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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면 소재지는 용암골 들머리 雲谷이기 때문에 덕암골 와요마을로 가자면 읍내쪽으로 되돌아 나와서는 십리도 더된다는 깊은 골로 들어가야 한다.
옛날에는 행정구역상 용암.덕암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가 1913년 일제강점기에 두 면이 통폐합되어서 「용덕」으로 바뀐 것이다. 덕암골 중간 못미친 지점에서 남행으로 앉은 와요마을이 있는데 동네옆에 희귀한 팽나무와 느티나무, 큰 소나무가 어우러진 긴 숲이 돋보인다.
연세 높은 어른들은 「왜우」「왜요」로 부르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을 종합해 본건대 원래의 소지명은 「와요골」즉 여러개의 기와 굽는 굴이 있었던 곳이라 추정된다. 아부(瓦釜)를 「왜부」로, 와요(瓦窯)를 「왜요」로 발음하는 예가 허다할 뿐 아니라 마을 주위 산자락이나 밭언덕에 기왓굴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매미골」동쪽 산밭을 일굴 때 기와조각이며 굴의 벽으로 보이는 흙담이 보였다는 것이며 또 옛날 부싯돌을 캐냈던 「뒷등먼당」옆 산골짜기를 「가무골」, 어떤이는 「 가모골」이라 발음하는 걸보면 그곳이 「가마골」의 변음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지명에 대한 유래로 다른 견해도 있다. 이 동네 뒤쪽 산세가 큰 소가 드러누워서 송아지에게 젖을 빨리고 있는 와우지혈이라 본디 「와우」였던 것이 「와요」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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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두가지 가설을 놓고 생각해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가 훨씬 설득력이 더함을 느끼게 된다. 이 골안의 토질이나 입지적 조건으로 보아 오지그릇이나 기와를 굽는 와부가 여러군데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행정구역의 일제정비를 하면서 쓰기 어렵고 민족정서와 관련된 글자는 모두 쉬운 글자로 바꾼 예가 허다한 것이다. 이 마을이름도 「가마요(窯)」가 스기도 어려울뿐더러 사용빈도가 적으니 엉뚱한 「구할요(要)」를 붙였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기왓굴도 찾아 볼 수 없거니와 지명의 유래를 아는이도 다 떠나버린 터라서 향토사의 정리 또한 난감한 상태다.
이 동네도 재미있는 땅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맨 밑 골짜기라고 「메미골」과 「메미골재」, 동네 뒷산이라서 「뒷등먼당」이며 그옆 산골어귀에서는 불이 잘나는 부싯돌이 묻혀 있어 그 돌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쓰는 라이터의 할아비격인 부싯돌을 못만져본 사람이 더 많으리라. 또 마을뒤의 산자락 밭이라 「바두(밭우.밭위)」또는 「밭웃갓」즉 밭위의 산이란 뜻이다. 「도갈골짝」「도갈들」「도갈껄」은 옛 술도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골이름.들이름까지 「도가→도갈」이 된 것이다. 「찬물새미」는 7년 대한 가뭄에도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들샘이었는데 한여름이면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었다고 한다. 마을앞의 큰들이며 앞들, 낮은 지대에 들어앉았다고 「굼들」,숲아래쪽의 논밭은 「숲밑들」, 큰바위가 서있는데 釘같이 생겼으니 「정바구들」이라 부른다. 앞선 너머가 가례 괴나리가 되는데 산고개 이름이 「생이고개」다. 옛날 이 동네에서 초상이 나면 대부분 이고개 부근 산에서 묘를 썼던 탓에 상여가 자주 오르는 탓에 상여고개라 그런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골마을에 들어와서 살사람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덕암골하면 골안으로 갈수록 논밭값이 비싸서 골논 한마지기 팔면 강변 들논 두마지기를 사고도 남았다는 얘기도 있으니 사람 살기 좋았던 곳이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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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이야기는 이마을 주위 일대는 모두 밭이었고 논이 귀했던 곳이라서 참새 두 마리가 이 동네에 왔는데 한 마리는 곡식 낟알 몇 개를 먹었지만 한 마리는 허탕치고 울면서 날아 갔다는 재미있는 속언이 전해오는 곳이다. 척박한 땅에 농사가 잘 안되던 지역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인것도 같다.
어쨌든 이 마을을 둘러보면서 瓦匠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설화나 민요를 얻으려 애썻지만 허사였다. 가장 먼저 들어왔다는 김해허씨가 지금도 28집으로 대성이고 주인인셈이다. 신덕산의 큰줄기 자락에 형성된 동네라 허씨재실도 新德齋다.
鄭씨 6집, 田씨 3집에 이,차,황, 구,양시도 한두집씩 남아 있다. 마을건너 안산먼당에 장군메(장군묘)라는 큰 고분이 있고 20여년전 우연히 토기류 몇점이 발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확인해보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사 대동이었제. 인자 늙은 무지렁이만 처져 있는기라. 이래가지고 농토가 우찌 될긴지 농촌은 다 망하는기라.」촌로의 한숨석인 독백, 오늘의 농촌모습 그대로다.
첫댓글 행정구역으로 미곡과와요는 와요리로 통합되어있는데 와요도 참좋다
와요? 와요? 반발심 조로 말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마을 이름이라 모르는 이에게 한번만 갈카줘도 잊지를 않지요.
와요라는 이름이 그냥 생긴것이 아니라 전자든 후자든 상당한 설득력이 있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