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걸까 아닐까?
태풍 “곤파스”가 몇 년 전에 우리의 산하를 할퀴고 지나갔었죠. 그 때 거목들도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태풍이라는 바람의 위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내가 자주 오르는 산에 쓰러져 누운 나무들이 몇 그루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뿌리가 거의 밖으로 드러나 있음에도 매년 무성하게 잎을 내고 살아 있습니다. 경사진 땅바닥 아래로 머리를 두었으니 힘들 텐데 그래도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나무는 이렇게 돌봐주는 이 없어도 잘 살고 있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거동을 못하는 사람들은 병상에 누워있어야만 합니다. 장성요양병원 화재로 21명의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잠자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쓸 사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거동을 못하면 태풍에 쓰러져 누운 나무만도 못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늙어갑니다. 돌이나 쇠붙이는 생명이 없으니 늙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바위도 세월의 비바람을 겪으면 풍화되어 부스러지죠. 쇠붙이 역시 녹이 슬어 삭아버리고 맙니다. 기계인 자동차도 늙어갑니다.
늙은 자동차도 거동을 못하면 폐차장이라는 무덤으로 가야합니다. 내 발이 되어주는 애마가 년식이 좀 오래되었습니다. 볼일이 있어서 아침에 서둘러 차를 출발 시켰습니다. 서부간선도로에서 조금 정체현상이 있었지만 동부간선도로까지 막힘없이 왔습니다.
간선도로에서 목적지를 가기위해 빠져나왔습니다. 시내 도로라 신호등이 많습니다. 자연히 클러치를 자꾸 밟아야 합니다. 신호대기후 기어를 넣고 클러치페달을 밟았는데 발을 떼어도 페달이 튀어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자동차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장승처럼 서 있습니다.
뒤에서는 빵빵거리고 엄청 당황스러웠습니다. 결국은 차에서 내려 손으로 클러치페달을 원위치 시킨 후 살짝 밟았다 놓으니 기어가 작동이 되면서 차가 움직입니다. 그렇게 몇 개의 신호등을 거쳐 가는데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공업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잽싸게 핸들을 틀어 공업사로 들어가 세우고 클러치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디스크삼발이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난도의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하루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고 해서 낯선 곳에 애마를 맡겨두고 귀가를 했습니다.
사람이나 기계나 오래도록 쓰면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나이 들면 여기저기 고장이 나는 것이죠. 백발이 성성하고 이빨도 빠져 몰골이 흉해지는 것입니다. 기운도 쇠하여지니 걷기가 어려워집니다.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입니다.
요즘은 수목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을 마쳤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타당합니다. 강원도 산골소년으로 살 때 산속에 들어가면 푸근한 느낌을 갖고는 했습니다. 산의 정기가 몸에 들어오면 힘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는 꾀꼬리라는 새가 많았습니다. 노란색의 자그마한 새였죠. 맑고 깨끗한 목소리의 사람들을 말할 때 꾀꼬리 같다고 합니다. 실제로 산에 가서 꾀꼬리의 지저귐 소리를 들으면 청량감을 느낍니다. 우울한 기분도 씻은 듯이 날아갑니다.
그 래서 산 소년이 되어 산을 놀이터 삼아 살았습니다. 산에는 옻나무가 많았습니다. 옻오르면 고생을 많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옻나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꾀꼬리를 쫓아다니다 보면 이 나무 저 나무 가지에 걸리기 일쑤였습니다.
옻나무를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몸 어느 곳인가를 스쳤나 봅니다. 얼굴에 옻이 올랐습니다. 얼굴 피부가 맷돌처럼 되어 고생했습니다. 가렵고 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 이 산 저 산을 날렵하게 뛰어다니던 그 몸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고단함을 느끼고 몸이 쳐지는 현상은 나이가 많아졌다는 표시이겠지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자위해본들 몸뚱이가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인생 한 평생이 긴듯하나 길지가 않습니다.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선한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