 반영되어있다. 닉슨은 이 보고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왔던 국제정치질서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평화의 구조를 갖추기 위한 원칙으로 다른 국가들과 맺은 파트너십(partnership), 미국의 힘(strength), 그리고 협상의지(willingness to negotiate) 를 꼽았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e). 요컨대 닉슨과 키신저는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맞이한 가운데 이에 외교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 운 대외전략을 구상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련과 경쟁을 완화하여 여러 국내외적 곤란을 타개하겠다 는 것이었다.8 물론 소련과의 냉전적 대결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닉슨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는 투자를 강조했다. 장기적 차원의 대립을 전제한 상태에서 이를 위해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새로운 전략구상에는 대외개입 특히 아시아지역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국력 및 위상에 끼친 악영향을 고려할 때 이로부터 명예롭게 탈출하는 것이 최우선 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정책목표로 오른 점은 놀랍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닉슨은 중국과 관계 개선이 필 요함을 또한 강조했다. 이는 국제질서가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양극질서에서 다극질서로 변환하고 있다는 키신저의 인식과도 어우러질 수 있었다. 키신저의 주 관심은 유럽 및 소련과 미국의 관 계여서 그가 닉슨만큼 중국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신저는 미국 단독으로 힘을 행사하 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간 힘의 역학관계를 이용한 국제관계 관리를 구상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중소관계는 미국 외교 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기회로 포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MacMillan 2008, 109).
2. 중소분쟁의 전개와 심화
중소관계의 악화는 미국이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선 중요한 필요조건이었다. 사실 공산권 내에서 중국과 소련의 분열은 이미 1950년대부터 서서히 진행되어왔다. 1953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사 망 이후 공산권 내에서 리더십 문제를 두고 양국 간의 분열이 시작되었으며, 1958년 이후 이러한 분열은 심화되었다. 중국은 후르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의 대서방 ‘평화공존’ 정책을 수정주의 라 비판했고, 양국 간의 경제적 협력관계도 사실상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1964년 10월 후르시초프가 실 각한 이후 소련은 중국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이와 같은 분열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고, 적극적으로 정책에 활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물론 미중관계 개선의 가능성이 희미하게나마 인식되기는 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 폴란드 바르 샤바에 위치한 양국 대사관을 채널로 삼아 간헐적으로나마 미중 정부 간 접촉도 유지되고 있었다 (Schaller 2002, 149-161).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미 국무부의 중간레벨 관리들은 중국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Foot 2001, 266-275). 이 무렵 중국도 미국과 관계개선 가능성 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1965년 친중성향의 미국 언론인 스노우(Edgar Snow)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지난 15년 동안 미국과 중국 인민들이 역사의 요인 때문에 분리되어 실로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이 사태가 전쟁이 라든지 역사상 커다란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언급했다(키신저 2012, 254-255). 중소 간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60년대 후반까지 공산진영이 일체성 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중국에 대한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존슨 행정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은 중 간관리들의 인식과 달리 여전히 중국을 적대시하는 시각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을 소련보다도 더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했다. 소련과는 국익에 따른 합리적 거래가 어느 정도 선까지는 가능하다고 본 반면, 중국은 공산혁명의 이념에 충실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혁명’을 강 조하는 중국의 대내외 정책이 주된 이유였다. 이러한 인식의 또 다른 중요한 근거는 베트남 전쟁에 있었 다. 당시 존슨 행정부의 대외정책 관심은 온통 베트남전쟁에 쏠려있었는데, 존슨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은 중국이 북베트남의 가장 적극적 지원세력이라고 인식하는 등 중국이 아시아지역 공산혁 명 수출의 배후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1964년 중국의 핵무기 개발 성공도 미국의 대중국 위협인식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Foot 2001, 281-285).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중소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프 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자유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이는 소련의 군사위협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강화했다. 1969년 3월에는 우수리강 젠바오섬 등 국경지역에서 잇단 중소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충돌은 중국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소련에 의한 보복공격으로 중국은 더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 당시 소련은 중국의 핵시설 공격을 고려했을 정도로 갈등은 심각했다(씨아야펑 2012, 133). 1969년 8월 도브 리닌(Anatoly Fyodorovich Dobrynin) 주미소련대사가 미국 관리에게 중국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며 미 국의 “지원”을 촉구했을 정도였다(Schaller 2002, 168). 소련은 이미 중소 국경지대에 100만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마오쩌둥(毛澤東)은 “천하대란”으로 인식했다(키신저 2012, 258). 즉,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는데, 중국은 특히 소련으로부터 제기되는 위협을 가장 심각하게 느꼈다. 중국은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방책을 선택했다. 즉, 소련의 위협에 대 비하기 위해 미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네 명의 퇴역장군들이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대외 정책 특별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는 중미관계 개선에 따른 전략적 이점을 강조했다(씨아야펑 2012, 133-135). 당시는 1969년 제9차 공산당 당대회 이후 문화혁명의 가장 격렬한 국면이 종료되고 지속 적 혁명에 대한 마오쩌둥의 강조도 차츰 약화되고 있었던 바, 이는 대미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정치 적 배경을 이루었다(Chen 2001, 239).
III. ‘복잡한 미뉴에트’9: 사전교섭
1. 대전략으로서의 데탕트
미국도 1969년 닉슨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중국과 관계개선을 고위레벨에서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닉 슨은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69년 2월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에 대중국정책 연구를 지시했다. 중국 및 대만에 대한 기존정책을 검토하고, 아시아에서 중국의 전략적 의도를 분석하며, 미국이 중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책 옵션과 그에 따르는 비용과 위험에 대해서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White House 1969). 또한 닉슨은 키신저에게 행정부의 고위관리들과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행정부가 중국과 관계개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정책 이니셔티브는 닉슨의 소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대중관계 개선을 통해 소위 “평화의 구조”(structure for peace)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러 가지 긍정 적인 효과를 얻고자 했다. 첫째, 중소분쟁의 상황에서 미중관계 개선은 소련에게 미국과 관계개선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둘째, 중국의 협조를 유도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명예로운 탈 출을 모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셋째, 닉슨은 국내정치적으로도 자신의 재선(再選)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넷째, 중국 시장을 통한 미국경제 회복 및 행정부에 대한 미국 경제계 의 지원 강화도 기대되었다(Xia 2006, 140). 키신저는 원래 중국과 관계개선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닉슨이 1969년 2월 중국과 관계개선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 키신저는 시큰둥하게 생각했다(Xia 2006, 139; MacMillan 2008, 109). 앞에서 지적했듯이 대 유럽 및 소련 관계를 중심으로 놓고 세계전략을 그리던 키신저에게 중국은 부차적 으로만 중요한 지역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며 점차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 는 것을 스스로의 과업으로 만들어갔다. 키신저는 특히 중국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소련에 압력을 가한 다는 삼각외교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10 키신저의 회고에 따르면 1969년 8월 여름휴가 중이던 닉슨의 캘리포니아 산 클라멘테(San Clemente) 별장에서 열린 NSC 회의에서 닉슨 대통령은 “소련이 한층 더 위험한 상대이며, 따라서 만약 중소전쟁 에서 중국이 ‘무참히 깨지게 되면’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언급했다. 닉슨은 중소갈등이 고조되는 상황 에서 양국 간 실제 무력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국이 불리할 것이며, 이는 미국의 이익에도 반한다고 판단 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통령의 뜻에 따라 키신저는 “소련과 중국이 대치할 경우 미국은 중립적 입장을 취 하겠지만, 그런 틀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로 중국 쪽으로 기울 것”이라고 지시했다(키신저 2012, 271).
1969년 12월 한 기자회견에서도 키신저는 “국제정치에 영원한 적은 없으며, 미국은 다른 국가들, 특히 중 국을, 어떤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MacMillan 2008, 113). 키신저의 회고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닉슨은 자신의 각료 대부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 으며, 따라서 그가 아직 중국과 관계개선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도 전인 1969년 8월 시점에서 자신의 의사를 가감 없이 공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문이다. 게다가 키신저가 언급한 NSC 회의 기록에도 닉슨이 말했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MacMillan 2008, 120).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샌프란시스코에 서 박정희와 가진 정상회담에서도 닉슨은 중국을 위협세력으로만 거론했지 중국과 관계개선 의사를 전 혀 밝힌 바 없었다(U.S. Department of State 2010). 닉슨이 회의에서 어떤 말을 했던 간에 그에게 국가안보연구메모랜덤(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NSSM) 14호에 따른 대중정책 검토 보고서가 전달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보고서는 미 국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정책옵션을 첫째, 중국의 고립이라는 기존 정책 유지, 둘째, 중국의 고립 심화, 그리고 셋째, 중국의 고립을 완화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보고서는 세 번째 옵션을 권고했다. 중국과 관 계를 개선할 경우 미국의 장기적 목적과 이익이 보다 증진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U.S. Department of State 2006a).
2. 상호탐색
닉슨 행정부가 중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당장 어떻게 중국에 접근하느냐가 문제였다. 아 직 두 나라는 서로에게 적대국이었다. 어떻게 적대적 관계에서 갑작스럽게 비적대적 내지 우호적 관계로 전환할 것인가는 실로 어려운 실천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첫걸음은 상대방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타진 하는 것이었다(Kissinger 1979). 닉슨 행정부는 중단되어 있던 바르샤바 채널을 다시 가동시켰다. 1969년 9월 닉슨 행정부는 스토셀 (Walter Stoessel) 주폴란드미국대사에게 중국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스토셀은 12월 3일 유고슬라비 아 패션쇼가 열리는 바르샤바문화궁전에서 중국 외교관들을 우연히 발견하고 패션쇼가 끝난 뒤 이들을 따라갔다. 중국 외교관들이 급히 패션쇼장을 떠나자 스토셀은 이들을 쫓아갔고, 중국에 전할 중요한 메시 지가 있음을 알릴 수 있었다. 이 특이한 접촉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마오쩌둥에게까지 보고되었 다. 중국의 리더십은 이 사건을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려 하는 미국의 진정성과 의지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해석했으며(Xia 2006, 144), 결국 미국과 대사급 회담을 재개하는 것에 합의했다. 1970년 1월 20일과 2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바르샤바에서 미중 간 대사급 회담이 열렸다. 베트남전 조기종결을 중국이 도와줄 것을 바라는 미국의 입장과 대만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하기를 요구하는 중국 의 입장 사이에서 접점이 쉽게 찾아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미 국무부는 중국과 회담을 가지는 것에 조심 스런 입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린(Marshall Green) 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는 3월 5일자로 백악관 에 상신한 문서에서 미중관계의 개선이 가져올 이득이 크지 않다고 보고했다. 중국의 대소련 영향력 확대 를 도와줄 뿐이며, 미소관계는 물론 미국의 아시아지역 동맹국들과 가지는 협력관계에도 심각한 손상이 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Xia 2006, 148). 물론 회담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은 미국정부 가 고위급 특사를 파견한다면 이를 환영할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관계개선에 대한 의지를 밝혔던 것이 다(Schaller 2002, 170). 닉슨과 키신저에게 국무부의 입장과 바르샤바 채널을 통한 미중대화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키신저는 “귀머거리들의 대화”라고 생각했으며, 닉슨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여 버릴 셈이군”이라고 말할 정도였다(키신저 2012, 277). 두 차례의 연기 끝에 1970년 5월 20일로 세 번째 회담의 일정이 잡 혔으나 이마저도 취소되고 말았다. 미국이 1970년 3월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론놀의 쿠데타를 지원한 것 이 문제였다. 쿠데타로 중국이 지원하는 시하누크 왕자가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곧이어 미국은 북베트남 의 보급선 차단을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했는데, 이에 반발한 중국이 미중회담을 연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예컨대 1970년 7월 10일 간첩활동의 혐의로 1958년부터 중국에 감금되어 있던 미국인 목사가 풀려났다(Schaller 2002, 171). 닉슨과 키신저는 국무부를 거치지 않고 보다 직접적으로 중국과 접촉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 다. 닉슨은 1970년 7월 해외순방 도중 파키스탄, 루마니아 및 프랑스 등에 중국과 접촉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 중국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에 있던 국가들이었다는 점에서 중국과 미국의 사이에서 연락 채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중국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의향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중국은 에드가 스노우를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1970년 10월 1일 국경절 퍼레이드에 초청하여 마오쩌뚱 옆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마오는 공식적인 자리에 스노우를 초대함으로써 미국은 물론 중국인들에게 미중관계 개 선에 대한 의미심장한 상징적 메시지를 던졌던 것이다. 중국은 스노우에게 마오와 인터뷰 하는 것도 허가 했다. 인터뷰 기사는 몇 달 후 1971년 4월 30일자 <라이프>(Life)에 게재되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마오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다면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편견이 있어야 할 필 요가 어디 있는가. 상호 존경과 평등은 가능할 것이다. 나는 두 나라의 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희망을 품는 다”라고도 언급했다(Snow 1971; 키신저 2012, 282). 실로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발신은 정 작 워싱턴에서 즉각적으로 수신되지 못했다. 스노우가 중국을 선전하는 언론인으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 문에 그의 행적에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향한 중국의 발신은 계속되었다. 중국은 파키스탄 및 루마니아를 통해 전달된 미국의 메시지에 화답했다. 1970년 12월 8일 저우언라이의 메시지가 파키스탄을 통해 키신저에게 전달되었다.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베이징에 특사를 보내 ‘지난 15년 동안 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해 온 타이완이란 이름의 중국 영토 문제’를 논의하자고 요청”했다(키신저 2012, 285).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루마니아를 통해서도 전달되었다. 1971년 1월 미국은 루마니아 및 파키스탄 채널을 통해 특사파견요청을 수용하며 양국의 모든 관심사에 대해 폭넓게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로 화답했다. 미중간의 화해 제스처가 이어졌다. 1971년 3월 닉슨 행정부는 미국인의 중국여행 자유화 조치를 취 했으며, 곧이어 중국에 대한 무역제재도 완화했다. 1971년 4월 14일 중국의 초청으로 미국의 탁구대표팀 이 중국을 방문하여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팀과 경기를 가졌다. 미국 대표팀 초청은 마오쩌둥의 결정에 따 른 것이었다. 마오는 미국에 관계개선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중국인들에게는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는 것 에 대한 심리적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Xia 2006, 153). 핑퐁외교는 본격 접촉을 위한 전주곡이었다. 1971년 4월 29일 저우언라이의 4월 21일자 편지가 주 미 파키스탄 대사를 통해 미국에 전달되었다. 이 편지에서 저우언라이는 닉슨의 중국 방문 또는 로저스 (William Rogers) 국무장관이나 키신저의 특사자격 방문을 재차 요청했다. 5월 10일, 백악관은 저우언라 이의 초청을 수락하는 답신을 보냈다. 다만 회담의제에 중국이 강조하는 대만문제뿐 아니라 여타 쟁점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6월 2일에 도착한 저우언라이의 회답은 포괄적 의제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고, 이로써 미국정부 고위급 인사의 비밀방문 실현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IV. 직접교섭
1. 키신저의 방중
저우언라이의 초청에 따라 키신저가 특사자격으로 1971년 7월 9일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했다. 키신저는 소수의 일행과 함께 사이공, 방콕, 뉴델리 그리고 파키스탄의 라왈핀디를 거쳐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라 왈핀디에서는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탈이 난 척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중국은 외교관을 파키스탄에 파견하여 키신저 일행을 베이징까지 에스코트했다. 키신저의 주된 임무는 닉슨의 방중을 목표로 양국 정 상의 공동성명서 초안을 마련하는 일 등의 준비 작업에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사흘간 베이징에 머물면 서 저우언라이와 총 17시간의 마라톤 회담을 했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1차 회담은 7월 9일 오후 4시 35분부터 무려 6시간 45분 동안 진행되었다. 회 담은 미국의 입장에 대한 키신저의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키신저는 양국이 상이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나 라이지만 누가 옳은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두자고 했다. 지금 미중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상 호존중과 평등의 기반 위에서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협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이에 집중 하자고 했다. 키신저는 중국이 미국의 핵심이익에 위협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닉슨의 소신에 대해서도 소 개했다. 덧붙여 미국은 강대국 관계를 중심으로 넓은 시야에서 국제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며, 지엽적 문제 에 지나치게 구애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7개 회담 주제를 제시했다. 이는 대만문제, 인도차이나문제, 소련·일본 등 주요국들과 관계문제, 남아시아문제, 양국 간 연락채널 확보, 군비통제, 그 리고 기타 중국이 원하는 주제였다.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대만문제였다. 저우언라이는 “이 중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모든 문제 의 해결이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또한 닉슨의 방중이 성사된다면 이는 역사적 사건이 되겠지만 이를 위 해서는 주요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의 유일한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대만이 1954년 체결한 방위조약도 인정할 수 없다 고 했다. 또한 미국이 정해진 기한 내에 대만과 대만해협으로부터 군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군사장비와 시설도 철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인도차이나 즉 베트남전쟁 문제가 해결된다면 닉슨대통령의 임기 내에 대만방 위에 필요한 3분의 2의 전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수할 것이며, 닉슨의 두 번째 임기 초반에 정치적 문제,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중국정부로 인정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제안했다. 인도차이나 문제를 대만문제와 연계시켜서 중국의 협조를 유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도차이나와 관련해서도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군사적으로 철수한 이후에도 다른 수단을 통 해 계속해서 이 지역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우려 아래 미 국 군사고문단의 잔류여부, 미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의 비밀작전 가능성, 군사 원조의 지속적 제공, 미국 이외의 외국군대 철수 등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모든 외국군대가 동 지역에 서 철수해야 하며 내정불간섭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더 이상 헤게모니를 행사하기 힘든 상태에 도달했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은 결 코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이며, 국가들이 크기에 관계없이 평등 해야 한다는 원칙을 중시한다고도 했다. 한편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면 이는 일본을 강화 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일본이 아시아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 미국의 전위 역 할을 하게 될 수 있다는 중국의 우려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미군의 일본주둔은 일본의 팽창과 공격적 정책을 방지하는 목적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철수하여 일본이 재무장에 나서고, 그리하여 태평양에서 일본과 중국의 세력이 상쇄되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으나 미국의 정책은 그 러한 것은 아니며, 이런 점에서 미국과 중국은 이해관계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첫 회담의 말미에서는 저우언라이가 동아시아에서 미군이 주둔하는 것 전반을 문제로 삼으면서 한 국 특히 주한미군에 대한 의견교환도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고 한국 군도 귀환하고 나면 닉슨의 2번째 임기 말까지 주한미군 전체는 몰라도 대부분의 철수가 이루어질 수 있 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또한 “만약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다면 이는 중국 입장에 서 볼 때 더 나쁜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일본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부각함으로써 주한미군에 대한 중 국의 긍정적 인식을 유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키신저는 한국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이 미국의 핵심이익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솔직히 우리가 한국문제에 오랫동안 묶여있을 필요는 없다” 라거나 “한국에 군사를 주둔하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영구적인 특징이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였다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a). 키신저의 보좌관 로드(Winston Lord)가 보고했듯 제1차 회담은 “철저히 탐색하듯 진행됐고, 포괄 적이었으며, 의미심장했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a) 팽팽한 긴장감도 흘렀다. 특히 대만 문제나 인도차이나문제와 관련한 저우언라이의 요구는 상당히 강경했던 바, 이는 키신저의 예상을 뛰어 넘는 정도였다. 이튿날 정오에 시작된 두 번째 회담도 저우언라이와 키신저가 조심스럽게 상호탐색을 계 속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저우언라이는 전날 회담에서 키신저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재차 강조해서 전달했다. 우선 인도차이나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의 완전한 철수만이 평화를 회복하는 길이며, 미국이 영향력을 남 겨두려 시도할 경우에는 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해서 바로 미중관계가 정상화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전 종전을 전제로 대만주둔 미군의 3분의 2가 철 수하고 이후에 점진적으로 상황을 보아가며 미중간의 정치적 관계 발전을 추진하자는 키신저의 제안을 그 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저우언라이는 일본에 대한 우려도 다시 표명했다. 그는 1969년 닉슨-사토(佐藤 榮作)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지원하고 있는 것 아니냐 고 의심했고, 미군의 대만철수 이후 생긴 힘의 공백을 일본이 채울 가능성이 높다고도 우려했다. 하지만 두 번째 회담에 임하는 저우언라이의 입장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중국과 친선관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분명한 정책방향을 통해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서 관계개선의 네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중국의 첫째, 정통성 인정, 둘째, 대만이 중국에 속한 다는 것을 인정, 셋째, ‘두 개의 중국’ 불인정, 그리고 넷째, 대만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대만 문제에 대한 중국의 원칙적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대만주둔 미군의 완전 철수 가 이루어져야만 양국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 당장 중국의 정통성을 인정해야만 닉슨의 방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도 더 이상 강하게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이러한 일 들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국이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중요한 변화였다. 저우언라이는 첫 회담에서 보다 누그러든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인데, 사실 이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 다(Xia 2006, 170-171). 키신저와 첫 회담을 통해 중국의 원칙적 입장을 밝힌 후, 이제는 그 원칙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미국과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우언라이와 마찬가지로 키신저도 최대한 접점을 찾으려는 자세로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그는 “오 랫동안 서로 떨어져있었던 두 나라는 우선 관계를 수립하고, 정상화한 다음 우호관계로 발전시키는 중요 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하고, 이 과정에서 양국은 “인내심을 갖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밖의 일을 강요함으로써 (합의) 가능한 것조차 놓쳐버려서 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또 저우언라이에 답하며, 그는 닉슨대통령의 방중 자체가 대단히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일이며, 닉슨의 방중으로 미중관계 정상화를 향한 큰 방향이 설정되는 것이라고 주 장했다. 중국의 정통성 인정문제도 미국 국내정치 사정상 당장은 어렵지만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 뒤 추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중국의 유엔(United Nations: UN)진출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설 명했다. 또 일본과 관련해서는 일본이 자위능력을 지녀야 하지만, 미국은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는 반대한 다고 밝혔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b). 두 번째 회담에서도 한국문제가 토의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내면 서,11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면 임기 후반에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할 것이라는 전일 회담에서 키신저가 한 발언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닉슨의 두 번째 임기 중이라고 정정하면서 철군이 상당히 일찍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저우언라이는 또한 북한이 한국과 미국의 공격 가능성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했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b). 저우언라이는 저녁 6시 이후에는 자리를 비웠 다가 밤 11시 20분에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와 30분 가량의 짧은 미팅을 가졌다. 미국 측에 알리지는 않았 지만 그 사이 북한 대표단을 만나고 돌아왔던 것인데(키신저 2012, 313), 이는 북한이 미중회담에 대해 중 국 측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언질을 받았을 가능성을 높게 시사한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c). 이상과 같이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두 번째 회담도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양측은 대만문제 관련 의 견조율에 있어서 약간의 진전을 이루었다. 이후 닉슨 방중 및 공동성명서에 대한 협의는 비교적 쉽게 진 행되었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e). 다만 키신저의 비밀방중 사실 및 중국의 닉슨 초청을 어떻게 발표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다소의 실랑이가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북한대표단을 만나러 간 사 이 공동발표문에 대한 토의가 있었는데, 중국 측은 대만문제에 대한 협의를 통해 양국관계 개선을 희망하 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닉슨을 초청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문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이를 받 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초청을 받아내기 위해 애썼다는 뉘앙스가 문제였을 뿐 아 니라 대만문제만을 부각시킨 것도 인정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음 날 오전 키신저 일행의 귀국 직전에 열린 마지막 회담에서 중국 측은 중국이 닉슨의 방중의사를 알고 초청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변경된 문안을 들고 나왔다. 대만문제에 대한 언급도 빠졌다. 키신저도 새 문안에 동의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닉슨 방중 이전에 실무협의를 위해 미국 고위급 인사가 다시 방 중할 것을 요청했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d). 7월 15일, 미국과 중국정부는 각각 그러나 동시에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이듬해 봄에는 닉슨의 중국방 문도 이루어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키신저와 회담을 마무리하며 저우언라이가 예상했듯 이 발표는 “세 상을 흔들어” 놓았다. 키신저는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다시 베이징을 방문했다. 정상회담 직후 발표될 성명서의 초안을 마련하는 일 때문이었다. 키신저의 7월 방문 시 논의되었던 사안들이 다시 세부적으로 논의되었다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f). 저우언라이는 특히 대만, 인도차이나, 한국, 일본, 남아시아, 미 소관계의 여섯 가지를 회담 주제로 제시했는데, 그가 키신저와 달리 한국문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표명 했다는 점은 흥미롭다.12 아무튼 키신저 일행이 떠날 때까지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 루어졌다. 하지만 대만문제, 특히 대만주둔 미군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남았다.
2. “세상을 바꾼 일주일”: 닉슨 방중(1972. 2. 21-28)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과 그의 일행이 전용기편으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저우언라이가 닉슨을 영 접했다. 중국의 환영행사는 비교적 간소했다. 무엇보다도 대규모 환영인파 동원이 없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중국인들에게 가할 정신적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의중에 따른 것 이었다. 하지만 마오는 닉슨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청하여 면담함으로써 태평양을 건너온 닉슨을 만족시 켰다. 사실 닉슨과 마오의 만남은 미리 예정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닉슨은 정상 간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심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사전 약속 없던 상태에서 외국 지도자를 불시 간에 불 러들여 만나는 방식은 마치 과거에 외국 사절이 중국황제를 알현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관계개선을 희망해오던 닉슨에게 마오와 만나는 것이 갖는 의미는 충분했다. 줄곧 적대적이었던 미중관계를 생각할 때 양국 정상이 만나 악수하는 순간은 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임에 틀림없었다. 마오는 닉슨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 정책과 관련된 구체적 논의는 저우언라이에게 미루어두 었다. 그러면서도 마오는 미중관계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소련위협에 대한 경계심을 간 접적으로 드러냈고, 대만문제가 양국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중도 내비쳤다. 또 닉슨 이 대만에서 병력을 일부 철수할 의향이 있다고 밝힌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 군대는 해외로 나가지 않습 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의 베트남전 개입 가능성을 일축하는 말이어서 베트남전으로부터 명예로운 탈출을 모색하고 있던 닉슨을 안심시켰다(U.S. Department of State 2006b). 이어서 닉슨과 저우언라이의 회담이 수차례 열렸다. 여기서 논의된 주제와 내용은 키신저와 저우언 라이의 사전회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만문제,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군철수문제, 대 소련 및 일본 관 계 등이 논의되었다. 이 중 일본과 관련된 사항은 주목할 만하다. 닉슨은 일본이 미일동맹으로 묶여있지 않을 경우 오히려 중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으며, 일본이 경제적 팽창을 넘어 군사적 팽창에 나 서지 않도록 억제할 것이라는 입장을 확인했다(U.S. Department of State. 2006c; 2006d; 2006e). 한편 로저스 국무장관과 치펭페이 외교부장의 회담, 그리고 키신저와 차오관화 외교부부장 간의 회 담도 열렸다. 특히 후자에서는 공동성명문의 세부사항을 논의하고 문구를 조율했는데, 여기서도 물론 대 만문제를 놓고 힘든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미국이 대만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중국은 대만문제를 평 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데에는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이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느냐 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원칙에 대한 합의’와 ‘장래의 해결’이라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다. 즉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는 대신 대만문제의 해결은 장래로 미루어두는 방식에 합의한 것이 다(U.S. Department of State 2006f). 1972년 2월 27일 상하이 코뮈니케(Shanghai Communiqué)가 발표되었다. 코뮈니케의 형식은 독특 했다. 일반적 외교관례는 국가들 간에 합의된 내용을 위주로 정상회담 또는 고위급회담 후 성명서가 작성 되는데, 상하이 코뮈니케는 미국과 중국의 입장을 각각 설명하고 서로 합의를 이룬 점과 그렇지 못한 점 을 따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중요한 방점은 양국의 합의사항에 찍혀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수십 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양국이 이룩한 진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양측은 “주권존중, 영토적 일체성, 불가침, 불개입, 평등, 상호이득, 그리고 평화공존”이라는 국제관계의 근본원칙에 합의하 고, 이에 근거하여 다음의 사항에 동의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정상화를 향한 진전은 모든 국가들의 이해에 부합한다. 양국은 국제적 군사 분쟁의 위험을 줄이기를 희망한다. 양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국가 또는 국가들이 그러한 패권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양국은 제3국을 위한 협상에 나서지 않으며, 다른 국가에 대항하는 협약체결이나 양해(각서)교 환을 하지도 않는다(U.S. Department of State 2006g). 외교적으로 에둘러 표현되었지만, 이상의 항목들은 모두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양국이 관계진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 경주할 것이며,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 분쟁에 대한 개입도 최소화한다는 동의의 표현이었다. 또한 소련이 제기하는 위협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밝히면서도 미중관계 개선이 결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애써 강조했다. 한편 미중 교섭에서 가장 난제로 떠올랐던 대만문제에 관해서는 미국이 군 병력 및 시설 철수를 궁극 적 목표로 인정하고 이를 이 지역에서 긴장이 완화되는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을 밝히 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코뮈니케에서는 과학, 기술, 문화, 스포츠, 언론 분야에서의 인적교 류를 활성화하고 양자무역도 확대하기로 했다. 양국 간의 대화채널도 다양하게 유지하기로 했다. 비록 관 계정상화의 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양국관계 진전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이 제 시된 것이다.
V. 맺음말
1972년 2월 27일 저녁 상하이에서 닉슨과 그의 수행원들을 위해 마지막 연회가 베풀어졌다. 닉슨은 건배 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꾼 일주일이었습 니다(Nixon 1978, 580; MacMillan 2007,xxi).” 자신의 중국 방문이 세상을 바꿔놓았다는 닉슨의 말을 얼 마만큼 받아 들여야 할까? 닉슨은 중국과 관계개선을 자신의 두드러진 외교적 업적으로 내세웠고, 이러 한 성과에 힘입어 1972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13 중국과 관계를 개선한 이후 미국이 소련과 일련의 긴장완화 조치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중소분쟁으로 조성된 소위 삼각외교의 구 도 하에서 미국은 중국 카드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소련과 데탕트 국면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 여 소련이라는 냉전의 주적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닉슨의 중국방문과 관계개선은 중요한 정치적 외교적 파급효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파급효과가 과연 세상을 바꿨을 정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미소 데탕트는 국면적인 긴장완화에 불과했을 뿐 냉전이라는 보다 근본적 차원 에서 대립은 계속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정상화는 1979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던 만큼 양국 관계 개선에도 일정한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더욱이 닉슨은 애초에 중국과 관계개선을 시도하면서 베트 남 전쟁과 관련된 중국의 협조를 노렸는데, 이와 같은 기대는 거의 충족되지 않았다. 미국과 관계가 개선 됨에도 불구하고 중국 그리고 소련은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명예로운 평 화”(peace with grace)의 실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결국 1973년 명예롭지 않은 철수를 단행했 다. 불과 2년 뒤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은 공산화되었다. 하지만 닉슨의 중국방문 이후 4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1972년의 미중관계 개선을 바라보게 되면, 닉슨이 스스로 업적을 과장한 측면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닉슨 행정부의 대중 국 외교가 갖는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기 힘들다. 닉슨은 이미 1967년에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떼어놓고서 국제질서의 안정을 꾀하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중국과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중국은 이후 미 국과 관계를 점진적으로 개선했고, 이는 경제개혁 추진의 기반이 되었다. 서방 특히 미국의 기술과 자본 은 중국경제의 비약적 성장의 중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도 급속한 경제적 부상을 계속 하고 있으며 점차 국제적 영향력도 확대해가고 있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1972년의 고립된 중국이 아니 라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강대국 중국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변화는 닉슨의 방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MacMillan 2007, 121-122). 물론 닉슨 행정부의 대중국외교는 시대적 산물이기도 하다.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 국내 외적으로 또 정치적·경제적으로 여러 곤란에 직면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또는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라는 조건이 없었더라면 미중관계 개선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중국과 관계개선은 존슨 행정 부에서도 일부 고려되었던 바 있었으나 그 당시에는 국내외적 여건이 성숙해있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와 이에 따른 여건의 성숙이 중요했다 하더라도 닉슨과 키 신저라는 유능한 매개자(agency)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1972년 상하이 코뮈니케에 이르는 과정은 가능하 지 않았을 것이다.14 아직 냉전이 계속되던 시절에 이념적 적성국과 관계를 교섭을 통해 “암묵적 동맹”으 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닉슨은 중국과 관계개선이라는 목표를 설 정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키신저는 중국과 교섭과정에서 미뉴에트를 추듯 조심스러운 상호탐 색과 조정을 통해 양국 간 이익의 접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키신저는 당시 중국과 교섭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국가이익을 절대적 형태로 정의 내린 상태에서 상대국과 교섭을 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국가이익이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달리 정의 또는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국가들이 상대방에 공격적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절제하고 상호 협력을 이루려면 어느 정도의 가치의 공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1972년 당시 미국과 중국은 서로 공유하 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가이익에 대한 상호합의가 그나마 서로가 행동을 절제하도록 하는 가장 의미 있는 요소였다. 키신저가 저우언라이와 첫 대면한 순간부터 가장 중요한 이슈 는 바로 양국의 이익 정의가 얼마나 서로 일치하는지 또 얼마나 일치시킬 수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키신 저 2012, 328-329). 양국 지도자들은 의견이 불일치 하는 문제를 장래에 해결할 일로 미루어놓고 우선 합 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갔다. 예컨대 교섭기간 내내 중국은 대만문제와 관련한 자신의 핵심원칙을 강조 했지만 문제해결의 실행은 미래로 돌림으로써 융통성을 발휘했다. 이러한 실용적 교섭의 결과가 바로 상 하이 코뮈니케였다. 중국의 부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21세기의 국제정치에서 미중관계의 향배에 대한 관심이 높다. 중국 은 1979년 이후의 개혁 개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 일당지배가 유지되고 있으며, 아직은 미국이 만들고 유지해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과 태도로 인해 중국의 부상이 곧 미국 그리고 미국적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이 이미 상당한 정도로 미국적 자유주의 질서에 편입되 어있고 그 정도는 앞으로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렇게 미중관계에 대한 예측은 논자에 따라 또 이론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미래는 열려있는 것이다. 미중 양국이 상호협력적인 관계로 나아갈지 아니면 갈등과 분쟁으 로 나아갈지는 미리 예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지금 양국이 내리는 정책적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 미이다(Khong 2013/14, 174). 이와 관련해서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중미 관계에 적절한 이름표는 파트너십이라기보다는 공진화이다. 그것은 두 나라 모두 국내의 긴급한 사항을 추구하고, 가능하면 협력하며,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호관계를 조정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모든 목표를 다 지지하는 법도 없고, 양측의 이해가 모두 일치한 다고 추정하지도 않지만, 두 나라 모두 상호 보완적 이해를 찾아내고 발전시키는 것이다(키신저 2012, 629-630).
아마도 이것이 1972년 상하이 코뮈니케에 이르는 미중교섭을 검토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한다. 닉슨과 키신저가 강한 목적의식과 조심스럽고 실용적인 외교를 통해 중 국을 적성국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변화시켰듯이 오늘날의 지도자들도 충분히 미중관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
주 (註)
1 예컨대 세스타노비치(Stephen Sestanovich)는 미국외교가 역사적으로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과감한 외교정책을 펼치는 시기와 국력쇠퇴를 우려하며 소극적으로 국제정세에 대응하는 시기를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패턴을 그려왔다고 주장하며, 최근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를 이러한 역사적 패턴 속에서 위치시켜 조망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Sestanovich 2014). 2 “암묵적 동맹”이라는 말은 다음에서 따왔다(Goh 2005, 222-255; Schaller 2002, 185-208). 3 출간된 순으로 예를 들자면, Goh 2005; Xia 2006; MacMillan 2007; Tudda 2012 등이 있다. 4 닉슨 행정부는 특히 서독이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나토에서 떨어져 나올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점차 이를 인정 및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Schlzinger 2010, 375). 5 물론 외교정책의 주도권은 닉슨에게 있었다. 그는 위대한 외교대통령을 꿈꾸며 외교정책을 주도했고, 키신저는 닉슨의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Margaret MacMillan 2008, 108-109). 6 하지만 닉슨은 동시에 “우리는 소련과의 협상에서 우리의 목표는 소련의 것과 다르다는 점을 늘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그 자체로 목표로 추구하지만, 그들은 평화를 승리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으려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a). 7 키신저의 언급은 2008 년 자카리아가 제시한 “미국 이후의 세계”(The Post-American World)의 아이디어와 매우 유사하다(Zakaria 2008). 8 이와 관련해서 러게볼과 프레스톤은 베트남전쟁의 여파를 강조하면서 데탕트의 궁극적 목적이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여파를 소화시킬 때까지 가능한 한 최대로 힘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고 평가한다(Logevall and Preston 2008, 9-10). 9) 원문은 “intricate minuet”인데(Kissinger, 2011, 220), 번역본에는 “정교한 미뉴에트”로 되어있다. (키신저 2012, 273). 10 맥밀란은 키신저가 미중관계 개선에 대한 닉슨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 시점을 1969 년 8 월경으로 추정한다(MacMillan, 2008, 117). 11 로드는 이튿날 회담을 통해 “중국이 한국과 관련해서 무엇인가 하고자 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보고했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c). 12 저우언라이는 북한이 전달한 정보와 1971 년 4 월에 발표된 소위 ‘8 개항’ 문건에 의거하여 한국에 대한 논의를 강요하다시피 했는데, 이에 대해 키신저는 마지못해 응하는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이 재차 전달되었고,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미국의 한국군 현대화 사업 지원이 사실상 한국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려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군철수의 공백을 메우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도 표명되었다. 키신저는 한반도 안정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공통된 이해를 강조하면서 주한미군철수에 대해 재차 설명했다. 또한 미군철수 이후 일본이 한국으로 팽창하거나 한국군이 북한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02g). 1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닉슨에게 국내정치는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이것이 중국과 교섭과정에서도 주요한 고려사항이었음은 물론이다. 14 터다는 닉슨과 키신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Tudda 2012). 이에 대해 제스퍼슨(Jespersen)은 닉슨과 키신저의 역할이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라기보다는 변화의 파도를 잘 포착하여 올라탄 것이라고 지적한다(H-Diplo Roundtables 201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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