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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1)
임광자 추천 0 조회 276 08.05.15 23: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1) 이길상

19.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제국(1)                   이길상

알라의 영광인가?  황량한 사막에서 왠 석유가...우리들이문화적인 측면에서 지역을 구분할 때, 흔히들 쓰이는 것이 공통의 문자와 종교가필수적으로 따르며, 그 외에 제도와 관습을 첨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랍내지는 이슬람문화권이라고 하는 것은 아라비아어와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포괄적인 의미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분류로 본다면 이슬람문화권내지는 아랍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은 서 아시아의 대부분과 중앙아시아 일부, 그리고북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발칸반도 일부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필리핀의 일부가 여기에 해당되는 매우넓은 지역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지역을 막론하고이들의 문화적인 혜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단 적인 예가 아라비아 숫자로서,2진법이든, 12진법이든, 60진법이든 간에 이 편리한 숫자가 없으면, 더하기도 빼기도나누기도 곱하기도 할 수 없으며, 한다 해도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한글학자들도 한자가외래문자라 하여 한글 전용운동을 펼치면서도 이 숫자에 대해서만은 이설을 붙일수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공통기호가 된 이 문자의 효용성에 대응할 만한 대안이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지역의 역사는 상대적으로아주 빈약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따라서 이 글을 읽는데도 어려움이 많으리라고생각합니다.

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

(1) 천일야화(千一夜話 : Alflaylah wa laylah)

이란계 아리아족이 세운 아키메네스왕조(Achaemendyansty)의 페르시아제국(Persian Empire : 550 ~ 330 BC)이 알렉산더대왕에게 멸망된후,

파르티아(Parthia, 247 BC ~ 226AD)왕국이 일어나 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로마제국과 중국의 중간지점에서 교역로를장악하고, 번성하다가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 208 ~ 651)가 일어나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400년 이상 지배하면서수도 (크)데시폰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고, 특히 호스로1세(531~579)의학예진흥은 동로마학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여 그리스의 고전문화를 계승, 보존하였다는점에서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 아시아는 이란계의아리아 족에서 아라비아의 셈어계로 버튼을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리우스,키루스, 샤푸르, 호루스 등의 이란계의 왕명 대신에, 예언자 마호메트(무하메트),이슬람(모슬렘, 무슬림), 이슬람교, 코란, 칼리프, 술탄 등의 아라비아 용어를 자주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라비아의 말 가운데지명이나 인명등에는 알 아 등이 앞에 붙는데 이것은 영어의 the, a, an, 등과 같은관사(冠詞)라고 생각하면, 그런데로 무난하며, 이름 앞에 이븐(ibn)이라는 말이 수없이나오는데 이것은 성(姓)이 없는 그들 사회에서 그저 "아무개" 혹은 "아무개아들 누구"라고 이해 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우리들에게그 남아 친숙하게 만든 것이 신비(神秘)와 요술(妖術), 문학적인 감미(甘美)와 미지(未知)에대한 동경(憧憬)으로 대표되는 아리비안 나이트(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라고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아라비안 나이트라고하지만 그 사실은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지배했던 여러 왕조의 내용을 함축적으로표현하고 있어서, 문학작품 이전에 이 지역을 이해 하는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천일야화(千一夜話)가 본명인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주요 이야기만도 180편, 거기에 100여 편의 짧은 이야기가곁들여 있습니다. 6세기경 사산왕조 때 페르시아에서 모은 천의 이야기가 8세기 말경까지아랍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며, 여기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다시 많은 이야기가 추가되었고그 후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여, 15세기경 현존의 것으로 완성된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많은 이야기의 작자는한 사람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페르시아에는 인도로부터 많은 설화가 들어왔으므로이 이야기에는 인도와 이란·이라크·시리아·아라비아·이집트 등의 갖가지 설화가포함되어 있고,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영향도 있는 듯하며 그 구성 또한 매우 복잡합니다.

그러나 아랍어와 이슬람 사상으로시종일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천일야화란 천 하고도 하루 밤(1001 夜)의 이야기란뜻인데, 그 주인공은 사산왕조의 샤푸리 야르왕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자청해서 시집간신부(新婦) 셰헤라자데가 당장 내일 아침에 죽지 않기 위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시작하고는 가장 재미있는 대목에 가서는 "오늘 밤은 피곤하니 이만 자고 나머지는내일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인들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내일을기다렸다고 합니다. 요즘의 연속극을 보듯이 밤이 되면 이야기를 하고, 궁금함을남긴 체 이야기를 끊었다가, 다음날 밤에 다시 이야기하고.... 이렇게 해서 천 하루밤을 넘겼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절대권력을 행사한왕이, 아내에게 배신당한 앙갚음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을 증오하여, 신부를 맞이하고는결혼 다음날 아침에 신부를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부의 살인행각은 신부의후보가 없을 때 까지(처녀의 씨가 마를 때 까지) 계속한다고 호언하였다니 누가 왕비되기를바랐겠습니까?

그리고 신부 감을 가진 부모들역시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이 때 셰헤라자데라는 어질고 착한 고급관료의 딸이자진해서 왕의 신부가 되어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왕은 이야기를계속 듣고 싶은 나머지 그녀를 죽이지 않는데 이야기는 1천 1밤 계속되었고, 드디어왕은 종래의 생각을 버리고 셰헤라자데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줄거리입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신드바드라는자가 일곱 번씩이나 인도양에 나아가 갖가지 위난을 극복한 끝에 바그다드의 부호가되는 것을 비롯해서, 연애 이야기·범죄 이야기·여행담·신선담·역사 이야기·교훈담·우화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프랑스의 A.갈랑이 불역판(佛譯版)을 내면서(1703)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없었던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등의 이야기를 아랍어로 번역, 임의로 여기에 삽입하여 서방세계에 알려졌을 때는더욱 신비와 호기심이 더했다고 합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오말 부느안 누만왕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가 전체의 8분의 1을 차지하는데 내용은 우마이야왕조의이슬람 제국과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을 주제로 하고 여기에 많은 연애담과 모험담등을 곁들인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실제의 내용은 샤푸르왕의재세기간을 훨씬 넘긴, 십자군(十字軍)과 이슬람교도와의 격돌 일화, 또는 그 시대의분위기 등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11세기에서 13세기, 혹은 그 이후까지도 이어진다고보고 있습니다. 전편을 통하여 가공의 세계와 실재(實在)의 세계가 뒤섞이고, 인물도역사상 인물과 가공의 인물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실제 인물의 왕으로는 아바스왕조제5대왕인 하룬 알 라시드가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바그다드가 가장많고 카이로·다마스쿠스·바스라 등도 자주 나오고, 동(東)으로는 중국, 서(西)로는이베리아에 까지 미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갈랑 이후 영국인 R.F.버튼이완역(完譯)한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가 나왔고(1885∼88) 이것이 널리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도 번역 본이 나왔습니다.

(2)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半島)

아라비아 반도는 아시아대륙 남서부에있는 큰 반도로서, 북서단~남동단 약 2,200 km. 동서 너비 약 1,200 km. 면적 약300만 km2로서 한반도의 약 14배. 동쪽은 페르시아 만과 오만만(灣), 서쪽은 홍해(紅海),남쪽은 아라비아해(海)와 아덴 만(灣)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사막지대로 중앙아시아에서아프리카의 사하라로 이어지는 대(大)사막지대의 중앙부를 차지하며, 정치적으로는중앙의 사우디아라비아, 북동 쪽의 쿠웨이트, 남쪽의 예멘, 남동쪽의 오만, 동쪽의아랍에미리트·바레인·카타르의 7개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홍해연안을 따라 산맥이 이어져 있으며 남쪽에 이를수록 고도가 높아져 예멘에는 3,760m의 높은 봉우리도 솟아 있고, 이 산맥과 홍해 사이에는 티하마라고 불리는 좁은대상(帶狀)의 저지가 이어져 있으며 혹서(酷暑)와 서열(暑熱)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양 기슭에도 하드라마우트산맥이 동서로 달리고 있으며, 남동쪽 오만에도 아하다르 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해발고도3,000 m가 넘는다고 합니다. 오만과 하드라마우트 사이의 내륙이 룹알할리(Rub' al-Khali:공허지대)라고불리는, 면적 약 65만 km2에 이르는 대사막이 생물의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전개되어 있고, 반도 전체가 큰 대지이며 북 동쪽을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람이 살만한 곳입니까? 열사와 모래먼지는 숨을 막히게할 뿐만 아니라 시력에도 장애를 주어 대낮에도 전조등을 켜고 운행하는 차량을 심심하지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라비아 반도를 예부터3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시나이 반도에서 지금의 요르단 일부를 포함한 아람족의 거점이었던 페르단의 유적이 있는 곳을 바위의 아라비아라고 합니다. 즉 서북쪽에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사이에펼쳐진 소위 시리아사막의 통상 도시 팔미라가 있는 곳을 사막의 아라비아라고 합니다.즉 아라비아 반도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이상의 아라비아는 로마제국과파르티아·페르시아의 세력범위에 있었던 곳입니다.

나머지하나 이른바 "행복한아라비아"라고 하는 곳은 현재의 아라비아 반도로서, 염열과 죽음의 사막으로그 오지는 잘 알려지지 않아 신비에 쌓여 있었습니다. 다만 그 남서부는 강수량이비교적 많고, 일찍부터 여러 왕조가 교체(交替)했는데, 이를 야만(예멘)이라 불렀고,아라비아 말에 "유문"은 행복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래서 행복한 아라비아라는말이 생기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행복한 아라비아"라고불리던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쪽 야만은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영향으로 비가많고, "사막의 아라비아"로 불리는 북쪽은 지중해의 습기가 봄·가을 두계절에 영향을 미쳐 약간의 비를 몰고와 곳곳에 오아시스를 만드나, 대부분의 지역은극도로 건조하여 고대부터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동부 페르시아만(灣)의 연안지대는원래 바다였던 곳으로 그 시대의 식물·동물이 수 km의 깊은 층을 이루며 침전되어세계 제일의 유전지대를 형성하였고, 지금은 그 황량한 땅에 알라의 영광이 깃들여퍼내는 원유는 세계경제를 웃고 울리고 있어서 현대판 알라딘의 램프가 나타나 풍요와영광을 그들에게 선물하고 있습니다.

(3) 아랍 어(Arabic language)

아랍 어란 셈 어족(語族)에 속하는아라비아어를 말하는데, 현재 약 1억의 인구가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서 사용하고있습니다.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의 언어로서, 이슬람교의 전파 지역을 따라 곳곳으로양자를 가서 아랍문화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표현력이 뛰어나고 비교적보수적이어서 매우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다고 합니다.

이 언어에는 문어(文語)로서 고전아랍어와, 구어(口語)로서 많은 방언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고전 아랍 어는 문어로서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담화에도 쓰이는 코란과 고대문학의 언어라고 합니다. 이에비해 일상적 회화에 쓰이는 아랍어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이것을 회화체 아랍어라부른다고 하며, 현재는 문학의 발달과 고등교육의 보급에 따라 점점 고전 아랍어가확대되어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관습적으로 이 언어는 자신의 고유한 문자로쓰여지는데, 이 문자는 이슬람 세계는 물론 그 밖의 몇몇 나라에서도 현재까지 쓰이고있습니다.

나. 이슬람교의 성립

(1) 사막의 신들

아랍 족의 역사를 보려면 그들의본거지를 셋으로 나누어 보는게 편리합니다. 첫째는 야만(예멘)과 하드라마우트(Hadhramaut)등의 남서부로서, 거기에는 사바(Saba : 시바,Sheba) 여왕의 전설로 유명한 사바나(Sabaeans)·힘야르(Himyar)등 몇 개의 왕국이 일어나서 거대한 돌을 쌓아올려 댐을 만들고 관개를 해서 농경을영위하였고, 독특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훌륭한 신전이나 왕궁 등을 세웠던 사실이고고학의 발굴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그 내용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알바디아라고 불린 아라비아의북부, 특히 지금의 시리아 사막이나 요르단 방면에 걸쳐서 페트라의 나바타이 왕국(BC4세기∼AD 1세기), 그 후 팔미라 왕국, 가산 왕국, 라흠 왕국 등의 국가들이, 이른바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로마와 파르티아,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세력다툼에서때로는 이편으로 때로는 저편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동족끼리 싸운 예도 허다합니다.이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하였고 그리스나 페르시아 문화를아라비아에 도입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셋째는 중부 네지드나 서부 헤자즈지역으로 수많은 베드윈족(Bedouin)의 유목 부족이 있었고, 곳곳에 발달된 오아시스에는농경을 주로 하는 定住民들이 잡거(雜居)하고 있어서, 마호메트 이전에 이 지역을통일한 국가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회구성은 부족단위로 되어 있었고, 대개 6개의신분계급이 있었는데, 유목민이 가장 웃자리이며, 농경을 천하게 생각하였고, 노예도있었다고 합니다.

국가적인 보호가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자기 부족에 대한 충성심(아사비아)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절로 발달하였으며,그 이상의 국가관념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주민의 대부분은 다신교도로 메카에있는 카바 신전은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었는데, 이렇게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사회를하나로 묶어서 서로 다투지 못하게 한 것이 메카에서 태어난 아라비아 최대의 인물로추앙받는 예언자 마호메트(570~632)였습니다.

메카는 황량한 민둥산에 둘러싸인 골짜기에 발달한 도시이긴 하나, 그 주변의 많은 험한 산과 동굴, 검은돌(Blackstone)과 소금기 머금은 우물 잠잠(Zamzam)이 있어서, 영험과 기적을 찾아 수많은순례자가 모여드는 성지(聖地)였고,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홍해가 활기를 띄자, 홍해의 항구도시 지다에서 80Km 정도 떨어진 메카 역시 상업과무역으로 번성하여 헤재즈 지방 제1의 도시로의 면모를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따라서 메카는 종교도시이면서,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춘 훌륭한 도시였습니다.

현재도 이슬람의 순례자들이 수없이찾아드는 카바신전(Ka bah)은 마호메트 시대만해도 높이가 사람의 키 정도에 지나지않았고 지붕도 덮지 않았으나 7세기 초에 개축하여 북동 쪽으로 면한 정면과 그 반대쪽은폭 약 12 m이고, 다른 두 면은 약 10 m, 약 15 m정도의 높이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고 합니다.

대리석 기초 위에 회색 돌로 쌓아올렸으며,정면 입구에서 내부로 들어가면 본전에는 나무기둥이 즐비하고, 천장에는 금·은으로된 램프가 매달려 있다고 하며, 동쪽 모서리에는, 지면으로부터 1.5 m 정도 높은곳에 검은 돌(黑石)이 끼워져 있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아담이 천국에서 신과인간과의 계약증거품으로 가져온 것을, 후에 아브라함이 카바를 건설할 때 대천사(大天使)가브리엘(Cabriel)한테서 받았다고 하며, 또 알라신의 손가락 끝이라고 믿는 사람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이이 신전을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 중에는 마호메트 이전에 있었던신체(神體)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또한 운석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고있습니다.

카바 서쪽 모서리에도 흑석과똑 같은 높이의 위치에 복돌(福石)이라고 불리는 돌이 박혀있으나 흑석(黑石)만큼유명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흑석이 있는 모서리의 반대쪽에 잠잠(젬젬)이라고 하는깊이가 42m 정도의 약간은 짠 소금기 머금은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성천(聖泉)이라하여, 위에는 둥근 지붕을 덮었고, 오랜 옛날부터 이 우물 부근이 신성시되어 아라비아인신앙의 중심으로서 카바신전이 세워졌으며, 이 카바신전은 영원성(永遠性)을 맡아보는즈하르(토성:土星)를 제사하였기 때문에 수 많은 변천 속에서도 멸망하는 일이 없었다고합니다.

즈하르 외에도 고대 아랍 인들이가장 숭배했던 신으로는 후바르(Khubar)와 그 밑에 세 여신 즉, 알 라트(al-Lat),알 웃자(al-Uzza) 그리고 마나트(Mannat) 등이 있었는데, 메카의 유력한 집안 코레이시(쿠라이시: Quraysh, Koreish)족은 알 웃자 여신을, 상록의 도시 타이프(Taif) 주민들은 알라트 여신을, 야스리브(Yathrib:현 메디나)의 주민들은 마나트 여신을 각각의 수호신으로받들었고,

이외에도 뇌신(雷神) 쿠자이,사랑과 미의 여신 앗즌, 검은 머리를 한 거인과 같은 알파르사드, 돌로 변한 별의신 사아드, 태양의 여신 샴스, 사랑과 우정의 신 왓드 등이 있었다고 하며, 마호메트가태어날 무렵 카바에는 후바르 이하 수십개의 많은 신상(神像)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이슬람의 절대 유일신 알라(al Lah)의 신상도 있었다고 합니다.

(2) 예언자(nabi) 마호메트(Mahomet: 570? ~ 632. 6. 8)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는 유럽의발음이고, 아라비아 원음으로는 무하마드(Muhammad)라고 하며, 이슬람교도는 보통라술라(Rasullah), 즉 "알라의 사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상업과 무역, 신성(神性)으로가득찬 메카에서 마호메트가 태어난 것은 570년 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코끼리의해"에 출생하였다는 전승(傳承)에 따르는 것으로서, 570년경 아비시니아군(이디오피아)이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남(南)아라비아(예멘)로 침입해 왔으므로, 이것을근거로 그의 출생연대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5세기경 황야에서이주해와 이 도시의 지배권을 쥐고 있던 코레이시족 중에서도 지체 높은 하심(Hashim)집안이 였으나, 그러나 당시의 하심 집안은 가난해서 아브두 샴스 가문(후의 우마이야가문)이나, 마하즈무 가문 등 부유한 가문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카바 근처의 골짜기밑에 살고 있었는데, 밑에 살수록 격이 높고, 열 여섯 집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전 부친압둘라가 병사하여 유복자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도 수년 후에 별세했기 때문에,마호메트는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조부의 사망 후로는 숙부 아브 탈리브의 보호를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메카의 부상(富商)밑에서점원으로 일하면서, 주인을 따라  시리아등지를 왕래하였으며, 이 시절에 유다교와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와 접하고, 그 나름의 신앙이 자리잡았다고보고 있습니다.

그 후 주인이 죽자 그의 미망인인하디자 밑에서 일하는 도중, 마호메트의 성실함에 큰 감명을 받은 하디자의 구혼으로두 사람은 결혼하였다고 합니다(595).

이 때 마호메트는 25세, 십여세 이상의 연상인 하디자(당시 하지다의 나이는 40 ?)와 결혼함으로서 가난한 청년에서일약 메카의 부호가 되었으며, 이로써 종교적인 정열을 펼칠 수 있는 경제적인 토대가이루어 졌고,

외견상 평온을 유지하여 두 사람사이에는 3남 4녀를 두었으나 남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조건만으로 이슬람이라는 신앙의 근원을 만들 수는 없었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천성적인매력(魅力)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서는 놓지 않는 인품이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인간적인매력은 이 세상 부인(婦人)들의 위대한 애인이 였다고 합니다.

마호메트 쪽에서도 결코 부인들을싫어하지 않았고, "유능하고 아름다운 여인들로부터 정열적인 지지와 마음에서우러나는 귀의(歸依)를 얻어서, 이슬람이라는 신앙을 통하여 이것을 보존시킨 위인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잡았고, 이들 여인들이 그의 성공과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데크게 기여하였다"라고 어느 이슬람학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많은 아내 중하디자와 아이샤(Aisha)는 다른 아내들보다 기여한 바가 많았다고 볼 수 있으며,그의 성공도 이 두 여인의 헌신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열매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고합니다.

610년경 마호메트가 40세 되었을때, 그는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들어갔고,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부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받았다고 하는데,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에 들면날개 달린 천마가 그의 앞에 나타나고, 그 천마를 타고 가면 예루살렘의 큰 바위에내리고, 그 바위에서 마호메트가 무릎 꿇고 기도드리면,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그를 인도하는데, 빛의 사닥다리를 타고 제7천으로 올라가서 화살이 닿을 정도의거리에서 알라를 뵙고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새로운 교(敎)를 창시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부인 하디자가최초의 이슬람(참다운 믿음?)이 될 때 신자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 였고, 3년 후에40명, 10년 동안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다. 이슬람의 세계

(1)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로서,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계시되고, 이 가르침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설교하여 교단국가가 등장하였는데,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마호메트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또는 회교, 청진교(淸眞敎)라고 하였으며,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불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일부다처,성인의식으로 치루는 할례(割禮), 남자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이상한 모자, 여인들이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리는 겉옷, 식사는 오른손으로 용변 후 뒤처리는 왼손으로,하루에도 메카를 향해서 수없이 행하는 기도, 구성지게 읊조리는 코란의 독송(讀訟)등 그 모두가 경이와 신비,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못지 않은 경이로운 신비가있다면, 한 사람의 신자로 출발하여 지금은 12억의 세계인구가 믿고 있는 거대 신앙으로자리잡은 그 자체를 신비와 경이로 보지 않을 수 없겠지요.

메카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이 불모지 골짜기가 인도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巡禮者)들이 찾아들었고, 빈부(貧富)의 차이도심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미쳐 크리스트교도 유다교도 아닌 하닐라(Hanila) 라는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多神敎)신당에 빠져, 돌·천체·샘·수목 등을 숭배하고 있었고, 하니프들은 세계의 종말과,선한 자는 복을,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하닐라는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고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의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어떤 형태로든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가르침에 몸을 맡긴다(歸依)" 다는 알 알이슬람을 설파하고, "알라 이외의신은 없다"라고 하는 등 그의 이상한 언동이 메카의 집권 층인 코레이시족의박해로 이어졌고, 그럴 때 마다 그의 충실한 신자인 동시에 연상의 아내였던 하디자가이를 잘 무마해 주었으나, 그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남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619?),

그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므로,이를 피하여 마호메트도 그의 친구이자 열렬한 신자인 아부 바크르(Abu Bakr)와 함께아부쿠바이스산 동굴에 몸을 숨기고, 아부 바크르의 딸 아스마가 허리띠를 풀어서동굴에 매달아 내려주는 물과 음식을 먹고 연명하다가, 드디어 위지를 벗어나 622년9월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야스리브(메디나)로 갔는데 신도들도 이때를전후하여 정든 고향 메카를 떠나 야스리브로 피난하였습니다.

이 메디나행(行)을 이슬람에서는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호메트,나아가서는 이슬람교의 일대 전기(轉機)가 된 것은 이 헤지라를 통하여 였다고 볼수 있으니, 이를 테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메디나는 메카와 달라서 사람들은가난하였고, 이슬람에 귀의하는 자가 많아 무슬렘이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호메트는메카에서 이주해간 교우(아스하아브)들, 즉 무하지룬(單數:Muhajiru: 複數 Muhajirun)과,메디나 협력자들(안사르)의 힘을 합쳐 교단(敎團:움마)을 조직하였고, 이것이 이슬람교의시초가 되었으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 다시 세계제국으로까지발전하게 되었습니다.

(2) 메디나의 마호메트 그리고그의 여인들

마호메트는 이 메디나에 머무는10 여 년 간 12명의 아내를 마지합니다. 이미 메카시절에 하디자가 죽은 후, 두 여인과혼약을 맺었는데 그 하나는 그의 외가 쪽 숙모 뻘이 되는 사우다라는 과부였고, 다른하나는 마호메트의 가족이외에 최초로 이슬람에 귀의하여 평생토록 예언자와 친구의정을 나눈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 였는데, 약혼 당시 아이샤의 나이는 불과 여섯살의 어린애였다고 합니다.

메카에서 박해를 피해 아부쿠바이산에서몸을 숨기고 있을 때 물과 음식을 날라다 준 아스마는 아이샤의 배다른 언니였으며,이미 아이샤는 다른 청년과 약혼하고 있었으나, 예언자가 구혼(求婚)하자 그 부친아부 바크르는 약혼자측의 양해를 구하고 파혼한 다음 친구이자 교주인 마호메트에게선뜻 딸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예언자가 죽은 후 아부 바크르는초대 칼리프(할리프)가 되었고, 아이샤는 "신앙의 어머니"가 되어 이슬람교도의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쉰 살이 가까운 예언자가 여섯살의 동녀(童女)와 약혼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결국이 동녀는 삼 년 후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쉰 살을 넘긴 마호메트와 결혼하여 그의세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 예언자 마호메트는이 어린 신부와 결혼한 같은 장소에서 그의 가슴에 안긴 체 숨을 거두기 까지 이슬람의교리는 확립되고 아라비아의 운명도 바뀌었으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역사까지도 바뀌게되는 엄청난 힘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미 마호메트는 일단의신도들을 거느리고 메카의 대상(隊商)들은 습격하였는데 바드로의 싸움에서는 무하지룬과(86명)안사르(238명)가 힘을 합쳐 약 천명의 메카 군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624.3)

이 때 마호메트 편에서도 14명의회생자가 나왔고, 그 중에는 메카이래의 유력한 신도인 우마르(이븐 알 핫타브 :Ibn al Khattab)의 딸 하프사(Hafsa)의 남편도 전사하였으므로, 우마르는 20 여세에과부가 된 딸의 혼처를 여러 곳에 수소문  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마호메트가이를 받아들여 결혼하여(625. 2) 아내로 삼았고,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오호드(Ohod: 무후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 싸움은 메카의 유력한 집안인아부 수피안(Abu Sufean)가(家)가 쳐들어 왔는데, 메디나의 북쪽 오호드의 언덕 아래에서양 쪽이 혼전을 거듭하여, 많은 회생자를 내게되자 1년 후 다시 결전할 것을 다짐하고메카 군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모하메트는다시 자이나브(Zainab)라는 여성을 아내로 마지하는데 그녀의 전 남편 역시 바드로의전투에서 전사한 과부로서 마음씨가 매우 착하여 "가난한 자의 어머니"라는애칭을 받았다고 하며, 이로써 예배당 곁에 있던 예언자의 검소한 집은 점점 흥성거리게되었으나 이 마음씨 착한 자이나브는 8개월 후에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마호메트의 여섯 번 째 아내는메카의 코레이시족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마하즘 집안의 힌드란 부인이 였습니다.그녀의 전 남편 아부 사라마는 오호드전투에서 부상당한 것이 덧나서 죽게 되자 이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626.3)

이 여인에게는 전 남편과 사이에이미 몇 명의 자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언자가 일곱 번 째 아내로마지한 것은 자프시의 딸 자이나브 였는데, 이 결혼에는 꽤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이 여인은 모하메트와는 동족으로 4촌 누이벌이였는데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가지못하자, 자기의 노예였다가 해방시켜 양자로 삼았던 자이드와 결혼시켰고,

어느날 예언자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때, 그녀가 미태를 부리자 예언자는 마음이 동하였고, 뒤 늦게 이 사실을 안 자이드는겁을 먹고 이혼하여 규정된 4개월 후에 예언자에게 보냈습니다.

 627년부터 629년 사이에마호메트는 또 다른 다섯명의 아내를 마지하게 됩니다. 그 다섯 명 가운데 가장 먼저온 것은 메디나에 있었던 유력한 유다교도 부족인 나디르족 출신의 라이하나라 불리는미녀로, 같은 유다족교도인 쿠라이자족 젊은이와 결혼한 몸이 였으나 마호메트가그 일족을 멸망시켰을 때 과부가 된 것을 맞아들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피야라는 열 일곱살 난 미 소녀였는데, 그녀도 유다교도로 라이하나와 같이 마호메트에 의해 멸망된메카북쪽에 있는 하이발시의 키나이족의 여자였는데 그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과부가된 것을 마호메트가 거두어 아내로 삼았습니다. 세 번째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금발의 미녀로서 동로마의 이집트총독이 선물로 바친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고대 이집트인종으로서크리스트 교도가 된 코프트파(Copts)에 속하는 크리스찬이 였기 때문에 정식 아내로인정되지 않았고 여자노예의 신분으로 있었으나, 메디나에서 이브라힘(Ibrahim)이라는아들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세 명의 이교도 중 사피야만은 이슬람으로개종하여 정식 아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628년 또 다른 두 여인과결혼을 하였습니다. 메카의 최대 명문가인 코레이시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 있는 우마이야집안의 장로(長老) 아부 수피안의 딸 탐라와, 자기 백부 압바스(al-Abbas)의 처제인마이무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정략적이 였으나,후일 후계자문제를 두고 그 심각성은 이 하렘(후궁)속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고합니다. 탐라의 부친 아부 수피안은 메카의 유력자로서 오호드전투 때 메카군을 지휘하여이슬람과 싸웠고, 이 전투에서 예언자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627년 3월에는다시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메디나를 포위하여 예언자가 위기를 맞았으나, 이른바참호전쟁(battle of the ditch)이라고 부르는 한다크(참호)를 돌아가며 파고 잘 막았기때문에 2주일 후 메카군은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전기로 해서 이번에는이슬람군이 공세로 나오고 메카가 수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630년1월에는 메카를 정복하게 됩니다. 1월 11일 마호메트는 알카스와란 이름의 낙타등에올라타고 카바신전으로 들어가, 흑석에 지팡이를 대서 경의를 표하고 신전을 왼쪽으로일곱 번 돈 다음에, 그곳에 모셔진 수십개의 신상(神像)을 쓰러뜨리라고 명령하여,주신(主神) 후바르의 거대한 신상이 땅을 울리며 쓰러졌을 때, "진리(하크)는왔다. 거짓은 멸망했다. 진실로 거짓은 멸해 버린 것이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고합니다(코란 제 17장 83절) 이래서 카바신전은 알라의 신전이 되었고, 최대의 강적아부 수피안이 항복한 것은 메카가 함락되기 직전이 였다고 합니다.

아부 수피안의 딸 람라는 그 일족의반대에도 불구하고,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박해받고 있을 때 이슬람에 귀의하고 있었고,아버지에 의해서 행해진 이슬람 박해를 피하여, 한 때 그 남편과 함께 바다를 건너아프리카의 아비니시아(이디오피아)고원으로 피신해 살다가 거기에서 남편이 병사하였고, 과부로 있다가 마호메트와 결혼한 것은 628년 봄이 였고,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고 하는데, 이때는 아직도 그녀의 부친 아부 수피얀과 예언자 마호메트가 생사를걸고 싸울 때 였으니, 아버지의 정적과 결혼한 셈이 됩니다.

마호메트는 629년 봄 26세의 미녀마이무나와 사실상의 마지막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호메트의 숙부압바스의 처제였고, 용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의 숙모이기도했습니다.

할리드는 메카군의 용장이 되어오호드전투와 한다크전역 때에는 메카의 기병대를 이끌고 이스람군을 수없이 괴롭혔으나,이슬람에 귀의하여 마호메트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쳐 예언자로부터 "알라의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예언자 마호메트는 메카에서는아내가 연상의 하디자 하나 뿐이 였으나 메디나에서는 11명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그런데 그의 아내들을 보면, 6살에 약혼해서 9살에 결혼한 아이샤는 비록 처녀이긴하였으나 파혼의 경력이 있었고, 이집트의 동로마총독이 선물로 바친 17살의 금발의미녀 마리아는 노예신분이 였으며, 그 나머지 아내들은 과부로서 전 남편과 사별했거나이혼하여 마호메트와 결혼하였는데 전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을 둔 여자도 있었으나,막상 마호메트의 자녀에 관한 기록은 남긴 것이 없고, 유일한 혈통으로는 외손자두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마호메트를 호색한이라고일부일처제 사회에서는 비난을 하는데, 이곳 유목민 사회에서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될 수 없다고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그 오아시스를 잃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오아시스를 두고 부족간의 치열한전투는 생사를 결정 짓는 중대성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고 심하면 전 부족이몰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럴 때 남편을 잃고 갈 곳없는가련한 여인들을 거두어 아내로 삼아 생을 영위시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의 은총이라고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마호메트의 아내 중에는정략 결혼도 있으나 대부분은 전쟁 미망인을 거두었고,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은,호화로운 궁전에서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궁녀 속에 묻혀 살면서, 궁녀의 처녀성을보장하기 위해 환관으로 궁중 일을 사역시키는 오리엔트의 여러 군주에게는 귀감이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려태조 왕건이 새로운 국가를건설하는 과정에서 유력한 호족들과 제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구잡이 식 결혼을하여, 정식 왕비가 25명, 거기에 후비를 합치면 도합 29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하는데그렇다고 역사에서 왕건을 호색한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정도(正道)라는 것이지요.

632년 2월에 거행된 메카의 대제(大祭)는마호메트 자신이 행사를 지휘하여 미나의 골짜기에서 모여든 군중을 향하여 낙타등에올라 앉아 일장의 설교를 했는데 "... 모든 모슬렘은 형제입니다. 여기 모인사람은 모두 평등합니다...." 이 간단한 언어 속에서 그의 사상을 엿 볼 수있고, 이러한 그의 사상이 교단국가라는 보기 드문 이슬람제국을 지탱해준 사상적인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미나의 대제를 고별 순례라하는데 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와, 병들어 눕자 여러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아이샤의 방에서 정양하다가 해 뜰 무렵부터 정오사이의 어느 시간에 고통 때문에어쩌지 못하는 63세의 육신을 아이샤의 부축을 받아 몸을 반쯤 일으킨 체 임종하여파란 많은 그의 영혼은 유일신 알라 옆으로 날라 올라 갔다고 합니다.

라. 정통의 칼리프들(632∼661).라시두운

(1) 할리파(칼리프 : 후계자)문제

마호메트가 죽은 뒤, 아부 바크르,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의 장로들이 교도(敎徒)의 총의에 의하여 잇따라 칼리프(후계자)로서이슬람 교단을 통솔하던 시대를 역사에서는 정통 칼리프(라시두운) 시대라고 말합니다.

4대 알리가 쿠파로 옮길 때까지모두 메디나에 있었으며, 초대는 전에 이반(離反)하였던 아라비아 제 부족을 재통일하였고,제2대는 시리아·이라크·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통치의 대 방침을 정하였으며, 제3대는코란의 통일을 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제4대 알리는 우마이야가(家)와 대립 끝에 암살되고,

결국 무아위야에 의한 세습왕조시대로 옮겨 가 우마이야(옴미니아:옴마이드) 조가되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가 수부가되었고, 다시 750년에은 마호메트가계의 아바스조가 들어서 이라크의 바그다드가수부가 되는 등 변화를 거듭합니다. 따라서 그 중심도 아라비아를 떠나 시리아, 이집트,이란, 이베리아반도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마호메트가 창설한 이슬람교국즉 움마의 지도자는 그가 죽은 후라도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었습니다. 마호메트가말하는 소위 속무(俗務)를 맡아볼 후계자(後繼者)를 선출해야 한다는 문제가 나타나게되었습니다. 칼리프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할리파라고 불렀으나 이것이 칼리프로와음(訛音)되였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후계자와 동시에 대행자(代行者)라는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래 아라비아 사람들은 여느 유목민과 마찬가지로부족의 우두머리를 세습하는 일은 드물었고, 그 때의 형편에 따라 유능한 인물이선출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호메트가 임종에 가까워 많은 유언을남기면서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고, 그들 사회에서는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호메트가 메카의 상인에서출발하여 이슬람교단 국가를 형성하기 까지, 그를 협력했거나, 마지 못해 이슬람에귀의한 무리, 또는 예언자의 집안과 그와 결혼했던 처족 등 몇 개의 세력권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무하지룬과 안사르사이의 미묘한 대립관계였습니다. 무하지룬이란 마호메트의 메카시절부터 교우(아스하아브)였고,헤지라 때 마호메트를 따라 메디나로 옮겨온 사람들로서 정통 이슬람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안사르는 역경에 처한이슬람을 그들의 도시 메디나로 불러들여 그들을 보호해 주고 용기를 주었던 메디나의협력자들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한바 있습니다. 소위 이들간에주도권 투쟁이 일어날 수 있겠지요.

다음으로는 메카 정복 전후에이슬람에 귀의한 신참 자들로서 그 안에는 메카의 명문집안이 많았고, 특히 우마이야집안은 그 세력이 대단했습니다. 이슬람교단에 끼친 공과와는 별도로 현실적으로가장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후계자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 치가 않았는데 거기에는 마호메트의 사촌동생이자 사위가되는 알 리가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력들은 마호메트가별세했다는 소식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칫하면 메디나는 유혈의 참극이벌어질지도 모르는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후계자로아부 바크로를 추천하여 초대 칼리프를 세운 것은 우마르 였습니다.

(2)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573?~ 634. 8. 29)

아부 바크르는 마호메트의 오랜친구이자 그의 사랑스러운 어린 처 아이샤의 아버지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요.초대 칼리프(632-634)가 된 그는 자신을 "알라의 사도의 칼리프"(알라의사도인 마호메트의 대행자)라 칭하고, 예언자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부족들이 물이세듯 교단을 떠나거나, 다른 일신교를 창시하여 예언자가 나타나는 등 자칫하면 이움마교단 국가가 와해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슬람을 떠나거나 예전의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릿다(Ridda)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배교(背敎)를 의미합니다.이에 아부 바크르는 이 가짜 예언자들을 토벌하는데 진력하였는데 이 토벌에 공을세운 것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로서 그는 예언자의 마지막 아내였던 마이무나의조카였고, 처음 메카군에 있다가 이슬람에 귀의하고 마호메트의 용장이 되어 예언자로부터"알라의 검"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할리드가 나지드고원 남부인 야마바지방에서 예언자를 자처하고 코란에 대처하는 경전까지 만들어 일신교를 세워 많은신자를 확보하고 있었던 무사일리마(Musailima)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이를 소탕하였을때, 무사일리마를 따라 순교(殉敎)한 사람이 1만에 달했다고 하며, 이슬람군도 많은희생자를 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메디나 북방에선 트라이하란자가 나타나 예언자를 자칭했고, 동부아라비아의 타밈족 사이에선 사자하란 여자예언자가 나타나 음률적인 아라비아 말로 설교를 하였으며, 남부 야만(예멘)에서는산아(San a)를 거점으로 알 아스워드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세력을 늘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칫하면 이슬람은 메디나와메카의 두 도시를 잇는 헤재즈(Hejaz)지방의 일부 세력으로 전락될 수도 있었습니다.

아부 바크르의 재세기간은 2년의짧은 시기였으나, 이들을 차례로 토벌하여 예언자 사후에 나타나는 이러한 릿다를막고 강력한 이슬람교단을 재건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비잔틴제국 치하에있던 시리아와 사산조페르시아의 근거지 가까이 있던 이라크 남부에 군대를 파견하기시작하였습니다.

633년에 할리드에게 1만 8천의병력을 주어 비잔틴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라함왕국의 수도 히라를 공격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9천의 병력으로 시리아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61세로 병사하자이제 그 임무가 다음 칼리프에게 넘어갔습니다.

(3) 2대 칼리프 우마르(634 ~644)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2대 칼리프가된 우마르 이븐 알 핫타브(Omar ibn al-Khattab)는 처음에는 "알라의 사도의후계에 후계"라고 했는데

칼리프의 칼리프란 말이 길어,이를 간단하게 줄여서 칼리프(할리파)라 칭했고, 또 아미르 알 무미닌(Amir al-Muminin: 신도의 통솔자) 이라고도 칭했는데 이 칭호가 이윽고 중세 유럽으로 들어가 "엘미람몸미니" "미라로민" "무루무무누스" 등으로 와전(訛傳)되었고,중국에도 전해져서 담밀막말니(담 密莫末니 ) 모문왕(暮門王) 등으로 표기되었습니다.

그는 메카의 명문 출신으로 마호메트의신흥종교를 처음에는 백안시 했으나, 일단 귀의하자 그 강력한 성격과 탁월한 재능으로교단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과부가 된 그의 딸 하프사를 마호메트가 거둠으로서 확고한지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예언자가 죽고 후계문제가 대두되었을때 아부 바크르를 선배로서 추대하여 후계자가 되게 하였다가, 그가 죽자 드디어칼리프가 되어, 마호메트에 이어 이슬람의 제2의 건설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재세기간에비잔틴제국으로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았고, 사산조페르시아에 치명상을 입히고이란과 이라크를 정복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마호메트의 유언(아라비아에두 개의 종교를 두지 말 것)에 따라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 일색으로 바꾸고, 아라비아반도 이외의 정복지역에서는 유다교도, 크리스트교도, 배화교도 들과 계약(딤바)를맺고, 정해진 인두세(人頭稅)와 지세(地稅)만 물면, 생명, 재산, 교회를 보호해 준다는방침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고있던 크리스트 교도들에게는 반도를 떠나 시리아나 이라크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고,이주하면 살 수 있는 땅을 나누어 준다고 하였으며, 메디나 북쪽의 하이바르시에는많은 유다교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옮겨가지 않자, 우마르는 이들을 완전히 아라비아 반도에서쫓아 내고 말았습니다.

639년에는 요르단강 지류인 야르무크(Yarmuk)강가에서비잔틴제국과 결전하여 이를 궤멸(潰滅)시켰는데 이 때 이슬람 군을 지휘한 것은"알라의 검"이라고 불리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이 싸움에서의 전공을 마지막으로 메디나에 소환되어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죽었다고합니다. 그 전공에 따르는 명망이 칼리프를 앞 지를 수도 있다고 보고 미리 제거한것이지요.

그리고 아부 우바이다(Abu Ubaida)를보내어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최후까지 버티던 예루살렘과(638)과 카에사레아(Caesarea)도정복하였습니다(640)

예루살렘을 함락하였을 때 우마르는메디나를 떠나서 친히 이곳을 방문했는데, 거암(巨巖)과 쓰레기가 범벅이 된 옛 다윗왕의신전자리에 이슬람의 "아득한 예배당"이라는 모스크(교회)를 목조건물로세웠고, 이로부터 약 50년 후 691년경에 우마이야조의 압둘 말리크가 화려하고 장엄한석조건물로 개축하였다고 합니다.

이 신전은 이슬람의 3대 성지로서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후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을 두고유다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는 선례를 만들었는데,

2차대전 때 오스만 투르크의 배후를교란할 목적으로 이 지역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이슬람에게는 맥마흔선언을유대에게는 밸푸어선언이라고 하여 양측 모두에게 같은 땅을 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공화국이이 지역에 수립되자, 수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발생하였고,4차례의 전쟁(중동전쟁)을 치루고도 해결이 되지 않아 세계가 고심하고 있습니다.최근에도 이곳은 매우 시끄러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 싹은 이미 우마르 시대부터트고 있었습니다.(왼쪽의 그림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사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만득자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칼을 든 모습입니다.

팔레스타인 난민도 이스라엘 민족도모두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데...도대체 종교가 무엇인지?.....)

우마르가 이라크를 정복한 것은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카다시아 싸움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하고 페르시아가조영한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인 (크)데시폰을 점령하자, 사산조페르시아의 최후의왕인 아즈디기르드 3세는 이란고원으로 도망하였다가 군사를 모으고 멀리 당나라에사절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637)

그러나 다시 니하완드의 결전에서패하고(641), 동쪽으로 도망하여 중앙아시아의 마루우 근교의 물레방앗간에 숨어있다가 그곳 토착민에 의해 살해됨으로서 사산조 페르시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651)

한편 우마르의 이슬람 군은 이집트의비옥한 나일강 유역으로 쳐들어 갔는데 이 때 이슬람의 주장은 메카의 코레이시족출신의 아므르 이븐 알 아스(Amir ibn al-As)로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버금가는대단한 용장이 였다고 합니다.

그는 일찍이 대상(隊商)을 따라이집트에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곳의 지리에 밝았고, 예루살렘 점령 때에도그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우마르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 대단한 용장 아므르는이집트에 진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신중한 우마르는 장노들의 의견을 물어본 다음에결정하겠다고 하면서 미루었으나, 그 단독으로 이집트에 진공함으로서 칼리프 우마르도결국은 구원병을 보내어 이집트 정복에 성공하였다고 합니다(639) 이로서 비잔틴제국은시리아에 이어 이 기름진 이집트를 영원히 잃고 말았습니다.

시리아나 이집트의 비잔틴제국이병력의 숫자나 장비면에서 우세하였음에도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비잔틴제국의 중세(重稅)에 염증을 느꼈고, 이슬람의 간단한 통치 방침에 환영하여내심 그들의 침입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방대한 영토를 확보한우마르의 생각은 매우 신중하여, 정복지에 아라비아인들을 이주시켜 원주민과 혼혈시키는것을 금기로 여겼습니다. 그의 생각은 아라비아인들은 알라의 전사로서 싸우는 것이사명이며, 그것만이 이슬람의 교단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지의 토지는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지세(地稅)만 내게하고, 요소에 아라비아 군을 주둔시켜이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지원토록 하였으며, 중요한 지점에는 군사기지가 될 도시를건설하여 아라비아 인들을 이주시켜 성전(聖戰 : jihad)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군사기지로 생겨난 도시를미스르(Misr)라고 하였는데, 현대의 아랍어로는 이집트를 가리키는 말로되어 있으나,원래는 이런 도시를 일컫는 말이었고, 이라크의 바스라와 쿠파, 이집트의 무스타트(구카이로) 등은 전형적인 미스르 였다고 합니다.

원래의 목적은 성전(지하드)을수행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건설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슬람의 학예(學藝)중심이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미스르에 거주하는 아라비아인들은 의식주 일체를 지급받았고, 지체가 높은 집안은 연금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재원(財源)은 모두 피 정복민 들로부터 받아들이는 인두세와 지세로 충당하였는데, 피정복민이라 할지라도 이슬람으로개종하면 인두세를 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농토를 떠나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슬람교단은 거대한전투집단이 되었고, 개종하지 않는 피정복민이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그리고 피정복민이 개종하지 않는 한, 토지를 팔 수도 떠날 수도 없게 만들었으니,이것이 우마르가 구상한 이상사회의 건설로서,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침식을 잊을정도로 노력하던 중, 644년 11월 7일 새벽 메디나의 예배당에서 아부 루루아란 페르시아태생의 크리스찬 노예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4) 3대 칼리프 오스만(Othman)(644 ~ 656) -코란의 완성

우마르가 살해되자 칼리프가 된오스만은 이미 나이가 70의 노인이 였다고 하는데, 그 성격도 온순하고 부드러워이 강력한 이슬람교단 국가를 이끌어 가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그는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 였다고 합니다.

그는 우선 요지마다 임명된 태수를차례로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자기의 일족인 우마이야 집안 사람들을 앉혔기 때문에인기를 잃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바스라, 쿠파, 무스타트의 3대 미스로의 사람들이불만을 품고 떼를 지어 메디나로 몰려오는 험악한 형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험악한 형세가 메디나의 예배당에서늙은 칼리프에게 폭행하는 사람까지 생겨나자 그는 자택에서 연금 상태가 되어 바깥출입을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656년 6월 마침내 폭도들은 칼리프의 저택에 침입하여오스만을 난도질 하여 죽였다고 하는데, 이 때 이미 여든 두 살의 노칼리프는 조금도동요하는 빛이 없이 폭도들이 쳐든 칼날아래에서 코란을 계속 읽었다고 합니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후에도혼신의 힘을 기울여 코란을 품에 안았고, 그 때문에 코란이 붉은 피로 물들였다고합니다. 이 노칼리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면 코란을 결집하여 완성시킨데 있으며이 때의 코란이 지금 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코란(Koran/Qur?n)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619년경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의 계시·설교를 집대성한것으로,

예언자 마호메트가 40세경 메카근교 히라산(山) 동굴에서 천사(天使)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은 것을 모은 이슬람교의경전으로서, "코란"이란 아랍어로 "읽혀야 할 것" 또는 암송(暗誦)혹은 독송(讀訟) 의 뜻이라고 합니다.

계시받은 마호메트의 말은 초기의사도(使徒)들에 의해 기억되어 낙타의 골편(骨片)이나 야자의 엽피(葉皮), 암석의파편 등에 불완전한 문자로 기록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승이 다양해져 그의집성·통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코란의 결집(結集)이이루어졌는데,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시도하여 본격적인 결집은 제3대 칼리프인늙은 오스만이 646년에 완성하여, 오늘날까지 당시 정리된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있다고 합니다.

코란의 용어는 아랍어의 메카방언이었으나 이것이 후에 고전 아랍어로 널리 쓰이게 되어 현행 아랍어 문어체의기초가 되었다고 하며, 그 문체는 사주아라는 일종의 운(韻)을 단 산문체로 되어있어 독송할 때 그 리듬감이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현행 코란은 6,342아야(句節)와114수라(章)로 되어 있으며, 각 수라에는 암소, 이므란 일가, 여자 등과 같이 그장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고, 제1수라의 개경장(開經章)은 7아야로 된짧은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에해당하며, 이슬람교도는 자주 이것을 독송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장(수라)은 대개구절(아야)의 수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서 최종 장에 이르러서는구절의 수가 아주 적어집니다.

예를 들면, 제2장은 286구절,제3장은 200구절인데, 제113장은 5구절, 마지막 제114장은 6구절로 되어 있고, 모든장에 메디나 계시 또는 메카 계시라는 표시가 있는데, 메카 시대의 계시는 극히 신앙적인짧은 것이기 때문에 현행 코란에서는 대개 후반에 집성되어 있고, 후대의 메디나계시는 대부분 전반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계시를 받은 순서와는  관계없이문장의 형태로 구분된 것도 코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란에는 아랍의 고속(古俗)과유대교·그리스도교의 전승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당시의 사회적관습이나 역사적 사건에 관한 부분도 적지 않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해하기 어려운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에, 코란에 주해(탑시르)를 첨기(添記)할 필요성이 생겨 그것이이슬람 신학자들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수많은 주해서가출간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아 타바리, 아 자마후샤리, 알 바이다위 등이 만든것이며, 그 중에서도 알 바이다위의 주해는 오늘날 코란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네요.

이슬람교도(무슬림)는 일상생활에서코란을 독송하며, 각종 의식에서는 정규 독송자가 소리 높이 독송하며, 초기에는10여 파의 유파(流派)가 각기 다른 정지(停止)나 성조(聲調)로 독송했으며, 10세기경이후 7파로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코란은 유일신 알라 자신의 말로 되어 있으므로 이슬람교도는 이것을 직접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번역은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전파지역을 따라 아라비아 언어가 보급되어 아랍문화권을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 이슬람지역에서 학문적인연구로 번역이 시도되어, 12세기에는 최초의 라틴어 번역이 준비되었고, 이후 1543년에비브리안델의 라틴어 역이 나왔으며, 이것을 다시 독일어·이탈리아어·네덜란드어로중역(重譯)되었으며, 1698년에는 다시 마리치의 라틴어역이 출간되어 널리 읽혀졌다고합니다.

그 후 프랑스어·영어 등으로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김용선(金容善)의 한역주해(韓譯註解) 코란 역편(譯編)이간행되었다고 하니 관심 있는 독자가 계시면.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있는 용산구 한남동에중앙성원(中央聖院), 항도 부산에 제2성원, 경기 광주에 제3성원, 안양시에 제4성원과전주시에 제5성원이 있으니 거기에 가시면 한역 코란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5) 마지막 정통 칼리프 알리(?li)(600 ?~661.1)

이슬람교단의 제4대 정통(正統)칼리프(재위 656∼661)가 된 알리의 정식 명칭은 Ali ibn Abi Talib이며, 메카의코레이시족 하심가의 사람이며 마호메트의 종제(從弟)로서 예언자가 친 아우처럼사랑했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으며, 마호메트의 딸인 과티마와의 사이에두 아이를 낳아, 마호메트의 유일한 핏줄인 후손을 남겼고, 누구 못지 않게 예언자를받들었으므로, 이런 그의 경력이나 혈통으로 보아서는 마호메트의 사후 곧 후계자가될 만도 하였으나 일이 묘하게 되어 때를 기다리다가 오스만의 암살로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품 역시 총명 박식하였고특히나 말 솜씨가 뛰어나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싸움터에 나가면용감한 용장이어서 마호메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성격 역시 성실하고 깨끗하였으며,남에게 겸손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공평무사하였고 일상생활에서도 검소하고 매우금욕적이 였다고 합니다.

외견상 이러한 그가 칼리프에취임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앞길이 잘 열리리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 그의 재임 5년간은 수없는 반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시련은 오스만이암살될 때 입은 피 묻은 속옷과, 폭도들로부터 남편을 지키기 위해, 폭도들의 칼날아래남편을 몸으로 감싸 안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나간 그의 처 나이라의 잘려 나간 손가락이다마스커스예배당의 설교단에 전시되자 시리아 총독으로서 그 지방의 인심을 쥐고있던 우마이야 집안의 무야위야가 추도 연설을 하면서 노칼리프의 죽음을 애도하자,이 때 6만의 장정들이 복수를 위해 결맹(結盟)을 했는데 이 때 원수(怨讐)로 지목된것이 알리 였다고 합니다. 오스만 살해의 원한과 책임을 고스란히 그가 떠맡은 셈이지요.

메카 역시 반 알리의 거점이 되었는데그 중심에는 신앙의 어머니로 추앙받던 마호메트의 애처 아이샤를 비롯해서, 같은하심가문의 알 주바이르 같은 원로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이샤가 알리를 못마땅하게여기게 된 것은 이야기가 30년 전 메디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때 마호메트가 외정을 나갔을때 그들의 풍속에 따라 그의 두 아내(아이샤와 힌드)도 같이 갔는데 문제는 귀로에서발생하였습니다. 먼길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일행이 잠시 쉬는 사이 아이샤는 낙타위에얹힌 가마에서 내려 용변을 보고 돌아와 보니 일행이 떠난 후 였습니다. 가마 속을확인하지 않고 당연히 가마 속에 아이샤가 얌전하게 앉아 있으려니 하고 그냥 떠났다는것이지요.

외진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아이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다만 그가 없는 것을 알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기다리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이 때 낙타를 몬 건장한 청년이 나타나 아이샤를낙타에 태우고 메디나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아이샤의 정조에 의심을가지게 되었고, 반 마호메트 진영에서는 약점만 보이면 예언자를 제거하려는 음모가있었기 때문에 이 단순한 사건이 확대되어 예언자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이 때 알리는 아이샤를 버릴 것을 예언자에게 건의했고 이것이 아이샤에게는 두고두고원한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 주바이르 등은 자신들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생각하여 반 알리의 진영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칼리프가 된 알리의급선무는 이런 반대파를 숙청해야 되기 때문에 먼저 메카를 정복하고자 하였습니다.그러나 메카의 반 알리파들은 아라비아고원을 넘어 이라크의 바스라를 점령하고 그곳을본거로 삼았기 때문에 알리도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라크의 쿠파로 옮겼는데(656)이것이 이슬람교단국가의 수부(首府)가 아라비아를 떠나게 되었고, 이 후 다시는아라비아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그해 12월 4일 양측은백병전이 벌어졌는데 아이샤도 낙타를 타고 직접 진두 지휘하였으나, 알리의 승리로끝나고, 아이샤도 사로잡혔으나 알리는 이 의모(義母)를 정중히 대접하여 메디나로보냈고, 거기에서 위대한 남편이 남긴 언행을 말로 전한 후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떠났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전투에서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독전했다고 하여 낙타전쟁이라고이름을 붙였습니다.

657년 1월 알리는 쿠파로 돌아와자리를 잡았으나 이미 우마이야집안의 무야위야와는 끊을 수 없는 원수가 되었기때문에 두 사람은 결국 이라크와 시리아를 거점으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657년 봄 알리는 5만의 병력을 이끌고 무야위야 토벌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양측이 팽팽히맞서 결정이 나지 않자 양측이 합의하여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는데, 알 아시타르를비롯한 1만 2천의 주전파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알리군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쿠파근교의 한 부락에모여들었는데 이들을 하지리파((Kharijites : 이탈파)라 부르며 이슬람 교단에서최초의 공공연한 분파가 행해졌고, 그들은 독자적인 신학체계를 가진 강력한 분파를형성하여 이 후 무수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이 하지리파(이탈파)들이 왜 알리의화의(和議)에 그처럼 노여워했는가 하면, 알리가 정통적인 칼리프의 자격을 가졌음에도불구하고 알라신의 동의 없이 인간의 잣대로 하는 화의 같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아부 바크르로부터알리까지 4명의 칼리프가 모두 코레이시족 출신이며, 알리를 몰아내고 칼리프가 되려는무야위야 역시 마찬가지로서, 그러나 이맘(Imam :칼리프의 다른 용어)이 누구이든그가 큰 죄를 범했을 때는 이슬람교도라면 반역할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또한 교주를 선출할 때 어떤 가문, 어떤 부족 출신이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으며,진정한 모슬렘이면 인종이나 가계는 불문에 붙이고 모두 교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그들의 주장이 였다고 합니다.

이후 알리는 이 하지리파의 진압에모든 것을 빼앗겼으나, 결국은 그들이 보낸 이븐 무르잠이라는 자객(刺客)에 의해서목숨을 잃었고(661. 2) 그 때 그의 나이 60세, 이로서 정통 칼리프시대는 막을 내렸고,우마이야조의 세습칼리프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알리와 예언자의 딸 과티마와의사이에 두 아들, 알 핫산(al-Hasan)과 알 후사인(al-Husain)에 의해서 마호메트의혈통이 이어졌는데, 지금도 이 혈통을 이은 사람들을 샤리프(sharifs) 혹은 사이드(said)라는경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리를 정통으로 보는시아파가 나타났고,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니파와 갈라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시작되었습니다.

예정은 이 번호에서 이슬람의이야기를 마치고자 했으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열하다보니 길어져, 이슬람의 의례,생활모습, 그들이 남긴 문화,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왕조, 바그다드의아바스왕조,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왕조, 이집트의 파티마왕조 등에 관한 이야기는다음 호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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