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불천탑 운주사 기행
2013. 8. 13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운주사 홈페이지 운주사 소개에서>
<9층석탑 근처의 석불군>
<5층석탑(거지탑)>
<7층석탑 1>
운주사 계곡 서쪽 산록의 칠성바위라 불리는 곳의 큰 암반 위에 서있는 탑이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자연 암반 위에 탑신부 만을 건립하였다.
탑신석 각면에는 양쪽 귀퉁이에서 넓직한 우주가 두드러지게 모각되어 약간은 둔중한 느낌이 든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 괴임이 생략되었다.
대체적으로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에 반전이 나타나며 낙수면도 평박한 편이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얹혀져 있다.
전체 높이는 7m이고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7층석탑 설명서>
<7층석탑 2>
<칠성바위>
칠성바위는 둥그런 모양의 바위들을 다듬어 7개의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하여 놓았다. 와불이 북극성을 상징한다면 사찰에 배치된 석탑들이 이를 중심으로 한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이 칠성바위들은 북극성을 바라보며 북두칠성의 자리에 위치한다. 7개의 원반형 석재는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으로 배열되어 있다.
배열 상태와 원반 지름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와 흡사하여 칠성신앙의 조형물인 북두칠성석으로 보는 관점이 학계에서 대두되고 있다.
<칠성바위-칠성암 설명서>
<7층석탑>
7층석탑(유형문화재 276호)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직선적이고 다소 가파른 처마의 선,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예전 백제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운주사 탑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파격적이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 흐르는 듯 하다.
<7층 석탑 - 문화재자료 257호>
<석불군 >
운주사 불상 제작에 사용한 석질로 도달할수 있는 가장 최고의 작품이라 할만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상의 둥근 얼굴 선과 눈과 코가 매우 총명한 인상을 준다.
법의 자락도 수려한 곡선으로 한껏 예술적인 멋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고 불상의 얼굴이 위압감을 주거나 권위적이지는 않는다.
법의 자락도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이렇듯 운주사의 불상들은 친근미를 근본으로 제작된 듯 싶다.
위의 바위너설도 낙수를 피하려는 듯 의도된 제작 기법이 엿보인다. 거기에서 채석된 돌은 불상의 재료로 바로 사용하였다.
얼굴 모습이 이웃들을 닮아 친근하다.
민간에서는 이 불상들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큰 아들 내외, 손자손녀들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대가족군상들의 모습이라고 하기도 한다.
<시위불 >
와불아래 시위불로 불리는 석불 입상이 있는데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와 관련된 설화의 중심부분이기도 하다.
와불을 중심으로 주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좌협시불이 석가모니불, 우협시불이 노사나불이다.
<시위불 >
<와불>
와불(유형문화재 제 273호)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m, 입상 10.26m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세우려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와불 건너 펀의 산 언덕>
<시계 청소된 와불 건너편 언덕>
<7층 석탑이 보이는 건너편 지역>
<와불>
<시위불 >
<칠성바위 근처에 있는 두 개의 7층 석탑(유형문화재 281호)>
<불상군>
<불상군 중에서 형상이 뚜렷한 불상 모습>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불상 모습>
<여러 형태의 불상 모습들>
<7층석탑>
<넓은 암반 위에 세워진 거북바위 교차문 7층 석탑(유형문화재 279호)>
너른 바위를 온통 기단석으로 해서 서있다.
비스듬이 깎아지른 바위 위에 홈을 파서 탑을 세웠는데 그 건축 기술과 과학적 재치가 신비롭다.
얇은 옥개석에 처마귀가 솟은 걸로 봐서 백제계탑이다.
볼록 솟은 교차 문양은 동서남북 사방불을 상징하는 듯 싶다.
<거북바위 5층 석탑(문화재자료 256호)>
옥개석의 생김이 직선적이고 육중하다.
신라계 석탑양식이다.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 위에 1매의 방형판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탑신부를 세웠다.
전체 높이는 5.57m이다.
<종각>
<대웅전>
<3층석탑과 법성료>
<4층석탑(유형문화재 제 280호)>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의 석탑을 빼어닮은 완전한 신라탑의 유형이다.
전탑양식은 벽돌을 쌓아 만든 탑으로 그 형식에 있어서 옥개석(지붕돌)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목조 기와지붕의 양식이 아니라 계단식 지붕형태를 보여주는 점이 그렇다.
지금은 4층만 남아있으나 실재로는 7층 혹은 9층은 되었음직한 크기다.
일설에는 이 탑을 건립할 때 맑은 날 거대한 이무기가 감고 올라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그 요물을 벌하였는데 그때 이렇게 파손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운주사의 석질은 사토에 모래와 자갈이 섞인듯한 토속적인 돌담양식의 인상을 주고 있다.
반들반들 윤기가 나지 않고 거친듯하면서도 다정다감 포근한 인상을 더해준다.
전체 높이는 3.23m이고 고려시대 제작한 것이다.
<원구형석탑(유형문화재 제 282호)>
날씬하게 솟아오른 기단면석에 놓인 넓고 둥근 초가지붕같은 기단갑석 그 위로 점차로 작아지는 육중한 원형의 옥개석(지붕돌)이 탑신을 과감히 생략해 버린채 겹겹이 올라가 있다.
엄격한 형식과 규격을 뛰어넘어 더 본질적인 부처의 세계로 대자유의 정신으로 접근하려고 애쓰는 염원이 운주사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이 발우형 석탑이야말로 으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이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중생을 어서 구원하러 오시라는 염원으로 발우형(스님들 공양그릇)석탑을 세웠던 듯 싶다.
퇴수후 가장 큰 발우 순으로 밑에 놓고 그릇을 쌓아올렸던 삶의 지혜처럼 둥근 돌과 돌을 포개어 쌓아올린 정성과 사상이 돋보인다.
저렇게 둥글고 무거운 돌을 어떤 건축 기술로 다듬어 쌓아올렸을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롭다.
이 탑은 일제시대 때 찍은 사진에는 7층이었으나, 그후 3층이 소실된 것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마애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 275호)>
거대한 바위벼랑 암벽의 요철부분을 그대로 살려 부조로 새긴 불상이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으나 머리와 이마가 거의 없고 희미한 눈썹과 귀는 양각되었으며 귓바퀴까지 음각되었다.
타원형으로 부드럽게 부조된 상호는 눈과 입이 희미하다.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 최근에도 바위가 균열되어 떨어지는 등 파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애여래좌상 위에 바위구멍이 뚫어진 걸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을 조형한 이는 이름도 없이 이미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겠으나 그가 추구한 이상은 오늘도 희미하게 남아 우리를 반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명당탑>
운주사의 주산인 거북이산(영귀산)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탑으로써 넓적한 하대석에 사각형의 기단면석 위에 놓인 둥근 원반형 석탑이다.
운주사의 석질은 이렇게 시루떡처럼 잘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특이한 형식의 석탑 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넓고 둥근 돌을 둥근 탑신을 세운 그 위에 층층이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옥개석 밑면을 보면 연화무늬가 둥그렇게 새겨져 있다.
지금 남은 탑은 자세히 보면 그 석질이 서로 다른면을 발견할수 있다.
이곳이 천년을 지배할 황제가 태어날 천년 군황지혈이라 하여 명당을 찾는 무리들에 의하여 그 훼손의 정도가 남다르다.
앞의 4층 석탑도 훼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훼손이 심한 4층 석탑>
<원구형석탑(유형문화재 제 282호)>
<불사바위 가는 길 바위 절벽 밑에 안치된 불상>
불사바위
영귀산 8부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바위 이곳 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공사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
이곳에 이 바위 한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도 신비로운데 또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고난받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한 선인들의 혜안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훼손된 불상 모습>
<불상>
<원형다층석탑(보물 제 298호)>
자연적인 거북형의 영귀산에 자리한 명당탑에 비해 인공적인 거북형의 하대석 위에 자리한, 10각 기단부, 연꽃문양의 기단갑석에 둥근 탑신석과 둥근 원형의 옥개석(지붕돌)을 갖춘 아름다운 석탑이다.
원과 원으로 이어진 우주전체를 조형하고 있는듯한 인상이다.
기단갑석에 두른 연꽃문양,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부처밖에 없다.
탑 전체가 부처를 상징한 탑이다.
달리보면 일반적인 탑의 꼭대기 부분인 앙화와 보륜 그 위의 보개, 수연, 보주, 찰주 등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연화탑은 현재 6층만 남아있으나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온전히 남아있었다면 그 해석이 더 용이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아하고 개성적인 아름다운 석탑은 이곳 운주사만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석탑 예술의 특징이다.
둥근 처마를 잘빗어 내린 옥개석(지붕돌)과 둥근 탑신의 절묘한 조화도 경이롭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기단갑석의 연화무늬의 선을 쪼은 정자국이 방금한 듯 남아있어 조형자의 혼과 숨결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기단면석은 10각도인데 이 10각도 원에 가까우므로 탑의 명칭이 원형다층석탑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주춧돌과 석탑>
<원형다층석탑(보물 제 298호)>
<원형다층석탑과 석조불감>
<석조불감>
석조불감(보물 제 297호)
팔작지붕 형태의 돌집으로 그 안에 두분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두분의 석불은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권 40 능성현 불우조에 이 상배불이 언급되어 있다.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 천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이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돌문을 열고 닫을 때 조정의 인재들이 죽어나가 세상이 시끄러워 도선국사의 아내가 이 돌문을 떼어 영광 칠산앞바다에 내다버렸다한다.
두 분의 불상이 거대한 돌집 안에서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는 채로 조성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며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훌륭한 작품이다.
석재로서 거대한 불감을 조성한 것은 아직 그 유래가 없는데 높이 5.5m 전면폭 4.9m 측면폭 5m이다.
7층석탑(유형문화재 278호)
7층석탑(유형문화재 278호)
<광배를 갖춘 불상(유형문화재 제 274호)>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있는 사다리꼴형의 판석에 돋을 새김하여 새겼다.
가늘고 길게 솟은 코, 두툼한 입술 크고 긴 귓바퀴가 선명하다.
육계는 솟아 있으며 합장한 수인과 법의 자락은 그저 선만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광배를 갖춘 불상은 매우 특이한 유형이다.
주변전체에 동글동글 구름문양의 화염문을 아름답게 음각하였다.
이렇게 화염문을 음각한 정도의 수준이라 한다면 이곳 조성자들이 불교 사상에 정통하였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얼굴은 뚜렷하지 않지만 권위나 위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매우 정겹고 친근감이 가는 모습이다.
발굴 조사때 조선시대 때의 기와가 많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 목조 기와집을 지어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한 돌부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발가락이 선명하고 그 인상 또한 친근감이 묻어나온다.
가장자리에 서있는 애기 돌부처는 마치 갓난아기마냥 정겹고 앙증맞다.
발가락과 손 모양이 너무나도 귀엽다.
운주사의 불상들이 갖는 특질들은 이렇게 너나가 따로 구분되어 높은 단위에 올라 위압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함께 각기 다른 개성으로 정겹게 하나되어 있다는 그 어울림에 있다.
남편과 아내 갓난 아이가 오손도손 정겹게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마치 부처님의 자비로운 세계가 실현된 듯 사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7층석탑 1(유형문화재 제 276호) >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직선적이고 다소 가파른 처마의 선,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예전 백제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운주사 탑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파격적이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 흐르는 듯 하다.
<석불>
마치 재래 시장의 오일장 거리에 나선 듯 바위 너설에 크고 작은 불상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서로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고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장날의 거리 풍경처럼 길가에 소중히 기른 채소며 집짐승 산나물들을 들고 나와 전을 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세상 살아가는 인생의 아프고 슬프고 기쁜 이야기를 나누는 듯 소란스럽다가도 언뜻 보면 고요한 좌선 삼매경에 들어 주위가 언뜻 외경스럽다.
편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교차되어 오가는 듯 마음의 문을 열어 그 안에 부처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번뇌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8만 4천 법문을 들려 주는 듯 싶다.
크고 작은 불상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열된 모습이 특이한 풍광을 자아낸다.
<석불군>
합장 수인의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배치된 형식이다.
바위너설 안에 모셔져 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풍우를 피할수 있게 바위 너설 위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바위너설이 실내의 법당 역할을 훌륭히 해낼수 있도록 조성한 듯 싶다.
다른 곳의 불상 보다도 그 생긴 모양이 특이하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가 인상적이다.
그저 우리 이웃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마치 천불천탑을 세웠던 듯 이런식으로 불상이 배치된 것을 보면 마치 천불이 이곳에 실재했는 듯 싶다. 맨 오른쪽 불상 대좌 뒤편에서는 8-9세기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토 되었다.
특이하게도 중성불의 개념을 깨뜨려 아버지부처 어머니부처 아들 딸 부처로 부르고 있는데
운주사 불상을 바위너설 야지에 집단적으로 배치한 모습과 더불어 이 또한 운주사만이 가지는 특이한 개성이라 할만하다.
<9층석탑(보물 제 796호)>
탑 높이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한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형식과 같아서 백제계 석탑이라 한다.
탑신석 안에 겹마름모꼴의 기하학적 무늬와 네잎의 꽃잎 문양은 유일하게 운주사의 탑만이 간직하고 있다.
겹마름모꼴은 사방팔방에 계신 부처님을 그리고 중앙의 네잎의 꽃잎문양도 사방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처마안의 무늬를 보면 밝은 빛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인상이다.
운주사에 있는 각 골짜기의 부처님이 비로나자불(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만큼,
이처럼 환한 빛살이 중앙에서 하늘로 퍼져오르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비로자나탑이라 불러도 좋을 듯 싶다.
아래 거대한 기단석도 잘라서 운반하였고, 일설에는 이 탑을 운주사 중심탑이라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한다.
<운주사 천불천탑 전경>
<운주사의 설화>
운주사의 불적은 많은 탑과 불상이 한 지역에 빽빽이 들어서 있다는 점에서 경주의 남산과 자주 비교된다.
그렇지만 운주사의 불상과 탑은 남산처럼 계곡에 각기 시기가 다른 별개의 불사로 이루어진 유적이 아니어서 분명히 구별된다.
100여분의 돌부처와 21기의 석탑이 야외 ㅈ너시장을 방불케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유적이다.
굳이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도선의 설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주사는 미완의 도량으로서 영원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
첫댓글 아름다워요....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