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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항해 95회 방송
제목 :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
1). 철학자 후설 소개
에드문트 후설(독일어: Edmund Husserl, 1859년 4월 8일 부터 1938년 4월 27일)은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입니다. 그는 당시 철학의 풍조였던 심리주의, 실증주의 등에 반대하여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정초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상학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헤겔의 저서 “정신현상학”과는 다른 학문입니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1859년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 지방인 메렌 (Mähren, 현재 체코의 동부 지방)의 작은 도시 프로스니츠 (Proßnitz)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할레 대학교의 강사, 괴팅겐 대학교의 강사와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은퇴 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습니다. (위키백과)
2). 후설의 초기의 철학: 기술심리학
후설은 학문의 초기에는 수학자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철학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는 수학의 기초로서 철학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수의 철학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후설은 그의 학문적 엄밀함과 명백함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명백함을 명증(明證)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철학도 “엄밀한 학(學)으로서의 철학”을 지향합니다. 그가 수학에서 철학으로 전환한 까닭은 학문에서 가장 명증한 수학에서도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결코 증명될 수 없는 5개의 공리에서 출발합니다. 철학만이 전제없는 학문의 이상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아직도 철학이 그의 위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시 수학계는 수리철학적으로 심리주의와 논리주의가 대립해 있었습니다. 심리주의는 수학도 인간의 심리에 의존한다 따라서 수학의 기초는 심리학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논리주의는 수학이나 논리학의 진리는 결코 심리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 수학을 심리학으로 설명하면 상대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당시 비인 대학의 브렌타노 교수는 심리주의를 주장했고 따라서 후설도 그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심리주의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독일의 예나 대학 교수인 프레게의 영향을 받아서 논리주의로 전환합니다. 그런 결과물이 후설 초기의 대저인 “논리연구, 순수논리학 서설”입니다. 뒤에도 다시 나오지만 브렌타노는 후설 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지향성 (intentionality) 개념을 중세철학에서 발견하여 도입한 사람이고 이를 후설 역시 받아들입니다.
3). 현상학의 이념
“현상학의 이념”은 후설이 1907년 괴팅겐 대학에서 행한 강의록입니다다. 후설은 1907년 여름학기에 “현상학과 이성비판 개요”라는 제목의 강의를 열었습니다. 이 강의의 입문에 해당하는 처음 다섯 번의 강의가 “후설전집” 2권으로 출간된 “현상학의 이념” 입니다.
이 책의 목적은 한 마디로 앎 혹은 지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물론 숱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에 빠져 살기 때문에 도대체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거의 무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에도 “올바른 지식은 있는가?” 혹은 “과학적 지식은 삶에 유익하기는 하나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볼 수 없다” 라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도 상대주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철학에 무척 중요합니다. 자연과학 내지 실증적인 과학들이 엄청나게 발전함에 따라 철학적 지식은 점점 힘을 잃어 갑니다. 특히 최근에는 뇌과학 (brain science), 인공지능(AI) 등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철학의 입지는 가뜩이나 좁아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종래의 인식론은 뇌과학 혹은 인지과학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후설이 살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철학에 대한 실증과학의 공격이 드세었습니다. 당시 발달한 심리학 특히 게슈탈트 (Grstalt) 심리학은 큰 반향을 주었습니다. 후설은 빈 대학에서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에게서 철학적 심리주의를 배웠습니다. 브렌타노의 제자인 베를린 대학의 교수 칼 스툼프(Carl Stumpf)에 의해서 1893년에 설립된 “독일의 베를린 실험 심리학 학교”에서 게슈탈트 심리학이 꽃을 피웠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은 심리학, 철학 등에서 심리적 인지적 정서적 현상 등을 개개의 감각적 요소 등으로 분해해서 집합으로 바라볼 때 그 부분들의 합과 총체적인 그 자체가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개개의 부분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전체로서의 구조나 특질을 갖게 된다고 보는 심리학적 입장이다. (나무위키)
4). 대상과 인식의 일치
우리가 흔히 지식 혹은 정보라고 하는 것을 인식이라고 합니다. 또 이를 진리라고도 합니다. 철학에서는 이 진리를 대상과 인식의 일치라고 합니다. 현상학의 이념의 번역자 이영호씨는 이를 “맞아떨어짐”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즉 대상과 인식이 맞아 떨어짐을 진리로 본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진리 대응설이라고도 합니다. 하여간 후설의 절대적인 관심은 바로 이런 것 즉 어떻게 인식과 대상이 맞아떨어짐이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후설은 칸트의 문제의식과 비슷합니다. 즉 지식 혹은 진리가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를 칸트는 “어떻게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 라고 도식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학이나 각종 자연과학의 진리가 존재한다. 철학은 그것이 어떤 근거로 가능한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칸트는 선험철학 혹은 인식론이라고 하고 후설도 그냥 인식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일치라고도 합니다.
이런 진리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저 꽃은 국화이다” 라고 할 때입니다. 혹은 “문이 열려 있다” 도 모두 이런 주관과 객관의 일치가 있습니다. 즉 관찰된 사실과 그에 대한 언표(言表)의 일치가 인식이고 진리입니다. 그래서 대상은 사실이나 경험 혹은 관찰에 해당하고 인식은 언표, 진술, 명제, 판단 혹은 말에 해당합니다.
5). 초월적 과학과 내재적 과학
후설은 일체의 학문 혹은 과학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즉 초월과학과 내재적 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등 일체의 과학은 초월과학입니다. 초월(超越) (transcendence) 이란 무슨 신비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모든 지식의 기준은 나입니다. 그래서 초월은 결국 나 밖에 혹은 나의 의식 밖에 란 말이 됩니다. 삼라만상과 우주 전제가 인식의 대상이고 또 초월자들입니다. 이처럼 철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은 그 대상이 초월자입니다. 이를 후설은 또 객관적 과학이라고 합니다.
이런 객관적 과학에 대하여 나의 의식을 대상으로 삼는 과학이 있으니 그것이 후설의 철학 곧 현상학입니다. 이를 후설은 또 생각의 과학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코기타치오 (cogitatio) 라고 라틴어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한다고 해서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생각 즉 개념, 판단, 추리 등이 아니라 직관적 인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 경험론이 말하는 감각이나 인상 (impression)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모든 지식의 원천인 지각 (perception)과 연관이 됩니다.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이런 경험론적인 발상이 도움이 됩니다. 즉 경험에서 관념이 나온다 는 사상입니다. 이런 경험적 인식을 후설은 직관적 인식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생기는 인식 곧 사물의 이름을 말합니다. (3)
위의 예처럼 “이것은 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 혹은 대상인데 후설은 이를 종종 소여(所與) data, 독일어로 Gegebenheit 라고 합니다. 또 자기소여(自己所與) 라는 말도 쓰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스스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연과학에 엄청난 신뢰를 보냅니다. 그만큼 그들이 객관적이다 혹은 정확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후설의 입장에서는 이들 자연과학 혹은 초월적 과학들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외적인 관찰에 의지하는데 이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연과학이나 심지어 수학마저도 그 전제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기하학의 공리 같은 경우입니다. 이는 이미 학문적 탐구 이전에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전제가 누구나 봐도 다 그럴 듯이 보이기는 합니다. 가령 평행선의 공리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공리를 부정하는 기하학도 탄생되었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도 주지 못하는 진리 즉 무전제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현상학입니다.
6). 내실적 내재(內實的內在)와 환원 (reelle Immanenz and Reduktion)
위의 내재적 과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영역을 나타내게 위해서 후설은 “내실적 내재”라는 말을 씁니다. 의식 밖에 주어진 대상을 탐구하는 초월적 학문들과 달리 현상학은 어디까지나 의식 안에서 대상을 찾고 분석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식 안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입니다. 후설을 이를 위하여 환원(還元) (reduction) 혹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환원이란 초월적으로 간주된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은 초월적 정립을 배제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초월적 정립이란 쉽게 말하면 내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즉 세상을 모두 나의 눈이라는 카메라에 담긴 영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불교 사상에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라는 것이 있는 데 바로 이 사상이 환원과 같습니다. 일체를 내가 만든 이미지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흔히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필자도 예전 학부 시절 부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했었는데 후설 현상학의 환원과 내실적 내재 등의 개념을 이해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후설을 알지 못할 때는 내가 보는 세상이 당연하고 자명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나의 극장의 스크린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또 두 번 째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크린을 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4)
이게 바로 환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불교와의 차이점은 마음 아니 의식의 구조가 단순하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후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혹은 의식은 몇 겹의 층으로 이루어 집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현상학의 임무입니다. 서양철학의 특징은 일체유심소조의 상태로 들어가야 비로소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불교와 현상학은 일치합니다. 단 현상학의 경우는 해탈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수련이 아니라 엄밀한 과학적, 철학적 탐구가 생명입니다. 여기서 동양과 서양이 갈라집니다. 즉 일체유심소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 거기서 사물의 본질을 직관해야 비로소 학문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이를 본질직관이라고 합니다.
내실적 내재(內實的內在)와 함께 후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는 사상을 채용합니다. 아시다시피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는 명제를 철학의 제일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이를 라틴어로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I think, therefore I am 이라고 합니다.
후설 역시 이런 데카르트의 사상을 많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코기타치오. (cogitatio)란 단어를 말합니다. 이 말은 사고, 반성 혹은 사고작용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사고되어진 것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후설은 코기타치오네스.(cogitationes) 즉 사고되어진 것들 이라는 말을 씁니다.
내실적 내재는 나는 생각한다는 능동적인 의식과 생각되어진 것이라는 대상의 영역으로 구별됩니다.
그런데 “내실적 내재”가 가장 명확하다 혹은 명증적이다 라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실적 내재와 유사하고 더 일반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부지각”이란 말입니다. 또 영국의 철학자 로크의 용어로 “내적인 경험”이란 것도 있습니다. 외적 경험은 바로 현실입니다. 문제는 내부지각과 외부지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따라서 내부냐 외부냐 혹은 후설의 용어로 내재냐 초월이냐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저 꽃은 노랗다 라고 할 때 이를 객관적인 사실로 간주하면 그것은 초월입니다. 그러나 저 꽃은 노랗다고 내가 생각한다 혹은 나에게 노랗게 보인다 라고 하면 그것은 내부지각입니다. 이 두 언표의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 그것은 진위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황달병에 걸려 있다면 나의 진술은 오류가 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것은 절대적으로 참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보인다 라고 하는 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브렌타노도 내부지각은 명증하다 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브렌타노는 심리현상은 내부지각이고 물리현상은 외부지각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후설은 지향성 개념을 통해서 내부지각, 외부지각의 경계를 파괴하고 이를 태도변환으로 다시 설정합니다. 초월을 내재로 환원시키고 거기서 다시 보편적인 본질을 찾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이런 태도 변환을 후설은 판단중지 에포케.(epoche)라는 말로 풀이합니다. 에포케(epoché, epokhế, εποχη)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판단중지(判斷中止)를 뜻하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의 에페케인(삼가다·멈추다)에 유래합니다. 회의론자는 어떠한 생각에도 반론(反論)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을 중지해야만 한다고 하여 이를 에포케라고 불렀습니다.
후설의 현상학에선 일상적인 관점, 즉 자연적인 태도를 괄호 안에 넣어 멈추도록 함으로써 순수한 체험, 순수한 의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두고 현상학적인 에포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세계로부터 현상학적인 본질 또는 세계에로의 현상학적 환원의 한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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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든 지식의 기초로서의 현상학
후설의 사상을 보면 그 이전의 여러 가지 선배 사상가들의 사상이 녹아 있습니다. 우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칸트가 말하는 지식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비슷합니다. 그래서 후설은 자신의 철학을 칸트와 마찬가지로 “인식비판”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성비판”이라는 용어도 칸트와 같이 사용합니다.
그 다음은 피히테의 지식학 개념을 가져옵니다.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 science of knowledge, Wissenschatslehre을 모든 과학의 토대를 주는 기초학문으로 정의를 했는 데 이것이 후설의 철학 개념과 일치합니다.
즉 내재과학을 통해서 초월과학을 정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연적 입장의 학문이라는 언어를 가져옵니다. 자연적 입장의 학문은 소위 자연적 태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 태도란 모든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 태도입니다. 보통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취하는 태도입니다. 즉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삼라만상이 다 내 주변에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입니다. 모든 여타 과학들도 모두 자연적 태도 위에서 성립됩니다. 이런 자연적인 태도에 환원이 가해지면 철학적 태도 혹은 현상학적인 태도로 바뀝니다. 이를 후설은 태도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현상학자 역시 자연인이기 때문에 보통은 자연적인 태도로 살아갑니다. 단 그가 철학을 연구할 때는 환원과 타도 변환을 통하여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즉 위에서 말한 내실적 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술 비슷하지만 우리들도 이를 해볼 수 있습니다. 일체의 존재 정립을 버리고 현상으로서 사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나름의 현상학적인 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꼭 철학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이나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색즉시공 일체유심소조의 태도로 세상을 한번 바라보기를 추천합니다. 이런 것들이 실은 현상학적인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내실적 내재를 만나는 것이 현상학의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후설에 의하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질직관 (Wesenschau or intuition of essence)으로 나아 가야 합니다.
환원을 시행하더라도 현상들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실적 내재 역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 그 변화와 흐름이 의식 안에 있다는 것이 환원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철학자는 혹은 우리는 개체적인 현상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의미의 초월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식의 흐름 즉 체험류를 구성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이런 본질은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혹은 선천적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현상과 거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본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음악과 미술 혹은 음조와 색채 등이 있습니다. 현상학은 본질학으로 규정됩니다. (6)
8). 지향성 분석을 통한 연구 영역의 확대
지향성(指向性)은 후설 철학의 기본적 주제의 하나입니다. 그는 이를 그의 스승인 브렌타노로부터 빌려 왔습니다. 브렌타노는 세계를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으로 나누고 심리적 현상의 분석을 통해서 무전제(無前提)의 학문을 정초하려고 했습니다. 브렌타노에 의하면 심리현상의 본질이 지향성입니다. 지향성이란 심리현상들 예를 들면 지각, 상상, 판단, 소망, 욕구, 감정 등은 항상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설은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더 넓게 정의합니다. 즉 모든 대상 관련적인 의식활동을 지향성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심리현상 중의 하나인 지각 (perception)의 경우 지각된 것은 실은 외부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각과 나머지 심리작용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상상이나 기억 같은 경우 그 작용은 활발하지만 그 대상은 현실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것은 예술가들, 미술가들의 경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물리적인 사실과 심리적인 사실이 구분이 안 될 수 있습니다. 또 물리적인 사실도 실은 심리적인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외부 세계 역시 사람의 눈,귀,코 등을 통하여 파악된 것이고 더 나아가서 의식도 참여한 결과입니다. 또 눈으로 보는 것도 사실을 그래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원근법이 있습니다. 먼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것은 크게 보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상과 객관적인 현실은 다릅니다.
후설의 지향성 개념은 외부 세계를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지향적 대상이 환원의 영역 즉 내질적 내재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후설은 빨간색의 예를 들어 지향성과 환원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우선 개별적인 빨간 색을 봅니다. 이는 물론 초월적인 즉 내 밖에 있는 어떤 빨간 색을 가진 물건일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빨간 탁상 시계를 봅니다. 여기서 환원을 합니다. 즉 그것이 내 밖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상으로 봅니다. 후설의 용어로는 초월적 정립을 배제합니다. 이는 달리 말해서 빨간 외의 모든 것을 배제함을 말합니다. 즉 시계와 빨간 색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빨간 색 일반을 생각합니다. 즉 빨간 색의 종개념을 획득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설의 말을 따르면 빨간 색의 내재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향성과 환원이 연결된 경우입니다.
사실 후설의 본질 직관은 내용을 보면 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이론 theory of abstraction 과 유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이론은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자를 획득하는 인식론적 과정, 혹은 사물의 특정한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관련이 없는 측면들을 무시하는 주관적인 심적 작용을 말합니다. 가령 소크라테스 라는 구체적인 인간에서 그의 특별한 개성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란 보편적인 규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코는 들창코입니다. 들창코란 콧구멍이 다소 위로 향한 코입니다. 여기서 위로 들렸다는 특성을 제거하면 그냥 코 라는 넓은 개념이 나옵니다. 즉 특정 조건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종적인 본질을 얻습니다. 이런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抽象)이론입니다. (7)
후설의 본질 직관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직관이라고 해서 무엇을 보고 즉시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철학적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결과가 나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후설 자신도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이념화 하는 추상이란 말을 합니다.
“이념화하는 추상은 우리에게 통찰적 보편성과 종(種)과 본질을 주며 (...) 따라서 우리는 직관을 통하여 인식의 보편적 대상성을 보편적 의식으로 고양하여야 하며 그리하여 인식의 본질학이 가능하게 된다”. (현상학의 이념 344쪽)
이런 면에서 볼 때 후설이 말하는 본질 직관의 길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직관을 통하여 보편적 대상성을 보편적 의식으로 고양해야 비로소 학문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그리고 그 세부적인 내용은 또 엄청난 연구가 필요합니다. 가령 소리, 믕악, 빛, 색깔, 언어, 문장, 의미, 숫자, 논리적 명제 등등 실로 방대한 연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도 판단중지와 환원을 통해서 세상의 대상에 대한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8)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
요약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함에 따라서 철학과 인문학은 점점 그 지위를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이 현상학이란 학문을 일으켜 철학의 르네쌍스를 가져왔고 그 이후 후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하이데거, 싸르트르 등의 소위 실존주의 철학이 한 세대를 풍미했다. 현상학은 근대 관념론의 계보를 잇는 철학으로 무전제(無前提)의 학문 그리고 엄밀한 학문을 표방함으로 해서 거대한 과학의 물결에 맞서는 다윗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후설의 현상학은 심리주의와 논리주의를 종합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즉 철학을 인간의 심리현상으로 보는 브렌타노의 입장과 논리적인 것은 심리적으로 치환될 수 없다는 프레게의 입장을 처절한 논리분석을 통해서 후설은 종합하고 심화하고 있다. 무려 5만 페이지에 이르는 그의 철학적 연구는 타의 모범이 되고 있다. 후설의 노력은 과학 만능, 기술 만능, 물질 만능주의 풍조에 맞서서 철학을 지켜서 결국 인간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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