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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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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스크랩 백석 시모음 2
기쁨 추천 0 조회 335 13.12.17 2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단 풍 (丹 楓)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느뇨.
빨간 정(情)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즐댄다.
어데 청춘(靑春)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개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
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
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山 宿

旅人宿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문들문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木枕들을 베여보며
이山골에 들어와서 이 木枕들에 새깜아니때를 올리고간 사람
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들문들문 : 불을 많이 때어 온돌방에 아지랭이 끼듯 더운 모양
그즈런히 : 여러개의 물건이나 사람들이 한줄로 고르게 나란히 있는 모양. 가지런히



鄕 樂

초생달이 귀신불같이 무서운 산(山)골거리에선
첨아 끝에 종이등이 불을 밝히고
쩌락쩌락 떡을 친다
감자떡이다
이젠 캄캄한 밤과 개울물 소리만이다


감자떡 : 감자를 삶아가지고 바가지에 담아 홍두깨 같은 방망이로 짖이기면 나중에는 찰떡이 된다. 이때 방망이로 짖이길때 쩌락쩌락 하는 소리가 난다. 장진에 가면 감자가 많은데 대개 색깔은 시커멓다. 이런 감자로 떡을 한다.
백석은 깊은 산중에서 감자떡 치는 소리를 들으며 잔치 준비로 떠들썩하게 캄캄한 밤을 보낸다. 그리고 말없이 흐르는 개울물소리에 잔치소리도 깊어가는 것을 느낀다.


夜 半

토방에 승냥이 같은 강아지가 앉은 집
부엌으론 무럭무럭 하이얀 김이 난다
자정도 활신 지났는데 닭을 잡고 모밀국수를 눌은다고
한다
어느 山 옆에선 캥캥 여우가 운다

야반 : 한밤중 활신 : 훨씬
눌은다 : 만든다. 국수를 국수분틀에서 뽑아낼때 누른다는 표현을 씀
한밤중의 심사를 읊은 시 < 야반(夜半) > 도 있다. 부엌에서 무럭무럭 올라오는 김냄새를 맡으며 여우가 우는 소리를 듣는 백석은 함경도의 산골에서 고향의 정취도 어렴풋이 느낀다.



白 樺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 너머는 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자작나무 : 자작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의 깊은 산에 나는데, 높이는 20m가량. 나무껍질은 희며 얇게 벗겨짐. 좀에 꽃이 이삭모양으로 됨. 나무는 가구재로 쓰인다. 백화(白樺)라고함
감로(甘露) : 단맛이 나는 이슬 박우물 : 바가지로 물을 뜨는 얕은 우물.
시 <백화>는 함경도와 평안도의 접경의 깊은 산골에서 본 수혜(樹海)의 자작나무를 보고 감명을 받아 쓴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3월 ‘녀성’지에 발표>
해설 --- 조선일보 [NK리포트] 2001.2.19일자
*백석(1912-1963?) 누구인가

평북 정주 출생. 본명은 백기행. 오산학교를 다녔고,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그해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아오야마(청산) 학원 영문과에 유학했다.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 ‘여성’ 편집을 맡았으며, 시 ‘정주성’ 등을 발표했다.
1936년 33편의 시가 실린 시집 ‘사슴’을 자비로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면서 순수 서정시인으로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등으로 재직하다 만주로 가 방랑생활을 했으며 광복후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가 북한 체제에 남게 됐다. 북한에서는 번역과 동화시 창작에 주력하다 숙청당한 뒤 1963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북지식인의 행로--백석

정부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를 발표했을 때(1988년) 시인 백석은 정갈한 옛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는 애초에 북한이라는 '체제'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고향이 소월과 같은 평북 정주였고, 그는 귀향했을 뿐이었다. 고향이 그의 시심의 주요한 원천이면서 그곳 언어가 그의 시혼의 모태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념은 없었다. 식민시대를 방랑으로 보낸 그는 광복 후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고향에 깃들었으나 그것이 영원한 구속이 돼버렸다.
백석은 자비로 간행한 시집 '사슴'을 통해 1930년대 후반기 모더니즘 계열의 신인으로 단숨에 한국 문학사에 떠오른다. 한정판 출간인 탓에 문학지망생들에게 이 시집을 필사하는 것은 유행이었고, 윤동주도 이 필사본 시집을 간직했다. ‘사슴’은 당대 '가장 많이 필사된 시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시는 향토적이고 서정적이었지만 모더니즘 풍의 세련된 언어감각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주착없는 향토주의'와는 구별되었다. '녹두빛 더블 양복에 검은 웨이브(물결 머리)를 날리면서 광화문을 지나는’ 백석의 풍모는 이국적이었다. 백석의 이같은 도회풍 감각과 재주는 조선일보에서 잡지 '녀성'(여성)을 편집할 때 발휘돼 연이어 매진되는 기록을 낳기도 했다.


백석은 1930~40년대를 거의 방랑으로 일관하면서 어둡고 긴 역사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자 했다. 그의 우울과 방랑벽은 체질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제시대의 주눅들고 피폐해진 삶을 남도와 만주 등을 유랑하면서 이겨내고자 했고 그것을 빛나는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해 낼 수 있었다.
몇 번의 결혼 실패와 잦은 이직, 그리고 만주 등지에서 소작인,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세관원 등으로 극도로 가난한 생계를 유지하던 방랑의 끝 지점에서 그는 광복을 맞았다. 34세였다. 그러나 오랜 방랑과 생활고로 그는 초로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내면의 피로함을 안고 그가 깃든 곳은 고향이었다. 아오야먀(청산)학원 시절, 불어 영어 독어 러시아어 등에 뛰어나 동료 학생들로부터 스파이로 오해받을 정도였던 그는 잠시 고당 조만식의 통역비서를 맡기도 했다.


백석의 시가 순수서정적이었던 때문인지 북한에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 같다. 북한 정권 초기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고 하지만 북에서의 그의 삶은 분명하게 밝혀진 게 별로 없다. 문학사 속에서도 1948년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북파 작가인 허준이 신천지에 발표한 몇 편의 시를 마지막으로 그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불우했던 삶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끈을 지속하고자 했던 흔적들을 남겨놓고 있다. 최근 알려진 백석의 행적은 1950년 전후 주로 번역가로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1949), 빠블렌코의 ‘행복’(1953), ‘이싸꼽프스키시초’(중국길림성 연변교육출판사, 1954) 등이 그가 남긴 번역작품들이다.


그후 그는 동화작가로서 문학적 글쓰기를 지속시켜 나가고 한편으로는 '조선문학'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감각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의 동화는 당시 박세영(북한애국가 작사자)이 극찬할 정도로 문장 감각과 우의(우의)성이 빼어났다. 특히 ‘집게네 네 형제’는 당시 아동문학 불모지와 다름 없던 북한에 동물시리즈 동화 유행을 일으켰을 정도다.
'조선문학'에 실린 시들은 내용은 체제 선전과 전후 복구 건설기에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데 바쳐져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그가 30년대에 줄기차게 그려갔던 마을 공동체의 신화와 언어에 근거한 것이었다. '갓나물'(1959.6) '동식당'(1959.6) '축복'(1959.6), '눈'(1960.3), '전별'(1960.3) 등의 시가 그러하다.


이용악, 오장환 등 30년대에 같이 활동했던 시인들이 김일성 찬양과 체제 선전을 위해 생경한 구호를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백석의 시는 서정성과 토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시인으로서의 존귀함을 잃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결벽증이 있었던 그의 습벽은 그의 시인으로서의 존재감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고 그것이 북한 체제에서의 현실적 삶에서도 별로 굽혀들지 못했던 모양이다. 여타 장르에 비해 계급적 성향이나 이념적 성향이 희석될 수 있는 번역 작업과 동화 창작에 자신의 마지막 시혼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는 그같은 내면의 고통을 “유년들의 세계는 주위 사물들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외어보는 세계이다. 유희에서 시작하여 유희에서 끝나는 세계이며 꿈에서 시작하여 꿈에서 끝나는 세계이다”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50년 중반 이후 김일성의 권력 투쟁이 강화되면서 이같은 백석의 시적 감각은 북한의 문예정책과 상충될 수밖에 없었고, 60년대 초에는 집필금지를 당하고 결국 숙청에 이르게 된다. 그의 사망시기는 52세 되던 1963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백석은 엄밀히 말하면 재북파 시인이었지만, 남한에서는 근 40년 동안 그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다. 북한에서도 그의 순수 서정성과 몰이념적 성향이 문제가 돼 숙청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무명의 존재가 되었다. 재북파 문인들의 이같은 운명은 이념인으로서의 자기 선언과는 관계없이 역사의 격랑이 어떻게 한 개인의 운명에 개입해 그 존재를 망각의 늪으로 빠트리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적 장면이다.


/조영복 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夕陽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돗보기다 대모체돗보기다 로이도돗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걸리며
투박한 北關 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살어졌다


개발코 : 개발처럼 뭉퉁하게 생긴 코 내지는 넙죽한 코를 말함.
안장코 : 말의 안장처럼 콧등이 잘룩하게 생긴 코.
질병코 : 거칠고 투박한 오지병처럼 생깉 코.
학실 : 노인들이 쓰는 안경. 특히 다리 가운데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마든 안경.
돌체돗보기 : 석영(石英) 유리로 안경테를 만든 돋보기.
대모체돗보기 : 바다거북의 등 껍데기로 안경태를 만든 돋보기.
로이도 돗보기 : 미국의 희극 배우. 헤롤드 로이드(1893~1971). 로이드 안경에 맥고모자 차림으로 192평균적 미국인을 표현함. 채플린, 키튼과 함께 3대 희극왕으로 불림. 주연 작품으로 '로이드의 수명', '로이드의 활동광'. 미국의 희극 영화 배우 로이드(H.Loyd)가 영화 속에서 끼었던 안경에서 유래.둥글고 굵은 셀롤로이드테의 돗보기(안경)
쇠리쇠리한 : 눈이 부신. 눈이 시우린, 시리운.
백석은 38년 4월의 문단에 그의 뛰어난 시 6편을 발표했다. 그중에서 「삼천리문학」 4월호에 발표한 시는 <석양(夕陽)>,<고향>,<절망>등 모두 3편이었다. 봄날의 따뜻한 오후 무렵 함경도 함흥 북관(北關)의 장날거리를 묘사한 시 <석양(夕陽)>은 백석의 봄나들이 풍물시이다.
시골장터의 영감들의 희극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서글픈, 어딘지 모르게 비감이 어리는 수작(秀作)이다

 

 

 



접시 귀에 소기름이나 소뿔등잔에 아즈까리 기름을 켜는
마을에서는 겨울 밤 개 짖는 소리가 반가웁다.
이 무서운 밤을 아래웃방성 마을 돌아 다니는 사람은 있어
개는 짖는다
낮배 어니메 치코에 꿩이라도 걸려서 山 너머 국수집에 국수를 받으려 가는 사람이 있어도 개는 짖는다
김치 가재미선 동침이가 유별히 맞나게 익는 밤

아배가 밤참 국수를 받으려 가면 나는 큰마니의 돋보기를
쓰고 앉어 개 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접시귀 : 반찬 또는 과실(果實) 따위를 담는 그릇으로 운두가 썩 얕고 짝 바라진 그릇임
소뿔등잔 : 속을 파낸 소뿔에 기름을 채워 심지를 넣어 불을 켜는 등잔불
아래웃방성 : 방성(榜聲). 방꾼이 방(알 리는 말) 을 전하려고 아래윗마을로 다니면서 크게 외치는 소리.
낮배 : 낮에. 한낮 무렵. 어니메 : 어느곳에. 치코 : 귀게 얽어 맨 새잡이 그물의 촘촘한 코.
가재미 : 겨울철 김치를 묻은 다음 얼지 않도록 그 위에 수수깡과 볏짚단으로 나무를 받쳐 튼튼하게 보호해 놓은 작은 움막. 넓은 뜻으로는 김치독 묻어 두는 곳을 말함
동침이 : 통째 또는 크게 썬 무우를 잠깐 절이고, 국물을 흥건하게 하여 심심하게 담근 김치의 한가지. 물김치
아배 : 아버지. 큰마니 : 할머니
개짖는 소리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 <개>는 익성동 오산마을에서의 어린시절을 그리고 있다. 국수라는 맛있는 매개물을 통해 개짖는 소리까지 들으며 무서운 고향에서의 어린시절을 회상한 詩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피 ㅅ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것과
내 손에는 新刊書 하나도 없는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世上事」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눈가를 내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따디기 :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무렵.
누굿한 : 여유있는. 습한 느낌이 있어 축축한
살틀하던 :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백석 시인의 명작(名作) <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여성」 1938년 4월호에 발표 되었다. 이 시에서 백석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리고 사랑했던 란(蘭)을 떠 올리며 자신의 가난하고 외로운 심사를 읊었다.


이 시는 백석의 절창(絶唱)이다. 그렇게 자기를 위해주던 친구 신현중이 자기를 버린 일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와 결혼한 사랑하는 란이를 생각하며 모든 일이 덧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참을 수 없다고 느낄 때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미어지며 뜨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시인의 고절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시를 두고 「여성」지 4월호 편집후기에서는 『백석씨(白石氏)의 비시(扉詩)등은 모다 이달호를 유달리 장식해주셨읍니다 』라고 평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내보이는 백석의 위대한 문학성은 당시로서는 드문 문학행위였다. 특히 시의 경우는 많은 시인들이 상징적인 수법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은폐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백석은 자신의 담담하면서도 치열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닫아두지 않고 분출했던 것이다. 고도의 문학성을 유지하면서도 너무나 시인 자신의 내면세계를 솔직히 표현하는 백석의 대표적인 시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라는 작품이다.

 

이러한 시를 당시 「여성」편집자는 비시(扉詩)라고 높이 평가를 하였다. 자신의 감정을 구김살없이 표현하며 시골의 사립문을 언제나 열고 닫듯이 담담하게 쓴 시를 두고 현대의 비시(扉 (문짝비) 詩 )로 보았던 것이다. 비시는 우리 먼 조상들의 문자 행위였다. 자신의 생활상을 담담하게 시(詩)로 기술한 의식있는 고려조의 문인들 그리고 조선조의 소수의 문인들에 의해 그 전통이 구준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천재시인 백석은 놀랍게도 그러한 전통을 다시금 계승하고 있었다.


이 시는 훌륭한 삽화가의 그림속에 담겨져 있었다.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 위를 커다란 나비 한마리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고 있는 동상처럼 앉안있는 그 옆에 백석의 측면 모습이 그려져 있는 이 삽화는 백석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인 정현웅(鄭玄雄)이 그린 것으로 시와 잘 어우러져 처절하고 쓸쓸한 느낌을 잘 나타내 준다.


백석은 함흥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시작품을 우편으로 보낼때면 「여성」지 편집자였던 정현웅에게 보냈던 것이다. 화가이면서도 훌륭한 수필을 간혹 쓰던 정현웅은 문학적 지식도 상당히 높아 백석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38년의 봄부터 이어지는 백석의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는 한해를 거의 지배하였다.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에서의 처량한 분위기며 <古響>, <절망>,<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보여주는 슬픔과 체념의 그림자는 백석이 더욱 '아서라 世上事'같은 노래에 자신의 심경을 의탁했다.
부모님에게 돈을 부쳐주고 나면 남는 것은 빠듯한 생활비이다. 그래서 더욱 백석은 사 보고 싶던 책도 더 사 보고 싶고 「아서라 세상사 」라는 노래도 듣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것이었다


외가집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가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복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 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와곬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 솥 적은 솥을
모주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쳐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복족재비 : 집족재비의 일종으로 참족재비와 구별됨
씨굴씨굴 : 수두룩하게 많이 들끓어 시끄럽고 수선스런 모양.
쇳스럽게 : 카랑카랑하게. 기와골 : 기와집 지붕 위의 숫기와와 숫기와 사이
무리돌 : 많은 돌. 길바닥에 널린 잔돌. 뒤우란 : 뒷마당 울타리 안쪽.
째듯하니 : 환하게. 재통 : 측간. 변소. 잿다리 : 재래식 변소에 걸쳐놓은 두 개의 나무.
시렁 : 물건을 얹어 두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의 벽에 건너질러 놓은 두 개의 시렁가래.
모랭이 : 함지 모량의 작은 목기. 넘너른히 : 이리저리 제각기 흩어서 널브려뜨려 놓은 모습.
<개>와 함께 고향의 분위기를 느끼는 약간은 색다른 시 <외가집>은 시골의 부유한 외가집에서 즐겁지 못한 생활의 경험을 떠올리며 지은 귀중한 시이다.
조선일보사에서 추진한 「시가집(詩歌集)」출판을 위해 자신의 새로운 시 두 편을 선보이는 백석의 노력은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여기에 실린 시 <외가집>이라는 작품은 백석의 우수성을 한것 보여준 명작(名作)이다. 백석 스스로 편집부에 건내준 이 시는 많은 시인들이 감탄한 작품이다.
김춘수(金春洙)는 근래에 발표한 논문 <산문시와 이야기시의 전개 양상. 1993. 7 현대시>에서 백석의 시 한편(외가집)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가장 한국적인, 순수하리만큼 한국적인 시다. 현대시로서는 독보적인 위상을 가졌다고 해야 하리라』

 

 

가무래기의 樂

가무락조개 난 뒷간거리에
빗을 얻으려 나는 왔다
빗이 안 되어 가는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도 춥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내 마음은 웃즐댄다 그무슨 기쁨에 웃즐댄다
이 추운 세상의 한 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얼마나 기뻐하며 락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벼개하고 누어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가무래기 : 모시조개. 새까맣고 동그란 조개
가무락조개 : 가무래기. 모시조개. 대합조개과에 딸린 바닷물 조개.특히 애도에서 물이 빠진후 많이 잡힌다.
뒷간거리 : 가까운 거리에. 가까운 거리를 뜻함.
능당 : 능달(응달). 해가 들지않아 그늘진곳
락단하고 : 즐거워서 손뼉을 치고.
그즈런히 : 가지런히
멧새소리와 같은 겨울이 배경인 시 <가무래기의 락(樂)>은 세상을 향한 백석의 시각이 담겨 있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 나라, 이 땅에서 버림받은 백석 자신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 시는 가난한 백석의 모습을 보여준다. 뒷간거리에 햇볕을 쪼이러 갔다가 햇볕을 못 쪼이고 추운 거리를 배회하며 오히려 웃즐대기도하는 백석은 이번에는 놀랍게도 자신을 가무래기에 비유한다. 가무락 조개들의 환영을 받으며 응달 외진곳에 조개들과 같이 누워 있을때 가난한 친구들인 조개들이 이 세상을 대신 비웃어 주며 세상을 욕한다는 내용이다.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 갔다가 못 빌리고 돌아서는 백석의 이야기가 은연중에 맺혀있다.

 

 

 

이주하 이 곳에 눕다


가난한 아들로 단천에 나니
재간이 뛰어났다
자라 영생에 배우고
뒤에 영신에 가르칠쌔
맑고 고요한 마음이
하늘과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
뜻을 두고 스물세살로
동해에 가니
우리드의 정은 울다

 


단천 : 함흥에서 홍원, 신포, 신창, 이원을 지나면 함경산맥과 동해안의 해안가로 둘러쌓인 함경남도의 열여섯군 중의 하나인 이곳이 나온다
영신 : 함흥에 있는 보통학교 교명
제자 중 한 사람인 김철손은 아직도 이 시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었다.
당시에 비석 세울 돈이 없이 고심하던 중 후배들과 동료 그리고 선배들의 푼돈을 각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비석을 마련했으나 작은 비석에 비문이라도 새겨 넣고 싶었다. 그래서 은사이면서 시인인 백석에게 비문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철손은 비문의 크기상 77자 밖에 들어가지 않아 백석에게 꼭 77자로 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백석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진혼시(鎭魂詩)를 지어 죽은 제자의 넋을 위로했다.
김철손은 아직도 이 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감동적인 문장으로 몇 십년 전에 어느 신학교 교지신문에 < 어느 일생(一生) > 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의 서두를 잡았다.
『저 북녘 하늘 밑 어느 산(山) 속에 임자모를 무덤 하나가 외로이 서있을 게다. 그래도 그 무덤을 지키고 있는 자그마한 돌비가 하나 그 앞에 서 있을 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온 그 돌비의 앞면에는 ‘이주하 이 곳에 눕다’라고 새겨 있었으며 뒷면에는 그의 일생(一生)을 모두 77 글자로 엮어 놓은 서사시적 문구가 새겨 있었다……』


通營(통영)


녯날엔 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가지
않은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저녁 소라방등이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나는 비가 날렷다


천희 : 바닷가에서 시집 안 간 여자를 '천희'라고 하였음. 또한 천희(千姬)는 남자를 잡아먹는(죽게 만드는) 여자라는 속뜻도 있다.
미역오리 : 미역줄기.
소라방등 : 소라의 껍질로 만들어 방에서 켜는 등잔.
이 시인의 포-즈에는 냉연(冷然)하고 태연(泰然)하려는 점이 보인다. 눈물과 진어(眞
語)를 파는 데까지 이르렀던 반동(反動)으로 현대(現代) ― 이 감상(感傷)을 폭로시켜 조소(嘲笑)의 대상(對象)이 되기를 싫어하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나 이 시인(詩人)의 냉연(冷然)한 포-즈 뒤에는 오히려 얼굴을 내여미는 처치할 수 없는 안타까움까지를 미도(味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집의 반(半)을 넘어 잃어 버린다 할 것이다』
미도(味到) : 맛볼 정도로 도달. 맛보아 깨달음

 

- 박용철 評 -

박용철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읽어 내고 있다. 그는 특히 시 <통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에로 들면서 백석 詩의 참맛을 알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더욱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그의 시의 깊은 뜻을 이해하라고 촉구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백석 시집의 가치를 반 이상을 잃어 버린다고 진단하였다. 박용철은 백석을 최고(最高)의 시인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불행히도 얼마 뒤에 바로 요절을 하여 그는 시인 백석의 위대한 시적 성취를 더 이상 평가하지 못하고 훌륭한 시평론가로서 가장 큰 아쉬움을 남기고 한국 문단에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고사(古寺)

부뚜막이 두 길이다
이 부뚜막에 놓인 사닥다리로 자박수염난 공양주는 성궁미를
지고 올은다

한말 밥을 한다는 크나큰솥이
외면하고 가부틀고 앉어서 염주도 세일만하다

화라지송침이 단채로 들어간다는 아궁지
이 험상구즌아궁지도 조앙님은 무서운가보다

농마루며 바람벽은 모두들 그느슥히
흰밥과 두부와 튀각과 자반을 생각나하고

하폄도 남즉하니 불기와 유종들이
묵묵히 팔장끼고 쭈구리고 앉었다

재안드는 밤은 불도 없이 캄캄한 까막나라에서
조앙님은 무서운 이야기나하면
모두들 죽은듯이 엎데였다 잠이 들 것이다

(歸州寺 - 咸鏡道咸州郡)



붓두막 : 부엌 아궁이 편에 흙과 돌을 섞어 쌓아서 솥을 걸쳐 놓은 것.
공양주 : 부처에게 시주하는 사람 또는 절에서 밥을 짓는 중.
성궁미 : 부처에게 바치는 쌀.
자박수염 : 다박나룻. 다보록하게 함부로 난 수염.
화라지송침 : 소나무 옆가지를 쳐서 칡덩굴이나 새끼줄로 묶어 땔감으로 장만한 다발.
조앙님 : 조왕님. 부엌을 맡으은신. 부엌에 있으며 모든 길흉을 판단함.
하폄 : 하품.
불기 : 부처의 공양미를 담는 그릇. 모양이 불발(佛鉢)과 같으나 불발은 사시(巳時)에만 쓰나 불기는 아무때나 씀.
유종 : 놋그릇으로 만든 종발.
재(齋) 안드는 : 명복을 비는 불공이 없는
귀주사 : 함흥시 경흥리(慶興里)에 있는 사찰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전 한때 이곳에서 독서를 하였으며 그후 왕위에 오른후 수리하여 큰 절이 되었다. 관북(關北)에 있는 선교(禪敎)의 대본산(大本山)의 하나가 되었다. 「함산지(咸山誌)에 의하면 예로부터 함흥근교의 귀주동(歸州洞) 설봉산 아래있는 절로 기록되어있다.


이 <고사>는 함흥 설봉산(雪峰山)에 잇는 유명한 사찰로 단풍으로 명성을 얻었던 귀주사(歸州寺)의 가을 모습을 보고 백석이 읊은 것이다. 함흥팔경(咸興八景)중에서 성천강 은반(成川江銀盤), 만세교 석조(萬歲橋夕照), 귀주사 단풍(歸州寺丹楓)은 백석이 발음했던 3곳의 명소(名所)였다. 즉 성천강의 물빛깔이며그위 만세교의 저녁놀에 비치는 풍정, 그리고가을 귀주사의 단풍은 절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백석은 귀주사에 와서 우선 절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보고 반하였을 것이다.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자리잡은 귀주사는 커다란 솥으로 유명했다. 행락객이 붐비는 이곳은 많은 스님과 보살등이 귀주사에 있었던 관계로 큰 솥을 정좌하기 위해서 부뚜막을 높게 만들어 양쪽의 경사진 측면 위로 사닥다리를 놓고 쌀을 지어날라 공양(밥)을 했던 것이다.


함흥에 있었던 금남 이석훈도 「삼천리」지 39년 1월호에 <함흥풍물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겨울 귀주사의 풍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歸州寺
함흥동방이십리(咸興東方二十里) 역시 있을만한 곳에 절은 있었다. 절앞어구는 장안사(長安寺)의 그것과비슷하게 숲이욱어졌다. 山가파로이 높고 골은 깊다. 여울물이 마르고 돌들이 드러나 하이킹男女들의 쉬임자리가 된다. 그래도 칡넝쿨욱어진밑에 새목축일 물은 남어있다. 힌구름이 갈피갈피 山위로날고 가마귀가 두어마리씩 우짓는다. 누가 시조(時調)를 읍조리는소리 한가로이 들린다. 종(鍾)이라도울지않나?』



산곡(山谷)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 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곬작이다
나는 이 곬작에서 한겨울을날려고 집을한채 구하였다

집이 멫집되지않는 곬안은
모두 터알에 김장감이 퍼지고
뜰악에 잡곡낙가리가 쌓여서
어니세월에 뷔일듯한집은 뵈이지않었다
나는 작고 곬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곬이다한 산대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채 있어서
이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내고
산을돌아 거리로날여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발은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통있었다

낮기울은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 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땅에 가서 꿀을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러한 백성들도 다 제집으로 들은뒤에
이 곬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아주까리 : 버들옷과에 딸린 일년생풀
잠풍하니 : 잔잔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터앝 : 텃밭. 집의 울안에 있는 밭.
돌능와집 : 납작납작한 돌을 지붕에 기와대신 올린 집으로 깊은 산골의 집에서 많이 보편화되었다
남길동 단 : 저고리 끝 깃동에 멋있는 남색을 단
낮기울은 : 해가 저물어가는. 도락구 : 트럭
장진 땅 : 장진호수가 유명하다. 부전고원(赴戰高原)의 일부인 장진호수는 길이가 20Km에다가 둘레길이는 120Km의 인공호수이다. 표고 1,200m의 황초령(黃草嶺)을 인크라인으로 올라오면 장진군(長津郡)의 관문인 황초령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장진선(長津線)의 종점인 사수역에 하차하여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장진땅의 기후는 한랭하여 벼농사를 하지 못하며 감자, 귀리 등의 밭작물이 성하며 겨울철에는 감자국수, 감자떡을 별미로 하고 있다.
백석은 그동안 함경남도 일대를 기회있을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백석은 남들이 유명하다는 곳에 가서도 결코 시를 지어내지않고 이름모를 장소나 지명에 시를 짓는 서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시가 바로 <노루>와 <산곡(山谷)>이다. 산골 깊은 곳에 가 그 곳에서 남들은 다 그 곳을 피하는 겨울철에 혼자 들어와 살고 싶다는 백석이 그려낸 산골 마을의 풍경인 <산곡(山谷)>과 함흥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 장진호수가 나오는데 그 호수 근처의 이름없는 산골 마을에 가서 장날 구경을 하는 백석이 노루를 보고 읊은 시 <노루>가 단연 <함주시초>의 백미(白眉)이다.


노루


장진(長津) 땅이 지붕넘어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찻떡이 흔한데다
이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왔다

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등에를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먹었다하고
설흔닷냥 값을불은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힌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스너슬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듯이
새깜안눈에 하이얀것이 가랑가랑한다.


넘석하는 : 목을 길게 빼고 자꾸 넘겨다보는.
자구나무 : 콩과에 딸린 낙엽교목. 산과 들에 저절로 나며 높이는 10m 안팎으로 밤이되면 잎이 자는것처럼 오므라듬. 6,7월에 붉은 꽃이 피며 수많은 수술이 대단히 길어 붉은색을 띠며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기장 : 벼과의 일년초로 식용작물. 인도가 원산으로 1.2~1.5m 정도 자라며 잎이 가늘고 이삭은 가을에 익음. 열매는 당황색이며 좁쌀보다 낟알이 굵음.
약자 : 약재(藥材).
기장감주 : 기장쌀과 질굼가루로 만든 감주
기장찻떡 : 기장쌀로 만든 인절미
막배등거리 : 막베로 만든 옷으로 조끼처럼 등에 걸쳐 입는 홀옷
막베잠당둥에 : 막베로 만든 잠방이 형식의 아래 속옷.
당콩순 : 강낭콩순.
다문다문 : 드문드문, 뛰엄뛰엄.
너슬너슬 : 굵고 길고 부드러운 풀이나 털 따위가 거칠고 성긴모양
가랑가랑한다 ; 그렁그렁한다. 물이 거의 찰 듯한 상태.

장진땅이 보인다는 산골에서 장터를 구경하며 쓴 시이다. <山谷>과 <노루>는 둘다 장진땅을 거론하고 있다.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있는 그 장진호수의 절경에 반한것일까. 고원 특유의 기후 탓으로 사시사철 누른 풀로 유명한 황초령 고개가 그 곳에 있고, 천하절경이라 조선총독의 여름별장이 그 곳에 있는 장진땅을 백석은 밟아보지 못하고 그저 근처의 산간지역만 배회하는 백석의 모습이 짙게 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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