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지진과 일본의 만주 침략
1) 재한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의 생활
1904년, 러일 전쟁의 승리 이후 농업이민 정책으로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가 증가하여 재한 일본인 수가 1936년에는 60만 명, 1942년에는 75만 명이 넘어섰다.
한국에 사는 일본의 거류민은 야마구치 현과 후쿠오카 현 출신자가 많았는데 이 들이 증가하자 거류민단과 거류민회가 설치되었다.
서울을 포함하는 경기도와 부산을 포함하여 경남 지역에 일본인 전체의 40~50%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관리나 경찰, 무역상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목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독자적으로 일본인 거리 명을 만들어 명동(本町, 혼마치), 을지로(黃金町, 오곤죠) 등 일본식 지명을 붙였다. 그리고 각지에 신사(神社)를 새로 지어 일본인 사회의 정신적 통합의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재한 일본인의 40%를 차지하는 총독부 소속의 공무 종사자는 지배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갑질 행정을 자행하기가 일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인의 빈곤과 열악한 생활환경 등이 강제통치에서 나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안했다.
심지어 행정 말단의 경찰조차 농민의 생활을 통제하였고 학교 교장과 교원은 착검을 한 채 강압적인 일본어 보급과 한국인의 일본 동화교육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1910년대에는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자신의 가족을 불러들여 숫자가 증가하였다. 이는 총독부가 실시 한 토지조사 사업으로 토지를 잃었고 동양 척식회사의 경제수탈로 농촌을 떠나는 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회사령을 제정하여 한국의 상공업 발전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기에 국내에서 노동력을 흡수할 만한 수요가 없어 일본에서 계절노동자로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자 대도시에 공장들이 건설되어 노동력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한국인 노무자의 일자리 찾기를 위해 일본 이주를 자극하여 1920년에는 재일 한국인이 약 3만~4만 명에 달하였다.
또한 1920년 초에 시작한 일제의 산미증식 계획으로 한국에 증산된 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의 쌀을 일본에서 강제로 반출해 갔다.
일본이 한국에서 반출해 간 쌀의 양은 1912년에는 50만석 정도 이었다가 1924년에는 472만석, 1926년에는 543만석, 1928년에는 741만석으로 각각 늘었다.
그러다가 1930년에는 543만석으로 잠시 줄었으나 1931년, 만주사변 발생 시에는 쌀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서 840만석이나 되었다.
이 때문에 쌀값의 등귀 현상으로 생활난에 빠진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어 1930년 대 말에는 재일 한국인 수가 90만 명을 넘어서서 재한 일본인의 수를 넘어 서게 된다.
재일 한국인들은 취업차별, 거주차별 등으로 1920년대 까지는 건설공사 현장의 육체 노동자, 방적 공장의 직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사카 등 대도시에는 한국인이 집거하는 지역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한국 요리점이나 식재점, 한국의류, 잡화 등 가게가 생겨나고 가내 제조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재일 한국인 중에는 특히 일본 유학생들이 한국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인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며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본 유학생 윤동주>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윤동주가 진학한 릿쿄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유학 초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교토의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렇게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윤동주의 유해는 1945년 3월 6일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정부는 윤동주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2) 관동 대지진 발생과 한국인 대학살
1923년 9월 1일, 낮에 일본 관동(関東, 간토)지방에서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는데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거의 폐허로 만들었다. cf. 천재지변(An Act of God)
그 외 간토지방 전역과 시즈오카(靜岡), 야마나시(山梨) 두 현(縣)에도 큰 재해를 가져왔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전소된 가옥이 약 57만호, 사망 및 실종자 약 14만 명 등 총 피해액이 약 65억 엔에 달하였다.
이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영향이 컸다. 더구나 제 1차 세계대전 후 경제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재난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경 대지진 발생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민심과 대지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와 경무총감 아카아케 아쓰가는 인위적으로 위기의식을 조성하고 대지진의 화풀이로 재일 한국인을 희생물로 삼아 흐틀어진 민심을 돌리려는 수작을 공모하게 된다. 일본 육군과 경찰은 관공서를 통해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라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된다.
또한 관공서 내부적으로 유언반(流言班), 지휘반(指揮班), 실행반(實行班)등의 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런 후 방화, 독극물 투입, 투탄(投彈) 등의 테러 행위를 감행시켜 마치 불량선인들이 자행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민심의 불안이 극도에 도달한 이날에 내각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자 한국인 폭동에 일본 정부의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 보복책을 쓰게 된다. 각 지방별로 자경단(自警團, 민족 배외주의자)을 조직하였고 군경과 이들 자경단에 의한 한국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동경대 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학살된 한국인의 수를 2534명으로 축소하여 집계했으나 우리나라 김승학은 ’한국독립 운동사"에서 6066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 후 일본은 제도부흥 심의회(帝都復興審議會)와 부흥원(復興院) 등을 설치하여 재해복구에 노력했다. 그렇지만 조선인을 무고하게 학살한 일본 군벌의 잔악한 행위는 세계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된다.
한편 관동 대지진 및 한국인 대학살 후 이들의 분노를 무마하려고 ‘내선융화(內鮮融化)’ 정책을 실시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내선협회 등이 일본 내 한국인 집거지에 조직되었다. 1925년에는 재일 한국인도 부분적인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허지만 재일 한국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보다는 일본정부의 의도대로 일본인과의 융화친목을 목적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주거 개선이나 임금격차 등의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분쟁은 계속 일어났다.
3) 만주 장작림의 배역과 한인 애국단원의 의거
<마적단 장작림의 독립군 토벌 협조>
조선총독부와 1925년 6월 11일에 당시 중국 만주를 장악하였던 군벌 장작림(張作霖,장쭤린)은 총독부의 조선 경무국장이었던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삼시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였다.
일본 관동군은 마적단 출신 장쭤린을 포섭하여 만주 항일운동을 하던 한국인 항일 무장단체를 공격하도록 이용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즉 일본군과 중국 만주 군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 측에 인도하였다. 이 바람에 독립군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점차 조선 혁명군 및 한국 독립군 들이 계속 조직되어 일본군과 대항하였다.
한편 만주 철도권을 얻는 과정에서 장쭤린이 일본군에게 사용권을 거부하자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를 마감하고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1928년 6월 4일,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북경에서 심양 행 열차를 타고 있던 장쭤린을 심양 부근의 황고둔 역에서 기차 차량을 폭발시켜 사망시키고 만주지역에서의 군사적 지위를 확보한다.
만주에서는 일본인이 세운 만주국(1934년 3월 1일)에 반대하는 반만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재만 한국인은 중국인이 지도하는 동북 군(東北軍)이나 비밀 결사대가 운용하는 적색 유격대(赤色遊擊隊)에 들어가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인 민족주의자가 지도하는 독립군에도 참가하여 중국인과 공동전선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일본의 만주침략과 한국지배에 대한 무력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인 애국단의 의거>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서 일본의 주요인물을 암살하려는 목적으로 1931년,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이 있었다.
한인 애국단 소속의 청년들은 한국 독립의 기운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고위직 인물을 암살하는 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수장으로 있는 한인 애국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본천황과 일본군 사령관을 암살하려 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를 들 수 있다.
먼저 이봉창(李奉昌, 1900년~1932년) 의사는 1930년 12월에 중국 상해로 가게 된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백범 김구(金九)가 자신이 조직한 애국단에 가입시켜 그의 소신대로 일본 천황 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일본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사쿠라다몬(桜田門) 경시청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때 이봉창 의사가 천황이 탄 마차를 향해 과감히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비공개 재판으로 사형판결을 받고 결국 1932년 10월 10일에 도쿄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카이(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 당하였다.
한편 윤봉길(尹奉吉, 1908년~1932년)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출사표를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31년에 윤 의사 역시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 후 상해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폭사시키기로 결심한다.
1932년 4월 29일, 일본군 사령관과 그 일행을 제거하기 위해 상해사변의 승리 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虹口) 공원에 위장하고 들어간다. 거기는 천황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기념하고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을 축하하는 전승 축하연 자리였다.
윤 의사는 축하 모임단상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난징 대학살을 주도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를 즉사시킨다.
그 외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 중장은 파편에 맞아 실명되었고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 중장은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혔다.
또한 시게미츠(重光) 공사는 다리부상으로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무라이(村井)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부상을 입게 된다.
한편 1932년, 중국 상해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시켰으며 중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지원받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약속하였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 감복 받은 장개석 총통의 협조로 광저우의 황포 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한국인들이 입교하여 군사 및 간부교육을 받게 된다. 또한 장개석 총통은 중국 남경 육군 중앙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여기서 한인 군사간부들이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 그 후에 조선 의용대와 의용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윤의사의 희생으로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다시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년 5월 25일, 상해에 파견된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었다.
그런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 설치 된 십자가 형틀에서 총살되어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4)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및 전쟁 수탈정책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일본에도 쇼와(昭和) 공황으로 파급되었다. 일본이 만주, 중국을 연결하는 경제 블록의 형성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한국도 그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1931년 6월부터 농공 병진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농촌 진흥운동은 한국농촌을 자립적으로 재건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식량 공급을 충실히 하고 농가 가계를 안정시킴으로써 농가 부채를 상환시키려는 목표를 내세웠고 근면성 함양을 겨냥한 심전 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후 조선 총독부는 1930년대 한국 북부의 개발을 통해 공업화 정책은 추진하였다. 일본의 자본을 한국으로 진출케 하여 농촌피폐로 떠난 사람들을 노동력으로 고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함경남도 흥남에서는 화학 질소비료공장(1927년)과 유지화학, 경금속 공장을 다수 설립되었다. 압록강 수계에서는 수풍 댐(1937년 10월 착수~1943년 11월 완공)과 발전소가 만들어져 값싼 전력이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이들 중공업 관련 공사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서 북부로 노동자가 이동하였다. 그런데 이런 공업화는 일본인 자본의 진출과 한국인 노동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바탕으로 추진되었다.
일제는 1931년 7월 2일에 일어 난 만보산(萬寶山, 장춘 교외 위치)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 만주에 이주한 한국 농민들과 중국인 사이의 수리권(水利權, 하천의 물을 계속적이고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권리)을 놓고 대립시키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공격한 것으로 일제가 언론을 조작하여 의도적으로 보도하게 만들었다. 이에 국내에서는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분노하여 인천의 중국 화교를 습격하여 총 127명 사망, 400여명이 부상을 입게 되는 일이 터지게 된다.
중일 양국의 대립에서 일제가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과 조선에 거주한 중국인들을 서로 이간질 시켰던 것이다. 한중 관계악화를 통해 만주 침략에 이용하였는데 양 국민들은 일제 침략에 휘말려 든 주된 피해자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봉천(奉天, 펑톈) 부근의 류조호(柳條湖)에서 만철 선로를 폭파하였다.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날조 한 후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한편 국내 최초로 1932년부터 서북지역의 평양을 중심으로 신사참배(神社參拜) 행위가 강요되었다. 그래서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해 각지에서 일본 건국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였다.
만주사변이 계속되자 한반도는 만주침략의 기지이자 일본과 만주를 잇는 중계지 역할을 하였다. 즉 청진 이북의 한국철도는 남만주 철도사업으로 이관되어 한국과 만주의 경제적 결속이 강화되었다. 1933년에는 신경(길림)과 도문(투먼)을 연결하는 경도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곳에서 니가타 혹은 쓰루가 항으로 이어지는 일만 신교통로(日滿新交通路)가 만들어졌다.
한편 1934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 마지막 푸이(溥儀)를 원수로 임명하고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 1932~1945년)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극동의 워싱턴 체제를 적대시 하였다.
또한 일본은 세계 경제 불황으로 한국의 값싼 쌀이 들어와 일본 쌀값 폭락을 반대하여 1934년에는 산미 증식계획을 중지하였다.
여기서 일본 국내에서 일어 난 사건을 살펴보면 1932년에 혈맹단 소속의 해군 장교를 중심으로 5.15 쿠데타 사건이 발생하여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암살되었다.
그 후 1936년에는 육군 장교들이 당시 사이토 마코토 수상을 살해하는 2. 26 쿠데타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하여 정당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군 장교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급속히 대두되어 군인 주도의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1936년에 미나미 지로(南次郞) 관동군 사령관이 제 7대 조선총독으로 오면서 황국신민(皇國臣民)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전쟁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내걸었는데 “한국인은 일본인과 한 몸이 되어 전쟁에 흔쾌히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7년에는 루거우차오(盧溝橋, 베이징 부근)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을 감행하였지만 중국의 저항으로 장기화되었다.
5) 제 2차 국공 합작과 난징 대학살
일본이 하북, 산서, 하남 성을 관할하는 자치정부의 수립을 이끌어내자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더욱 거세지 진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 군대의 공격으로 2만 5천리 대장정 퇴각을 단행한다. 이는 1934년 10월, 쟝시성 루이진(瑞金)을 탈출하여 1935년 10월, 산시성 옌안(延安) 북쪽 우치까지 진행된 행군이었다. 대장정을 잘 마무리한 후 전열을 정비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게 된다.
한편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 직후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3월,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중국의 영토인 만주를 사실상 장악했다. 그리고 중국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시켜 일제의 탄압정치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항일전선이 진행됐다. 중국 국민정부의 대원수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자신의 부하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산시성에서 연금된 시안사건(1936. 12. 12~25)이 발생하였다.
장제스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져 국공합작이 기대되었다.
1937년 7월에 시작된 중일전쟁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대륙을 침략해 나간다. 같은 해 11월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자 국민당 정부는 일본을 피해 우한으로 이동한 후에 다시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긴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오지에 충칭 정부를 세우고 공산당의 변구(邊區) 정부를 포위할 태세를 취하였다. 반면에 중국 공산당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의 배후에 항일 근거지를 확대해 갔다.
<제 2차 국공합작>
1937년 9월 22일, 마침내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손을 잡고 제 2차 국공합작(國共合作, 1937~1945)이 성립되고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연합하기로 결정한다.
국민당 장제스는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공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공산당의 주장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정치범을 석방하였으며 1938년에는 일종의 민주의회인 국민 참정회를 설치한다. 여기서 국민당 일당 독재에서 벗어나 공산당을 비롯한 다른 당파와 각계인사들을 참여시키게 된다.
같은 시기에 공산당은 토지개혁의 중지, 소비에트 정부 해체,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방정부로 편입 등을 골자로 하는 국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중국 노농홍군(勞農紅軍)을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과 국민혁명군 신편 제 4군(新四軍)으로 재편해 일제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해 나가게 된다.
<난징 대학살>
국민당 정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민중들은 자력으로 항일 자위조직을 만들어 일본군에 대항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군을 잃은 양민들은 그 사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을 통한 군사적 승리는 소위 ‘난징 대학살’(1937.12~1938 2)로 이어 지었다.
난징 대학살의 일본군 만행은 미국 뉴욕 타임스 기사 “야만적 잔혹행위, 포로들의 대량학살, 강탈, 강간 및 양민학살로 일본민족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다”는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 살해된 사람만도 비전투원 1만 2천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등이고 근교로 피난 간 시민 5만여 명 등 합계 13만여 명이 2개월 동안 살해되었다.
난징 학살 후 우선 일본의 무력 침략이 본격화되자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학생, 노동자들에 의한 시위와 파업과 대중 집회가 개최된다. 여기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결의하고 국민당 정부에 대한 철저한 대일 항전을 요구하게 된다.
당시 대륙을 통치하던 국민당 정부의 미약한 움직임을 비판하고 일본 침략을 막아내고자 민중의 대일 선전포고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다.
6) 일제 전시동원 체제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생
<전시동원 체제 구축>
전쟁이 확대되어 사상자 증대로 많은 군인이 필요하게 되자 일본에서는 1938년 4월 1일, 국가 총동원 법에 의해서 전시동원 체제를 만들게 되었다. 특히 1938년에 조선 총독부도 전시동원에 편승하여 내선 불평등의 철폐 등의 구호를 동원해 ‘육군 지원병 제도’를 시행하였다.
1938년 8월, 일제는 ‘제 3차 교육령’을 시행하여 사상적 동화 정책을 펼쳐 한국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는 교육정책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강요로 1938년 9월 9일, 평양 장로교 ‘서문 밖 교회’에서 진행된 총회에서 친일파 목회자들에 의한 신사참배를 합법화하는 결의가 행해졌다.
이 때 주기철 목사 등 일제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여 순교한 자들도 있었다.
<주기철 목사와 순교 사건>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낮은 곳을 사랑한 조선의 기독교인
1936년 양주삼 초대 총리사가 신사참배 수용을 선언했고 1938에는 최대 교파라 할 장로교마저 무릎을 꿇는다. 전국 27개 노회 대표 목사 27명이 단체로 신사참배를 강행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기독교가 2천년을 흘러온 것은 그렇듯 권세에 영합하고 굴종하는 대세에 거스르는 정의파들이 꼭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다. 그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이 가르치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했지만 몸이 안 좋아 낙향했고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기도 한다. 이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됐고 고향에서 목회를 하다가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 중 가장 빛나고 가장 혹독했던 시간이 열린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신사참배 반대를 선언했다. 이 정도 되면 일제의 눈엣가시가 아니라 눈에 뿌리를 내린 나무 같았을 것이다. 일제는 툭하면 주기철 목사를 잡아가둔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에 찬성한 평북노회장이 심은 기념 식수를 도끼로 베어버리자 주기철 목사를 잡아들였고, 경상북도 의성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기독교인들을 일망타진할 때에도 그 배후 혐의로 먼 평양까지 찾아가 주기철 목사를 끌고 왔다.
의성경찰서에서 풀려나와 그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산정현 교회 강단에 올라 남긴 설교는 한국 기독교사에 남는 명설교일 것이다. 일제는 다시 주기철 목사를 투옥했다. 이제는 친일 기독교 노회까지 가세하여 주기철 목사를 목사 에서 파면 처분하고 가족들까지 목사 사택에서 내쫓는다. 하지만 교회 교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기철 목사 가족이 살던 집 담 너머로 곡식이며 먹을 거리들을 던져 넣었다. 가족들은 그걸 ‘만나’라 불렀다고 한다.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는 마지막 면회를 한다. 형무소장은 병보석으로 석방해 주겠다고 하지만 아내는 그를 거절한다. “당신은 승리하셔야 합니다. 살아서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주기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형무소 안에서 죽겠다고 말한다.
한편 일본정부가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1939년 7월, ‘국민 징용령(國民徵用令)’을 결정하여 모집 및 알선 등으로 한국인을 모집하였다. 그 후 일본, 동남아시아, 사할린 등지에서 위험한 일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72만 명이 동원되었다.
전시 동원정책에 의해서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들은 탄광, 광산, 토목공사 현장, 공장 등에 배치되어 열악한 시설에 수용되어 집단생활을 하며 중노동을 하였다.
산악지대 댐 건설이나 철도부설 등 노동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사망하거나 중부상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아무튼 중일 전쟁이후 재한 일본인 가운데 농어민은 감소한 반면 광공업 종사자가 급증하였는데 상업과 교통업은 비대화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생과 일제의 최후 발악>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는다. 일본은 석유, 고무 등 군수물자를 얻고자 인도차이나로 침략해 들어가게 되어 미영 등과 군사적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의 지하자원을 공출하고 식량을 수탈하는 등 한반도를 군수 공업기지로 재편성하여 군사 병참기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총독부는 전쟁이 본격화 되자 물자수탈도 강화하여 모든 금속제품을 강제로 바치게 하였다. 특히 농기구, 각종 그릇, 제사 용구 등을 징발하여 전쟁무기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전쟁 군인들의 군량확보를 위하여 산미증식을 재개하였으며 식량 배급을 실시하고 미곡 공출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군량미 조달을 위한 한국으로부터의 강제적인 공출에 대한 통계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한국의 총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 63.8%(1944년)로 매년 증가하였다.
내선융화 사업은 경찰서를 단위로 1938년에 협화회(協和會)가 만들어지고 1939년에는 중앙 협화회가 만들어져 재일한국인의 황국 신민화 및 전시동원 정책을 담당하였다. 또한 1939년 11월 10일,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강제로 추진하였는데 일제가 제령(制令) 제 19호로 조선인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관한 건을 공포한다.
그 후 1940년 2월 11일에 시행에 들어가 6개월 안에 의무적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이는 징병제 실시에 대비해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착취와 동원을 손쉽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만일 이를 어기면 학교 입학이 거부당하고 행정 사무를 못하게 하거나 징용 대상으로 가게 하였다.
한편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충칭(重慶)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중국 우한(武漢)에서 창설하고 194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였다. 또한 좌파 독립운동 청년들로 구성 된 조선 의용군(대장 김원봉)을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좌파 단체인 조선민족 혁명당을 끌어들여 역량을 강화하였다.
일본이 말레이 반도 등 동남아를 공격하고 1941년 12월 7일에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으로 공습하였다. 이로써 미국과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자 임시정부도 일본에 즉각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2년에는 한글학자들이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였다는 이유로 이들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조선어 학회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여성 정신대 사건>
1943년에는 일제가 해군에서도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고 1944년 8월 23일, 일왕 칙령 제 519호인 ‘여자 정신대 근로령(女子挺身隊勤勞令)’이 공포되었다.
한국여성 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14세부터 40세까지 동원되었는데 처음에는 일본의 군수공장에 노동여성으로 충당되었다.
이 중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서 일본군인, 헌병의 군대 위안부로 배정되어 인간 이하의 성노예로 혹사시켰다.
일제가 강점기에 자행한 강제 인력수탈의 한 형태로서 모집한 정신대(挺身隊)는 원래 국가목적에 몸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는 부대라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농촌 정신대, 보도 정신대, 의료 정신대, 근로 정신대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뽑았었다.
최초 조선 여자들에게 직업을 구해준다는 명목으로 속여서 정신대를 뽑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국가 조직적으로 정신대 요원들을 선발하여 대부분의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소로 배정하였다. 그 후에 집단적인 군대 위안부 역할을 시켰던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초기에 위안부는 일본에서 직업여성을 데려다 썼지만 군대수요가 너무 많았다.
이 때문에 결국 한국인 정신대 여성들이 일본군 인들을 위한 위안부로 이용하여 이들에게 크나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젊은이 들이 전쟁으로 죽어가는 통에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반면에 한국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임신가능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집단학살(Genocide)을 시키려는 일제의 음모로 보는 주장도 있다.
<학도병 징집 사건>
일제는 1943년 10월, 대학총장 등 친일파 지식인들을 먼저 유인한 후 이들의 권유에 의해서 강제로 한국인 대학생들을 ‘학도병(學徒兵)’으로 징집하였다.
당시 한국인의 문맹 율은 아주 높아서 한글을 아는 자도 부족한 지경이었는데 대학생의 경우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단히 학력이 높았다.
그래서 이들 대학생들은 해방 이후에 한국을 이끌고나가야 할 차세대 국가 지도자급의 인재 수준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 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총알받이로 죽어 감으로써 당시 한국의 인적자원의 손실이 대단하였다.
학도병 신분으로 일본이 벌이는 동남아 등 오지의 전쟁터로 끌려 가 일본 소총부대의 말단 소대원으로 편성되었다. 나중에는 이들 한국의 엘리트 급 수많은 학도병들이 인간적인 대접도 못 받는 비참한 병영생활의 차별 속에서 있다가 일본군 대신 적의 총탄에 맞아 사라져 갔다.
이는 한국의 독립을 막기 위해 고급 인적자원을 의도적으로 소멸시키려는 일본의 계책에 친일파 지식인들이 미련하게 말려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